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단상(斷想)
거제YMCA 사무총장 문철봉
한 주 전만 해도 해 돋기 전 마당 한켠에는 동장군의 시린 자락이 깔려있었다. 춘삼월에 들었는데도 지 맨 낯에 몇 번이나 살얼음을 살짝살짝 발라 놓고 밉상지게 앙탈을 하더니 이제는 이마저도 못하고 저 뒤로 꽁지를 뺀다. 이런 동장군의 심술에 옹골지게 몽쳤던 매화도 제 입술을 열고 향기를 품더니 어느새 져버렸다. 햇살 퍼지는 수돗가에는 볕 바라기 하며 누웠던 깜둥이가 게으른 기지개를 한껏 켠다. 매화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는 수선화가 살며시 머리 내밀고 노란 꽃 얼굴로 활짝 웃는다. 자고나면 어제는 보지 못했던 새싹이 올라와 있다. 산나리에 백합, 작약과 더덕 그리고 아직도 다 알 수 없는 싹들이 쏙쏙 머리를 내민다.
이런 봄날이면 유년의 기억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달콤한 춘곤증에 젖어들게 한다.
따사로웠던 봄날, 배추와 무 종다리 같은 노란 꽃들이 피어 있는 어느 외딴길, 이길 끝에는 선생님의 집이 있었다. 선생님은 동무들과 무척이나 좋아하고 따랐던 유치원 선생님이다. 기억에, 선생님은 저 봄날 유치원에 오시지 않았고 담임이 없는 우리는 옆 반과 합반을 했다. 어린 마음에도 합반을 맡은 옆 반 선생님 보다 우리선생님이 더 예쁘다고 생각하며 그날 오전을 내도록 심드렁해했다. 우리 선생님이 왜 안 오셨는지를 졸라대며 심술부리는 조그만 우리들에게 옆 반 선생님은 귀찮다는 듯이 “아파서 못 나오셨다”고 했고 우리는 더 앙탈스럽게 우리선생님의 집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 찾아간 곳이다. 어린 발걸음으로 어렵게 찾아가서는 집 앞 길가에 피어 있는 저 노란 종다리 꽃들에 날아오는 나비를 쫓아다니던 기억, 꽃나비 쫓기에 정신이 팔려 왜 갔는지를 잊은 채 어지러이 뛰어다녔고, 우리들 시끄러운 소리에 삽짝을 내다보며 놀라던 선생님, 그 선생님의 유난히 검고 긴 머리에 파리한 얼굴, 말없이 팔 벌려 우리를 끌어 앉으며 반가움과 애처로움의 눈물을 주룩 흘리던 두 눈, 풀냄새 가득한 하얀 저고리와 검정치마.... 봄이면 생각나는 모습이다.
하나가 더 있다.
‘산 넘어서 봄바람 불어온다.
강 건너서 봄바람 불어온다.
봄바람 오실 때 날 찾아 와
송이송이 꽃송이 뿌려주네’
봄 동요이다. 선생님께 배운 노래로 봄이 오면 가장 먼저 되살아나 입안에서 흥얼거려지는 노래다. 반세기도 더 지난 기억인데 마치 어제 같이 떠오르고 불러지는 노래이다.
봄은 이렇게 아득한 그리움과 함께 정겨움을 가져다준다.
이 정겨움에는 또 다른 경험과 기억이 묻어 있다.
동란 후 유년시절을 보내며 보릿고개라는 배고픔의 시절을 지나왔지만 그래도 봄은 아량이 있고 너그러움이 있는 정겨운 계절이라 기억된다. 누구나 들과 산, 논 밭 언덕에 나가 새싹의 나물을 뜯어서 먹었고 칡과 짠지 같은 뿌리들을 캐어 먹었다. 진달래가 피면 이 꽃을 따서 먹었고 삐삐의 솜 같은 새순을 뽑고 찔레의 순을 잘라 먹을 수가 있었다. 어디에서든 양지에 돋아난 풀을 뜯어 돼지와 토끼, 닭의 모이까지 버무려 먹일 수가 있었다. 누구도 저 푸성귀를 자신의 땅 소유라고, 내 것이라고 빼앗고 못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봄의 자연은 민초가 살아지도록 너그러웠다. 꽁꽁 동이고 켜켜이 입었던 내의를 벗고 마당가 새미에서 기지개를 켜며 묶은 떼를 벗는 데도 상하와 빈부가 따로 없었다.
역설적이지만 대개가 말하는, 풍성한 계절이라는 가을은 그렇지 못했다. 서럽게 야박했다. 가을의 곡식과 열매는 반드시 임자가 있는 것이기에 땅 한 뙤기 없는 사람과 남의 집 더부살이로 무엇 하나 내 것이라 할 처지가 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서럽고 못된 계절이었다. 삽짝을 넘어온 가지에서 떨어진 감 홍시를 줍는데도 마당 안 임자가 보면 빼앗아 갔다. 풀밭에 떨어진 밤 한 톨도 주인 허락 없이는 함부로 할 수가 없었고 떨어진 이삭마저도 그 임자의 허락 없이는 주워갈 수가 없었다. 이래서 누구는, 봄은 무산계급의 계절이나 가을은 유산계급의 계절이라 했지 싶다.
지금도 SNS의 네트워크에서는 지인들의 봄꽃과 사연들이 연달아 올라온다.
외도 보타니아의 동백으로 시작해서 수선화와 무스카리, 히아신스 같은 봄 화단의 꽃과 노자산 계룡산의 꿩의 바람꽃과 괭이밥, 산자고와 현호색 꽃에서 지리산의 영춘화까지 올라와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이렇게 봄소식을 훑는 사이 봄비가 시나브로 오시고 진달래 개나리 뒤를 이어 벚꽃이 만발할 채비다. 쳐다보노라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아마도 산 너머 강 건너 오는 저 바람 때문이지 싶다. 해마다 찾아 와 따사로운 햇살과 꽃향기로 입맞춤하며 전해주는 저 그리운 생각들과 너그러운 정들 때문이지 싶다.
나이가 들어가도 어쩌지 못하는 봄 마음에 이는 단상(斷想)들이다.
3월-거제신문 기고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