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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학 칼럼 6>
에덴의 길 찾기와 관조적 삶의 해법
- 경현수 시인, 그 눈부신 언약과 삶의 일체성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김동명학회 회장)
1. 영혼의 빛남과 시적 차별성
한 편의 시는 특정한 시인에게 시적 논리의 합리성이며 가끔은 조화로운 언어의 미로 가늠된다. 까닭에 레바논 출신의 화가이며 20세기 신비주의의 시인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의 “시는 마음속의 불꽃이고, 수사학은 눈송이다. 불길과 눈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시는 영혼의 비밀인데, 왜 어휘들을 가지고 수다스럽게 그것을 소모 시켜 버리는가?”라는 문제의 제기는 한 번쯤 유념할 바다. 아울러 지브란이 “지식인이 침묵하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죄를 짓는 일임”을『예언자』에서 일깨워주었듯 모처럼 묶어낸 시집은 단순히 화자가 들려주는 삶의 잠언은 ‘지구로부터 가장 먼 별 에른델’의 이야기가 아니라, 기실 ‘지구상에 몸담은 체취(體臭)가 묻어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얘기임’은 더없이 자명하다. 또 한편 시집 평설에서 비열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지식·정보화 사회에 처한 대다수의 이들 중에 푸른 생명의 언어로 깊은 이해와 관심을 명백히 밝히고 지극히 차별성을 지닌 시적 작위(作爲)를 시대적 소임으로 인식하고 철저하게 수행하는 창조적 영혼의 경우는 못내 매혹적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현재 서울 강동구에 거주하며 지난 연초 『시문학』의 폐간 직전에 고뇌와 망설임 끝에 무게 중심의 중량감이 실린 시집은, 새로운 시 의미의 이해와 감상을 위한 탐색으로 ‘푸른 바람의 향방’을 구명하여 존재감이 빛난다. 모처럼『꽃잠 속에 에른텔별』(시문학사, 2023)을 출간한 강릉출생의 경현수 시인은 의식이 깨어 있는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다. 또 평자와는 동향(同鄕)으로 학연이 맞물린 탓도 그럴 것이나 1980년 초부터 전국적인『瑞世樓 詩』의 동인이라는 각별한 친분으로 ‘3인 특집을 꾸며온 신동집, 정공채 시인’에 의해 1986년 추천을 받았고, 등단 직후에 폭넓고 왕성한 활동을 지속하며 현재는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시창작 강사로 활동 중이다.
그 나름으로 7년 전의 시집인『바람은 그 마을에』 간행 이후에도 아직 할 말이 남은 탓이랄까? 작금에 발행한 시집의 편집구성은「서문 :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문명인(박이도), 시인의 말, 시작 노트, 1부 꽃잠 속에(14편), 2부 오래된 대문(15편), 3부 골목 안(13편), 4부 네거리의 기억(14편), 5부 가장 먼 별 에른델에게(14편)」의 구도로 비교적 균형감각을 유지한 70편의 시편이 결(結) 고운 모직물의 직조(織造)로 치밀한 구성심리학의 모양새를 갖춘 양식이다. 또 한편 그 자신의 시적 모티프는 ‘잎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는 나무의 생리’로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지 않아 칙칙한 어둠의 그늘도 말끔 걷힌 밝은 율조에 점층적 효과의 차별성은 비교적 조화롭다. 그렇다. 시편에 관한 합리적 해법에 앞서, 저자가 우편물로 보내준 시집『꽃잠 속에 에른델별』(시문학사. 2023)의 표제 시로 눈부신 형사(形似)가 이채롭고 시 의미가 응축된 “나는 잠속을 허둥대며 뛰쳐나왔습니다/아무도 보이지 않고//봄날은 흐르듯 깔리고 있습니다(꽃잠 속에)”에 시선이 닿는 한순간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꽃(잠)과 별(에른델)의 구도적 대응’에 놀랍게도 전율을 절감했다.
까닭에 그 자신은 줄곧 시적 작업에 몰두하면서 ‘줄곧 시간의 무한개념’을 역설해왔다. 여기서 다소 짧은 호흡의 형식에 시적 이미지를 역설적으로 응축시켜 놓은 문제의 시편에서 그 자신이 탯줄을 묻은 강릉은, 예부터 ‘천년의 시향(詩鄕)으로 일컬어져 온 처소’다. 따라서 아득한 유년의 꿈이 자리한 삶의 공간은 ‘하늘엔 별, 땅에는 꽃, 그리고 마음에는 시(詩)’라는 행간의 틈새와 맞물린 “젖은 찔레꽃 향기가 손을 잡았습니다”라는 시 종자의 발아(發芽) 공간으로 옛 지명은 예성(蘂城)’이다. ‘꽃잎에 이슬이 눈부신 곳’인 점에서 즉물적 대상의 구도처리는 결코 무관치 아니하다. 여기서 “잠깐 잠이 들었습니다. 봄날의 오후” 황홀한 몽환(夢幻)처럼 ‘감춤과 드러냄의 차별화로 감정을 절제한 서정시의 추이’는 호흡 가다듬고 묵언으로 관망할 바다.
그간에 분망한 삶의 일상에서 ‘목어(木魚)의 울림 뒤 교교한 월광에 선잠인 듯 아득할지라도’ 그 자신은 “꽃들이 여름 찬란했던 그림자를 묻고 있다//열반(涅槃)의 꿈이 고요하다(적멸)”에서 자연의 순리에 거역함이 없는 계절의 순환을 조금은 여유롭게 서로를 반조(返照)하고 감동을 회복시켜주는 삶의 일깨움은 시적 상상력의 확장에 의한 ‘웅덩이를 만들어서라도’ 멈춤과 적멸(寂滅)을 열반으로 형상화한 시적 작위로 또 하나의 역설(逆說)이다. 가끔 영감을 안겨주는 뮤즈도 거슬러 오르면 꿈에 닿고 때로는 종교에 있어 ‘신들도 꿈의 영역에서 태어나고 걸어 나와서 죽을 때는 끝내 꿈으로 돌아간다.’ 바로 이것은 의식뿐만 아니라 잠든 상태에서 생각한 모든 대상은 꿈의 영역이기에 수면 중 창작과 영감으로 이루어진 창조물도 꿈의 소유에 잇닿아진다. 그의 시편 중 동기부여로 메르헨의 요소가 언뜻언뜻 엿보이는 “외줄타기 곡예를 덩더쿵 덩더쿵 하일장천/관객도 떠난 자리, 외로운/바람과 구름과 짝하고 계셨지요(지금은 어느 짬에 계신가요)”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묵언으로 관망할 바다.
그렇다. 오늘도 영혼의 상처로 고통을 받는 인류를 위해 복음성가를 부르는 ‘두 팔 없는 가수로 감사의 화신’인 레나 마리아(Lena maria)처럼 불행과 위기를 행복과 감사, 그리고 축복의 기회로 전환 시키는 위대한 삶을 영위하여야 한다. 이 같은 면에서 “숨결의 나붓나붓 지붕 위에 뜨락에 장독대에 쌓이던 평화가, 이 아침에//하얀 편지, 목화송이가 안겨온다(큰 눈 오는 날처럼)”와 같이 지정학적으로 강릉은 겨울에는 많은 눈이 내리는 편이고 또 상대적으로 ‘양강지풍(襄江之風)’이란 옛말처럼 봄·가을에 바람이 심한 날씨가 잦은 편이다.
2. 바람의 향방과 묵언의 관조(觀照)
특히 창조하는 영혼은 생명감에 활력gold brain이 넘쳐나기에, 정신작업의 종사자들은 갈등과 모순성에 기인하여 마음에 고통을 받을지라도 밝은 미래의 비전을 일깨워 줄 시대적 소임을 충직하게 담당하여야 한다. 이 같은 시대 상황에서 독자적인 시적 영토의 확장을 위해 ‘가지치기와 잘리는 두 객체, 즉 양극 사이에 서로 다른 이해와 존재와의 깨달음’에 의한 행복한 시 읽기에 있어 그 투시도법의 타당성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한 관계성’의 일상화는 가늠하다. 모름지기 에밀 슈타이거(E. Steiger)는 서정의 본질을 회감(回感)으로 정의하면서, ‘시인은 자연을 회감하고 자연은 시인을 회감한다.’라고 제시하였다. 이같이 시적 자아에서 분출되는 서정성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물에 대한 주체의 동일자적 욕망의 산물로 인식되기에 “섬돌이 놓였던 할머니 방, 격자 창호지 문살에 꽃잎을 박았던/맑은 날의, 햇살 지문이 얼룩져 있다(오래된 대문)”에서 맑은 영혼의 소유자라면 최소한 쉼표(,)마다 화자의 눈물방울을 확인할 것이다. 이처럼 타자 중심의 내적 충만을 관통하여 공감대의 영역을 확장 시키는 서정성의 양상이 현상적으로 투사되고 있다. 또 한편 “언어는 생명력을 지닌다.”라는 구조주의 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F.D. Saussure)의 역설처럼 따뜻한 감성에 맞물린 깊은 사유의 일관성은 신선한 충동이다.
차제에 ‘유록빛 여름 한낮 양철지붕을 난타하던 소나기’에 “낮은음자리표, 높은음자리표//내 안의 높고 낮은 빗물 흐르고(여름날 빗소리)”를 통해 여름날 빗소리는 맑은 스타카토의 음조임이 입증될 것이다. 이처럼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려 기도하는 나무’는 성자의 경건한 징표인 점에 비춰 그 자신이 나직하게 읊조린 시편에서 「가을 나무」,「쟁쟁 울리는 봄날이」,「은행잎은 꽃잎이 되고」를 포함하여 “햇볕이 파고듭니다//삼월은 목련을 보냅니다/그가 피어날 때를 몰라도(그가 피어날 때를 몰라도)”의 보기처럼 그 자신의 존재론적 양상은 절제된 감정과 깊은 사유를 통한 언어의 생명력은 절망을 무너뜨리는 또 하나의 역동성에 해당한다.
각론하고 위대한 창조적 영혼은 “자기 일에 지극히 헌신적이며 열정을 지니면 누구나 자기가 처한 환경을 바꿀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라는 ‘용서와 통섭’을 일깨워준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의 역설처럼 꿈을 실현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가능한 현실로 전환될 수 없다. 까닭에 “한강 조망이 찬란한 스카이라운지는/발아래 고달픈 사람들, 하루 생애를 내려다보는 자비와/긍휼까지(고층으로 가는 사다리)”의 보기나 또 “그들의 독백이 ‘살다 보면-’/여름은 길게 늘어져 있고(살다 보면)”처럼 선한 심성에서 비롯된 시적 감각은 따뜻한 정신기후를 조성하려고 인고의 밤을 지새우며 시적 형상화에 맞물린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으로 친근한 정조다.
간혹 삶의 일상에서 제한된 공간에 처한 이 땅의 대다수 정신작업의 종사자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임이나 역할의 수행에 앞서, 주지할 바는 좌절이나 절망이 아니라, 소중하고도 유의미한 삶을 위한 긍정적 사고를 지녀야 한다. 또 한편 “노란 개나리 행궁 전각에 올라가/꽃가지 망루에 걸어놓았다(남한산성-새봄)”의 시편에서 놀랍게도 그 자신의 시선이 즐겨 닿은 대상은 견고한 산성의 거대한 위용이 아니라 산성 자락에 숨어서 핀 아기 제비꽃이거나 노란 개나리, 그리고 연초록의 봄이다. 평자의 어설픈 지론이지만, 비록 ‘음계가 서툴지라도 자기만의 육성으로 시혼을 읊어내는 존재감’은 끝내 ‘새봄 뒤의 아흐, 부활’이기에 새롭게 조명되어 마땅한 그 자신의 시적 양상은 삶의 현장에서 체득한 결과로 또 하나의 일깨움이다.
무엇보다 시집에 수록된 대다수 시편에는 계절의 순차(循次)를 일상의 삶에서 지극히 개성적인 ‘느낌, 체취’를 감정의 절제 없이 따뜻한 서정성의 시적 형상화에 있어 묘미와 감응은 비장감마저 묻어있다. 특히 “위대한 시의 영감을 마음에 담습니다//바닷가 사람들, 바다, 동해안, 강원도를 사랑하신 시인이여(천상에 드신 월천 선생님께)”의 시편에서 월천月川 시인과의 온갖 감회(感懷)로 평자의 가슴 또한 저며왔다. 그렇다. ‘직립 보행의 인간은 언젠가 이름 모를 낯선 항구에 닻을 내려야 할 존재이기에, 피폐한 정신을 치유하는 따뜻한 정신기후의 조성에도 새삼 전념할 일이다. 또 한편 맑은 눈물은 순수한 언어 이전의 영혼에 비견되기에 눈물보다 더 큰 목소리, 감동을 주는 웅변은 없다. 비록 그의 시편에 눈물은 자주 사용되는 시어는 아닐지라도 “남애 어촌 마을에는 울음 뒤에 바다가 잠들었다/흰 파도가 몇 폭의 만장을 펄럭인다(봄날의 색소폰)”는 하나의 예시지만, 피곤한 삶의 일상에서 숱한 사연들은 크고 작은 환희의 꽃들로 은유 되거나 절망의 조각으로 맞물리기에 경건한 창조적 행위의 등가물로 제시된 ‘꽃과 별, 그리고 열매’는 자연 본래의 질감에 해당한다.
모처럼 직물 대상의 감응에 잇닿은 그의 시편에서 예감되는 서정적 변용은 ‘바람이 불어오는 시간 도시가 겨울을 건너가는 정황에서’ 그렇게 “눈이 제법 쌓이고 잠시 그쳤던 눈발이 송이 눈으로 훨훨 날고 있다/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이 도시, 테헤란로/차량이 쉼 없이 꼬리를 물고 가고 있다(네거리의 기억)”에서 시적 분위기는 이채롭다. 한편 “창조자의 이름에 합당한 것, 신과 시인 말고는 없다.”라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지론을 가늠치 않더라도, 경건한 창조 활동을 폭넓게 이행할 ‘영감의 비의를 해명하는 사제로서의 역할’은 몸소 수락할 바다.
어디까지나 그 자신이「바람의 향방과 묵언의 관조」에 해당하는 각론을 반복하지 않더라도 ‘강문 열리더니 강물 왈칵 바다로 들어가는 어스름의 시간대에 “안목항 등대는 수평선을 기다린다/집어등의 불빛은 꽃등을 켜고/강물은 파도소리에 어울려 바다가 된다(강문)”의 예시에서 최소한의 양식을 지닌 시인이라면 가끔은 순수 자연을 응시하며 언어공해가 심각한 삶의 일상에서 금속적이거나 동물적인 언어의 횡포는 삼가야 한다. 까닭에 담담히 풀꽃 향내의 식물성 언어로 증오심도 말끔 정화를 시켜 대립의 이분법을 상생으로 전환 시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3. 합리적 해법과 눈부신 존재감
어디까지나 의식이 맑게 깨어 있는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최소한 존재의 뿌리인 언어의 집짓기에도 전념하여야 한다. 한 편의 시 쓰기란 삶의 다양한 소재의 선택과 세계의 만남에서 깨어남을 계기로 지속적인 변주를 모색하는 행위이기에 “오천 년의 아득한 연륜의 나라/전설이 알알이 피어 있고/아름다운 서정이 무늬 진 바다와 산과 강/아리 아리 아라리(아리랑 序曲)”에서 언어학적 측면에서 ‘아리랑’의 새로운 개념은 ‘물이 흘러가는 봇도랑(浪)이며 냇물(川)이고 강물(江)’이다. 그 일례가 한강을 ‘아리수’로 칭하듯 아리랑은 아름다운 우리말이기에 그 해법의 당위성은 새삼 유념할 바다. 이 같은 일면은 그 자신이 순수하고 해맑은 아득한 유년을 회상케 하여 비록 직물 대상 앞에서 좌절과 시련으로 절박감이 주어져도 이것은 응당 감당할 몫이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시편의 골격을 지탱한 동력은 생명의 본원인 자연 회귀성과 맞물려 있을뿐더러, 의식의 심층에 자리매김한 기대감은 분망한 일상에서의 지극한 관심사다. “우주의 끝에 가 있는 그를 보았다/이제 보았다, 꿈에서 가장 멀리 있는 에른델erndel/280억 광년 떨어진 머나먼 별(가장 먼 별 에른델에게)”에서 확증되듯 의인법을 수사적 기법으로 활용한 정황에서도 인연의 매듭은 못내 소중할 따름이다. 또 한편 그간에 천문학자들이 허블 우주망원경을 사용해 지구로부터 280억 광년 떨어진 가장 먼 위치에 자리한 별을, 빅뱅 이후 9억 년이 지난 근간에 관측하고 에른델로 명명하였다. 이 같은 연계성은 별의 이름을 ‘새벽 별 또는 떠오르는 빛’을 의미하는 고대 영어 단어에서 파생한 에른델은 새삼 유의미하다.
그렇다. 진정한 그 자신의 내면의식은 ‘한순간의 격정과 끓어오르는 분노에 평정을 안겨주어 감미로운 심적 현상을 유지 시켜주는 역동성’을 지닌다. 그나마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대에 생산적 결과물을 음미할 수 있음은 작은 축복으로 시 읽기의 행운과도 연유하는 분위기다. 까닭에 영국의 시인이며 비평가인 윌리엄 어네스트 헨리(William Ernest Henry)가 「정복되지 않는」 시편에서 “문이 얼마나 좁을지/얼마나 가혹한 형벌이 소용돌이칠지라도 상관없다./나는 내 운명의 주인/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라고 역설하였듯 그 자신은 ‘못다 부른 사모곡’에서도 삶의 의지를 쉽게 단념하지 아니하고 “어머니 가시던 날/먼저 울었고, 나중에 무너지는 슬픔에 갇혔습니다//오랜 후에 알았습니다//가을과 단풍, 슬픔과 눈물은 찬란한 무채색이었습니다(무채색)”에서 그 자신은 슬픔이 찬란한 심적 상황에서도 한층 더 생명의 존엄성을 절감하는 놀라운 관심사는 신선한 충격이다.
각론하고 그 자신은「시인의 나라」에서 “강줄기를 달래며 자장가를 부르더니, 어머니가 되었다”라며 타자 사이에 ‘외딴 섬’이 자리해 있음을 확인하고 생명의 본원인 모성에 대한 간절함을 끌어안고 있음에 비장감이 묻어난다. 또 한편 ‘이 지상에서 위대한 이름인 어머니’를 휩싸고 돌며 끝남이 없는 노래로 “언제부터인가 누구의 모천母川이 된 것을 알았다//수천 년, 수만 년 소리 내지 않는 분화구//차츰 분화되어 꽃으로 터지는(시인의 나라)”에서나 또는 “꽃들은 소금바람에 조금씩 견고해지고/파도의 음계가 높아지듯, 발끝 쳐들어/먼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머니/거기에 당신이 계십니다(외딴섬·1)”에서 ‘어머니=고향’의 등식은 성립된다.
차제에 앞서 박이도 시인이「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문명인-시인의 내면세계를 객관적 시점에서 응시」로 전제한 뒤에 “이번 시집에서 풍기는 대체적인 분위기는 절망이나 허무 같은 우울한 정서가 지배적이다. 도시의 일상적 삶에서 오는 긴장, 이어지는 긴장감에 이완(弛緩) 현상을 시인은 제삼자의 위치에서 관찰하고 있다. 이는 현재적 자아를 객관적 시점에서 관찰하는 것이다(서문)”라고 천명하였듯 마침내 전통적으로 서정성은 인간의식의 내면 심층에서 공감된 삶의 신비를 ‘바람과 바다, 그리고 빛이 만나는 모성적 공간을 시의 본질인 서정시로 형상화했기에 사각의 빌딩 숲에서 인간 소외감을 떠올리는 그 행위는 연민의 대상으로 가늠할 바다.
결론적으로 그 자신이 풀어쓴 정직하고도 따뜻한 감성, 그리고 ’느림의 시학‘은 소중한 미적 주권의 확립과 내적 사유의 큰 틀을 유지할뿐더러 천상의 층계를 오르는 고독한 순례자의 행보는 반복적으로 이행되고 있다. 까닭에 매개적 정신 능력의 범주에서 시적 상상력의 확장은 신비로운 영성에 의해 일상의 감동을 회복시켜주기에 더없이 다행스럽다. 모쪼록 심상의 미적 주권의 확장을 위해 시의 독자성 회복은 물론이고 ‘작은 신의 대행자(代行者)’로서 전통의 틀을 쌓고 허물며 아우르기를 반복하는 ‘작은 사제로서의 소임’을 끊임없이 수행함으로 ‘환한 웃음 뒤에 부서지듯 사라지는 그 삶의 고뇌’가 하늘의 은총으로 충만하기를 하나같이 기대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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