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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말, 5년 반에 걸친 <한국의 아름다운 108 산사> 순례를 끝내고 6개월 여 만에
강원도 동해시 두타산 <무릉계곡> 안에 있는 <삼화사, 三和寺>를 찾아 갔습니다.
지난 9월 11일, 몹시 흐리고, 간간이 빗방울도 뿌렸지만, 아침 아홉 시 십오 분에 춘천 농막을
출발, 210 km를 쉬지 않고 달려서 11시 20 분에 무릉계곡 주차장에 도착하였습니다.
한동안 '생활 속 거리두기'를 강권하는 정부와, '사람 많은 곳에는 무조건 가지마!' 라는
아내의 협박(?) 속에서 '생활 속 답답함'을 해소할 방안을 찾기위해 며칠간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지인의 블로그를 통해 다소 멀기는 하지만 산과 계곡, 멋진 폭포, 유서깊은 사찰이
있는 종합적인 언택트 관광지 두타산 삼화사와 무릉계곡을 선택한 것이었지요.
차를 세우고는, 가장 가까운 가게에서 냉커피 한 잔을 사서 마시고, 점심 식사 대용으로
감자떡 한 박스(6 개 들이)를 사서 배낭에 넣은 다음 삼화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주차장에서부터 양쪽으로 늘어선 상가들 사이로 난 길을 올라가는 동안 "이건 아니잖아?"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상가지구가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눈 앞에 활짝 펼쳐진 무릉계곡의 모습은
그야말로 압권이었습니다. "아! 이래서 무릉계곡이구나!" 하는 짜릿한 희열이 느껴졌습니다.
조금 더 오르니 눈 앞에 그야말로 환상적인 광경이 전개되었습니다. '무릉반석'(武陵盤石)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바위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진 이 넓은
반석의 면적이 약 5,000m2 (약 1,500 평)이나 된다니 이런 곳이 또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곳이야말로 언택트 관광지이면서도 진정한 힐링의 명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릉계곡에 대해서는 삼화사와 별도로 다시 포스팅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주문입니다. 일주문은 속계와 불계의 경계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부처님 세상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큰 사찰의 일주문을 들어서게 되면 묘한 흥분과 기대감을 느끼게 되는군요.
탄허(呑虛) 스님께서 쓰신 '두타산 삼화사' 현판이 걸려 있네요. 탄허 스님(1913~1983)은
월정사 주지와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을 역임했고, 우리 불교계에서 화엄학의 대가였으며,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서 월정사를 비롯한 전국 유명 사찰에 수많은 현판 글씨를 남겼습니다.
이곳 삼화사는 한두 곳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전각의 현판을 탄허 스님이 쓰셨더라구요.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걷다가 계곡 위에 가로놓인 반석교를 건너면 곧 삼화사 입니다.
입구에 삼화사의 역사를 기록한 '삼화사 사적비'(三和寺史蹟碑)가 우람하게 서 있습니다.
삼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원정사의 말사로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2년,
자장율사가 이곳에 터를 잡고 흑련대라고 이름지었으며, 그 후 864년에 범일국사가
'삼공암'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삼공암은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로 지정되었는데, 왕건은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며 후삼국 통일을 간절히 발원했고, 결국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왕건은 국민들의 갈등을 풀고 화합시키려는 뜻에서 '삼화사'로 이름짓게 되었다 합니다.
고려 시대에 왕실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순탄하게 사세를 키웠던 삼화사는 그 이후
긴 세월의 흐름 속에서 많은 부침을 겪게 됩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병들의 근거지 역할을
했던 탓에 왜군들에 의해 완전히 불타는 아픔을 겪었으며, 그 이후에도 몇 차례 화마에 의해
불탔다가 중수되는 과정을 겪었다고 합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인
1907년에도 일본군에 의해 다시 한번 불타버리는 재난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근래에 들어서는 원래 있던 자리인 바다에 가까운 자리가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암이
대규모로 매장된 자리여서 1977년 쌍룡양회가 조계종 종단과 협의하여 보상금을 내고
삼화사를 지금의 무릉계곡 안에 있는 위치로 옮겨 세워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산업발전이 최대과제였던 시기에 삼화사가 국가 경제를 위해 용단을 내렸던 것이겠지요.
경제는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호국 행위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삼화사에는 주법당인 적광전을 비롯하여 극락전, 약사전, 비로전 등 18개 전각이 서 있으며,
보물 제1277호인 삼화사 삼층석탑, 보물 제1292호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등과,
국가무형문화재 제125호인 삼화사 수륙재 등 주요 문화재가 보존 또는 전수되고 있습니다.
삼화사 주 출입문격인 천왕문으로 가는 담장 아래에는 화강암으로 깎은 십이지신상이 서 있습니다.
불교에서의 십이지신상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겠지만, 커다란 열두 기의 돌조각상들은
마치 삼화사를 수호하는 십이신장(十二神將) 같은 느낌이 듭니다.
원래 이 십이지신상은 삼화사 경내에 있었으나, 2010년 5월 인천국제공한 입국장으로 옮겨
전시를 한 후, 2015년 9월에 다시 옮겨와 담장 바깥에 세웠다고 합니다.
십이지신상을 하나씩 보면서 걷다 보면 금세 천왕문(天王門)이 나타납니다. 천왕문은
사찰의 주법당을 행해 가는 두번 째 문으로, 부처님과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안치하고
있는 문입니다. '천왕문' 현판 역시 탄허 스님의 글씨이며 현판 아래에는 '수건법계수륙무차
보리도량'(修建法界水陸無遮菩提道場)이라는편액이 붙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사천왕상은 목조사천왕상이 대부분이고, 순천 송광사나 홍천 수타사 등
몇몇 사찰에는 소조사천왕상이 있는데, 이곳에는 특이하게도 사천왕 탱화(幀畵)가 걸려 있네요.
[출처] <아름다운 산사 탐방 - 두타산 삼화사>|작성자 hansongp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마당 한 가운데 고색이 창연한 '삼화사 삼층석탑'이 서있고 저 멀리 축대 위에
삼화사의 주법당인 '적광전(寂光殿)이 서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큰 사찰의 경우 사천왕문 안쪽에는
출입문을 겸하는 2층 누각이 서있는데, 삼화사에는 누각이 없는 것도 특징인 듯 합니다.
적광전 아래 큰 마당에 서 있는 이 삼화사 3층석탑은 높이가 4.7m 이며, 학계에서는 조성
기법으로 보아 신라 말기인 9세기 중엽에 세워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즉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등 신라 석탑의 3대 구성요소가 온전하게 남아 있을 뿐 아니라,
탑신부의 굄대를 별석으로 만들어 끼운 점이나, 옥개석의 조성양식이 신라 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삼화사 삼층석탑은 '동해안 지방에 세워진 보기 드문 아름다운 석탑'으로 그 예술적,
문화적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삼화사가 오랜 풍상을 겪으면서 멸실과 중건을 반복해 온
데 비해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물 제1277호로 선정되었다 합니다.
적광전은 삼화사의 중심법당으로 1977년 당초의 건물을 옮겨서 다시 짓는 과정에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계 양식으로 세워진 전각입니다. 적광전은 당시
여러 가지 문양과 단청으로 아름답게 꾸민 화려한 법당이었는데, 1997년 중수 당시 좌우로
각 1 칸씩을 중측하여 지금은 정면 7칸의 우람한 전각으로 변신하였습니다.
단청을 하지 아니한, 좌우에서 각 2번째 칸이 당시에 증축된 칸인 듯 합니다.
화려한 단청의 5칸 사이에 무단청 1 칸씩이 끼어있는 모습도 보기가 나쁘지 않네요.
적광전으로 올라 가는 축대의 기단 가운데 대형 '치미' 한 쌍이 독수리의 날개처럼 놓여 있네요.
이 치미는 아마도 적광전을 이건하기 이전의 적광전 용마루에 올려져 있던 것 같습니다.
적광전 불단에는 철조노사나좌불상을 주존으로 좌우에서 관세음보살상과 지장보살이
협시하는 형태의 3존불을 봉안하였습니다. 원래는 철조노사나좌불상만 있었으나, 지장보살상과
관세음보살상은 금년(2020년) 8월 30일에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높이 1.45m 인 이 철조노사나좌불상은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129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당초에는 약사불로 알려져 왔던 이 삼화사 철조노사나좌불은 삼화사가 겪어온 오랜 동안의
수난의 역사를 거치면서 1967년 이 철불에 대한 학술조사 당시 하반신이 완전히 상실되고,
두 손도 사라지는 등으로 훼손상태가 극심했었다고 합니다. 한때는 사악한 골동품상 부부에
의해 외국으로 팔려나갈 뻔한 위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서 이 불상은 부처님의 가피 덕분인지 학계의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1990년 5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2호로 지징이 되었고, 1997년 4월에 복원불사가
추진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보물로 승격되었습니다.
이 불상의 복원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불상 배면에 돋을 새김으로 남아있던 명문 중 판독이
가능한 100여 자를 통해 이 불상이 신라 말기에 조성되었으며, 당초 알려진대로 약사불이
아니고 노사나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불상은 1997년 중수된 주법당에 안치되고 현판도 적광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삼화사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25호인 '삼화사 국행 수륙재'를 전승받아,
매년 4월에 매우 큰 규모의 수륙재를 봉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삼척으로 유배했다가, 궁천이라는
곳에서 그 세 아들들과 함께 살해해 버렸습니다. 그 후 이성계는 이를 참회하며 그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동해와 남해 서해의 사찰에서 수륙재를 봉행하도록 했는데,
동해에서 그 역할을 맡은 사찰이 바로 삼화사였다고 합니다.
새로운 권력이 전임 구ㅕㄴ력자를 처리하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는 듯 합니다.
이렇게 하여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삼화사는 불교탄압이 극심했던 조선 초기에도
왕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며 사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수륙재 사진은 삼화사 홈페이지에서 빌어 온 것입니다.)
전면에서 보아 적광전의 왼쪽 축대 위에는 극락전(極樂殿)이 서 있습니다. 극락전은
서방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당우입니다.
아미타불은 서방 정토에 계시기 때문에 극락전은 대체로 기도하는 사람이 서쪽을 향해
기도하도록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극락전 법당에는 주불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습니다.
이 아미타불은 조선 시대 후기에 왕실에서 조성한 불상으로, 철조노사나불이 복원되기
이전의 주법당인 대웅전에 모셨던 불상이라고 합니다.
전면에서 보아 적광전 오른쪽에는 약사여래 부처님을 모시는 약사전(藥師殿) 전각이 있습니다.
약사전은 1998년 신축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약사여래 부처님은 중생을 모든 변고와 병마에서 구하는 약사유리광여래 부처님으로,
병을 고쳐주는 위대한 부처님이라는 뜻의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약사전에는 약사여래 부처님을 주존으로 좌우로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습니다.
한편 약사전 법당에는 1 천 구의 작은 불상을 모셔서, 천불전의 기능도 겸하도록 했습니다.
적광전 전면 축대 위에서 내려다 본 삼화사의 전경입니다. 좌측에는 종무소가 있는 육화료가,
우측에는 '수륙사' 편액이 걸린 심검당이, 정면에는 범종각과 천왕문, 무향각이 나란히 있네요.
그 뒷편으로는 베틀바위, 혹은 베틀봉이라는 암봉이 기세좋게 솟아 있습니다.
수륙사(水陸社)라는 편액이 걸린 심검당(尋劍堂)입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현재는 요사채로 활용하고 있는데, 심검(尋劍)이란 무명(無明)을 잘라내는 지혜의 검입니다.
심검당 추녀 아래 붙어 있는 '수륙사'(水陸社) 편액은 동해시 출신의 서예가인 벽송(碧松)
민병두(閔丙斗) 선생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편액을 제외한, 삼화사에 걸린 거의 모든
현판이나 편액은 탄허 스님의 작품인 듯 합니다.
육화료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당우로 요사채이자,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육화(六和)란 '혼자만 편히 살지 말고 할께 머물 것' '입씨름이나 언쟁을 삼갈 것'
'화합을 위하여 남의 의견을 존중할 것' '게(偈)로써 화합하여 함께 규율을 지킬 것'
'모든 대중이 견해를 같이 할 것' '이익이 있으면 모두 함께 균등하게 나눌 것' 등이라고 합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는 범종각이 있습니다. 범종각은 범종과 목어, 운판, 목어 등
불전사물을 걸어놓는 누각을 말합니다. 2011년에 신축한 전각입니다.
이 불전사물은 저마다의 독특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범종은 특별히 지옥의 중생들을
제도하는 기능을 하며, 법고는 축생을 제도하는 악기입니다. 목어는 물 속에 사는 중생들의
제도를 기원하는 것이고, 운판은 하늘에 있는 중생들을 재도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천왕문을 들어서서 왼쪽 편에는 '무향각'(無香閣)이 서 있습니다. 무향각은 이름과는 달리
전통차집으로 항상 아름다운 차향기가 가득한 장소입니다. 늘 사찰 탐방을 하고 나서 마시는
차 한잔의 의미가 각별한데, 이번에는 한 시간여에 걸쳐 삼화사를 들러 본 다음, 2.5km
떨어진 쌍폭과 용추폭포까지 험한 산길을 왕복한 탓인지 상당한 피로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바로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이곳은 무릉계곡을 둥산하는 길에서 보이는 무설전 향적당 세심당 등 선방이 있는 공간입니다.
지금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사용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출입할 수 없도록 막아 놓았네요.
템플스테이 관으로 오르는 언덕에 외롭게 비석이 하나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비석이라 살펴 보니 '동안거사 이승휴 유적비'(動安居士李承休遺跡碑)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보물 제418호로 지정된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저자이며, 고려 충렬왕 시대의 간관(諫官)이자
시인이었던 동안거사 이승휴가 머물면서 삼화사에서 불경을 빌려 읽던 장소라고 합니다.
제왕운기는 이승휴가 1287년에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쓴 역사서인데,
상·하 각 1권씩으로 된 책으로 상권은 중국 역사를 간추려 7언고시 264 귀로 서술했습니다.
하권은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한 것으로 1부에는 단군에서부터 고려가 서기까지의 과정을
7언시 264귀로, 2부는 왕건의 세계(世系)에서부터 고려 개국 이래 충렬왕까지의 역사를
5언시 700언으로 서술한 귀한 역사서입니다.
이렇게 천년 고찰 삼화사에 대한 탐방기를 마칩니다.
지난 3월초에 끝을 맞은 '한국의 아름다운 108 산사 탐방' 때도 방문대상 사찰 가운데
삼화사가 포함은 되어 있었지만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모처럼 기회를 잡아 우리나라 최고의 아름다운 환경 속에 자리잡은 천년고찰
삼화사의 향취를 듬뿍 맡고 나니 진정한 힐링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듯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