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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2편)
늙은 천사의 집
친구여, 기억하는가.
우리 함께 걸었던 그 희미한 길
안내판 지나 안내판 없는 곳까지 넋 놓고 걸었지.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름과 이름 사이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이름을
무심히 지나가며 봤던
하늘은 흐리고 바람은 차가웠으며
축축한 안개가 모든 길을 덮고 있었던
반쯤 창이 열린 길가의 집은
스치기만 해도 무너질 것 같았지.
기울어진 문 뒤로
손보지 않은 뜰 한 쪽에는
사과 한 알이 막 추락하고 있었던 그 집
한 뼘의 햇살이라도 있었다면
그림 같다고 말할 뻔 했던
바닥을 드러낸 연못에는
잠들지 못한 물고기가 헤엄치고
그걸 보고 체념 가득한 얼굴로 너는
언제든 떨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지.
늙은 천사가 하품을 하는지
거미줄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던
어떤 장식도 이미지도 없는 집
친구여
이곳이 묘지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혼자만 한 건 아니었지.
묘비명
졸음처럼 날아드는 글자들
애인처럼 도망가는 글자들
뭐든 많으면 좋은 거라지만
말이 많으면 거짓말이라지.
말이 많으면 빨갱이라지.
그런 말들은 언제나 무섭지만
친구여, 때가 되면 말할게.
저 많은 글자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때를 놓쳐 끼니를 걸렀을 때
몰빵하느라 길을 잃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이 질병 때문에 죽듯이
생각 때문에 죽기도 하겠구나.
그런 생각도 끝이 있겠지.
어디 끝이 없는 시간이 있을까?
울다 지치는 아이처럼
원수를 향한 분노도 지치고
자식 잃은 어미의 슬픔도 지치고
죽음을 목전에 둔 두려움도 지치겠지.
그런데 왜 모든 유언은 길가에 버려진 우산 같을까.
심장을 문밖에 내걸어두고
거리에서 간신히 덜어낸 한 컵의 통증
오도 가도 못 하던 몸의 글자들이 갇혀있네.
아무도 읽지 않을 글자들
시간이 버린 글자들
안 보이면 더 생각나는
내 것인 줄 알았던 그렇지만 아닌 것들
이제 제발 거두어가길
발표작 3편
집으로 가는 길
이 도시는 안개로 유명하다.
내일의 삶마저 다 살아버린 사람들은
안개의 집에서
안개와 함께
안개의 이불을 덮고 잔다.
분간하기 어려운
담과 집의 경계 사이로
재빠르게 달아나는 안개의 꿈들
옛날 옛적 흩어지고 부서진 돌들을 주워 모아
집을 짓고 집을 허물고 다시 그 자리에
더 높은 집을 세웠지만
안개에 파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길은 멀고 앞은 어둡다.
안개의 막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어린 영혼들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소리가 개울 가까이서 들린다.
비명인지 울음인지 들릴 듯 말 듯
앞서가는 순례자들 발이 보이지 않는다.
친구여,
그럴 때마다 이 도시가
커다란 묘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네.
입을 가리고
코를 가리고
눈마저 가린
사람들이 쫑긋 귀를 세우고 있는
이 도시는 오래된 것으로 유명하다.
새벽이면 동쪽 하늘의 啓明을 찾느라
여러 번 넘어졌다.
네가 가난한 이 집의 영혼을 말리는 동안
늦었네.
겨우 한 뼘 햇살이 드는 창가에 서서
두 손을 말리며 너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지.
그게 마지막 인사인 줄 몰랐네.
몇 번이나 불렀을까.
하긴 이름도 모르는데,
대답도 없이 등지고 있는 네가 보였어.
반쯤 열린 서랍 속에 어지럽게 놓인 하얀 봉투들
내려다보고 있는 네가
거기 저만치
서 있었지.
아주 조금만 더
적막의 시간을 견뎠다면 정말 그랬다면
또 다른 아침을 볼 수 있었을까.
때를 맞춰 일어나지도 못했던 구제불능
밀랍처럼 마음이 굳어갈 때도 간절했던 생각
그냥 아프지 않게
매달리는 법
함부로 손을 모아 본 적 없는데
이번만은
손과 발도 깨끗이 씻고 갈비뼈 위로 성호를 그었지.
사원을 닮은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미처 적지 못한 이야기를 누가 들었으려나.
창틈으로 이따금씩 먼 비린내가 났지.
끊임없이 생각을 넘보는 바람의
혀가 몸을 핥는 것 같았어.
그리고 사이렌 소리
네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게 보였지.
바람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아주 조금씩 말라갔지.
네가 천천히 쓰다듬어 준 하얀 내 얼굴
처음으로 사랑한 슬픈 내 얼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넓은 내 이마
그 위로 햇살 한줌 내려앉았지.
이젠 정말 눈을 뜨려고 해도 뜰 수가 없네.
네가 가난한 이 집의 영혼을 말리는 동안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지.
핀 줄도 몰랐던 율란
한 잎
한 잎
떨어져 내리고 있었지.
포비아
― 희망
흰 길고양이가 순식간에 눈앞을 지나갔다.
얼마나 오래 걸릴까?
뭐가?
흰 고양이가 검은 고양이가 되려면 우주적인 사랑이 필요하겠지.
근데 우리 어디로 가?
아랍어 같은 말투로 너는 말했다.
글쎄 우선 여기서 좀 쉬자.
모르는 해변에서 길을 잃고 집단으로 죽는 돌고래들이 있는데,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그렇대.
무슨 말이야?
어디로 가기 위해선 아무래도 초월적 연습이라는 게 필요하겠지.
오래된 기별을 가지고 이제 막 해안에 도착한 병처럼
너는 캄캄하게 흔들렸다.
얇은 너의 등을 몇 차례 쓸어내렸다.
어쩌면 검은 고양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어디로 가?
자꾸만 길고양이의 흰 털이 떠올랐다.
어디로 가야하는 게 아니라면
혼자여도 좋았다.
미안해
어디도 갈 수 없을 것 같아.
손을 뻗어 너의 검은 눈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여태천(余泰天)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하여, 시집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 스윙 국외자들이 있으며, 편운문학상(2021)과 김수영문학상(2008) 등을 수상했다. 현재 동덕여대 국어국문학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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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무덤]으로 가는 길
여태천의 근작에 부치는 사족
“그러나 흘러간 지난날의 눈[雪]은 어디로 갔는가?”
프랑수아 비용
집에서 무덤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그 오이코스의 경제를 규율하는 형식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은 어떤 모양으로 죽음과 삶의 이름을 덧입은 것일까? 그 죽음과 삶은, 벽과 지붕은 어떠한 강고한 법과 유연한 신체를 얽어 운명의 실을 잣고 있는 것일까? 그 집을 무덤답게, 그 무덤을 집답게 만드는 것은 누구의 입김일까? 무엇보다도 먼저 경계가 있다. 경계는 한계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삶인지 결정하면 죽음이 태어난다. 어디서부터 죽음이고 어디까지가 죽음인지 엿보는 사이에 삶이 태어난다. 그 최저점과 최고점을 한계짓지 않으면 화음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쪽 끝과 저쪽 끝을 마름질하는 시공간 속에 벽이 올라가고 지붕이 앉는다. 벽과 지붕과 창이라는 물질적인 지지기반이 현재라는 사태를 초래한다.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인 사건들에 틈입하면서 악전고투, 살아내는 지금-여기 삶의 지지기반이 집이고 무덤이다. 안개처럼 풀리며 벽과 지붕을 옭아매고 대기를 잠식하는 푸른 빛, 그 비실재의 감각이 집을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진동하게 만든다. 그러니 망각과 기억의 시간 속에 현재의 집이 건립되는 셈이다. 기억과 망각은 죽음을 향해 흘러가고, 필연적인 사태로서의 무덤에 고인다. 그러니까 집의 시는 무덤이 시다. 그것은 생생불식하는, 구체적인 한 인간의 생애사다.
시는 집으로 가는 길에서 태동한다. 희미한 길이다. 수많은 이정표들이 지시하는 이름들이 지워졌다가 다시 쓰이는 아마득한 현기(眩氣)에 시달리며 가까스로 다다르는 곳에서 경계가 열린다. 거기 스치기만해도 무너질 듯 아스라한 몸피로 기울어진 문이 하나 열린다. 지나온 길과 지나갈 길 사이로 반쯤 열린 채, 마치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에게도 열어보이지 않았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간직한 듯, 미망의 불빛을 비추이는 터. 무언가 생동하는 것처럼 안개가 피어오르고 기울어진 바닥 너머로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린 세간이 보인다. 하늘 끝에서 쏟아지는 빛살과 지옥으로 끌어당기는 것만 같은 중력을 견디며 낡아가는 살림의 시간이 이마에 와닿는다. 이 모든 이미지를 지우고 다시 그린 그림과 같은 공간은 그리하여 마침내 기억 그 자체와 가까워지는 곳으로 탈바꿈한다. 욕망과 충동의 서사를 비껴갔기에 이제는 준-현실(quasi-reality)이 되어버린 삶이 아로새겨진다. 바로 그 비실재의 한 점에서 피어오르는 말이 있다. 비실재의 언어가 지배하는 행간이 있다. 과거 혹은 미래일 수밖에 없는 어딘가에 쌓아올린 벽과 창이 집의 시를 건립한다. 비실재이기에 저만의 진실을 걸머진 단독자의 규율이 아니라, 언젠가 나였던 그 누군가와 손 맞잡고 그이와 더불어 도달할 수밖에 없는 곳에 집이 있다. 거기서는 아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기에 자유다. 아무런 사태도 생성하지 않기에 평화다. 바닥에 바닥을 겹쳐서 이루어진 집, 고백의 성사만이 체념처럼 고인 비인간의 자유와 평화가 지배하는 집.
늙은 천사가 하품을 하는지
거미줄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던
어떤 장식도 이미지도 없는 집
친구여
이곳이 묘지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혼자만 한 건 아니었지.
- 「늙은 천사의 집」 부분.
그 집[무덤]에는 무엇이 잠들어 있을까? 그 집은 무엇이 잠든 곳일까? 먼지를 뒤집어쓰고 낡아가며 생채를 더하는 모든 사태의 물질성이 지워지고, 당신이 삶이라 여겼던 그 모든 결정적인 사건은 기억과 회상 속에서 비약을 거듭하다가 서서히 지워져 간다. 시작과 끝이라는 한게를 설정하지 않고는 어떤 화음도 발생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라는 양끝을 직관하지 않으면 기억과 회감은 태동하지 않는다. 집을 쌓아 올리는 생성의 시간은 한계를 지시하면서 비롯되는 질서인 까닭이다. 집은 무덤을 이고 솟구치며, 삶은 죽음을 덧입고 무늬를 이룬다. 때문에 모든 기억 속에는 집 한 채 도사린다. 집은 그렇게 ‘주어진 벽’과 ‘만들어낸 벽’ 사이에서 진동한다. 벽은 그렇게 “세계를 두 영역으로 나눈다. 하나는 생이 벌어지는 커다란 외부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생이 생기는 조그만 내부 세계이다.”(빌렘 플루서, 사물과 비사물, 김태희, 김태한 옮김, 필로소픽, 2023, 43쪽.) 그림자가 와닿아 무늬를 이루는 벽과 창, 주어진 언어와 만들어낸 언어가 개시되고, 건립하고, 은폐되는 터. 그리하여 모든 벽의 다른 이름은 묘비명이라 고쳐 쓸 수 있는 것이다. 주어진 것과 만들어진 것을 지시하는 언어가 먼저였던 까닭이다. 일찍이 막스 피카르트가 지적한 그대로 선험적인 언어능력, 경험독립적으로 주어졌기에 사물의 질서를 넘어서면서 사물을 생성하는 시의 언어가 먼저였다. 발화는 사건이다. 처음으로 온전한 문장을 뱉어내고는 스스로 놀라 뒷걸음치는 아이의 표정을 떠올려보라. 삶과 죽음을 초과하는 언어의 집이 먼저였다. 그토록 수다한 고백의 말들은 어디서 왔는가?
친구여, 때가 되면 말할게.
저 많은 글자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때를 놓쳐 끼니를 걸렀을 때
몰빵하느라 길을 잃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이 질병 때문에 죽듯이
생각 때문에 죽기도 하겠구나.
그런 생각도 끝이 있겠지.
어디 끝이 없는 시간이 있을까?
울다 지치는 아이처럼
원수를 향한 분노도 지치고
자식 잃은 어미의 슬픔도 지치고
죽음을 목전에 둔 두려움도 지치겠지.
그런데 왜 모든 유언은 길가에 버려진 우산 같을까.
- 「묘비명」 부분.
‘죽음을 목전에 둔 두려움’ 속에서 최후의 고백이 적힌다. 최후의 시점은 삶의 몫이었다. 죽음의 시점에서 묘비는 최초의 고백이었다. 묘비명의 시는 “과거와 미래로 나뉘며 현재를 끊임없이 지워버리는 생성”의 언어로 적히는 까닭이다. 기억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등배를 맞댄 시간이다. 기억은 ‘사건으로 현재에 내속’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간은 물질적 기억이 지배하고, 과거와 미래의 시간은 작용/반작용의 ‘비물체적 효과’ 속에서 분화하고 갈래를 친다. 과거와 미래라는 무규정적인 심급이 길항하며 잠시 현재를 생성한다.(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옮김, 한길사, 1999, 50-51쪽.) 기억이 현재를 쓴다. 묘비명의 언어가 태어난다. 묘비명의 언어는 비물질적인 생동으로 도약하는 미래의 언어다. 묘비명은 기억흔적과 결합하면서 이어지다가 잠재성의 가쁜 호흡이 결락되는 지점에서 생몰연표를 닫는다.
철필로 돌을 긁어 새기는 시는 죽은 이의 신체 위에 가로놓인다. 현재를 비켜가며 사라져간 죽음의 집 위에 시들어가는 꽃다발로 장식되는 몇 행의 삶, 몸의 언어. 누군가 가장 깊은 곳까지 파내려 간 다음 단정하게 수습한 몸뚱이, 죽은 자의 말을 빌려, 죽은 자로 하여금 일으킨 죽은 자의 말을 빌려 맞이하는 기억의 시. 누가? 누구를? 묘비명은 주억거리며 빗돌을 읽는 바로 그 사람을 추억한다. 그이는 삶의 질서가 빚어놓은 사건의 인과성 밖에 버티고 서서 한 인간이 남긴 진실을 재구성한다. 한 인간의 진실이었을 바로 그것을 역사의 영역에서 ‘판타즘’의 영역으로 옮긴다. 이장(移葬)한다. 새로운 읽기와 쓰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가장 늙은 어ᇿ어는 가장 새로운 언어가 되어 가장 밝은 언덕에 터를 잡는다. 묘비명은 가장 밝은 곳에 뿌리내리는 근원적 변이의 언어에서 생성한다. 바로 그 변이의 한 지점에 우뚝 세운 빗돌에 “내 것인 줄 알았던 그렇지만 아닌 것들”의 언어가 적힌다.
묘지에서 출발한 길은 그렇게, 고단하게 눈감았을 그이를 어루만져 씻기고 눕혔을 집으로 이어져 있다. 이제 다만, 집은 온데간데없고 집으로 가는 길만 무덤 쪽으로 뻗었다. 바로 그 길을 지시하는 언어를 숙명처럼 받아안고 되뇌는 고백만 남았다. 삶이 죽음으로 지워지고 새로 쓰이듯, 기억은 비기억이다. 비기억의 의미라는 측면에서 망각의 힘에 의지해서 생성된다. 기억은 기억흔적의 언어이기에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생의 필연을 과잉결정한다. 무엇을 잊어가는가를 기억하는 바로 그 순간에서야 기억의 근원이 명확하게 지시되는 까닭이다. 한사코 망각을 기억하려는 의지가 그이의 발걸음을 집[무덤]으로 이끌었다.
옛날 옛적 흩어지고 부서진 돌들을 주워 모아
집을 짓고 집을 허물고 다시 그 자리에
더 높은 집을 세웠지만
안개에 파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길은 멀고 앞은 어둡다.
안개의 막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어린 영혼들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소리가 개울 가까이서 들린다.
비명인지 울음인지 들릴 듯 말 듯
앞서가는 순례자들 발이 보이지 않는다.
친구여,
그럴 때마다 이 도시가
커다란 묘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네.
- 「집으로 가는 길」 부분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무엇을 잊어버린 것일까?
“요컨대 우리가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이유는 별처럼 밝게 빛나는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고통으로 가득한 우리의 밤을 환하게 밝혀 빛으로 채워줄 수 있는 눈부신 그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이다.”(샹탈 자케, 계급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 류희철 옮김, 그린비, 2024.2, 117쪽.) 그러니까 삶/욕망/충동이 아니라, 고통/결여/죽음/충동이 먼저였다. 욕망과 뒤얽힌 고통의 실재가 실낱 같은 빛을 향해 밤의 시간을 확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밤/빛이 기억/망각의 실재였다. “내일의 삶마저 다 살아버린” 위에 남은 ‘꿈’들을 파묻어 다진 지반 위에서 첫삽을 들었던 바로 그곳에 누군가 처음으로 호박돌 하나 놓았던 것. 바로 그 터에서, 터-있음[Dasein]의 시간이 시작된 것.
그리하여 “고통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더 나은 삶으로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더 나은 삶을 욕망하고 있다는 뜻이다.”(샹탈 자케, 같은 책, 같은 쪽) 고통의 계명을 찾는 오체투지가 집으로 가는 길을 열어왔다. 고통 속에 빗금그어진 구체적인 사태를 사로잡으며 명멸해간 구체적인 사물들의 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결정적인 현재의 삶을 생성했다. 안개 속의 순례자들이 맞이하는 한 점 불빛처럼, 비명과 울음에 등돌리면서도 한사코 귀기울였던 마지막 전언처럼, 수많은 물상들이 지워진 채로 다가오는 길, 지워졌기에 더욱 또렷하게 아로새겨진 길. 바로 그 길에서 쓴 시가 있다. 눈을 감으면 더욱 또렷하게 어둠을 대면하게 되지만 어둠을 직시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머뭇거리며 어둠의 몸피 속으로 손을 찔러넣었을 때 만져지던 이정표들이 있었다. 이정표의 시간이 집적될수록 현재는 소산했다. 그렇게 만들어 간 길과 집으로 이어진 마을은 묘지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명명백백백한 감각, 명백한 비실재적인 감각이 오롯한 나만의 기억의지를 들쑤셨다. 감각으로 몸을 추동했다. 수없이 지워지면서도 되살아오는 그것은 무엇이었나?
근데 우리 어디로 가?
아랍어 같은 말투로 너는 말했다.
글쎄 우선 여기서 좀 쉬자.
모르는 해변에서 길을 잃고 집단으로 죽는 돌고래들이 있는데,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그렇대.
무슨 말이야?
어디로 가기 위해선 아무래도 초월적 연습이라는 게 필요하겠지.
오래된 기별을 가지고 이제 막 해안에 도착한 병처럼
너는 캄캄하게 흔들렸다.
얇은 너의 등을 몇 차례 쓸어내렸다.
어쩌면 검은 고양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어디로 가?
자꾸만 길고양이의 흰 털이 떠올랐다.
- 「포비아 ― 희망」 부분.
희망? 두려움과 한몸이었던 희망? 모든 것을 말하려는 의지를 밀어붙였던 침묵? 바로 그 자리에서 생성하던 한 줄의 시?
“우리는 단어들의 의미가 기호처럼 바뀌는 것을 알고 있다. 오랫동안 점 세 개의 말줄임표(…)는 잃어버린 것과 미지의 것을, 언제부터인가 말해지지 않은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사라짐과 끝 저편의 열린 가능성까지를 표시하게 되었다. 그렇게 점 세 개는 그것이 암시하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여 보기를 독려하고, 생략된 것들을 상상하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묵살된 것들, 불쾌하고 외설적인 것들, 지탄의 대상과 사변적인 것들, 누락된 것들의 특별한 변주라는 근본적인 것을 표시하게 되었다.
우리는 또한 고대의 생략 기호가 별표(*)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유디트 살란스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 박경희 옮김, 뮤진트리, 2022, 159쪽.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남긴 그 모든 생략 기호가 별표였음을 알게 되리라. 우리가 남긴 모든 그 침묵이 별이었음을 알게 되리라. 오늘 한 줄 시의 죽음이, 마침내 남은 삶을 마저 쓰게 되라는 것 또한.
신동옥申東沃 시인.
2001년 《시와 반시》로 등단했다.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고래가 되는 꿈, 밤이 계속될 거야, 달나라의 장난 리부트, 앙코르를 펴냈다. 산문집 서정적 게으름, 시론집 기억해 봐, 마지막으로 시인이었던 것이 언제였는지를 펴냈다. ‘노작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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