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있는 사람(Blessed is the man)
시편 1:1-3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사람들은 "복"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잘 살거나 더 잘 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사람들은 복을 받기를 원해서 설날이 되면 새배를 하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복'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입니다. 1, 2절에서 말씀하듯이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는 반대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복과 반대인 저주받은 상태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저주받은 상태에서 살아가니까 계속해서 세상이 말하는 '복'만 따라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짜 복인 줄도 모르고...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될 때에 나 자신도 바르게 알게 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어야만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통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기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자기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적인 지혜와 훈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여기에서 "멸시한다"는 것은 하찮게 생각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만, 그것보다 자기의 생각을 따라가며 자기 의지대로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상 삶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어 삶의 모든 면에서 변화가 됩니다. 그 동안 인생의 목적이 잘 살고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어서 형통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그러한 잘못된 인생의 목적도 달라지고 행복의 근원도 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되므로 그 말씀대로 살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1장3절에서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고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형식적으로 또는 억지로 지키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율법을 지키되 억지로 피조물이니까 할 수 없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하셨듯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진리인 율법을 즐겁게 지키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지 못하고 하기 싫고 억지로 해야 하기 때문에, 또는 우리의 생각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고 그것을 즐겁게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과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가운데 8가지 복이 있는 사람이란, Blessed is the man입니다. 즉 "복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이다"라는 말입니다. the라는 정관사가 붙어서 특별히 지정된 "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복을 받은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어제 '그것이 알고싶다'를 보니까 너무나 가난했던 사람 3명이 로또에 당첨된 것을 보며 사람들은 "복받은 사람"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심지어 "하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까지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이 그 복을 받았을 때, 그것이 과연 복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의 결국은 처음보다 더 나빠졌습니다. 죽지 못해 살던 사람에게 큰 돈이 쥐어진 결과 행복은 한 순간이고, 어느날 그는 감옥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가짜 복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 인간의 심리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파놓은 함정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짜 복을 받기 위해 이리 저리 헤메이지 말고 진짜 하늘의 복을 받아서 살아야 합니다.
시편 1편에서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동사(verb)만 생각해보면, "좇아가고, 서고, 앉는다" 입니다. 즉 우리가 무언가를 추구하여 좇아가다보면, 그것이 좋아서 거기에 멈추어서 결국 그 자리에 앉아서 누리고 싶어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복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한 꾀를 좇아가지도 않고, 거기에 멈추어서 함께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시편은 의인과 악인, 복과 저주가 계속해서 대조되어 나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정직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은 의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며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은 악인으로 구별되어 나옵니다. 꼭 사람을 죽이고 사기치고 감옥에 가는 사람만 악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는 "복"이라고 번역된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시편 1편과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 쓰인 "복" (에쉬어"אֶשֶׁר")은 "~을 했을 때에 받는 결과"를 말합니다. 즉 시편1편에 쓰인 말은 산상수훈에 나온 것처럼 "~을 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의미로 쓰인 용어입니다. 즉 인간이 어떤 행동을 취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거기에 대한 댓가(상)를 받는 복을 말합니다. 따라서 시편1편에 쓰인 "복있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해야한다는 전제 조건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한 "그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에스겔서 47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성전 문으로 인도하시는데,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물이 흐르기 시작하여 그 물이 사람을 덮을 정도로 흘러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강가로 데리고 가셔서 보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았습니다. 그리고 9절과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이 장면과 똑같은 장면이 연상되는 성경은 요한계시록입니다. 계시록 제일 마지막장인 22장을 1-2절을 보면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또 창세기 2장 8-10절까지를 생각나게 합니다."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는 복받은 자들을 위해 에덴동산에서부터 생명수의 강을 만들어서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수는 바로 예수님이시며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즐거워서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며 그 말씀을 매일 매순간 묵상하며 살아가므로 생명수의 강이 그 사람의 삶 속에서 흘러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복있는 사람의 행동을 보면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오늘은 소극적인 면을 살펴보겠습니다.
*** 복있는 사람의 소극적 행동(1절)
1절에 보면, 복있는 사람의 행동 중에서 소극적인 3가지 면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3살 버릇이 80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우리의 습관은 반복되는 행동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사람은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즉 생각대로 행동하며 행동이 반복되면 그것이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대로 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꾀는 '생각'이며, 죄인의 길은 '행동'이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은 '습관'을 말합니다.
(1) 복있는 사람은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한국 성경은 "악인의 꾀"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꾀"라는 말은 "모략, 상담, 의견, 충고, 목적, 의도"(counsel, advice, purpose)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악인(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이들, 세상)의 충고나 악인의 지혜나 악인의 상담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이므로 아무리 세상적으로 지혜스럽고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생각을 가장 많이 컨트롤 하는 것이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와에게도 "선악과를 먹어봐"라고 하지않고 "이것을 먹으면 지혜롭게 되고, 선과 악을 알게 되고, 죽지도 않아"라며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은 생각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만 하고 살던 하와가 갑자기 생각을 하게 된 순간,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고 세상의 카운셀러를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맡기라고
하셨는데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십니다. 환난이 닥쳐서 하나님을 찾을 때까지... 따라서 이런 사람은 삶 속에서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립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한 꾀를 버려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찾지 않고 마귀가 넣어주는 생각을 따라갔던 것을 회개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세상의 지혜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에 사로잡혀서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한테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면 그냥 그 생각을 버리면 됩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죄성을 갖고있는 인간들은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그 생각에 사로잡혀서 밤잠도 설칩니다. 그리고 말씀을 버리고 자기에게 떠오른 생각을 선택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찌라도 좇지 말라"라고 말씀하는 겁니다(잠 1:10).
(2) 복있는 사람은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죄"라는 것은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과녁에서 많이 빗나갔건, 아주 조금 빗나갔건 조금이라도 빗나갔으면 "죄"입니다. 따라서 "죄인"은 과녁 즉 하나님의 율법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간 행동을 하는 것, 즉 불순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강도처럼 큰 죄를 지어야만 죄인인 줄로 착각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바로 죄인입니다(예를 들어 인생의 짐을 맡기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방식대로 사는 것).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또는 세상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죄인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찌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잠 3:7)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행동은 마음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에서 결정하고 어떤 행동을 했을 때에는 이미 죄를 지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미 마음에 작정하고 하나님께 여쭈어볼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대로 하도록 허용하십니다. 그가 원하는 그길을 가보아야 자기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난을 겪은 뒤에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맷집이 강한 사람은 일일이 다 경험을 해도 돌이키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충고를 해주지 않으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에게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3)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떠한 행동이 반복될 경우 그것이 습관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행동이 습관이 되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해지고 매우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의 길에 오래 서있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습관이 되어 권위를 무시하는 불순종이 평범한 일상적인 언행이 되어서 전혀 거북하지도 않고 잘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을 다시 살펴봅니다. 악한 꾀(내 생각)를 따라서 갈 것이냐, 말 것이냐를 성경에 비추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행동을 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악인의 꾀(내 생각)를 좇아가다가도 죄인의 길 앞에 멈추어 서서 죄인과 함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죄인이 자기 자신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을 따라가던 것을 멈추고 주님의 뜻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아가다가 성령의 인도하심 때문에 다시 회개하고 되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3) 복있는 사람은 습관을 조심해야 합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에서 "오만"이라는 말은 "자랑하다, 과장해서(부풀려서) 말하다, 무례하다, 오만하다, 경멸하다, 조롱하다, 비웃다, 무시하다"(to scorn, make mouths at, talk arrogantly to boast, scorn, mock, deride, to be inflated, scoff, act as a scorner, show oneself a mocker) 등의 의미입니다."앉다"라는 말은 편안한 자세를 말합니다. 자랑하고 과장하고 무례하고 비웃고 무시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이미 몸에 베어서 아주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언행을 해도 불편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그러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세를 하고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디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까? 바로 술자리입니다. 술을 먹는 자리에서는 자랑하고, 과장하고, 술에 취해서 무례하게 예의도 없이 아무렇게나 말을 하고, 술집여자들을 거느리며 사장도 아니면서 사장인 체하며, 또 평소에 하지 못하던 말을 거리낌없이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리의 대명사인 술을 먹는 자리에 가면 안됩니다. 술먹는 자리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만한 것은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가 일주일에 2번씩 금식하며 십일조를 내며,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남의 죄와 비교하며 자신의 깨끗함을 기도하는 것이 바로 오만한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도 깨끗할 수가 없는 죄인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바리새인처럼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어떻게 크리스천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느냐?"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중에는 젖먹는 단계부터 장성한 분량까지 있기 때문입니다. 장성한 사람의 눈에 젖먹는 단계에 있는 크리스천의 언행은 기가 막힐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주며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몰라서 그러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중직자 중에도 젖먹는 단계에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젖먹는 단계에 있는데 맡겨진 것은 중직이므로 오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왕 노릇을 해보라고 시켜보면, 그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겠습니까? 겸손한 자세가 절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여봐라!"라고 하며 큰 소리부터 치지 않습니까?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scorners)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 3:34)
"무례하고 교만한 자(Proud [and] haughty scorner)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잠 21:24)
"거만한 자(scorner)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경성하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잠 19:25)
"교만한 자가 나를 심히 조롱(derision)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19:51)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scorn)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욥 16:20)
"그러므로 너희는 경만한 자(mockers)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우심할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서 들었느니라"(사 28:22)
우리가 습관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습관은 그 사람의 성격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생각)를 따라가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않고(행동)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습관)않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즉 긍정적이며 밝게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이는 다른 사람은 신경쓰지않고 자기 멋대로 자기만 기쁘게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래 참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며, 질투하며, 잘난 척을 하며, 교만하며, 예의가 없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화를 내며, 악한 것(성경과 다른 것)을 생각하며, 불의(성경과 다른 것)를 기뻐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하고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떠한 행동이 나에게 습관화 되어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복있는 사람 즉 의인인지, 아니면 바람에 이리 저리 날아다니는 겨와 같이 악인의 생활을 하고 있는지 새해를 맞으며 주님 안에서 새로운 각오를 하기 위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있는 사람은 먼저 생각을 조심하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반복되는 언행으로 말미암아 형성되는 습관을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경건한 습관이 몸에 배어서 새벽 미명에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교제로 하루를 시작하며, 자기 자신의 유익을 전혀 구하지 않고 타인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다 나누어주며, 잘난척 하는 제자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더러운 발을 닦아주며, 머리 둘 곳조차 없어도 의식주 문제로 인해 전혀 염려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죽이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복있는 사람입니까? 복받은 바로 '그 사람'입니까? 아니면, 바람이 이리로 불면 이쪽으로 갔다가, 바람이 저리로 불면 저쪽으로 날아다니는 알맹이가 없는 겨와 같은 사람입니까?
진정으로 말과 행동과 습관을 조심하여 주님의 말씀에 합당한 경건한 습관이 몸에 배어 어느 곳에서든지 사람들로부터 참지 못한다, 예의가 없다, 잘난척 한다, 화를 잘 낸다, 온유하지 않다, 자기 유익만 챙긴다, 교만하다는 등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과 반대인 잘 참는다, 예의가 좋다, 겸손하다, 잘난척 하지 않는다, 왠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다, 온유하다, 자기의 유익보다 다른 이들의 유익을 챙긴다... 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찌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삼상 2:3)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큰 은혜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동안 제가 생각해왔던 복의 개념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의 개념이 차이가 있었던 것을 깨닫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기복적인 풍속에 젖어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 행함이 없이 그저 복만 받아누리고 싶어서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많은데, 저도 그런 부류에 속했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도 있지만, '복'이란 개념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을 때에 받아 누릴 수 있는 '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서 복만 받고 싶은 것이 죄인들이 마음인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는 별로 관심이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니며 교회생활을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성경에 대해 너무 무식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성경말씀을 알고자하는 간절한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저 남들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 또는 남들보다 많이 안다고 자랑하기 위해 상식적으로 알고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고있는 상식과 대립되는 성경말씀을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그와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제 자신을 굽혀야 한다는 생각에 결코 제 자존심을 구길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말을 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의 입을 막은 것이 주님 앞에서 심히 교만한 것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습관적으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제 속에 너무나 견고한 마귀의 요새가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고백하오니,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사 제 속에 있는 더럽고 추악한 견고한 진을 주님의 말씀으로 산산히 부서뜨려주옵소서.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제 속에 있는 단단하고 고집스런 굳은 마음을 제하여 주시고, 부드럽고 온유한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그래서 주 안에서 생각이 복을 받으므로 복있는 자의 언행을 함으로 경건한 습관이 제 삶 속에서 배어나오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저의 변화된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놀라게 하시며, 그들의 입에서 "복있는 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힘써 지키며 즐겁게 지키는 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항상 저와 동행하여 주시고, 제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제 생각과 언행과 습관을 지켜주옵소서.
항상 예수님처럼 경건한 습관이 몸에 배이게 하여 주옵소서.
좋지 않은 언행을 좇느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여 경멸하는 것을 하지 말도록 저를 붙잡아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 가운데 악인에서 복있는 사람으로 저를 바꾸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김 수 경
†he 2nd Life Foundation
뉴욕 퀸즈 리폼드 교회
Pastor Esther Soo-Gyung Kim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