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의 시대정신과 시학詩學
좋은 시(시조)는 반드시 구체적인 체험을 수반한다. 그 안에 녹아 있는 응축된 시상과 표현은 육안 깊숙이 심안에서 솟아난 사유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한 시대의 역사적 배경이나 사회상을 품고 있어 오랜 시간이 흘러도 독자로 하여금 시인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게 한다. 수백 년의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까닭은 진실을 통한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시는 함부로 태어나 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함부로 쓸 수도 없다. 한 번 탄생한 시는 피가 돌고 맥이 뛴다. 이것이 사람과 같은 시의 생명력이다. 진정성을 획득하기 위해선 허구가 아닌 사실에 의한, 상상이 아닌 직접적 체험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산 선생의 돌올 한 시대정신은 시공을 초월한 우뚝한 산이라 할 수 있다. 이백 년도 훨씬 전에 부패한 나라의 폐단과 뿌리 깊은 부정, 백성에 대한 학정 과 수탈 속에서 발아한 그의 위민사상은 청사에 빛나는 자랑이다. 수많은 그의 저서는 모두 유배 생활에서 얻어진 보물로 흔히 애민정신의 발현이라 쉽게 말하지만 목민심서牧民心書나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은 애민경전으로 불리어야 마땅할 것이다. 특히나 유교가 주렴을 치고 있던 당대의 조선사회에서 현실 개혁을 주장한 실학사상의 등장은 위정자나 사대부의 눈에는 반사회적 역모나 다름없는 위험천만한 외돌토리의 견해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업적을 이웃의 일본에서 까지 익히고 연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히 다산 학茶山學이라 일컬을 만큼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우리가 눈여겨봐 야 할 부분은 그의 시다. 그의 학문의 뿌리가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단초가 아닐 수 없다. “시대를 아파하지 않고 분노하 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不傷時憤俗非詩也)”라는 그의 시론은 당시 농경시대 지도층의 추상적이고 유미주의적인 또는 음풍농월의 허장성세를 깨우치며 오늘날 우리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담론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어 있고
이정里正이 호통하여 단벌 소만 끌려갔네
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뛰어들자
붉은 피 자리에 낭자하구나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은 죄로구나”
말 돼지 거세함도 가엾다 이르는데 하
물며 뒤를 잇는 사람에 있어서랴
위의 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산의 대표적인 시라 할 수 있는 ‘애절양哀絶陽’이다. 그 외에도 그는 ‘기민시飢民詩’나 ‘시랑豺狼’ 등 당시의 농촌 현실이나 사회의식을 드러낸 시편들이 눈에 띈다. 특히 ‘애절양’은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려 세금을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 丁을 빗대어 힐난하고 있다. 이 밖에도 백성을 수탈하는 방법으로 일가붙이에게 대신 거두는 족징族徵을 비롯해서 도망친 자의 몫을 이웃에 물리는 인징隣徵, 이미 죽은 자에게 부과한 백골징포白骨徵布, 딸을 아들로 바꾸거나 가축의 이름을 도용해 세금을 추징하는 등의 악랄한 수법이 횡행했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덕암산 중턱에는 지금도 다산이 18년 유배생 활을 하면서 그의 학문적 산실로 불리는 다산초당이 보존되어 있다. 지금은 초당이 와당으로 변해 역사의 흔적이 퇴색한 감이 있지만, 그는 이곳에서 저서를 통해 자신의 실학사상을 완성했다. 이전에 그는 암행어사나 목민관 생활을 통해 부패한 관리와 백성들의 참상을 경험하고 유배생활에서 보고 들은 사실을 학문과 접목하여 시로 표현함으로써 조선이 낳은 보석으로 한때는 일본에서 더욱 연구되고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시에서 시대정신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내일의 우리의 삶과 사회 를 이끌어가는 비판적인 정신의 힘이자 창조적인 예지라 말할 수 있 으리라. 시를 시답게 만들어주는 힘은 사회적 굴곡과 고통이 예지의 눈에 포착되어 결합할 때 참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시의 밑바탕인 서정성이나 상상력 또는 구조적 장치나 미학적 요소를 배제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시대적 대상이나 상 황과 언제나 서로 길항하면서 가치를 형성하는 더욱 중요한 조건들이다. 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혀나 손끝이 아니라 시인이 세상을 향 해 가슴으로 쏘는 화살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슬픈 척하고 아픈 척하지 말자. 그것 역시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영효(崔英孝) 1999년 《현대시조》 추천. 200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김만중 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외 수상. 시집 『노다지라예』 『죽고 못 사는』 『컵밥 오디세이아 3000』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