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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 그 막사에는 다섯 개의 중대가 있었고, 강이병은 3중대 1소대 막둥이였다.
1978년 5월. 중식 직후의 그 시각에, 소총수 강이병이 햇살을 피하는 이유는 ‘빨랫줄에 널린 양말’ 때문이다. 그는 지금 ‘분대 고참들의 잃어버린 양말을 다시 훔쳐오기’에 골몰하는 중이었다. 잠시 후 화기중대 건조대의 양말을 아무도 모르게 싹쓸이해서 1소대 고참들 맨발에 신겨줌으로써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게임’을 만들 예정이다.
기회는 왔다. 감시병이 오줌 누러간 그 틈새에 재빨리 건조대에 엎드렸을 때 아주 잠깐 가슴이 뜨끔했던 것은 순전히 푸른 하늘 탓이었다. 군복과 양말과 빤쓰…… 건조대 빨래들의 물결 사이로 드러난 푸른 하늘이 하필 ‘자유의 술렁임’으로 느껴졌을까. 일순 주춤했다. 그러나 곧바로 현실로 돌아온 쫄따구 강이병은 훔친 양말을 군복 윗도리 사이에 구겨 넣고 납작 엎드린 채 후닥탁 달린다. 그때까지는 ‘아싸 호랑나비’였다. 그러나 곧바로 호루라기 소리에 덜미 잡히며 바싹 얼어붙었다. 그리고 순찰대에게 이름이 적혔고 토요일 오후 주말 군기 교육대에 끌려간다.
먼저 선착순이다. 호출된 군인 아저씨들이 축구골대를 돌기 위해 우르르 앞을 다툰다. 강이병이 처음부터 꼴찌를 선택한 이유는 원래 느림보 거북이 체질 탓도 있지만 선두로 뛰어봤자 어차피 사열대 옆에서 ‘대가리 박아’를 시킨다는 얼차려 코스를 진작부터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통수는 불어도 세월은 간다’
몸을 포기한 채 두어 시간 ‘원산폭격’이나 ‘한강철교’ ‘통닭구이’로 지내다보면 어차피 ‘기합의 잔혹사’가 끝난다는 것도 예단했으므로 그렇게 몸을 방치시켰다. 그런 가학적 예감이 맞아들기도 한다. 저물녘쯤 군기반장이 호루라기를 불어 쫄따구들을 집합시키더니 지휘봉을 흔들며.
“오늘 욕봤다. 앞으론 이 아자씨와 제군들이 ‘우향 앞으로 갓’ ‘좌향 앞으로 갓’ 하는 자리에서 만나지 말기를 바란다. 이번 주 군기교육은 이걸로 때웠으니 돌아간다. 자, 막사를 향해 우향 앞으로 갓.”
스물두 살 이등병.
병사는 본성이 센티멘탈 체질이었다. 작대기 하나의 강팍함 속에서도 이따금 ‘사랑의 스잔나’의 러브신과 잘 차려진 주안상을 떠올리며 아, 하는 감탄사를 내뿜곤 했었다. 서정인의 ‘강’이나 문순태의 ‘징소리’ 한승원이나 한수산 같은 작가들을 막연하게 품으며 ‘문단의 주역으로 나설 것인가’ 아니면 ‘문사들의 그늘에서 뒹굴뒹굴 책이나 읽을 것인가’도 잠깐 저울질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도 그 정도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에 젖을 때면 가슴에서 뱃고동 소리가 벌렁벌렁 들리기도 했다.
그날 밤 병사들 모두가 취침 중인 내무반에서 불침번을 서며 문학도답게 보안등 아래에서 몰래 책을 편다. 보름달 여대생 후배로부터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세 차례쯤 받은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문예창작의 열망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국방부 시계가 왜 이리 힘들게 돌아가나’에 대한 막막함을 그렇게 때워주는 맛도 있다. 그런데 도둑질하듯 계간지를 뒤적이다가 아주 우연히 이문구의 ‘우리 동네 김씨’를 만난 것이다.
‘이건 우리가 우향 앞으로 갓, 좌향 앞으로 갓, 헐 일은 아니지만유.’
민방위 교육장이다. 강사와 마을 사람들이 티격태격 다투는 문장 속에 하필 온종일 몸을 혹사시키던 군바리 용어가 등장한 것이다. 그건 해학의 힘이었고 나는 처음으로 ‘익살과 해학의 차이’를 각인하게 된다. 똑같은 문장도 상황에 따라 ‘고통에서 해학으로’의 탈바꿈할 수 있다는 진리도 처음 맛보게 된다. 그때부터 틈나는 대로 그의 문장을 접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유년기에 수없이 접했던 밭고랑 낱말들이 그를 통하면 새롭게 여문 단어들로 각인되는 것이다.
‘새마을 운동’ ‘저수지 물대기’ ‘민방위 교육장의 말다툼과 엉성한 화해’ ‘수재 의연금 갹출’ ‘대장간 풀무질과 진한 살갗 냄새’ ‘주모와 국밥’ ‘이발소 액자에 붙은 푸시킨의 시’ 등 잊었던 풍경들이 그렇게 늘어진 테이프처럼 출렁출렁 펼쳐지는 것이다. 정신없이 웃으면 눈물이 쏟아진 다는 사실도 새롭게 느꼈다. 또 있다. 그는 느리고 여유작작했다. 반전 드라마가 필수품인 줄 알았던 단편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이 단칼에 깨어졌다. 그리고 5년 후 나는 국어 교사가 되어 그를 만난다. 그를 만났던 신동엽 시비는 기실 그전부터 이따금 들르던 자리다.
83년 쌘뽈여고 총각 선생 시절,
여고생들은 아가위 눈빛을 반짝이다가도 때까치처럼 카르르 파닥거리며 총각 선생에게 쫑끗쫑끗 다가오곤 했다. 그즈음 나는 신문반 제자들과 시집 ‘껍데기는 가라’를 들고 부여의 신동엽 시비 근방을 빙빙 돌곤 했다. 스스로를 ‘깨어있는 교사’로 규정지었으므로 ‘섶을 지고 불길에 뛰어드는’ 각오를 두근두근 세우던 시국이다. 그렇게 시비 앞에서 가끔 소주병도 따면서 세상의 분노를 달래곤 했었는데.
그해 4월.
그 자리에서 열린 신동엽 추모 모임에서 처음으로 이 땅의 문사들을 무더기로 만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 것이다. 특히 이문구 선생님을 눈여겨보는 중인데, 마침 조재훈 선생님이 나에게 손짓하더니 직접 악수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아, 왔구나.
“이 친구는 소설 쓰는 청년 강병철이여.”
손을 마주잡았다. 그는 미륵 같은 그의 몸에서 활짝 핀 목련꽃 향기가 풍겨왔다. ‘저 의연한 그늘 아래서 잠들고 싶다’며 밤마다 손바닥 발바닥으로 거울을 닦으려던 참이다. 그러나 그는.
“요새 소설 쓰는 친구들 많데.”
퉁방스럽게 대꾸했을 뿐이다. 오랜 동안 쌓았던 모래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다. 버림받은 짝사랑의 수치심으로 아랫도리를 가리고 싶었으나, 재빨리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마음을 다독이기도 했다. 나 역시 그의 무심한 표정만큼 흘려듣는 몸짓으로 어깨를 돌려 금강 물살에 눈길만 쏟아 부었다.
시인이 전사이던 시국이 있었다.
제5공화국 신군부 정권이 ‘학원안정법’이라는 으스스한 카드를 저울질할 즈음이다. 벗들은 게오르규의 ‘잠수함 속 토끼’처럼 장렬하게 산화하자고 머리끈 동여맨 채 술통에 빠졌던가. (그 젊음이 영원할 줄 알았었다.) 책을 읽었고 녹음기 들고 채록에 빠졌고 농민공동창작시를 만들었고 유인물 문장을 고쳤다. 그 와중에 ‘민중교육’지 사건이 터졌고 드라마틱한 일상 속에 나는 불안한 영웅이 되었다. 열일곱 명의 교사들이 한꺼번에 목이 잘렸으니 엄청난 파장의 필화 사건이었다.
그 85년 교육무크지 사건의 해직교사들이 모여 실천문학사에서 성명서를 발표할 때 이문구 선생님이 출판사 주간이었고 소설가 송기원 선배가 편집장이었다. 해직의 와중에도 그가 내 옆에 앉아 있다는 게 신기했고 당혹스러웠다. 그 순간.
‘저는 이번 민중교육에 소설 ’비늘눈‘을 쓰고 해직된 교사 강병철입니다.’라고 인사드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허사였다. 나는 팔뚝으로 전해오는 맨살 체온만 감지한 채 한 마디 말도 걸지 못했다. 그는 ‘부당하게 해직된 교사들을 당장 복직시켜라’라는 규탄 성명서를 읽더니 김진경 윤재철 고광헌 등 몇 사람과 악수를 했을 뿐 나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일단 ‘황홀한 허망함’을 땅속에 꽁꽁 묻어두었다. 실천문학사 창문 너머 순대국 가마솥 쇳소리가 쟁쟁 울려 퍼졌던가. 사랑 고백을 섣불리 하지 않음을 참으로 다행으로 여겼고.
나는 일종의 결벽증 환자였다. 그대들이 아무리 침 발라가며 거짓말해도 나는 절대로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며 우산을 받고 몸을 세웠다. 그리고 아전급 관료들의 표정 바꾸기에 당혹해하면서 끝까지 평행선으로 가겠노라고 마음 다지며 더욱 고독의 길에 익숙해졌다.
마흔 살.
첫 소설집 ‘비늘눈’을 출간했다. 첫 사랑처럼 설렜으나, 기껏 한겨레신문에 성냥갑 만하게 실렸을 뿐이어서 ‘조직의 쓴맛’을 제대로 본 셈이다. 대신 몇몇 선배가.
“충청도 사투리 좋데. 이문구 김성동의 대를 잇는 작가가 될 거야.”
“그네들이 보령 사투리를 잡아먹으면 자네는 서산 사투리를 몽땅 가져가라. 이.”
그런 정도의 칭찬을 받았지만 나는 정작 이문구 선생께 창작집을 보내지 않았다. 좀더 숙성시켜보겠노라 마음 다지며.
그 사이에 벗들은 그와의 야사와 기행(奇行) 연달아 터뜨렸고 이따금 나를 연결시켜주기 위해 등을 떠밀기도 했다. 느닷없는 방문 직후 새도록 술떡이 되었다던가, 더러는 원고지를 통째로 넘기고 호된 야단을 맞았거나 과분한 격려를 받았다며 즐거워했다. 실제로 벗들과 선생님은 그렇게 붙어있었으나 웬 일일까, 나는 연신 빙빙 돌았을 뿐이다. 몸은 수시로 부딪쳤으나 가슴을 열 수 없었다. 대신 반복적으로.
‘소설 쓰는 청년이었다가 이제 중년으로 기우는 중입니다’
오물오물 입술 올리는 연습만 족히 수십 번은 넘었던가. 어쨌든 몸은 택도 없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경기도 어디쯤 상갓집에서도 그랬다. 그가 화톳불 맞은편에서 불을 쬐고 있을 때도 내 눈길은 오로지 그의 가슴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눈길이 마주치면 재빨리 등 돌린 채 구두코만 쏘아보았다. 나중에는 여럿이 섞인 자리에서 술잔을 나누기도 했다. 그래봤자 그는 투명인간에게 잔을 돌리듯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 채 술을 따랐고 나도 똑같은 자세로 돌려주었다. 그 와중에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짝사랑 고백 연습을 하는 건 도대체 무슨 행태란 말인가.
‘사랑합니다. 비수로 정확히 가슴을 겨누니 칼을 받으세요.’
당연히 그 고백도 땅바닥에 파묻었다. 단발마의 외침으로 날을 세우면 그냥 쓰뭉하게 팔짱만 끼고 있을 것 같아서, 그 대 앞에만 서면 몸이 작아지는 것이다. 그런 세월 스무 해가 쏜살같이 흘러버리다니.
내가 교편을 잡던 공주에도 수시로 출두했다.
문학제나 학술제에 초청강사로 그가 등장하면, 지역 소설가가 꼭 참석해야 한다는 주최측의 연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또 근방으로 몸을 움직여야 했다. 마찬가지였다. 식당에서도 나는 말석에서 소주잔만 홀짝거렸고 찻집 다예원에서 국어과 교수들과 한담을 나눌 때도 칸막이 저쪽에서 고독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웠다. 동숙자들은 그의 사소한 너스레에도 박장대소하며 한갓진 시간을 누렸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더 외롭게 글을 쓰리라’ 사랑의 날을 벼리곤 했다. ‘이문구 선생님은 나를 모를 것이다.’라고 규정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던가.
“아니여. 강병철 그 사람은 목이 왜 아프지, 하며 묻기도 했는데……선생님이 형을 당연히 알지.”
“공주의 강 뭐시기는 요새 글 안 쓰나 하시던데.”
후배 작가의 그런 언질도 대강 뭉개버렸다. 아무래도 선생님은 아주 착한 후배나 전망있는 작가들을 좋아할 것 같은 것이다. 그즈음 생년월일이 늦은 후배 작가들은 천재성이나 노력의 근성으로, 혹은 조직의 힘으로 사방에서 치고 올라왔다. 나도 영역 확장에 고민해야 할 즈음이나 몇 가지 애로점이 있었으니.
전교조의 무게가 가장 컸다. 전교조는 100% 합체되는 사상은 아니었으나 가장 순수하고 착한 스승들의 단체였다. 나는 교무실에서 수시로 전교조를 강변했고 그 강령에 따르려 노력하며 불법 유인물들을 돌렸다. 최루탄을 맞았고 징계위원회에도 몇 차례 출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국은 ‘마주오는 열차’처럼 다급했으므로 그 도정의 일탈이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오히려 동지들에게 투쟁의 시기에 문장에 빠져있다는 질타를 받으면 옷깃을 여미곤 했다. 그 다음은 가족이었다. 17평 아파트에 사는 제비 새끼 같은 자식들의 입에 영원히 단 것과 비린 것을 넣어주고 싶었다. 이차구차 문장들과 간극이 쬐끔씩 벌어지는데, 언제였던가, 그가 암투병 중이라는 소문이 들리는 것이다.
대천의 마지막 대면.
후배 작가 김종광의 결혼식 때 그 예고편이 불쑥 앞을 막는 것이다. 만남의 광장 2층 첫 번째 횟집 술자리에서다. 송기원 선배나 유용주 시인 최경실 선생 등이 합석하면서 주안상이 시작될 타임이다. 그가 크로마뇽인 골격으로 기우뚱 쳐다보기에 나도 처음으로 반가운 척 재빨리 고개 숙였다. 순간 머리가 어항처럼 출렁출렁 쏟아질 것 같아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이 아프구나.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갯바람이 몰아치는 바닷가 수평선만 코끝이 시리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눈시울이 젖는 와중에도 자꾸만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 것이다.
‘선생님이 나를 알아보긴 한 걸까.’
‘그냥 몸이 욱신거려 기우뚱했는데 내가 반사적으로 몸을 낮춘 건 아닐까.’
그런 조급증을 누르며 갈매기 떼와 부서지는 파도만 바라보았다. 동시에 이제는 그런 포스도 괜찮을 듯싶었고.
얼마 후 그가 하늘나라로 조금 먼저 떠나셨다.
찢어지게 슬펐지만, 나는 다른 문사들처럼 소리 지르며 통곡하진 않았다. 그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관촌 수풀 뼛가루 뿌리던 마지막 순간까지 동행하며 그림자처럼 지켜봤을 뿐이다. 그니의 뼛가루를 지켜보는데, 이번에는 기러기 떼다. 나누지 못한 사랑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다며 쿵쿵쿵 가슴 다지는데, 쟁반 같은 석양 속으로 철새 떼들이 끼륵끼륵 가슴 후비는 것이다. 그런데 문득 박용래 시인의 호통치던 스크린이 떠오른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야 이놈 문구야 내가 군산은행에서 돈을 싣고 함경선 타고 청진 함흥 지나 블라디보스톡 가는 두만강 철교에 이르렀을 때 눈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넌 모를 거야. 두만강 철교 위로도 차창으로도 눈발, 눈발 출렁이는 시푸른 물결 위로 소나무 위로 하늘로 땅으로 온통 눈발, 눈발, 미친 듯이 눈이 내렸어 정말이야 세상은 온통 눈으로 뒤덮혔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암만 얘기해도 믿질 않겠지만 그렇게 많은 눈발을 본 사람은 아마 나뿐일 거야 정말이야
시인 박용래가 강경 욕쟁이 할머니네 목로에서 소설가 이문구의 손목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엉엉 우는 장면이다. 그랬다. 그는 실속 없는 울보 시인들의 어리광을 다독여주는 그늘이 넉넉한 느티나무였다. 숱한 여린 벗들이 그렇게 그의 자양분으로 달밤에 씨를 뿌렸고 땡볕에 밭을 일궜다. 유독 나에게 그 연이 닿지 않았을 뿐이고.
2011년 12월.
학습연구년을 신청했다. 교직생활 수십 년(해직 4년은 빼고)만에 처음으로 1년을 꼬박 챙길 수 있는 알토란 찬스를 절대로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스펙 서류를 미리 올리고 면접에 들어간다. 1년의 안식을 위해 5분 정도 눈을 내려줄 참이다. 면접관들 다섯 명도 나처럼 초로의 문턱 이쪽저쪽 동반자들인데.
“책을 열권이나 내셨네요. ……선생님께서 가장 존경하는 작가가 누구십니까?”
“이문굽니다.”
“친하셨겠네요. 충청도에 함께 사는 소설가니까요.”
“…… 네."
‘그런데 소통하지 못한 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했다. 3분 만에 면접을 끝내고 문을 나서는데 찬바람이 가슴을 뚫고 휑 하니 지나갔다. 나는 그 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사월의 마지막날 대학도서관.
오늘은 작가마루를 뒤적이다가 오랜 만에 그를 겨누어본다. 추적자의 벼랑끝, 저 벌판은 여전히 안개 바다로 뿌옇다. 캠퍼스 철쭉꽃 더미로 잠깐 비쳤던 그니의 팔목이 순간적으로 이마를 딱 때린다. 반갑다.
‘드디어 만났군요’
아름드리 팔을 벌렸으나, 없다. 선명하게 없다. 저수지 옆댕이 전봇대 지나 슬라브집 그니의 그늘에 안착하고 싶었으나 꿈은 그예 꿈으로 끝난 것이다. 이상하다. 그가 도깨비불로 사라지면서 ‘분하다’ 밤마다 손등 뜯어야하는데 정작 나는 왜 안도감에 젖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