일터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씨벌, (직장) 때려 친다!"며 술기운을 빌려 욕을 하며 분통을 터뜨린다. 다음날 남는 것은 속쓰림이고 출근할 걱정이다. 비몽사몽 오전 일을 하다보면, 어제의 분통은 사라지고 또 매미처럼 자신의 기계 앞에 달라붙어 죽어라 일한다.
글을 쓰면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어떻게 하면 앞으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인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음표를 던진다. 글이란 글자만을 나열하는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것이다. 우선 자기 자신에게 묻고 자신이 답을 찾는 일이다.
논리나 증명, 뭐 이런 게 철학책에만 있는 게 아니다. 사회학을 배우고 정치학을 배워야만 얻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삶을 세상으로 잘 끌어냈을 때, 그게 철학이 될 수 있다. 자신에게 묻고 답하기. 홀로 자신과 마주이야기 하기. 이게 글쓰기다.
한 철도 노동자의 푸념을 글로 옮겼다.
"회사의 부당함에 맞서 노동조합이 파업을 결의했다. 나도 파업에 참여했다. 언론에서는 시민들의 발을 묶었다고 철도 노동자를 범죄자 취급한다. 파업은 성과 없이 끝났다. 나는 징계를 당했다. 억울했다."
이게 빼고 더하고 할 것 없는 자신의 체험이고 느낌이다. 각 문장 문장을 자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 쓰면 글이 완성되지 못한다. 여기서 물음표를 던져야 제대로 된 글이 나온다. 회사의 부당함이 무엇인지는 당연히 설명해야 한다. 그 부당함에 맞서 파업을 결의하고 자신도 파업에 참여했다. 자신은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한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물어야 한다. 파업이 무엇인지? 왜 파업이 노동자에게 당연한 권리인지를. 자신이 아는 당연함을 스스로 물을 때 비로소 글쓰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파업이 무엇인가? 일을 중지하는 것이다. 일을 하고, 하지 않고는 법이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다. 일하는 주체가 판단해서 행동할 일이다. 파업은 노동법이 정한 단체행동권 이전에 인간의 자유의지다. 어떤 이유를 통해서든 파업을 제한한다면 그건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문제를 던지고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 보면 '억울했다'로 글을 마무리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노동자는 파업으로 징계를 당하자 다음부터는 파업에 참여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는 이미 징계를 받은 몸, 하며 더욱 노동조합 활동에 앞장 설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억울했다'라는 자신의 감정이 자신의 삶을 결정지어서는 안 된다. 더 억울하지 않는가.
아래는 철도노조와 관련하여 경향신문(2009.12.14)에 실린 사설이다. 자신의 억울함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 것인지, 철도 노동자가 쓴 글과 비교해 읽어보자.
김기태 철도노조 위원장이 끝내 업무방해죄로 구속됐다. 이달 초 철도파업을 주도해 코레일의 업무를 방해한 혐의다. 이번 철도 파업은 사업장 점거나 대체인력 투입 방해 행위도 없었고, 파업의 목적·절차·수단이 모두 노조법에 따른 합법·준법 투쟁이었다. 거기에 무슨 업무방해가 있었단 말인가.
헌법에는 엄연히 노동3권이 보장돼 있고, 그 헌법 취지에 따라 노동조합법은 쟁의행위(파업)를 노동자의 정당방위로 간주해 처벌하지 못하도록 규정, 준법 파업에 대해서는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도 검찰과 경찰은 파업만 했다 하면 노동조합법이 아니라 형법의 업무방해죄란 올가미를 끌어다 씌워 무차별 처벌해 왔던 것이 그간의 현실이다. 1988~1991년 구속된 노동자 1400여명 중 785명에게 업무방해죄가 적용됐다. 2002~2006년 노동형사사건 중 업무방해죄는 30.2%로 가장 많았다. 형법상 업무방해죄가 노동권을 있으나마나한 기본권으로 무력화시키고 있으니 '헌법 위의 형법'이란 말이 나올 만하다.
노동3권을 인정하는 나라 중 업무방해죄 규정을 두고 있는 곳은 한국과 일본뿐이다. 일본이 1907년 전쟁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쟁의행위를 억제할 목적으로 만들었던 법을 우리가 지금까지 그대로 베껴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도 지금은 파업에는 적용하지 않고 있다고 하니, 세계에서 우리만 파업 처벌 국가로 남아 있는 꼴이다.
파업은 사용자와 계약한 노무행위 제공을 거부하는 집단행동으로 내 업무를 중단할 뿐이지 다른 사람의 업무를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이 단체행동권을 보장하는 것도 약자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뜻에서 이 같은 파업의 특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헌법 정신을 무시하고 하위 법률인 형법이 쟁의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파업=범죄'로 간주했던 구시대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이미 유엔사회권위원회는 2002년 "파업을 범죄시하는 한국 정부의 접근 방식은 수용될 수 없는 것"이라며 "파업권을 행사하는 노조에 대한 형사소추를 중지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힌 바 있다.
헌법재판소에는 올 7월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이 업무방해죄를 쟁의행위에 적용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며 낸 헌법소원심판이 계류 중인 상태다. 때마침 법무부에서도 성범죄 처벌 강화를 위해 형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다. 헌재의 명철한 판단을 기대하며, 차제에 국회에서도 개정 형법에 반영될 수 있도록 진지한 검토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파업 이후 자신의 삶에 물음표를 던지며 글을 쓰다보면 억울함의 진짜 이유도 알게 되고, 언론에서 파업 노동자를 범죄자 취급하는 게 얼마나 부당한지 비판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파업을 통해 징계를 당했을지언정 자신의 삶에 마이너스가 아닌 긍정으로 이후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더불어 놀라운 발견을 한다. 자신의 글이 그저 일기장에 대충 긁적여 둔 초라한 글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느 신문의 칼럼보다도 날카롭고 뛰어난 분석글이나 주장글이 된다. 책상물림들이 책을 들척이며 글재주나 뽐내는 글과는 상대가 아니다. 이 글이 어떻게 나온 것인가? 자신이 몸으로 쓴 현장감이 담겨 있고, 눈물과 분노가 삭혀져 나온 진실이 있고, 노동의 땀이 버무리진 건강한 글이 아닌가? 이 글이 숱한 파업 동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이 될 수 있다. 동료들의 억울함을 대변해주는 성명서가 될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데 힘을 보태는 글이 될 수 있다.
글을 쓰며 자신에게 묻고 답하기. 이는 자신이 사는 세상에 던지는 질문이자 앞으로 가꾸어야 할 세상의 밑그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