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꾼이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순간은 지켜보는 사람도 흥분을 일으킨다. 낚싯바늘에 걸린 고기가 저항하며 천천히 끌려올 때, 마침내 수면 위로 건져질 때, 낚시꾼의 희열은 얼마나 대단할까. 힘이 좋다, 크기가 좋다, 생김새가 좋다. 감탄이 연거푸 나온다. 그리고는 살림망 속에 넣는다. 그 후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혼인 관계를 이렇게 대하는 것을 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상대방을 이미 확보했다 여기는 순간, 무언가가 꺼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식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대신에 예전 같지 않다며 상대방을 탓하며 공격하기 시작한다.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다. 예수님에 대해 들었다. 흠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믿게 되었다. 큰 기쁨을 누렸다. 그런데 그다음은? 처음 사랑이 증발해 버린 자리에, 흥미를 주는 다른 것들이 하나씩 들어선다. 그 복된 관계를 풍성하게 누리는 일은 어느 사이 소홀해진다.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원수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극적인 타락이 아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서서히, 조용히, 무감각하게 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 처음 그 설렘이 사라져 있다. 마음이 건조해지는 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 돌아봄의 순간이야말로 회복이 시작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요한계시록의 경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경고인 이유는 돌봄에 소홀하거나 익숙해지면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망하시는 하나님은 늘 먼저 구애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리라"(호 2:14) 떠난 사랑을 정죄로 끝내지 않으시고, 다시 시작하자고 부르시는 것이다.
빌립보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는 "축복합니다"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그가 말하는 사랑에는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해지는 어떤 것이다. 잡은 물고기처럼 상대방을 살림망 안에 가둔 사랑이 아니라, 세월이 흐를수록 우람하게 커가는 나무의 이미지다. 그리고 그 나무를 자라게 하시는 이는 결국 성령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우리의 몫은 그 사랑이 흘러가도록 물길을 막지 않는 것이다.
살림망 속의 물고기는 더는 헤엄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을 그렇게 가두어두지는 않았는가.
게으른 자의 밭도 처음부터 가시덤불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나쳐 보지 않은 날들이 쌓였을 뿐이다. 사랑도, 가정도 그렇게 무너진다 —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무심함으로.
가정은 밭 같아서 관리하지 않으면 알게모르게 황폐해지고 그 피해는 부모만아니라 고스란히 자녀들의 몫이 되고 만다.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거친 풀이 그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잠 24: 30-32)
집은 결혼으로 세워지지 않고 지혜로 세워진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며"(잠 24:3) 저절로 세워질 것이라는 거짓에 속지 않는 분별로 견고해진다.
하나님은 식어버린 사랑을 정죄로 끝내지 않으시고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다시 말을 거신다. 오늘 우리도, 살림망 속에 가두어둔 사랑을 향해 다시 그 들로 나가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