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정한 시인이고 싶었다. 물론 지금 시인이자 비평가라는 레테르를 달긴 했지만, 시 한편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시에 대한 열정으로 불면의 밤을 보냈던 고등학교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교실을 웃음판으로 만든 사건이 생각난다. 친한 친구에게 밤새워 쓴 시를 보여줬는데, 반 친구들이 박장대소하며 나를 비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나는 나의 나로써’라는 구절을 들이대면서 이게 시라면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시인이지 하는 것이었다. 문득 또 하나의 사건이 떠올랐다. 미당 서정주의 초기시로 석사논문을 쓸 무렵이었다. 정독도서관에서 미당의 문학강연이 있었다. 미당은 영생주의와 신라정신을 주제로 강연을 했고, 몇몇 사람들의 시낭송도 있었다. 강연 후 질문 시간이 있었다. 나는 손들고 질문을 했다. 사실 나는 당시 미당의 시를 연구하면서 많은 심적 갈등이 있었다. 시의 아름다움과 현실적 삶이 불일치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시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문법입니다. 그런데 왜 역사 앞에 많은 훼절을 하셨습니까.’ 하는 오만불손한 질문이 터지자 강연장은 술렁거렸고, 미당은 곧바로 강연장을 박차고 나갔다. 나는 뒤쫒아 가서 다시 한번 답변을 요구했다. 간결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나는 나야’라는 말을 남기고 미당은 그 자리를 떠났다. 두개의 나는 이렇게 만났다. 나의 ‘나는 나의 나로써’와 미당의 ‘나는 나야’라는 두개의 나는 이렇게 대립 충돌하여 현재에 서있다. 미당의 나와 나의 나 사이에는 질량의 차이가 있을까. 물론 삶을 대하는 의미의 질량은 차이가 날지 모르지만, 그 본질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아니 두개의 나는 같다. 나의 나는 타협을 모르고 그의 나는 세상과 더불어 잘살아간다. 나의 나는 고집이 무척 센 반항적 인간형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현실의 원리 밖에 있는 서 있는 원리원칙주의자의 형상이 내 안에 있는 나의 실체이다. 나의 나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할 말은 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래서 늘 세상의 논리에 뒤쳐져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나의 나가 뒤쳐져 있을까. 올곧게 학문만을 향해 달려가는 나의 나가 과연 세상에 뒤쳐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반면 미당의 나는 어떤 의미인가. 미당이 한국의 시문법을 대표한다고 가정할 때, 미당의 현실적 삶이 미당이 이루어 낸 그 수많은 시들을, 아름답게 비의의 세계를 침범한 시들을 훼손할 수 있을까. 미당의 미당다움은 미당의 굴곡 많은 삶 앞에 굴복하고 말 것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미당의 나는 미당의 미적 현실성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들은 저마다 ‘나’다웁게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나’다운 삶은 각자가 처한 현실성을 감당해내야만 하는 운명적인 ‘나’는 아니었을까. 사실 두개의 나는 그 모양만 다를 뿐, 같은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비평가 반경환의 「고은비판」을 읽으면서이다. 나는 고은이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시를 썼는지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문제는 반경환 비평가가 그의 책의 또 다른 비판에서 시인 임영조의 「시인의 모자」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정신적 문학적 스승인 미당을 부친살해 하듯 고은이 비판하고, 그렇게 비판했던 고은을 다시 비판하는 반경환의 비평적 태도에는 진짜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다만 반경환이 임영조의 「시인의 모자」에 형상화된 시인의 진정한 마음과 시인의 위의를 고평하여 가려 뽑은 높은 안목을 존중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이 글은 고 임영조 시인의 영전에 받치는 글이다. 그의 시에 관한 마음과 시인의 위의를 기리기 위하여 진정한 시인의 위의가 무엇인지를 논구하고 있다. 이 글의 논지는 시적인 삶과 현실적 삶의 문제이다. 그것은 가면과 본질의 문제인데, 과연 이 양자를 일치시킨 인물이 있었겠는가. 물론 공자가 그러했겠고, 노자가 그러했겠고, 부처와 예수 또한 그러했겠지만, 그들의 언어 내부에 담론적 욕망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말과 행동을 일치시켰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진정 그들은 담론적 욕망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문제는 세계 전체가 점점 더 섹터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김영석 시인의 말처럼 경전 밖에 눈이 내리고 새가 우는데, 경전 안의 세계는 무한히 분기되어 늘 유혈사태를 연출하고 있다. 수니파 대 시아파, 장로교 대 제칠안식일교회, 노자 대 공자, 천태종 대 조계종의 대립 분화를, 경전 안의 분열적 사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만 하는가. 과연 하나가 옳고 다른 하나가 그른가. 만약 둘 다 맞다면, 우리는 왜 싸우고 늘 대립하는가. 문제는 그 담론들의 진리성이 아니라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겠는가.
2. 담론의 의미와 존재 양상
『코란』, 『도덕경』, 『논어』, 『화엄경』, 『성경』 등의 경전들 속에 표현된 언어는 담론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 그 자체에 대한 메타적 언어로 동일한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경전들의 의미를 진리 자체의 차원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방식을 문제삼을 때, 경전은 진리의 언어가 아니라 담론으로 추락하게 된다. 왜냐하면 진리가 언표될 때, 폴 리쾨르가 『Hermeneutics and Human Science』에서 말한 것처럼 언어는 진리를 전유(appropriation)를 통해서 현전화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는 진리 그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언어에 의한 세계의 이해 방식이 전유를 통해서 해석 이해되고 고양되는 한, 진리를 진리 그 자체인 동일률로 환원시키지 못하는 한, 진리의 모습을 띤 언어는 섹터화된다. 그러므로 경전으로 표현된 진리는 담론적 욕망으로 인간의 의식 속에 재전유된다. 만약 경전의 진리성이 전유된 진리이고, 그 전유된 진리를 인간이 재전유할 때, 세계는 무한히 분화되고 ‘나(주체, 자기)’라는 거울 통해서 끊임없이 재전유된 것에 지나지 않다. 만약에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한다면, 현실에서 펼쳐진 진리 주장은 하나만이 진실이고, 나머지 모두는 기만이거나 사기일 것이다. 만약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유아론적 재전유가 판을 칠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덫이고 아포리아이다. 인간은 존재의 덫에 걸린 기만 덩어리로 살다 죽어갈 운명인지도 모른다. 담론을 지배하는 내적 동인은 욕망 또는 욕망하는 의식이다. 그것이 절대 이성으로 표현되었을지라도 담론은 담론을 둘러싸고 있는 지배이데올로기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담론은 니체식으로 말하면 권력에의 의지이고 헤겔식으로 말하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다. 담론의 표면적 목적은 세계성 자체를 정위시키는 것이지만, 담론은 세계의 구조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순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세계 속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개조시킨다. 이때 세계는 훼손된다. 인간의 욕망에 의한 세계의 변질이 담론의 표면적인 목적에 부응하여 상호공조체제를 이루면서 세계는 권력적 담론으로 채워지게 된다. 이제 담론은 패러다임 내부에서 안온한 충족적 임무만을 수행하게 된다. 담론적 패러다임 외부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패러다임 외부는 모두 적이거나 억압되어야만 하는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된다. 문제는 패러다임 내부의 의사소통적 관행이다. 내부의 지배원리는 담론적 소통에 의한 권력적 지평의 향유이지만, 그 향유는 다시 계층적 의식으로 무장하여 철저하게 혈통주의나 연고주의로 무장하게 된다. 도전은 불온한 의식이다. 한번 생성된 권력적 담론은 한손엔 배제의 법칙을 다른 한손엔 순응의 법칙으로 담론적 패러다임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단속 장악하게 된다. 담론의 자기 갱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담론은 담론 내부자의 힘의 원리에 따라 권력의 이동점에 따라 재편되지 자기 혁신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담론은 질서지워진 가치체계 내부를 공공이 하기 위하여 인륜성을 진리의 차원에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워진 질서에 인륜성과 가치를 끼워 맞춘다. 더 나아가 담론은 질서 유지 차원에서 권력을 매개 작동시켜 체제를 안정시킨다. 그것이 바로 담론의 내적 원리이다. 담론은 미당을 비판한 고은이고, 다시 고은을 비판한 반경환이다. 이때 고은의 미당 비판과 반경환의 고은 비판은 동일한 담론적 욕망을 지향하는가. 물론 이 양자는 동일한 욕망의 곡선 위에 펼쳐지는 담론적 욕망의 언어이지만, 적어도 반경환의 고은 비판은 담론이 지닌 허구성을 비판하는 메타적 담론의 질량을 함의하고 있기에, 반경환적 담론의 양상은 보다 건강성을 견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반경환의 담론 비판적 담론의 지향성은 너무도 격렬하여 인신공격적인 측면 때문에 폄하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의 행위는 올곧다. 그것은 어쩌면 아무도 수행하지 않는 문학생산자의 자기 검열에 해당한다. 그의 비판적 비평은 한국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점의 중심부를 건드리고 비판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반성과 성찰은 물론 공존의 미학 또한 상실한 우리 사회 전체의 관행에 맞서 싸우는 반경환의 무모하지만 도전적인 행위는 까뮈의 반항적 인간형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가. 담론은 욕망의 언어이다. 담론은 권력을 향한 주인과 노예의 피터지는 싸움이다. 그러나 담론적 논쟁이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상실했을 때, 그것은 논쟁이 아니라 이전투구가 된다. 하버마스와 가다머의 2-30년에 걸친 논쟁은 담론 생산자의 논쟁의 귀감이다. 더 나아가 케임브리지인지 옥스퍼드인지로 공부하러 간 비트겐슈타인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다음의 세기는 당신의 세기이고 이미 나를 넘어섰다고 말한 버트란드 레셀의 태도는 어떤가. 後生以可畏가 아닌가. 진정 재능있는 자를 알아보고 그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진정한 아량과 관용의 사도는 어디 있는가. 20세기를 대표하는 물리학자인 하이젠베르크의 스승인 좀머펠트와 닐 보어 같은 위대한 스승은 한국사회에 없는가. 문제의 중심점은 담론의 욕망하는 의식에 있지 않다. 아니 담론은 끊임없이 욕망함으로서 세계 전체가 발전하게 된다. 진짜 문제는 권위에 있다. 귄위란 상호주관적인 인정이다. 이때 이 인정은 담론의 내부와 외부를 통어하는 인정이다. 창의적인 사유와 세계관에 대한 경의와 존경이 귄위의 주체가 될 때, 담론은 타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담론이 권력적 귄위로 전락할 때, 담론 생산자의 내부에 자기 검열이 부재할 때, 담론은 개인화된 욕망의 언어로 전락하게 된다. 만약 담론의 권위가 존중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성숙한 사회이고 담론은 창조적 생산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담론은 구조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담론을 생산하는 구조가 열린 구조인가, 폐쇄적인 구조인가에 따라 담론의 질이 결정된다. 열린 담론의 구조와 그의 적들이 공존할 수 있는 문학장이나 사회의 장이 펼쳐진다면, 담론은 건강성을 견지한 채, 운명의 노래를 아름다운 노래로 승인하면서 세계 전체를 유미화시킬 수 있지 않은가.
3. 시인의 가면과 시적 언어
앞서 언급한 담론적 속성에 비추어 볼 때, 시적 언어가 담론적 욕망으로 무장해 있는가를 물어야만 한다. 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에게 페르조나가 없다면 인간은 정신병에 이른다고 한다. 가면을 쓰는 행위는 세계 속에 자신을 정위시키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정도의 문제이지, 인간성 자체의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간 내면에서 벌어지는 의식작용이 그대로 현실 세계에 투사되는 것을 금지시켜 의식을 여과시키는 그물망이다. 페르조나는 이미 만들어진 질서이자 규범에 순응하는 외적 장치이자 삶의 현실성이다. 가면은 프로이트의 『토템과 타부』에서 시작한다. 특히 아들들의 부친살해 행위와 그것의 금지 규약 즉 타부가 최초로 인간이 쓴 가면이다. 이 가면은 두려움과 권력의 향유 사이에서 타부규칙을 만든다. 그것은 고은의 미당 비판이다. 시인의 가면은 욕망하는 의식으로 점철되어 있다. 시의 문법이요, 한국을 대표하는 미당을 의식적으로 죽임으로써 고은은 자신이 한국을 대표하는 시의 문법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전인미답의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면, 그의 부친살해 행위는 완벽하게 성공한 시적 타부가 된다. 왜냐하면 그 살해행위는 자기 대에서 끝나야지 두 번 다시 자행되어서는 안 되는 시적 타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살해행위는 그의 의도대로 완벽하게 수행되지 못한다. 문제는 『피안감성』의 세계가 『화사집』을 넘을 수 없고, 『만인보』가 『오적』을 넘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설령 그가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쳐도 시인이 아무리 화려한 가면을 쓰고 있을지도, 시의 본질을 그 타부가면으로 가릴 수 없다. 타부는 금지의 규칙이지만, 타부의 내적 원리는 욕망하는 의식에 도사린 양날의 칼이다. 누군가를 벨 수도 있지만, 그 칼날은 자기원인적인 운동에 따라 칼날을 휘두르는 자에게도 이를 수 있는 무서운 업보의 칼날이자, 타부가면의 운명적 실체이다. 모든 시인은 자신이 시대의 시문법의 창조자가 되기를 원한다. 만약 시인의 욕망이 시문법의 지평 창조로 향한다면, 그 욕망은 아름다운 욕망이다. 말라르메의 시문법에 관한 욕망은 시문학의 계보학적 차원에서 볼 때, 가장 아름다운 구도의 길에 가깝다. 말라르메의 욕망의 길은 하나의 正典이다. 그는 문학적 선배이자 스승이기도 한 보들레르의 시세계를 넘어서기 위하여 평생을 헌신한 끝에 절대주의적 상징주의로 나아간다. 그가 책 속에 파묻혀 문자에게 모든 상징을 되돌려 주고 순수 언어 탐구에 몰두했을 때, 그의 시문법은 단순히 사건성을 띤 시문법이 아니라 또 다른 창조적 지평으로 비약하게 된다. 이 얼마나 위대한 작업인가. 시인의 욕망이란 무릇 말라르메적이여야 하지 않는가. 문제는 시인의 욕망을 탓할 수는 없다. 시인의 욕망의 지향점이 어디로 향하는가가 관건이지, 결코 시인의 욕망을 비난하거나 문제삼을 수는 없다. 욕망의 함수가 지평 창조로 향할 때, 시는 무한히 순수해지고 인간학의 새로운 면모를 현시하게 된다. 그러나 그 함수가 세속적 욕망으로 침몰할 때, 시는 시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말들의 향연으로 추락하여 말이 말로써 대체되는 말놀이가 된다. 시의 문법은 세계 내에 숨겨진 전인미답의 내밀한 법칙성을 발견한 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특권적 능력이다. 최소한 우리가 어떤 시를 좋다고 언급할 때, 시가 지향하는 의식적 지평은 언어를 존재론적으로 새롭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시적 언어는 존재의 개현이고, 그 개현된 존재성으로 인해 인간의 의식지평은 무한히 확장되게 된다. 사실 이러한 논리는 시인의 삶을 배제한 시적 언어만을 결과론적으로 문제삼을 때 일어나는 귀결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삶, 즉 시적 가면의 차원에서 욕망하는 의식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중요한 사안이다. 미적 행위는 도덕적인가. 미는 세계의 논리를 초월해 있는가. 만약 악을 통해서 아름답고 보편적인 미적 가치를 창조했다면 그것은 용인될 수 있는가. 까간이 『미학강의』에서 추도 변형된 미의 한 형식이라고 언급했을 때, 세계 전체를 악의 세계로 규정한 옴진리교의 악마적 행위는 수용될 수 있는가.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 『광염소나타』의 백성수가 만약 실존하는 인물이라면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인간의 욕망하는 의식이 그 자체로 현실에 투영될 때 세계는 진정성이 실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적어도 규범적 윤리성을 표방한 가면들은 금지의 규약 위에서 벌어지는 억압이자 미적 실천의 한계 지점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세계는 어느 정도의 평형 상태에 이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수많은 의문점의 수면 아래에 은거한 시인의 욕망과 가면이 상호공조체제를 이룬다. 욕망은 가면을 뚫고 올라가 시의 문법이 되고자 노력하지만 타부가면이 늘 욕망을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때 욕망은 정화될 수도 있고 억압될 수도 있다. 가면의 욕망은 내면의 욕망과 동일시되기를 원하지만, 조금은 신중한 태도로 무의식의 욕망을 키질하여 자신의 욕망을 세계 속에 순응시킨다. 만약 이러한 정신의 자기 방어 기제가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미의 창조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는 사드의 악마적이고 변태적인 육체성 위에서 서술된 본능적 기호이다. 미는 위반이다. 위반이 없는 미는 새로운 지평을 창조할 수 없다. 미는 가면이 자행하는 현실적 욕망을 뚫고 올라와 현실의 문법을 파괴하고 허물어트릴 때 일어나는 사건이다. 미의 창조적 지평은 가면 위에 새로운 가면을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가면을 새로운 가면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다. 모든 미는 가면이다. 그러나 그 가면은 역사상 새로운 가면들로 채워져 있다. 시인의 가면이 현실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시는 타락하게 된다. 그것은 가면 위에 가면을 덧씌우는 기만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진정성은 시의 문법으로 충일해 있는 무의식적 욕망을 언어로 예인하는 작업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가면 속에서 키질된 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언어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려주려고 하는 말라르메의 도발적 행위이다. 이때 시적 언어는 하나의 혁명적 사태를 자체 내에 숨겨놓는다. 그것은 언어로 세계 전체를 변화시키는 방식이다. 해체론적 실용주의 철학자인 리처드 로티가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에서 감행한 인간 정신의 비존재성에 관한증명 방식처럼, 시의 혁명은 전혀 새로운 세계로 인간을 이입시킨다. 진정한 시는 차원변이가 가능한 임계점에 육박하여 언어가 마법을 일으킨다. 세계는 시적 언어를 통해서 새롭게 정의되고 이해될 수 있다. 이 위대한 작업이 바로 시가 감행하는 이중의 작업이다. 시적 언어는 관념과 현실성 사이에 존재하는데, 관념이 자꾸 초월의 편에서 세계 규정을 마련하려할 때, 시는 실존적 현실성을 인식시키고, 현실이 속물적 의식으로 범람해 있을 때, 시는 존재 자체의 운명성을 응시하라고 촉구한다. 그러므로 시적 언어의 본질은 ‘사이’이다. 이 사이는 관념(초월, 형이상학)이나 현실의 차원에서 보면 하찮고 무력한 것이겠지만, 이 사이가 존재하지 않고는 세계는 지탱될 수 없다. 세계가 시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 이때 시는 너무도 투명하여 세계 속에 기화되어 자신의 실체를 숨겨버린다. 왜냐하면 시는 정진규 시인의 말대로 ‘사이’의 경제학 위에서 펼쳐지는 살림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 말할 수 없는 것들 사이로 잠입해 들어가 보고 말하는 것이 시적 언어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시는 보이는 것을 얼마나 아름답게 언어로 조감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말들의 잔치 속에서 하나의 말을 예인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치고 들어가 비의로 내장된 말을 훔쳐오는 프로메테우스적 인간형이다. 이때 시인은 간을 드러내놓은 채 너덜너덜한 육체적 천형을 짊어진 채 천하를 주유해야만 한다. 시인은 눈이 멀고 귀가 먹게 되지만, 직감적으로 말들을 받아 적는 영매가 된다. 말은 운명을 따라 자동기술된다. 이때 시인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대리자가 되어 그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의 언어를 만난다. 그것은 서정주의 「동천」이다. 너무 쉽지만 너무 단단한 언어로 짜여진, 그리하여 언어의 한계를 휠씬 비껴가는 그 언어, 그것이 바로 운명과 만난 언어가 아니겠는가. 미당의 ‘나’는 그 굴곡 많은 삶의 언저리를 훑어가면서 매서운 겨울 하늘 위를 나르는 새매의 영혼과 조우했던 것은 아닌가. 시인의 가면 내부에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영혼의 침식 작용이 있지는 않았을까. 미당의 ‘나’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또 다른 ‘나’의 검열로부터 정말로 자유로웠을까. 물론 미당의 ‘나’는 동일성의 세계 속에 있기에 자유로웠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의 ‘나’는 어떤 고민의 흔적 없이 시대의 문제를 수리하고 정말로 자유로웠을 것이다. 그러한 시인의 실존적 사태에도 불구하고 시적 언어는 시인의 가면 저 너머의 세계로 도달한 미궁의 언어가 아니겠는가. 시란 시인의 가면의 의도대로 조합될 수 없는 그리하여 상호 대립되는 가치 사이에서 움터오는 영혼의 상처이다. 그 상흔은 영원히 아물지 않겠지만, 시인의 가면과 시의 본질 사이의 균열을 시가 봉합해준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자기 구원행위이다. 물론 언어로부터 완벽하게 구원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적어도 시적 언어는 울혈과 정체된 마음자리를 열린 공간으로 소통시킨다.
4. 진정성에 관한 네 포즈
서두에서 나는 진정한 시인이고 싶다고 말했다. 다시 이글을 쓰는 궁극의 지점, 즉 두개의 나의 지점으로 돌아왔다. 시인에게 있어서 진정성이란 미당의 ‘나는 나야’이거나 ‘나는 나의 나로써’가 아니겠는가. 미당의 나는 가면과 본질이 상호 자기 검열로써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률의 세계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주체로써의 나와 현실 속의 나는 상호 대립되는 것을 지양하면서 하나의 목적, 하나의 삶, 하나의 이상, 하나의 꿈을 실존적 욕망으로 충족시킨다. 이때 나는 분열적인 나가 아니라, 세계성을 자신의 의식으로 전유하는데 있다. 미당의 나는 내적 본질과의 일치가 아니라, 외적 세계와의 일치를 꿈꾼다. 그러나 세계는 늘 가변적이다.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양상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시인은 세계의 구조를 주밀하게 추적 고찰한다. 미당의 변화무쌍한 시적 변화를 음미해본다면, 그의 시적 지향성이 무엇을 향해 달려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시적 이동점들은 나의 내적 인식의 이동점이기 보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의 이동점이다. 그것은 미당의 나가 나에 의한 나의 미적 구현이 아니라 세계를 반영하는 나이다. 그러므로 미당의 나는 정태적인 나가 아니라 동태적인 나이다. 비록 그가 신라정신과 영원주의로 그의 의식의 지향점을 안착시키기는 했지만, 그 시간과 공간의 지점을 궁극의 지점으로 상정하고 있지만, 미당의 나가 인식하는 세계는 변화의 지점이다. 그것은 나의 나다움이 나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의 나이다. 반면에 ‘나는 나의 나로써’의 나는 세계 규정이 나의 의식 내부에 속해 있다. ‘나’라는 주체는 자신의 능력을 자기에게 속해 있는 것을 자신의 기호로 드러내는 것을 주임무로 삼는다. 두개의 나의 태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그 다름은 동전의 앞뒤 양상이 아닌가. 세계는 어저면 두개의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태가 아닌가. 시인들이 형상화해내는 각자의 몫이 아니겠는가. 시란 이 두개의 나 사이에를 왕래하는 진자운동이다. 이 두개의 나 사이에서 시는 때론 아름다운 언어의 세계를 노래하고 때론 시인의 위의를 말하기도 하면서 운명같은 삶과 초월의 지점으로 영혼을 이입시킨다. 그것이 바로 시가 담론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유이다. 시는 사태의 언어가 아니다. 시는 사태를 직관하여 사태의 원상을 언어로 복원시키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시는 한손엔 투명하게 고양된 언어를, 다른 한손엔 진정성의 의식을 움켜잡고 이 양자를 상호 회통시키는 것을 지향한다.
나의 새해 소망은 진짜 ‘시인’이 되는 것이다 해마다 별러도 쓰기 어려운 모자 하나 선물 받는 일이다
‘시인’이란 대저, 한평생 제 영혼을 헹구는 사람 그 노래 멀리서 누군가 읽고 너무 반가워 가슴 벅찬 올실로 손수 짜서 씌워주는 모자 같은 것 돈 주고도 못 사고 구할 수 없는 그 무슨 빽을 써도 구할 수 없는 얼핏 보면 값싼 듯 화사한 모자 쓰고 나면 왠지 궁상맞고 멋쩍은
어디서나 팔지 않는 귀한 수제품 아무나 주지 않는 꽃다발 같은 ‘시인’이란 작위를 받아보고 싶다 어쩌면 사후에도 쓸똥말똥한 시인의 모자 하나 써보고 싶다 나의 새해 소망은 임영조 「시인의 모자」 전문
그렇다. 시인 임영조의 「시인의 모자」를 읽다보면 유년시절의 내 꿈이 떠오른다. 그렇다. 진짜 시인이고 싶은 욕망이 한편의 시에 감동받고 감상에 젖던 치기어린 자화상이 떠오른다. 그런데 슬프다. 쓰라리다. 가슴 아프다. 왜 아프지, 왜 가슴이 찡해지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참 예쁘고 아름다운 시인데, 천박한 자본주의의 거대한 위용 앞에 시인의 위의를 한 것 드높인 고결한 시인데, 시인이란 자고로 이래야하는데, 왜 나의 마음이 서글퍼지고 눈물이 날려고 하지. 아마 시 한편 제대로 쓰지 못하는 시인이라는 레테르가 부끄러워서 그런지 모르겠다. 대저 시인이란 초나라 문필가인 굴원처럼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생을 마감하는 부류의 인간형이 아니겠는가. 시인 임영조는 시에 관한 메타성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시인을 하나의 작위로 생각하면서 시인의 존재론적 양태를 아름답게 묘파하고 있다. 평범한 듯하지만 비범한, 둔탁한 음조로 노래하지만 폐부를 찌르는 시인 임영조의 영혼의 가락은 아름답다. 진짜 시인이라는 작위의 모자를 쓸만한 자격이 있다. 대저 시인이란 제 영혼을 말갛게 헹구어 타자의 영혼과 교감하는 부류의 인간형이다. 투박하지만 살가웁고 촌스럽지만 왠지 모를 미묘한 기운이 넘쳐나는 시인이라는 이름,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여도 눈물이 나는 시인이라는 이름. 시인 임영조는 그 시인이라는 보통명사를 절대화시키고 있다. 화려한 겉멋이 들린 시인이 아니라, 연금술적 자기 정련과정을 거친, 자기라는 이름을 걸 수 있는 그런 시인에 대하여 그는 말하고 있다. 이 어찌 가당한 일인가. 어찌 현대성의 한 복판 위에서 시인은 시인의 위의를 사유하고 촌스럽고 투박한 시인이라는 작위에 연호하는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리하여 자본의 저편에 위치해 있는 시인이라는 이름. 진짜와 가짜를 판별할 수 없는 세상, 얼치기 전문가들이 판을 치는 세상, 속물근성으로 채워진 세상. 보드리야르가 말한 것처럼 세상은 가상 위에 가상을 덧대고 있는데, ‘진짜’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용언 앞에 시인은 왜 맞서 있는가. 복제가 판을 치는데, 인간까지도 복제하고 있는데, 왜 시인 임영조는 진짜라는 아우라를 새삼스럽게 요청하는가. 진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 어디에도 없는데, 시인은 왜 진짜 시인이 되고자 하는가. 시인에게 있어서 진짜는 진성성과 맞닿아있다. 진정성이란 공장에서 국화빵 찍어내듯 만든 모자가 아니라 한 땀 한 땀 공들여 만든 그리하여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수제품 모자이다. 진짜는 유일무이다. 진짜는 소월이고 만해이고, 지용이다. 진짜는 그 누구도 대리할 수 없는 자기라는 이름을 가진 시인이다. 사실 진짜의 의미는 임영조의 새해소망이 아니라 시인의 욕망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천박하다거나 비열한 부친살해적 욕망이 아니라 가면을 덛씌우는 욕망이 아니라, 제 영혼 헹구어 세계의 가면을 벗기는 자기 정련의 욕망이다. 이때 시인 임영조의 욕망은 부지불식간에 해소된다. 어디 진짜를 추구한다 해서 진짜가 그대로 드러나는 세상인가. 진짜는 시인의 마음 안에, 시인이 지향하는 시인의 위의 안에 이미 아로새겨져 있다. 임영조는 진짜 시인이다. 그는 가고 지금 여기 없지만, 시인이라는 이름 하나 가지고 인간 임영조는 영원히 현존하지 않겠는가. 모자가 너무 잘 어울리는 임영조, 시인이라는 작위를 받아 마땅한 모자 쓴 시인 임영조. 너무 맑고 투명한 한 편의 시로 세상 전체를 비출 수 있는 거울이 된 시인. 기쁘지 아니한가. 몸은 비록 하데스의 세계에 있으나, 시인의 영혼이 흐트러진 세상의 혼돈을 맑게 정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시인의 임무에 딱 맞아떨어지니 역시 기쁘지 아니한가. 모자가 잘 어울리는 진정성의 시인 임영조, 모든 시인의 시적 가면을 벗어던지게 만들고 시에게 가면을 씌운 시인 임영조.
엄마가 어린 딸을 데리고 시장 가는 길 감나무에 조랑조랑 열린 풋감을 보고 ‘푸른 감이 가을이 되면 빨갛게 익는단다’ 엄마 말에 고개를 갸옷갸옷 하던 딸은 감나무가지가 휘어지도록 우는 매미울음 따라 엄마 손 잡고 까불까불 걸어갔네
가을 어느 날 해거름에 시장 가는 길 빯게 익은 감이 탐스러운 감나무가지에 하얀 낮달이 꼬빡연처럼 걸려 있었네 다 저녁이 되어 엄마 손잡고 돌아올 때 밤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고 딸이 말했네 ‘엄마, 달님이 그새 빨갛게 익었어’
개미가 기어다니는 보도블록을 걸어오는 길 엄마가 까치걸음 하는 딸을 보고 눈을 흘기자 ‘아기 개미를 밟으면 엄마 개미를 못 만나잖아?’ 암증스러운 어린 딸의 말을 듣고 엄마는 처녀적 시인의 꿈이 다시 생각나 미소지었네 시인은 못 됐지만 이제 시인 엄마가 되었네
감나무가 빨간 등불 알알이 켜고 환히 비추는 아기 시인과 엄마가 시장 갔다 돌아오는 길 (오탁번 「시인」전문)
대저 시인이란 무엇이고, 시인의 마음은 어떠해야 하는가. 시인의 감각능력은 언어의 숲을 헤매다가 아와 어의 어감 사이를 배회하다가 부지불식간에 미지의 기호 앞에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환영이 지나간다. 미쳤다. 광기다. 시인의 감각은 일상적인 사건 속에 은밀하게 숨어있는 알 수 없는 의미를 촉지해낸다. 역시 광기다. 왜냐하면 시인의 감각문법은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말한 숭고판단의 미적 인식과정을 경유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인의 감각은 단순한 촉지법이 아니라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만 한다. 리오따르는 칸트의 그것이 포스트모던의 미적 원리라고 명명했지만, 어찌 숭고판단이 포스트모던만의 미적 원리이겠는가. 세계-내-미적 현실성들 모두는 그 형식을 불문하고 미지의 기호를 전인미답의 미적 가치와 의미를 형상화낸 것이 아니겠는가. 오탁번의 「시인」은 그러한 시인의 감각을 해맑은 어린 소년의 화법으로 풀어내고 있다. 물론 보는 눈에 따라 별것 아닌 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시의 내밀한 의식작용, 즉 시인이 되어가는 과정, 시인이 잊지 말아야 할 초심같은 그 무엇이 문자 배후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시적 사태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훼손되지 않은 투명한 감각의 언어들이 소녀와 어머니 사이를 매개하면서 시는 잊혀졌지만 가슴 한 가운데 자리 잡았던 꿈과 희망을 환기시킨다. 시인이라는 꿈. 그 미완의 꿈을 향해 유년의 어느 시점 한 가운데를 가로 질러가다가 시나브로 해거름녁 가을의 풍경 어디쯤을 몽상하게 된다. 아름다운 가을의 정경 사이사이에, 어린 딸과 어머니의 시장 가는 길 사이사이에, 한 계절을 경유한 여름과 가을 사이에 시는 대화의 방식으로 상상력과 시의 문법을 심어놓는다. 엄마의 습관화된 일상 언어문법을 어린 딸아이가 변형하여 새롭게 언어문법을 만든다. 딸의 어법은 노암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이다. 시의 어법은 현상을 현상으로 기술하는 어머니의 일상 언어문법이 아니라, 그 모를 상상적 지평과 길들여지지 않은 순결한 언어가 결합 작동하는 순간에 새롭게 현시된다. 시의 어법은 그저 널부러져 있던 언어에게로 다가가 언어의 의미를 변형 생성시켜 미적 자의식의 문법으로 고양된다. 오탁번의 「시인」은 시인이 직면한 미적 현실성을 동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내고 있는데, 그것은 한번도 배운 적이 없는 그래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어린 소녀의 착각과 오류 어법 속에서 생성된다. 다시 말해서 시인이 창조한 언어는 즉자의 언어를 대자의 언어로 정련하는 과정 중에, 말과 말의 콘텍스트 사이에, 일상언어와 그 말들의 주변에 존재하게 된다. 시인 오탁번의 시인론은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 사이는 모든 감각을 세계 쪽으로 열어 놓고 감각이 촉지해낸 기호를 의미기호 변환시키는 사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감각은 일상적 삶의 과정 사이사이로 치고 들어가, 어머니의 발화를 의도적으로 왜곡 언표하는 어린 소녀의 발화 사이로 들어가 오탁번은 시적 언어가 창조되는 지점을 정갈하게 묘파하고 있다. 시적 언어는 ‘푸른 감이 가을이 되면 빨갛게 익는단다’에서 ‘달님이 그새 빨갛게 익었어’로 변성되는 과정 중에 생성된다. 이것이 바로 시인 오탁번이 인지한 시적 언어의 탄생과정이자 시인론이지만, 그는 시적 언어 옆에 시의 내면 즉 시인의 마음을 포개 놓는다. 타자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수렴시킬 수 있는 어린 소년의 까치걸음의 마음을 시인이 될 수 있는 기본 자질로 상정하고 있다. 오탁번에게 있어서 시인이 갖추어야 할 시적 재능이란, 언어의 변형생성문법과 그 언어를 진정성과 사랑으로 고양시키는 마음자리임을 아주 소박하지만, 그러나 이 세상 어떤 시보다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다. (생략) 애지 07년 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