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5, 박시백, 휴머니스트, 2005.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기도 전에 삼촌에 의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던 왕. 그리하여 ‘비운의 임금’이라는 칭호를 받는 존재가 바로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이라고 평가되는 세종의 긴 치세 동안 세자 교육을 착실히 받았지만,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여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12살의 단종이 그 자리를 잇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 재위 시절부터 탁월한 능력과 야심만만한 존재로 부각이 되었던 수양대군은 이 사태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즉 ‘어린 임금과 장성한 대군’ 사이에 절대 나눌 수 없는 권력을 두고 신경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초래되었다.
비록 삼촌이지만 왕의 신하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시대의 권력구조에서, 수양대군이 절대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조카인 단종을 왕위에서 몰아내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명분을 중시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만약 실패하게 된다면 역적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어머니와 할머니도 없었던 단종에게는 삼정승으로 구성된 의정부의 도움을 받아 정책을 펼쳐야만 했다. 아마도 수양대군은 신하들의 입김이 강해지는 그러한 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고, 결국 그것을 극복하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서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현재 남아있는 ‘단종실록(노산군일기)’은 당시의 정치 상황이 불안정했으며, 그래서 세조(수양대군)가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는 방향으로 서술되어 있다.
실록을 비롯한 각종 기록에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듯이, 수양대군은 자신의 야심을 채우기 위한 절차를 하나씩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김종서를 비롯한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등이 단종의 강력한 후원 세력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한명회를 비롯한 책사들의 도움으로 김종서를 제거하고 쿠데타에 성공하게 된다. 권력을 틀어쥔 수양대군 세력의 압박에 밀려 단종은 결국 왕위를 물려주고, 마침내 세조가 등극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명분을 중시했던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에게 그 상황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에, 물러난 단종을 다시 왕위에 복위(復位)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된다. 세조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은 사전에 발각되어 이른바 ‘사육신’이라고 불리는 성삼문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그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단종을 살려두게 되면 후환이 지속될 것이라고 여겨,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난 단종 역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정상적인 왕위의 계승이 아니고 불법적인 쿠데타로 집권을 했기에, 세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그가 시행한 정책들은 조선을 보다 탄탄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실록 역시 그러한 치세를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역사에 대한 평가는 냉혹하여 세조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는 물론 그를 도왔던 인물들 역시 역사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세조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한명회는 이후에도 ‘간신’의 대명사로 치부되었으며, 세종의 신하이자 집현전 학자로 여겨졌던 신숙주의 경우 세조의 쿠데타를 도왔다는 이유로 상하기 쉬운 녹두나물을 ‘숙주나물’로 불리게 되었다는 야사를 남기고 있다. 역사는 언제나 결과보다는 과정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평가를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