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개
어르신을 뵈러 가는 중이다. 아파트에서 꽃집으로 옮겨간 지 두어 달이 되어간다. 그동안에 품은 늘었는지, 벼슬은 올랐는지 궁금하다. 동생이 보내온 사진과 문자에는 약동감이 없어 아쉽다. 그래서 주말마다 알현하러 간다고 하니 ‘어르신’이라는 별명까지 붙는다. 어느새 날개가 돋아 가로막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린단다. 그 소식을 접하니 더욱 그들의 날갯짓이 보고 싶다. 날개를 편 듬직한 모습을 상상하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는 “날개는 날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둥지 속에서 알을 품고 있는 날개는 날개가 아니라 품개이기 때문이다.”라며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품개’라는 단어를 짓는다. 더불어 “날개보다 더 소중한 날개인 품개”라는 문장을 만들어 타임캡슐에 넣어 젊은이들에게 남기고자 했다. 그 문장이 ‘너희들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문학이 아무리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하지만, 의아한 단어와 해석이다. 날개는 자유의 상징이 아니던가. 자유로이 날지 못하는 날개는 날개가 아니다. 그런데 날개의 본질을 떠나 ‘품개’가 더 소중하다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러다 뇌리에 번뜩 스치는 것이 있다. 날지 못하는 병아리가 식구를 품은 장면이다.
병아리를 갖고 싶다는 손녀의 갈망하는 눈빛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어렵게 주문한 병아리가 인천에서 버스를 타고 머나먼 길을 달려온 날이다. 딸이 병아리를 주저하여 우리 집으로 데려온다. 종이박스를 열어보니 다섯 마리 병아리는 기이하게 서로의 목을 감아 한 몸처럼 엉겨 있는 게 아닌가. 마치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라는 표어의 상징처럼. 내 상상으로는 낯선 곳에 도착한 병아리들이라 긴장하여 삐악거리며 뿔뿔이 나댈 줄 알았다. 그렇게 상상을 뛰어넘는 생경한 모습에 놀라고, 병아리의 형제애를 새삼 알게 된 것이다. 마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독후한 자매들의 모습만 같다.
나는 칠 남매의 맏이, 맏이 같지 않은 나이만 많은 사람이다. 꽃집 동생을 떠올리면 자주 그런 생각이 들어 무람하다. 친정 형제가 거의 2년 터울로 여동생 다섯에 막내로 남동생 하나이다. 식구가 많아 바람 잘 날 없었던 시절이다. 부모님은 무슨 일이 생기면 맏이를 불러 걱정을 나누니 어깨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걱정을 끼치는 여동생에게 다정하게 다가서지 못하고, ‘자신의 앞길은 스스로 헤쳐 나가라.’고 나무란 적이 여러 번이다. 그리 불편한 감정으로 돌아서 서로 자신의 가정을 챙기느라 속 깊은 이야기는 나누지도 못하고 지낸 것이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꽃집 동생은 변함없이 친정 가족을 품고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스치지 못하듯 동생들이 꽃집을 찾아가는 것이 그 증거이다. 동생은 사람을 편안하게 대하는 재주가 있다. 동생들의 고민거리도 들어주고 많지도 않은 자신의 것을 나누기도 한다. 그렇다고 꽃집 동생이 재물을 넉넉히 가진 건 아니다. 형제들과 정답게 지내는 모습은 보기가 좋으나 그 집 살림을 축내는 것 같아 오지랖 넓은 동생의 날갯짓을 걱정하며 “네 것 좀 챙기며 살라.”고 군소리하게 된다. 큰언니로서 동생들의 형편이 고만고만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꽃집 동생이 아니면 병아리의 보금자리도 해결되지 않았으리라. 병아리는 두 달 만에 중닭으로 변신한다. 아파트에선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작아 걱정이다. 고민 끝에 꽃집 여동생에게 ‘족보 있는 병아리고, 20년을 산다.’고 구구절절 얘기하니 마지못하여 허락한다. 동생은 고맙게도 이틀 후에 손수 보금자리를 만들어 보여 주는 게 아닌가. 이러구러 미물인 중닭도 여동생이 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꽃집에 갈 때마다 눈여겨보니 매일 들락거리는 이웃사촌이 한둘이 아니다. 옆집 상가 주인도 내 집처럼 들락거리며 커피를 마시고, 폐지를 가져가는 노인에게도 매일 따스한 커피를 대접하는 동생이다. 더욱이 할아버지의 후일담을 듣고는 동생이 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 만나게 될 인연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가 보다. 여동생이 미장원에 파마하러 갔다가 꽃집을 한다고 하니 손님 중의 한 분이 묻더란다. 자신의 아버님에게 폐지를 모아주신 분이냐고. 당신의 아버님이 말기 암환자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아버님이 병실에 누워 고마운 꽃집 여사장님이 자신을 기다릴 거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단다. 여동생 또한 할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아 궁금하던 터에 어르신의 근황을 들었다는 훈훈한 이야기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 성공의 날개를 달길 원한다. 하지만 대부분 성공을 구가하다 성공에 미혹되고 취하여 자신의 본모습을 잃어버린다. 아니 가장 빛나던 순간에 이카로스처럼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돌아보니 나의 날개는 힘이 잔뜩 들어가 무거워서 날 수 없는 날개이다. 동생의 보이지 않는 날개는 인정(人情)을 품는 날개, 자신의 품안에 든 사람은 누구든 품고 있다. 이어령 교수가 말한 ‘품개’가 아닌가 싶다. 어린이집을 오가는 손녀에게 병아리를 키우며 생명 존중의 의미를 알게 하려다 도리어 날개의 새로운 의미를 깨우친다.
꽃집을 나서며 아쉬움에 닭장으로 다가선다. 닭장을 살며시 열어보니 어르신들이 날개와 날개를 포개어 주무시는 중이다. 세상에 어떤 두려움도 없다는 평온한 모습으로.
첫댓글 억지로 되는 게 아닌 '품개'의 DNA가 아닌가 싶어요.
살다 보면 사람마다 지니고 태어난 천성이 각자 따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요.
저도 품개는 달지 못하고 살아온 탓에 이 글이 더 감동입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품개 참 멋진 명사 같네요.
거기에 사람의 삶까지 비유했으니
글을 참 잘 쓰는 작가라 여겨지는 군요.
"품개"
따뜻한 작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