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회사 사무실일까? 여러번 이야기를 들었던 사무실에 다녀왔습니다. 바로 이곳입니다.

깔끔한 흰색 바탕에 노란 바닥, 그리고 맞춤 가구들. 여기까진 그리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개인공간들이 넓어 보여 맘에 듭니다. 이동용 책꽂이를 각자 책상 앞 파티션으로 씁니다.
그런데 이 사무실, 자세히 보시면 창문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지하실에 사무실을 몽땅 몰아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건물 지상 부분은 어떻길래? 지상이 없어서?
건물 지상부는 이렇습니다.

© FG+SG – Fernando Guerra, Sergio Guerra
모양이 독특합니다. 그랜드 피아노 같기도 하고...일단 어떻게 생긴 건물인지 좀더 뜯어봅시다.

© FG+SG – Fernando Guerra, Sergio Guerra
독특합니다. 건물이 굽이굽이 물결치듯 돌아갑니다. 그리고 몽땅 노출콘크리트.
이렇게 건물이 있는데 왜 사무실을 다 지하로 집어넣었을까요?
물결치는 건물 내부를 보시겠습니다.

© FG+SG – Fernando Guerra, Sergio Guerra
내부는 하얀 절대 공간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텅 비어 있습니다.
이 건물은 미술관입니다. 열린책들이 운영하는 미술관 겸 사옥입니다. 미술관 이름은 `미메시스 뮤지엄'이고, 그 지하가 출판사 사무실입니다.
이 열린책들 사옥은 파주 출판도시에 있습니다. 파주 출판도시는 유명 건축가들이 설계한 유명 출판사 사옥들이 모여있는 건축 백화점 같은 곳입니다. 이 곳에 있는 여러 작품 건물들 중에서도 그 건축가가 가장 유명한 사옥이 바로 이 열린책들 건물입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루 시자가 이 건물을 설계했습니다.

알바루 시자는 포르투갈 건축가입니다. 올해 나이는 78살. 원로 중의 원로인 건축 거장입니다.
건축계에서 `건축 노벨상'으로 부르는 상이 있습니다. 프리츠커상이란 건축상입니다. 세계적 건축 거장 중 한 명을 골라 매년 수상자로 뽑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선 한 명도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죠.
알바루 시자는 1992년 프리츠커상을 받았습니다. 포르투갈이 낳은 세계적 건축가로 단연 첫손 꼽힙니다. 세계 건축의 주류는 역시나 미국과 유럽, 유럽 중에서도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강대국들입니다. 포르투갈은 유럽 건축계의 변방이죠. 이 변방의 한계를 딛고 세계적 건축가로 자리매김한 대표적 유럽 건축가가 알바루 시자입니다.
한국이 이제 정말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고 있구나, 건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구나라고 실감하게 되는 계기가 이런 세계적 건축가들의 작품이 한국에 들어서는 소식을 들을 때입니다. 파주 출판도시에도 두 명의 프리츠커 수상자가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미메시스 뮤지엄입니다.

© FG+SG – Fernando Guerra, Sergio Guerra
미메시스 뮤지엄은 독특한 외관 이상으로 내부가 독특합니다. 건물이 곡선이어서 내부도 곡선을 이루고, 공간을 넓게 트거나 때로는 쪼개고 가려 다양한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내부 공간을 독창적이고 풍성하게 꾸미는 것이 알바루 시자의 특기입니다.
또한 하얀 순백색 건물을 좋아하는 것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입니다.
하얀 공간은 특별한 매력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공간을 입체적으로 분할하면 형태에 따른 빛의 농담 변화로 명암이 다양한 입체감이 연출되지요. 미메시스 뮤지엄은 이런 시자의 장기가 잘 드러납니다.

© FG+SG – Fernando Guerra, Sergio Guerra
곡면이 대담한 외부도 날씨와 시간에 따라 느낌이 다양해집니다. 노출 콘크리트나 하얀색 같은 무채색 건물들은 그래서 모양의 다채로움으로 승부가 납니다. 형태의 변화는 이런 단색조일 때 더 강하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요즘 자동차 색깔이 은색 또는 메탈컬러가 유행인 것과 비슷합니다. 형태 디자인을 좀 더 강조해주는 색깔이기 때문입니다.
이 미메시스 뮤지엄은 아직 내부는 작품으로 채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부의 입체감이 더욱 강하게 다가옵니다.
미술관이자 사무실, 그야말로 작정하고 지은 출판사 건물이라 하겠습니다.
# 반세기를 활동해온 작가 건축가
알바루 시자가 세계 건축계에서 돋보이는 것은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그것도 가장 잘 나가는 건축가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점입니다. 가장 유명한 스타 건축가는 아니어도 늘 세계적 인정을 받으며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를 만족시켜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세계 건축계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60년대였습니다.
당시 그의 작업 중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이 것이었습니다.

건물이 아니라 수영장입니다. 포르투갈 팔메이라에 있는 야외 수영장입니다.
이 수영장은 바닷가 바위 지형을 그대로 살려 중간 중간 최소한의 건축 만으로 자연적인 풀장을 만들었습니다. 길 쪽에서는 수영장이 전혀 보이지 않고, 바다쪽에서 보면 나타나는 시각적 재미를 만들어냈습니다. 길가에서 높은 벽으로 만든 진입로로 들어가면 양쪽은 벽으로 막히고 하늘만 보이다가 드디어 자연 바위와 바닷물로 수영할 수있는 풀장이 짠~ 하고 나타납니다. 바다를 즐기면서도 안전하게 수영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탁월한 건축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1966년 당시만해도 이런 접근법은 신선했고, 많은 세계 건축인들에게 놀라운 충격을 주었습니다.
초기 시자의 건물은 합리적이면서도 개성적인, 그리고 저렇게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한 끌어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저 수영장은 바로 아래 건물의 연장선이라 하겠습니다.

60년대 건물임에도 지금 봐도 촌스럽거나 질리지 않는 디자인입니다. 유럽의 주류 건축과는 다른 지역적 특성도 느껴집니다.
시자의 세대들은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자의 작품들은 모더니즘 속에서 진화해나갑니다. 점점 절제, 정제되고 절대적인 형태의 근원을 추구하는 듯한 건물을 선보입니다. 순백의 조형적 건물들은 시자의 대명사가 됩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산타마리아교회입니다. 네모꼴만으로 처리한 디자인이 강력하면서도 차분한 상반된 느낌을 모두 아우릅니다. 종루를 따로 만들지 않고 튀어나온 부분 안에 집어넣은 처리도 인상적입니다.

Architect: Alvaro Siza
Location: Marco de Canaveses, Portugal
Project Year: 1996
Photographs: Alvaro Siza Website
References: Rudolf Stegers, Pedro de Llano
90년대 이후 시자는 이런 하얀 조형물 같은 건물, 건물 모양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특이한 모양의 건물들을 설계했습니다. 대표적인 건물들을 보시겠습니다.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로에 있는 이 건물은 독창적인 형태로 건물의 고정관념을 깨는 시자의 디자인 세계를 잘 보여줍니다. 건물 모습이 자유롭고, 그래서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가 설계한 주택들 역시 이런 하얗고 특별한 모습들을 강조한 것들이 많습니다.
`Fez House'는 좀 더 첨단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마치 우주선 같군요.


Architects: Alvaro Leite Siza Vieira
Location: Porto, Portugal
Project Year: 2010
Photographs: FG+SG – Fernando Guerra, Sergio Guerra
하얀색은 하늘빛의 변화를 표면에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색깔로 보이는 것이 매력이죠. 이 집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집의 매력 포인트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내부 천장의 장식 같군요. 촌스러울수도 있지만 과감한데도 차분한 느낌이 드는 중첩되는 분위기를 만드는 듯합니다.

천장 시공팀이 고생을 많이 했음직합니다. 이 집을 짓는데 무슨 곡절인지 모르겠으나 12년이나 들었다고 합니다.
# 한국에 속속 들어서는 시자의 작품 건물들
시자의 건축은 절대적인 조형의 근본을 탐구하는 듯합니다. 모양은 강렬하면서도 정적입니다. 집인지 조각 작품인지 구별이 안되는 스타일입니다. 이런 성향은 건축의 예술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건물들은 경제성보다는 상징성을 추구합니다. 시공은 어렵지만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운 강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도 특징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 한국에 시자의 작품들이 계속 지어지고 있는 점입니다.
시자는 세계적 건축가지만 프랭크 게리나 렘 콜하스처럼 대중들에게도 유명한 스타는 아닙니다. 한국에 작품을 남긴 스타 건축가들 대부분이 기업의 마케팅 목적에 따른 선택이었고, 회사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사옥 등을 주로 지은 점을 감안하면 시자가 한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점은 뜻밖입니다. 실제 그가 한국에 설계한 건물들은 기업의 간판 건물보다는 조용히 숨어있는, 그러면서 예술성을 지향하는 건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 FG+SG – Fernando Guerra, Sergio Guerra
Architects: Alvaro Siza, Carlos Castanheira and Kim Jong Kyu
Location: Yongin-si, Gyeonggi-do, South Korea
Project Area: 26,029 sqm
Project Year: 2008-2010
경기도 용인에 있는 아모레퍼시픽 연구&디자인 센터입니다.
이 건물은 이 사진으로 보면 넓은 잔디밭에 낮게 들어선 긴 학교 건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굉장히 다양한 형태의 여러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는 `얼굴이 많은' 건물입니다. 보는 방향에 따라 느낌과 모양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긴 유리창 건물은 앞에서 보면 이런 모습입니다.

© FG+SG – Fernando Guerra, Sergio Guerra
내부에서는 어김없이 시자 특유의 하얀 빛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 FG+SG – Fernando Guerra, Sergio Guerra
시자의 건축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또다른 특징은 대지의 독창적 활용입니다. 땅 모양을 자연스럽게 따르면서도 파격적인 형태로 튀는, 그러면서도 이런 상반된 디자인이 조화를 추구합니다. 이 아모레퍼시픽 센터에서도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 FG+SG – Fernando Guerra, Sergio Guerra
넓은 대지에 구획벽을 두르고, 건물이 지하로 들어가는 배치가 안도 다다오의 비트라 파빌리온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한국에 지어진 시자의 작품 중에서 소품에 해당하는 안양 `알바로 시자홀'도 이런 지형과 건물의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 FG+SG – Fernando Guerra, Sergio Guerra
작지만 공간감이 풍성한 이 건물은 한국에서 시자 건축의 여러가지 특성을 만나볼 수 있는 곳입니다. 하얀 내부, 빛의 처리, 다양하고 자유로운 벽면, 그리고 자연 지형과의 조화 같은 것들입니다. 시자가 제자인 김준성 건축가와 함께 설계했습니다.

© FG+SG – Fernando Guerra, Sergio Guerra

© FG+SG – Fernando Guerra, Sergio Guerra
그리고 그의 작품으로 가장 최근에 들어선 것이 바로 열린책들의 미메시스 뮤지엄입니다. 이 안양홀보다는 훨씬 큰 건물이고, 디자인도 더 강렬해졌습니다.

© FG+SG – Fernando Guerra, Sergio Guerra
뮤지엄은 실내는 하얀 네모꼴 전시장으로 충분한 대신 외관은 다른 건축물보다 훨씬 자유롭고 과감하게 디자인을 추구할 수 있는 분야입니다. 현대 건축에서 정신성과 추상성을 가장 확실하게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그렇게 강한 볼거리로 승부할 수 있는 건물이 뮤지엄들입니다. 미메시스 뮤지엄은 이런 뮤지엄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이런 파격적인 형태의 건물일수록 시공이 어렵고, 하자가 많기 쉬워 유지 관리가 어려운 편입니다. 이 미메시스 건물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분명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매력을 지닌 건물입니다.

© FG+SG – Fernando Guerra, Sergio Guerra
미메시스 뮤지엄은 파격적인 외부, 다이나믹한 내부로 새로운 동선을 시도하는 현대 뮤지엄 건축의 최전선을 보여줍니다.
아쉽게도 기업 사옥이어서 그 내부를 마음껏 돌아볼 수는 없고, 아직 전시 공간은 빈 상태지만 1층에 책 가게도 있고 그 외부는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들어선 외국 스타건축가의 건물들의 경우 주요 작품으로 꼽히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스타 건축가의 이름값에 목맨 국내 기업들이 돈은 돈대로 들이면서 제대로 된 건축물 하나 못남기는 것은 건축계 내에선 많은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시자의 작품 중에서 저 아모레퍼시픽 센터와 미메시스 뮤지엄은 최근 그의 작품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 손꼽히는 점에서 반갑습니다. 외국 주요 저널들에서 여러번 소개했고, 시자 본인도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한다는 후문입니다. 건물 자체에 대해서는 보는 분들의 취향에 따라 호오가 엇갈리겠고, 실제 건물을 사용하는 이들에겐 다른 건물보다 불편할 수 있는 건물이겠지만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두 건물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전세계 건축주들의 러브콜을 받는 건축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이 한국에도 들어서는 것을 보면 이 노장의 꾸준함과 치열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파주에 가실 일이 있다면, 특별한 건축물에 흥미가 있으시다면, 그리고 알바루 시자라는 건축가가 마음에 드시는 분이라면 미메시스 뮤지엄도 한번 구경해보시면 좋겠습니다.
by 구본준 http://blog.hani.co.kr/bonb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