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鳳菴) 강지호(姜趾皥)·계려(稽黎) 강기팔(姜起八)
樂民 장달수
산청군 ‘우정학사’가 있는 마을이 정곡마을이다. 옛날 지품현의 소재지였던 이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진주강씨(晉州 姜氏)들이 살아 왔다. 현재까지 400여년 이상을 살아온 이곳 강씨들은 경호(鏡湖) 강대연(姜大延)의 후예들이다. 경호는 당암 강익문의 셋째 아들로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 구주(鷗洲) 강대적(姜大適)의 아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사호(思湖) 오장(吳長)의 사위이기도 하다. 경호의 후예들은 이 마을에 살며 조상들의 얼을 계승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그 흔적은 ‘호상지미록(湖上趾美錄)’이란 책에 실려 전하고 있다. ‘호상지미록’에는 경호를 비롯한 후손들의 문적이 실려 있으며, 이를 편찬한 사람이 바로 봉암(鳳菴) 강지호와 그의 아들 계려(稽黎) 강기팔(姜起八)이다. 봉암은 선조인 경호와 그의 아들 죽봉(竹峯) 강휘정(姜徽鼎), 손자 역락재(亦樂齋) 강명기(姜命基) 등 3대 시문을 모아 보관해 왔는데, 아들인 계려가 이를 정리 편집해 ‘호상지미록’이란 이름을 붙이고, 다시 계려 사후 그의 동생들과 그의 아들에 의해 출간되는데, 이때 봉암과 계려의 글들도 함께 엮어 지금 호상지미록에는 봉암과 계려의 글도 실려 있다.
옛날부터 내려오던 조상들의 문적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이를 모아 보관했던 봉암 강지호는 1834년 묵곡리에서 필택(必宅)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선현들의 공부 방법을 익혀 이를 잘 따랐다. 곧 한훤당 김굉필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한 것과 덕계 오건이 중용으로 퇴계에게 칭찬 받은 사실을 본받고자 소학과 사서 공부에 매진했던 것이다. 약관의 나이에 산청의 민백연(閔百淵)과 함양의 물재(勿齋) 노광리(盧光履) 등을 찾아가 질정하니 모두 뛰어난 자질을 칭찬을 했다. 1866년 용묵재(容默齋)를 지어 자제들을 가르쳤으며, 마을에 향약을 널리 시행해 풍속을 교화시키는데도 앞장을 섰다. 1876년에는 정곡리로 돌아와 당시 피폐해진 민심을 향약으로 바로잡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는데 앞장서 마을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랐다. 봉암은 성격이 강직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봉암이 서울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마을에서 선행을 베푼 것을 요직에 있는 사람에게 알려 한번 만나 보기를 원했다. 봉암은 이를 거절하고 돌아오는 길에 냉동으로 가서 성재 허전을 만났다. 성재가 웃으며 말하기를 “요직에 있는 사람을 만날 뜻이 있느냐” 하자 봉암은 “별도로 만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고 하며 “다만 선생을 뵈러 왔습니다”고 했다. 성재가 말하기를 “내가 잘 알고 있다”고 하며 “이 사람은 세속에 물들지 않았구나. 그 지조가 굳은 것을 볼 수 있겠다“라고 했다.
봉암은 고향으로 내려와 다시 세상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고자 했다. 이때 집안 어른으로 정승을 지낸 정와공(貞窩公) 강로가 안음으로 귀향을 왔다. 봉암이 가서 뵙고 인사를 드리자 강로가 “명성을 이미 듣고 있는데 지금 만나 보니 이를 알 수 있다”고 했다. 1888년 산청의 객사인 환아정 중수의 일을 맡아 보았으며, 이듬해엔 은열사를 두방 옛터에 이건하여 강당을 창건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1890년에는 성재선생 간행소에 가서 일을 도와 만성 박치복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1896년에는 지역 선비들과 덕계선생 신도비각을 묘 앞에 세웠다. 1899년에는 두방강당에서 두산 강병주 등과 족보를 간행했으며 이어 한사선생 연보도 간행을 했다. 얼마 후 나라에서 중추원 의관을 제수하여 그 품계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1903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봉암의 아들 계려 강기팔은 1858년 태어났다. 가학을 이어 어려서부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었으나 어지러운 세태를 인식하고 학문에 전념할 결심을 하고 한평생 선조 현창 사업과 학문에 정진했다.
계려는 선조들의 업적을 계승하는 일에 누구보다 정성을 기울였다. 강씨 족보를 편찬하는 것은 물론 면우 곽종석에게 청하여 두방재 앞에 은열공 신도비를 세웠다. 뿐만 아니라 덕계선생 묘비 세우는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지역의 선비들이 대원사에서 ‘주자어류’를 간행할 때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평생 지조를 지키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이는 부친인 봉암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지역의 어진 선비들을 찾아 질정하기를 좋아했다. 사미헌 장복추, 후산 허유, 면우 곽종석, 노백헌 정재규, 물천 김진호, 남천 이도묵, 월연 이도추, 소당 김기요, 하봉 조호래 등 인근 대표 선비들과 교유하며 질정을 했다. 계려는 을사늑약 이후에는 비분한 감정을 벗들과 시로써 표출하여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고향에서 선조들의 유업을 기리는 일과 지역 유풍 진작에 누구보다 앞장서다 1920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산청 정곡 강씨들은 대대로 조상들의 전통을 계승해 오고 있다. ‘호상지미록(湖上趾美錄)’에는 경호 강대연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 죽봉(竹峯) 강휘정(姜徽鼎), 죽봉의 아들 우송정(友松亭) 강이기(姜履基) 둘째아들 극복재(克復齋) 강효기(姜孝基) 셋째아들 역락정(亦樂亭) 강명기(姜命基) 넷째아들 매헌(梅軒) 석기(錫基)의 글이 실려 있다. 또 역락정의 현손 봉암(鳳菴) 강지호와 극복공의 현손 조위(釣渭) 강지두(姜趾斗), 매헌공의 현손 심암(尋菴) 강지노(姜趾魯), 극복공의 현손 적은(跡隱) 강지주(姜趾周) 봉암의 아들 계려(稽黎) 강기팔(姜起八)의 문적들이 실려 전한다. 언젠가 ‘호상지미록(湖上趾美錄)’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경호를 비롯한 그 후예들의 흔적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