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0 왕의 권력을 뛰어 넘은 외척, 이자겸의 난 [키워드 한국사]
이호 기자l2015년 08월 23일 10:59:02
[시선뉴스 이호기자] 이자겸은 고려 문종의 장인이며 문하시중을 지낸 경원(인천) 이씨 가문의 이자연의 손자이자 상서좌복야 이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원 이씨는 고려 왕족에 딸들을 시집보내는 데에 성공하여 권력을 쌓아 고려 최고의 권세가로 발돋움 하게 되었다.
이자겸은 그런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음서를 통해 벼슬길에 올랐다. 그 후 이자겸은 자신의 둘째 딸인 순덕왕후를 예종에게 시집보내게 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는데, 이듬해 후궁이었던 순덕왕후는 아들인 태자 해(훗날 인종)을 낳아 비가 되는 등 외척으로서의 권력을 차츰 쌓아갔다.
예종은 중립정치를 구현하는 왕이었으므로 이자겸이 그리 큰 힘을 쓰지는 못했다. 하지만 예종이 죽고 예종의 아우들을 물리치고 그의 외손자인 인종을 왕에 옹립하고 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자겸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인종은 정사를 모두 이자겸에게 일임하였고 이자겸은 이렇게 얻은 권력을 더욱 키우기 위해 인종에 대립하는 인물들을 모두 죽이고 유배시켜 숙청했다.
이자겸은 자신의 셋째, 넷째 딸을 인종과 결혼을 시켰다. 이로써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 되는 비상식적이지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외척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자겸은 한안인 같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정적들은 역모로 몰아 죽이고 자신의 손자가 왕인만큼 그 권세를 누리기 시작했다.
이자겸은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고 부르려 했다. 이 당시 생일에 ‘절’을 붙이는 것은 왕이나 태자만 가능한 것이었지만 이자겸은 왕의 장인이자 사위로서 오만하고 방자함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김부식 등이 인수절의 공식화를 반대하고 나서 이 날이 공식화 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아첨하는 자들은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이라고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또한 이자겸은 마치 자신이 왕인 양 외교활동을 했는데,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와 공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금나라가 강성해지자 다른 신하들이 금과 사대관계를 맺는 것을 반대했지만 자기 마음대로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군신관계를 맺기도 했다(부연 1126년).
청년으로 자란 인종은 아무리 자신의 외조부이긴 하지만 자신보다 더 왕노릇을 하는 이자겸에 대해 반감이 생긴 인종은 지녹연, 김찬, 오탁 등과 함께 이자겸과 그의 오른팔인 척준경을 제거하려 했다. 이 공격으로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을 죽여 기선을 잡았지만 척준경이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공격해 인종은 궁지에 몰리게 됐다.
척준경은 자신의 동생과 아들이 죽자 분노하여 궁에 불을 질렀고 불을 피해 뛰쳐나온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인종은 결국 이자겸의 집에 감금되었고 인종은 살기 위해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조서까지 내렸지만 이자겸은 주위의 반발이 두려워 이를 받지 못한다. 대신 이자겸은 본격적으로 인종을 압박하고 나라의 모든 일을 관리하며 임금과 동등하게 절을 받는 등 권세를 누리기 시작했다. 이것을 이자겸의 난이라 한다. 왕건이 고려를 세울 때 호족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무분별한 혼인 정책을 썼던 것이 결국 외척이 실권을 장악하는 상황까지 발전시킨 것이다.
그 후 이자겸은 틈이 나는 대로 인정을 죽이기 위해 음식에 독을 타는 등 여러 방법을 썼지만 인종은 이런 위기를 두 번째 왕후의 도움으로 겨우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인종은 척준경이 이자겸과 사이가 약간 벌어진 틈을 타 척준경을 회유하는데 성공한다. 1126년 이자겸이 이런 인종에 화가 나 궁궐에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왔는데 인종은 척준경에게 이자겸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여 이자겸의 군사들은 제압당했다.
이에 이자겸은 소복 차림으로 인종에 용서를 구하였고 인종은 차마 자신의 외조부이자 장인인 그를 죽이지는 못하고 영광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렇게 하여 이자겸의 권세가 끝이 나 버렸고 척준경은 한동안 이자겸 대신 권세를 부리다가 유배되어 사망했다.
이자겸의 난은 문벌귀족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가문의 힘(외척)을 극대화 시켜 그 권력이 왕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결국 문벌귀족들이 폐쇄적으로 권력을 독점하는 것에 다른 신분들이 염증을 느끼게 하였고 이는 결국 고려의 여려 내분이 일어나는 하나의 시발점이 되어 버렸다.
능력보다 가문의 힘을 더 중하게 여겼던 문벌귀족. 요즘 정치계에서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직시키는 것에 관여하는 것을 고려시대에 횡행하던 음서제에 빗대는 것은 국민들이 그만큼 그런 행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호 기자 dlghcap@sisu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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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1 반란이지만 반란이 아니었던 묘청의 난 [키워드 한국사]
이호 기자l2015년 08월 30일 10:59:46
[시선뉴스 이호기자] 이자겸의 난으로 고려는 궁궐이 불에 타는 등 왕권이 한없이 떨어져 있었다. 겨우 이자겸을 숙청해 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자겸이 형님의 나라로 화친을 맺어 놓은 금나라에 압박을 받고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이자겸의 몰락 이후 고려는 경주 김씨인 김부식 등의 문벌 귀족이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 문벌귀족들에의 권력 집중에 대해 지방 출신의 신진 관료들은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산세, 지세, 수세 등으로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관시키는 풍수지리설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묘청은 이의 선구자적인 인물이었다. 묘청은 정지상, 백수한 같은 신진 관료들과 함께 고려를 황제국으로 하는 건원칭제를 주장하였고 금을 정벌하자고 했으며 고려의 수도인 개경이 기운이 다해 내란과 외부의 침략이 심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묘청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좋다며 서경(현재의 평양)으로의 천도(도읍을 옮김)를 주장하게 된다. 인종은 묘청의 주장에 설득이 되어 서경 행차, 관료조직의 감축, 불필요한 세금의 감면, 농사의 장려, 민생 안정, 질병 구제, 빈민 구제 등 15조에 이르는 개혁안을 선포하였다. 또한 대화궁이라는 궁궐까지 지으며 수도를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금에 대한 정벌은 계속 반대했고 서경파들은 지속적으로 건의했다.
이렇게 서경파들이 천도에 성공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며 권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개경에 기반을 가지고 있던 김부식을 위시한 문벌귀족들의 반대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인종은 서경천도를 포기하게 되고 이에 극도로 화가 난 서경파들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서경으로의 천도를 성공시키고자 난을 일으키게 되는데(1135)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로 하며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불렀다.
하지만 묘청의 난은 결국 김부식이 지휘한 관군에게 서경이 함락되면서 진압되어 다시 문벌귀족들의 세상이 되었다.
묘청의 난은 고려 입장에서 반란으로 분류가 되기는 하지만 임금인 인종에 대한 난이라기 보다는 금에 사대하는 문벌귀족에 대한 반란으로 보는 것이 맞다.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이 난에 대해 자주적이고 독립적이라고 평하기도 하고 풍수지리설 같은 토속신앙에 의지하여 난을 일으켰다며 부정적으로 평하기도 한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모두 문벌귀족들의 오랜 집권과 폐쇄성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다. 이처럼 권력이란 웅덩이에 고인 물과 같다. 흐르지 않으면 썩기 때문이다. 고려는 점점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이호 기자 dlghcap@sisu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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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부연
2. 문벌귀족사회의 동요
가. 이자겸(李資謙)의 난(1126)
인주(경원) 이씨는 이자연(李子淵)에서 이자겸(李資謙)에 이르기까지 약 80년간(문종~인종)때가지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자겸은 둘째 딸을 16대 예종(睿宗)의 비로 들여서 그 소생인 해(초명은 구(構)이고 해(楷)로 개명) 인종(仁宗)으로 왕위를 잇게 하고 다시 두딸 3녀와 4녀를 인종에게 주어 이중 인척관계를 맺어 권력을 독차지 하였다.
이자겸 일당은 한안인 등 반대파를 몰아내고 남의 토지와 재물을 강탈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재화를 획득하고 18자(十八子)가 왕이 되리라는 도참설(圖讖說)을 믿고 왕이 되려 하자 인종은 왕 4년 1126년 이자겸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여 인종은 행동의 자유를 잃고 최탁, 안보린 여러 신하도 해를 입었다. 이자겸은 인종을 시해하려다가 왕 5년 1127년 인종에 포섭당한 일파인 척준경(拓俊京), 김향(金珦), 이공수(李公壽), 정지상(鄭知常)등에 타도되어 쫓겨 귀양을 가게되어 인주 이씨가 몰락하였다.
이 난으로 문벌귀족사회의 해체가 촉진되고 궁궐이 불타고 민심이 불안하여 도참이 유행하고 서경천도론이 대두되었다.
경원이씨와 왕실의 혼인관계도
11대 문종 | 12대 순종 | | |
인혜왕후(이자연의 딸) |
| 1. 정의왕씨 | | |
2. 연복궁주(延福宮主, 金良儉딸)-선희왕후 김씨(宣禧王后 金氏) |
장경궁주(이호딸, 이자연손녀, 아자겸의 누이동생) |
13.선종 | 14대 헌종 | |
사숙태후(이석딸) |
정신현비(이예 딸) | |
원신궁주(이정 딸) |
15. 숙종 | 16대 예종 | 17대 인종 |
| 문경왕후(이자겸 2녀) |
| | 폐비이씨(이자겸 3녀) |
폐비이씨(이자겸 4녀) |
인경현비(이자연의 딸) | | | |
인절현비(이자연의 딸) | | | |
나. 묘청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1135)
문벌귀족은 개경세력과 서경세력으로 분열 대립하였다. 그리고 금나라는 고려에 종종 압박을 가하여 고려는 외교적 시련에 직면하였다. 묘청(妙淸), 백수한(白壽翰), 정지상(鄭知常) 등 서경파・풍수지리설파・배욀파로 불리던 서경인들은 이자겸의 난 때 불타버린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묘청 등은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개경은 땅기운이 쇠하고 서경은 땅기운이 왕성하므로 서경으로 천도하면 국가를 중흥시킬 수 있고 칭제건원(稱帝建元)하여 송이나 금과 대등한 입장을 칭하고 금국을 정벌할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인종도 처음에는 마음이 움직여 서경에 대화궁(大花宮)과 팔성당(八聖堂)을 짓고 호의적이었으나 개경파・유학파・사대파 귀족들이 반대를 하여 서경천도가 어렵자 묘청은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하여 인종 13년 1135년 서경에서 서경 분사시랑 조광(分司侍郞 趙匡), 분사병부상서 류참(分司兵部尙書 柳旵), 사재소경 조창언(司宰少卿 趙昌言), 안중영(安仲榮)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리고 하였으나 백수한, 정지상, 김안을 출병전에 참수하고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조광이 묘청, 류참과 그 아등 류호를 목베어 항복했다가 정부가 항복을 받아 들이자 않자 다시 싸우는 등 내분과 전략 실패로 1년만에 서경이 함락되고 난이 진압되었다.
이 난으로 문벌귀족사회의 모순이 극화되고 분사제도와 삼경제가 폐지되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문벌 귀족 사회의 분열과 지역 세력간의 대립이었고 자주적 전통 사상(풍수지리설 등)과 사대적 유교 정치 사상과의 충돌 및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갈등(신라 계승 이념과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 1천년 내 제대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