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나면 우리 어매는 제일 먼저 방방마다 이불과 요를 꺼내서 마당 빨래줄에 넙니다. 장마동안 눅눅해진 이불과 요를 깔고 덮고 자기에 불편했거든요. 그래요, 쉬지 않고 지리하게 비가 내리면 손을 휘휘 내저으면 손가락에 담북 물이 묻어날 정도로 습기가 대단하거든요. 여름이니 이불이야 그렇다쳐도 요가 눅눅하면 잠을 자도 잔 거 같지 않게 개운하질 않아서요. 밭 일이랑 모심기에 바쁜 어매는 허리가 쑤신다고 더운 여름에도 군불을 때어서 등어리를 지지더라고요.
우리, 그림을 그려볼까하는데 어때요?
먼저 야트막한 동산을 배경으로 깔고 산그늘아래 초가삼간을 그려보세요. 물론 동산이야 짙푸른 녹색으로 그려야 할 테고. 노랗게 올린 초가는 장마를 지나며 잿빛으로 변했을테지만 그 위에 박넝쿨이 올라가야 멋드러지지 않을까요?
안방과 건너방 사이에는 두어 뼘 남짓한 마루가 있어야 늘어지게 낮잠을 잘 수 있을테니 꼭 빠져서는 안될거고요. 울바자에는 키를 키운 해바라기랑 옥수수가 얼굴을 삐죽 내밀고 바람따라 일렁이는 걸 그려야겠는데 좀 어렵다 그지요.
벌쭘 열린 삽작 안으로 올망졸망한 꽃밭이 보이네요. 채송화하고 나팔꽃이 없으면 말도 안 되지요. 새끼줄 따라 올라가며 핀 파랑색, 빨강색 꽃이 흡사 나팔처럼 벙그래져서 나팔꽃이랬지요. 그래, 봉숭화가 없어서는 말이 안 되지 암. 울 누나 손톱에 빨강물을 들여야 할 테니까.
다 그렸나요? 제가 넘 깝친다고요? 그럼 쉬엄쉬엄 쉬어가며 그려요. 스타벅스 아이스 커피 한 잔 하시던가. 오비다방 미스킴이 그립네.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맨 먼저 아이스 커피 들고서 주루룩 달려와서 '자기, 많이 덥지?' 빡세게 매상 올리던 미스킴이.
자 다시 시작해볼까요. 꽃밭에 피는 꽃일랑 다들 생각나는대로 그려넣으시고. 오~ 베파자매님, 코스모스가 가당키나 한 겁니까? 티나 자매님처럼 흐드러진 능소화가 여름꽃으로 제격이지요.
그 다음은 머시당가? 텃밭에 상추랑 대파에 고추하고 가지는 어떨까요? 어! 울집에는 텃밭이 뒤안에 있어 눈에 보이지 않거든요. 아~ 생각 났다. 우리집 워리가 마루 밒에서 혀를 쑤욱 빼어물고 헉헉하는 거. 더위 타는갑네요. 똥개는 으례 귀가 진도개처럼 쫑긋하지 않고 풀죽은 듯 늘어진 게 천상 잡종견(요새는 믹스견)이지요. 하지만 워리의 눈을 그릴 때는 순하게 그려야한답니다, 꼭이요. 어글어글한 똥개의 슬픈 운명을 예감하는 듯 그런 순한 눈을. 참 사람은 잔인해요. 집집이 키우는 똥개들이 여름나기가 참 쉽지 않았거든요. 빛갈은 누루스럼했지요 암매. 마루밑에서 오수를 즐기는 똥개도 그려보시구려. 개밥통은 찌그러진 양은 주발로 하면 좋겠네.
장마가 그치면 하늘이 얼매나 파랗던지 눈이 시릴정도로. 흰 솜털 구름이었던가 조개구름이었던가. 구름을 살풋 펼쳐야 하늘이 더 푸르게 보이거든. 대충 다 그렸는감요? 성미도 급하셔라 중요한 거 딱 하나 빠졌어라. 그게 뭔대요?
비록 타작마당으로 쓰기에 좁아터졌지만 마당을 가로질러 철사줄로 빨래줄이 떡하니 걸렸거든요. 모든 그림에는 포인트가 있는 뱁이요. 우리집의 포인트는 빨랩니다. 장마가 가신 뒤 널어놓은 빨래 이야기를 하려고요.
살림이 그렇고그래도 널어놓으니까 마당에 걸린 빨래줄가지고 택도 없더라고요. 빨래줄은 빨래만 너는 게 아니거든요. 푹 삶은 보리밥을 광주리에 넣어서 빨래줄에 걸어놓았지요. 쥐가 극성이라 피신한 셈이지요. 쥐란 놈은 어디에 꼭꼭 숨겨놓더라도 귀신같이 찾아내서 저지래를 하는데 빨래줄에, 그것도 중간 쯤에 걸어두면 별 수 없더라고요. 지가 써커스단의 곡예사가 아니고서야 어찌 외 줄 타고 건너오겠시유.
뒷산으로 올라가는 뒷꼍에는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울창해서 장관이었습니다. 그 앞에다가 임시로 줄을 메어서 빨래를 널었지요. 지게 작대기로는 높이를 맞출 수 없어 높다란 바지랑대를 세워 빨래줄을 걸어두면 이불이랑 요도 땅에 끌리지 않아서 여간 쓸모가 있어요.
요즈음 이 장면이 그립더라고요. 초록의 물감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나무숲과 대비되는 하얀 광목이불과 빨래깜이.
그래요. 햇볕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초록의 숲을 다 그렸나요? 그 다음은 무명 이불이던가 옥양목이던가 하얀 광목 요를 널어두면 초록 숲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빨래줄에는 쉼없이 햇볕이 내려쬐고, 산모랭이를 돌아오는 울집 황소가 울어잿기던 "음~머" 하는 금빛 게으른 울음이 아련하기만 하네요. 금빛 게으른 울음도 꼭 그려넣으시구려. 꼭이요. 물론 푸른 하늘을 빼 먹음 안되지요. 그래야 그림이 쉬원해질테니.
그림 이야기가 끝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요. 우리네 인생도 해가 쨍쨍 나는 맑은 날이 있는가 하면 장마처럼 구질구질한 날도 있을테니 말예요. 더러는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세상 놀음에 빠져드는 게 어디 한두 번이겠습니까? 어둡고 타성에 빠진 돌아보기 싫은 구석이 있다면 이리도 밝고 따가운 햇볕에 말리자고요. 가슴을 열고서 빨래줄에 바짝 말리면 맑고도 신성한 기운이 우리네 가슴 깊이 들어오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렇게 애둘러 빨래이야기를 늘어놓았네요.
그대의 가슴에 널어둔 빨래는 무슨 색깔인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