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 발목/한주수
우리는 성북구 저릉동 배밭골에서 구차하게 살았다. 일본 고등계 형사의 고문 후유증으로 아버지는 해방 18개월을 남겨 놓고 돌아가셨다. 그 슬픔 후 큰형은 데릴사위로 가고 나머지 식구는 어머니 친정 동생 형제가 사는 시골로 내려갔다. 반가워 할리 없는 작은 삼촌네 윗방을 얻어 살았다.
어머니는 사기그릇 행상으로는 우리 3남매를 먹여 살릴 수가 없어 밤에는 베도 짜셨다. 그래도 우리는 늘 배가 고팠다. 살던 방은 방문만 열면 곧바로 마당이었고, 방문 밖 바로 왼쪽엔 부엌이었다.
눈이 쌓인 날이었다. 어머니는 베를 짜러 가고 안 계셨다. 마당이 꺼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문구멍으로 내다보니 작은형이 달려오는 발소리였다. 폭설이 쌓인 그날 이른 아침에 사냥꾼을 따라갔는데, 짐승몰이를 해주고 노루 발목 한 개를 얻어들고 달려오는 거였다.
부엌에 들어서자 큰 바가지에 두멍 물을 퍼 담더니 노루발목을 씻었다. 솥에다 물을 부은 다음 노루발목을 넣고 아궁에 불을 집혔다. 등걸불이 잘 붙었을까. 형은 무슨 볼일이 또 남아 있는지 밖으로 휑하니 달려 나갔다. 잠시 뒤에 솥에서 고기 익는 냄새가 풀풀 올라왔다. 작은누나가 나가더니 주걱으로 노루 발목을 건져 바가지에 담았다. 부엌칼로 베어 입에 넣는 게 보였다. 아직 덜 익었나 보았다. 솥 안에 도로 넣었다. 좀 더 기다린 누나는 다시 나가 노루 발목을 통째로 건져 들고 들어왔다.
말라붙은 남매의 창자는 순식간에 하얀 뼈다귀 한 개를 만들어 놓고 말았다. 누나는 그걸 도로 가져다 솥에 넣었다.
잠시 뒤 또다시 마당이 울렸다. 형이 달려왔다. 급한 손놀림으로 솥뚜껑을 열었다. 건졌다. 하얀 뼈다귀뿐이었다. 형은 분통이 터지는 소리를 지르며 부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큰소리로 울면서 외쳤다.
“노루 괴기 다 먹었네, 지들끼리만 다 처먹었네.”
형이 벌떡 일어나 부지깽이를 들고 방문을 열어젖히곤 우리 둘을 마구 때릴 것만 같았다. 우리도 큰소리로 울어댔다. 양심의 가책이라기보다 겁이 나 울었을 것이다. 급기야 형이 부엌 바닥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젠 맞을 차례구나!’ 싶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형은 소매로 눈물을 닦더니 방에 대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처먹으면 됐지 울긴 왜덜 울구 지랄여? 국물에다 소금이나 쳐서 먹어.”
그렇게 말을 남기곤 다시 눈이 내리는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홉 살 나하고, 열두 살 누나는 한참을 더 울었다. 매를 맞은 것보다 마음이 더 아파서 울었는지도 모른다. 눈은 다시 퍼부었다. 마당 위에 외줄로 난 형의 발자국은 하나씩 둘씩 눈에 덮이고 있었다.
(1943년)
소의 눈물/한준수
서울서 숙부 두 분이 내려오셨다. 사 형제분이 돈을 모아 집을 사놓았다고 했다.
어머니가 우리 삼 남매를 데리고 다니며 동네에서 이엉과 짚을 얻어 모았다. 사놓은 집 지붕을 새로 이기 위해서였다. 숙부들이 읍내로 가서 소달구지를 불러왔다. 세간이라야 물 한 지게들이 두멍과 솥 한 개와 바가지 몇 개, 그리고 식기가 몇 가지였다. 그것들을 달구지 바닥에 얹고, 그 위에 이엉과 짚을 싣고 동네를 떠났다.
당진읍내를 지나 송산면 산 갈에 들어섰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산길은 아직 아직껏 얼어 있었고, 그 위에 눈이 덮이니 더욱 미끄러웠다. 소는 달구지를 끌고 어른들은 뒤에서 밀었다. 그러나 달구지는 자꾸만 뒤로 미끄러졌다. 어른들은 소를 모질게 후려치면서 달구지 바퀴살도 위로 채 보았다.
그래도 못 올라가니까 돌덩이를 바퀴 뒤에 괴어 놓고 잠시 쉬었다. 소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어른들은 또 다시 소를 다그쳐 몰았다.
그럴 때마다 소는 앞발로 땅을 파 앞으로 끌어들이는 듯이 기를 쓰며 밟고 뒷발로는 버티었다. 그러나 점점 힘에 부쳤다. 뒤로 더는 미끄러지지 않게 하려고 두 무릎을 언 땅 위에 푹 꿇었다. 그 순간 홉뜬 소의 두 눈은 처절하게 겁에 질려 있었다.
어른들은 짚단을 반 정도 내렸다. 그 제서야 달구지는 겨우 재빼기에 올라섰다. 소 몸에선 김이 났고, 무릎에선 피가 났다. 입에서는 끈끈한 침이 흘러 흰 눈雪 위에 떨어졌다. 붉게 충혈 된 두 눈에선 눈물이 흘러 양 볼에 기다란 검은 줄을 긋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 소는 울고 있었다. 힘이 약한 암소는 송아지가 영양분을 다 빨아먹어서인지 바싹 마른 몸에 양쪽 엉덩이엔 두 개의 주걱 같은 뼈가 불거져 있었다.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도 모진 매만 맞은 것이었다. 그 소에게서 우리 어머니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1944년
수구레/한준수
소금물(눈물)에 절은 삶 같은 세월은 흘렀다.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곧이어 서울서 큰형 식구가 내려왔다. 첫 아들을 안고 온 형수는 천사처럼 보였다. 뒤란에서 익어가는 능금을 따다 주면 18세 새댁은 맛있게 참 잘 먹었다.
형님은 말했다. “이젠 해방이 됐으니 잘살게 되었어요. 사업 자금이 필요한 데 이 집을 팔아 주세요.” 어머니는 드디어 아들 덕을 볼 수 있게 되었다며 집과 밭을 선뜻 팔아주었다. 세 식구는 서울로 먼저 올라갔다. 나머지 우리 네 식구는 40일쯤 늦게 올라왔다.
서울역으로 마중 나온 형님 몰골은 초췌하고 망가져 보였다. 형님이 양복에 넥타이를 한 사장님이길 바랐었다. 하지만 내 몸이 절망의 늪으로 곤두박질쳐 들어가는 듯했다. 해방도 되었고 형님이 사업을 잘하면, 그렇게도 하고 싶던 공부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어머니도 낙담과 충격으로 울면서 큰아들을 마구 꾸지람하셨다.
형님이 살고 있던 집은 서울서부역 맞은편 마포구 서계동이었다. 대문이 좁아 내가 걸머진 이불 보따리도 모로 집어넣어야 들어갔다. 그래도 형님 집이려니 했다. 그런데 아니었고, 좁은 건넌방에 세를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탄식의 나날이었고, 형님은 도박으로 잃은 돈을 만회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작은누나는 작은형이 밥만 얻어먹고 있는 영천 제사공으로 갔다. 나는 식구들 끼닛거리를 보태기 위해서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시장 바닥에서는 부서진 사과 궤짝을 줍고, 남산으로 가서는 소나무 삭정이를 꺾었다. 그래야만 콩비지라도 입에 넣을 수 있었다.
“너 오늘 우리 학교에 왜 왔니?”
안집 소녀가 묻는 말이었다. 내가 여학생 교실을 들여다볼 때 내 얼굴을 본 모양이었다. 나는 너희들 공부하는 모습이 부러워 보러 갔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얼굴만 붉히고 있는데 소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너 공부하고 싶으니?”
나는 고개로 대답했다. 소녀는 연필과 공책을 들고 마루로 나왔다.
“너 글을 어디까지 아니?” 하고 물었다. 글을 배운 적이 없으니 얼굴을 좌우로 저었다.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그러지 말고 한글 기초부터 배워보자.”
국민학교 4학년생 순자는 공책에다 ‘ㄱ’에서부터 ‘ㅎ’까지 쓰더니 저를 따라 해보라고 했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따라서 했다. 연필을 손에 쥐여주면서 써보라고 했다. 글자 밑에 그대로 그려나갔다. 몇 번을 반복시켰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은 ‘ㅏ’에서부터 ‘ㅣ’까지 쓰곤 다시 연필을 넘겨주었다. 그것도 여남은 번 반복 후 그대로 그리고 외울 수도 있었다. 다음은 글자와 받침을 가르쳐주었다. 그 다음엔 내 이름을 써보라고 했다. ‘한준수’를 썼다. 소녀는 감탄사를 터뜨리며 저네 방에 대고 소리쳤다
“엄마, 엄마! 얘는 천잰가 봐. 몇 번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한글 모음하고 자음을 다 배우고 제 이름까지 쓸 줄 알지 뭐야.”
그 애는 기쁨을 참지 못했다. 제 실력으로 문맹아 한 명을 눈뜨게 했다는 자부심과 우쭐한 기분인 듯했다. 나의 첫 번째 선생님 ‘순자’는 시간이 나는 대로 정성껏 나를 가르쳤다. 까다로운 맞춤법을 빼고는 한글을 거의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맹인이어서 집안일을 잘 못했다. 나는 소녀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주고 싶었다. 이를테면, 공동 수돗물을 길어오는 일을
대신해 주든가 굵은 장작을 잘게 쪼개주는 일도 다 맡아 해주었다.
소녀네 세 식구는 절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서울역 앞 큰 교회를 다녔는데, 일요일마다 나를 데리고 갔다. 구호물자가 나온 날이면 나에게 맞을 만한 옷이나 신발을 골라내느라고 소녀는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어느 일요일인가, 나하고 둘이서만 교회에서 먼저 나가자고 했다. 서울역 파출소 앞 길가와 염천교 건너 길가에는 수구레 파는 아줌마들이 옆으로 줄을 지어 앉아 있었다. 우리는 염천교를 건넜다. 소녀가 갑자기 수구레 파는 아줌마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 수구레 이 원어치 주세요.”
수구레 접시를 받아 나에게 주면서 혼자 다 먹으라고 했다. 콧날이 찌릿했다. 그때까지 공복인 것은 저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미군 트럭이 지나가며 시꺼먼 먼지를 일으켰다. 아줌마들은 수구레 양푼을 보자기로 덮었다. 소녀는 분홍 손수건을 얼른 꺼내어 내가 들고 앉은 수구레 접시에 씌워주었다. 목이 메어 수구레를 빨리 먹을 수가 없었다.
소녀는 쥐고 있던 빨간 지갑을 열었다. 하얀 잠금 구슬이 햇빛에 빤짝, 빛났다. 종이돈 두 장을 꺼내서 아줌마에게 주었다.
내 두 눈도 물기가 어려 그렇게 빤짝 빛났을 것이다.
(1945년)
첫댓글 아무도 수필을 게시 하지 않아 이 안젊은 오빠가 밤잠을 대신 봉사? 하고 있어요.ㅎ
준빠님, 감동. 감동
정말 고맙습니다.
그 시절의 어려운 삶이 하나도 어둡지 않고 선생님 모습처럼 맑고 담담하게 젖어드는 것은
선생님 청정하고 아이같이 천진한 인품이 그대로 녹아 있어서겠지요.
이런 글이야말로 진정한 수필입니다.
애를 써 주신 그 마음도 감동입니다.
진즉 대가의 반열에 오르셨어요.
하이고 과찬. 어째튼 고마워요. 아니 개감사합니다.
이 시샵님, 개감사 이야기 참 재밌는 작품인데 꼭 게시해 주세요.
준빠님, 이글은 하도 가슴을 찡~하게 하는 내용이라서 읽지 않고 제목만으로도 알지요.
나를 그만 울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