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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카페에 올리려고 했던 한글에 저장했던 글입니다. 회원분들의 생각은 어떤가 해서 올립니다. 참고로 대소왕의 집권시기를 추정할 때 기록이 없으므로 길림성 집안현에 조선족들 사이에서 전해져 오는 설화를 주로 인용으로 하여 부끄럽게도 소설적 상상력이 많이 들어갔음을 밝힙니다. (어젠가 그제 한단인님께서 이에 대해 유목민의 형제유산상속과 태조대왕과 차대왕이 빗대어 설명을 잘 해주신 후 나름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백지가 됬는지 다시 설명해달라기는 염치도 없고 해서 혼자 공부해 보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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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14년(서기전 24)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내고 마침내 신묘(神廟)를 세웠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을 갚았다.
→ 부여의 금와왕과 고구려의 추모성왕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이 두 왕 재위기간 내의 국가간의 관계는 이 기록에서 뿐만 아니라 뒤에 나올 대소왕의 발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14년(서기전 6) 봄 정월에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볼모를 교환할 것을 청하였다. 왕은 부여가 강대한 것을 꺼려하여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서 가지 않았으므로 대소가 성을 냈다. 겨울 11월에 대소가 군사 5만으로 침략하여 왔으나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었으므로 돌아갔다.
→ 그런데 부여의 금와왕이 어느 시점에 죽고 대소가 왕위에 오르자 부여의 고구려에 대한 정책은 갑작스레 강압적으로 바뀝니다. 부여의 강압적인 대고구려 정책에 반발(?)한 고구려에 부여의 대소왕은 군사 5만을 보내 침범하지만, 폭설로 인해 실패하고 맙니다.
그런데 실패 여부를 떠나서 부여의 5만 군사는 상당한 병력입니다. 일반적으로 부여는 연맹왕국 단계로 되어있고 왕권이 미약한 연맹왕국의 군사 5만 차출은 어려운 일입니다. 태왕릉비에서도 보여지듯 어느 정도 왕권이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에서도 군사 5만은 많은 병력에 속합니다. 어쨋든 계속 사료를 보겠습니다.
유리명왕 28년 가을 8월에 부여왕 대소(帶素)의 사신이 와서 왕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우리 선왕과 당신의 선군인 동명왕은 서로 좋은 사이였는데, [동명왕이] 우리 신하들을 꾀어내어 도망쳐 이곳에 와서 성을 수리하고 백성을 모아 나라를 세우려고 하였다. 대개 나라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사람에게는 어른 아이가 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예이며, 어린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이 순리이다. 지금 왕이 만약 예와 순리로써 나를 섬기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서 나라의 운수가 오래 보존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려고 해도 어려울 것이다.”
→ 대소왕은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게 예속할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시켜 버린다는 협박을 하나 보기 좋게 거절당합니다.
유리명왕 32년(서기 13) 겨울 11월에 부여인이 쳐들어오자, 왕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무휼은 군사가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았으므로, 기이한 계책을 써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렸다. 부여 군사들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자, 복병이 나가 불의에 공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은 군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 결국 대소왕은 또 다시 군사를 고구려에 보내지만, 당시 어렸던 대주류왕 지휘의 고구려군의 매복과 기습에 말려들어 크게 패배합니다.
대무신왕 5년 괴유가 칼을 빼서 소리지르며 공격하니 [부여의] 모든 군대가 무너져서 지탱할 수 없었다. [괴유는] 곧바로 전진하여 부여왕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부여사람들이 왕을 잃어 기력이 꺾였으나,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군을] 여러 겹 포위하였다. 왕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들이 굶주리므로, 두려워서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하늘을 향하여 영험을 비니 홀연히 큰 안개가 피어나, 7일 동안이나 지척간에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다. 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무기를 쥐여 군영의 안팎에 세워 거짓 군사들로 만들어 놓고, 사잇길을 따라 군사들을 숨기며 밤을 타서 빠져 나왔다. [이때] 골구천의 신비로운 말과 비류원(沸流源)의 큰 솥을 잃었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서 먹을 것을 주었다. 왕은 서울에 이르러 여러 신하를 모아 잔치를 베풀며 말하였다. “내가 덕이 없어서 경솔하게 부여를 정벌하여, 비록 그 왕은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하지 못하고, 또 우리 군사들과 물자를 많이 잃어버렸으니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이윽고 친히 죽은 자를 조문하고 아픈 자를 위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의 덕과 의(義)에 감격하여, 모두 나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기를 바랬다.
→ 이 기록에서 대주류왕이 스스로 패배를 시인하고 부여는 비록 왕을 잃었지만, 전쟁에서 이깁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여름 4월에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막내 아들인데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전에 대소가 죽임을 당하자 [그는]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자 백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렀다. [그는]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결국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이곳에 와서 비로소 도읍하였는데. 이 사람이 갈사국왕(曷思國王)이 되었다. 가을 7월에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선왕이 죽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데 없는데 왕의 동생이 도망쳐 갈사에서 도읍하였다. 나도 역시 불초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킬 수가 없다.” 마침내 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 오니, 왕은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
那部)에 두고,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었으므로 낙(絡)씨 성을 주었다.
→ 위의 사료는 제가 대소왕이 중앙집숸체제를 마련한 것도 아니고 굳이 독재를 했다고 보는 가장 큰 근거입니다. 분명 부여는 왕을 잃었지만, 승전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라 사정은 패전국인 고구려 보다 분열이 심합니다. 분열도 거의 국가존망도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삼국지 부여전에 "간위거가 죽자 제가들은 마여를 왕으로 세웠다.", 옛날 부여에 장마가 들거나 가뭄으로 기후가 고르지 않아서 오곡이 익지 않으면 왕에게 허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죽여야 마땅하다고 했다." 라고 되어 있듯이 부여의 왕을 세우는 주체는 제가이고 몰아내는 주체도 제가입니다. 제가들 보다 세력이 약한 왕이 전쟁 중에 죽었다고 해도 다른 이를 왕으로 세우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대소왕 사후를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분과 이탈만 가증되었습니다. 분명한 승전국임에도 말입니다. 이것은 대소왕 재위기간 내에 제가들이 세력이 상당히 꺾였다는 것을 반증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대소왕은 언제 집권하였을까요? (위의 가설들이 충분히 가능성 있다는 전제하에.)
우선 대소가 집권을 했을 때는 금와왕 말기에 태자 자격으로 금와왕 대신 국정을 봤다거나 금와왕 사후 왕위에 올랐을 경우인데, 두 가지 다 봐도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동명성왕 19년(서기전 19) 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오니,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昇遐]. 그 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고 이름하였다.
→ 위의 기록에서는 유류와 예씨부인이 부여에서 '도망'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망의 사전적 의미는 몰래 달아나다, 쫓기어달아나다입니다.
유류와 예씨부인은 누군가에게 목숨의 위협을 느껴 국경을 넘어 몰래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고구려로 가게 된 배경이 굳이 목숨부지가 아니더라도 빚독촉 때문에 떠났을 수도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근거가 전혀 없으므로 배제합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위협을 받았을까요?
유력한 후보로는 금와왕과 대소입니다. 제 3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기록이 없으므로 이 역시 배제합니다.
금와왕은 추모성왕이 떠난 후는 물론 떠나기 전에도 대체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물론 말지기좌천건도 있지만, 이것은 금와왕이 대소에게서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탈부여 할 때도 거의 묵인하다시피 합니다.
떠난 뒤에 추모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한 후에도 우호관계를 유지합니다.
우호관계를 유지했음에도 금와왕은 자신이 재위에 있을 때 예씨부인과 유류를 고구려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금와왕은 양자이므로 정통성이 약하므로 세력있고 가문 좋은 여인을 왕후로 맞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길림성 집안현에 조선족들 사이에서 전해져 오는 설화에 의하면 금와왕대의 대소신료는 대부분이 왕후의 친척들이었다고 전해져 옵니다. 아주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쩌면 금와왕은 같은 양자 처지인 추모성왕에게 연민을 느껴 도망치게 한 것 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추모성왕을 시기하던 대소왕과 왕자들은 물론 왕후의 대소신료들은 금와왕에게 반발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 기왕에 볼모가 된 예씨와 유류 마저 보낸다면 금와왕의 입장은 상당히 난처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 암암리에 유류와 예씨를 궁밖으로 도망치게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는 그 시점을 유화부인 사후로 잡습니다. 딱히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소는 도망가는 추모성왕을 직접 죽이려고 한 인물로 금와왕과는 입장이 다릅니다. 더군다나 아버지인 금와왕과는 다르게 외가도 세력이 큰 편입니다. 추모성왕을 직접 죽이려고 한 인물인데, 그의 부인인 예씨부인과 자식인 유류를 살려둘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그가 예씨부인과 유류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시점은 금와왕이 거의 힘이 없는 말년에 태자 자격으로 국정을 대신 살피거나 왕좌에 올랐을 때입니다. 즉 동시에 예씨부인과 유류가 도망갈 때이기도 합니다.
어쨋든 도망가기에 앞서 궁밖으로 나온 유류와 예씨부인은 사서에 나와 있는데로 거의 평민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합니다.
사서에서는 예씨부인과 유류가 탈부여를 할 때 딸랑 칼조각 하나와 몸뚱이만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곧이 곧대로 믿는 어렵고 탈출 상황에 있어서는 설화 쪽이 조금 신빙성이 있는 것 같아 설화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이에 앞서 예씨부인의 부여내에서의 위치 부터 파악하자면 예씨부인은 고대사회에서 흔치 않게 성씨를 가지고 있는 것과 왕자 신분인 추모성왕과 혼인을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부여내(중국에는 禮씨 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부여 혹은 고구려 내의 고유 성씨로 보임.)에서 영향력 있는 대귀족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녀가 친정으로 갔다면 평민생활을 하지는 않았을 법도 한데, 그렇지 못합니다. 예씨부인을 예씨집안에서 대놓고 들이지 못한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몇 가지 꼽자면 귀족체면도 있겠고 예씨부인과 유류는 이미 대소왕자들은 물론 대소신료들에게도 눈밖에 난 인물들인데, 예씨부인과 유류를 받아들인다면 귀족사회 내에서도 입지가 좁아지므로 실이면 실이지 득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암암리에 도와줬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설화에서는 예씨부인을 묘사할 때 동부여에서 가장 아름답고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씨부인이 친정에 가지 않은(혹은 못한) 이유 중에는 예씨부인의 효성스러운 마음도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유류와 예씨부인이 고구려로 올 때 의복을 단정히 갖추고 금과 은으로 장식된 장식품들을 하인들에게 이고 지게 한 뒤에 고구려로 떠난 것으로 나옵니다. 평민생활이나 다름없이 지내던 예씨부인과 유류가 하인들이라느니 장식품들을 가지고 오는 것은 만무한데, 그것들을 갖고 고구려로 왔다는 것은 그녀가 귀족대열에 다시 합류했다는 것이 되며 바꿔말하면 예씨집안이 통채로 예씨부인과 유류를 매개로 고구려로 왔다는 것입니다.
예씨집안이 예씨부인과 유류와 함께 온 이유는 대소의 독재체제로 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왕족인 대소가 독재체제로 가면 자연히 상대적으로 귀족들은 위축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씨집안도 딸과 추모성왕 때문에 부여내에서 구차하게 귀족생활 할바에야 고구려로 가서 왕의 장인으로 더 큰 권세를 누리는 쪽을 택했을 것입니다.
사서에서는 유류가 오자마자 태자가 되고 설화에서는 예씨부인이 오자마자 소서노를 몰아내고 동궁왕후(정실왕후)가 됩니다. 여기에도 예씨집안의 강력한 세력이 한 껏 작용했을 것입니다. 소서노를 비롯한 토착세력도 있었겠지만, 추모성왕의 측근들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차근차근 고구려내에서도 토착세력과 비등해질 만큼 추모성왕의 세력이 커지고 거기에 예씨집안 더해져서 소서노쪽을 밀어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읍루는)한나라가 건립된 후 부여에 종속되었다.
→ 후한서에 읍루는 한나라가 건립된 후 부여에 종속되어있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여기서 한나라가 건립된 후라는 표현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읍루가 복속된 때를 후한 시대라 보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시대구분을 할 때 한이라는 말이 쓰일 때는 전한시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전한시대에 살던 대소가 왕위 된 뒤 강력한 독재체제를 배경으로 대외팽창 정책을 펼쳐 읍루를 복속시키고 그 일환으로 고구려도 치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레 근거 없이 추정해 봅니다. 또 한가지! 대소왕대의 부여는 고구려를 자신들의 천하에 복속시켜려고 했습니다. 부여나름대로의 천하관도 있었을 법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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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제 결론은 부여의 대고구려정책 급변(금와왕→대소왕)+군사5만 차출+ 대소왕 사후 급분열등을 근거로 대소왕 시기에 일시적으로 독재체제를 이루지 않았을까 합니다.
첫댓글 부여의 인구가 위지동이전에 의하면 8만호 약40만명이라고 하죠 물론 대소왕 집권당시에는 더 많았을수도 있지만 (대소왕이 죽은뒤 후계분쟁기간에 상당수가 부여를 떠났다는 가정도 해볼수 있을듯 실제로 대소왕의 동생이자 대쥬류왕의 장인이 독립해 갈사국을 세웠죠)수십만에 불과한 부여의 인구사정으로 5만이나 되는 대군을 동원했다는건 대소가 강력한 군주였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67년에 부태왕이 2만의 군대로 현토군을 공격한 기사로 봐서 부태왕도 상당한 권력을 행사한걸로 보이지만 현토군 공략에 실패한후 다시 한나라와 통교한걸로 봐서 전쟁실패후에 형인 위구태를 중심으로 한 친한나라파에게 실권을 빼았겼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부태왕이 현토군을 공격한게 무역분쟁이란 시각도 있지만 무역분쟁에 2만이나 되는 군대를 동원 했다는건 좀 오바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