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절친, 처남 ‘林秉英’
-세상, 純粹순수한, 素朴소박한, 正直정직한, 多情다정한, 勤勉근면한, 儉素검소한, 純眞순진한, 한 사람을 뽑는다면?
-세상, 평생 先山 保存선산 보존, 父母幽宅 保存부모유택 보존, 營農 鬼才영농 귀재, 掃地 達人소지 달인, 淸淨청정한 한 사람을 뽑는다면?
-평생, 충실한 家長 한 사람을 뽑는다면?
그가 바로 나의 切親절친, 처남 ‘林秉英’
林公의 일생을 보면 가엾기까지 하다.
갓 돌이 지나 열병을 알았다. 잘 생신 용모와 건장한 체격이었지만 열병에는 속수무책이었던 때, 그는 청력을 잃고 말았다(평생 난청). 언어구사가 안되더니 일곱 살 때에야 ‘엄마’라고 외쳤단다.
당시는 여순반란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하고 6.25 동란으로 살던 집(종가집)이 소실되어, 피난생활, 家勢斜向가세 사향으로 장애아 林公은 학교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저 부모님 모시고 근근히 가사에 종사했다.
林公은 배움은 없었지만 가풍을 전수 받아 예의범절을 익하고 농사법을 익혀 가사에 전념했으며 선산을 지키는 일에도 매진했다.
장모님은 애지중지했던 아들이 장애를 갖게 되면서 그에 대한 애절한 보살핌이 더했다. 따스한 가르침에 순종했던 아들. 차츰차츰 지각이 트이고 힘이 강해지면서 강인한 육체와 재빠른 동작으로 매사를 긍정적으로 처리했다.
이런 순수한 청년이 있다는 매파의 중매로 영리하고 참한 부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부인(처남댁)은 남편을 얕보지 않고 가문의 법도를 지켜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었다. 부인도 억척이었다. 남편과 같이 농사에 매진하고 아들 둘, 딸 둘 예쁘고 건강하게 낳아 마을에서나 고향 사람들에게 칭송 받는 자녀로 키워냈다. 부농이 된 것이다.
林公과는 절친이기도 하지만 같은 사랑방에서 딩구는 사이다. 가끔 장인 장모님 산소를 참배할 때면, 어느새 林公이 먼저 산소에 와 있다. 어느 때는 알리지도 않았는데 산소에서 만난다. 그만큼 부모님 산소에 자주 오간다는 예기다.
처가(장손 광주이거로 종손가로 이거)에 가면 처남 부부가 이것저것 내 놓는다. 음식 솜씨 좋은 처남댁, 손재주 많은 처남 합작이다. 때론 씨암탉을 잡기도 한다. 말려도 소용없다.
우리는 가끔 여행도 했다. 농업박물관, 목포 해변, 삼성궁, 한강 나들이, 현충사... 농업박물관에 비치된 오랜 농기구와 가구를 보고 또 보고 시간가는 줄 몰랐다.
집에서 잘 때는 항상 林公의 방이다. 군불을 따뜻하게 넣어두고 나를 이끈다. 큰소리로 이야기도 나누고 그가 좋아하는 TV도 보고 딸이 사준 카세트라디오도 듣는다. 이제 많이 익숙해져서 쉬운 글자나, 음악이나, 영상을 즐긴다.
아침에 눈을 떠보면 林公은 자리에 없다. 이미 새벽에 논밭 건사하기에 바쁘다. 발을 흠씬 적시고 집에 와서 신발을 씻고 방에 들어오는 시각이 아침 식사시간이다. 정확하기가 시계바늘이다. 아침 오전 오후 과학적인 플랜이 있다. 그래서 농사 잘 짓는 ‘영농왕’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농기구 농기계 다루는 솜씨가 과학자 뺨친다. 경운기, 트랙터, 자전거, 군불 때는 방 굴뚝 환풍기 설치 등 하지 못하는 기술이 없을 정도다. 정상아로 교육을 받았다면 처가식솔 중 가장 으뜸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손자가 하는 말. “우리 할아버지는 못하는 것이 없어. 최고예요.”
지난 해 추석 때의 일이다.
장인 장모님 산소 참배를 하던 날,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林公이 오고 있었다. 매일의 일상이 산소에 들르는 것 같았다.
참배를 마치고 처가에 들렀더니 옷을 갈아입고 마당에 나서면서
“매제, 율포에나 다녀오세.”
하기에, 그러자며 아내와 함께(처남댁은 다리수술 중) 시골길을 이리저리 승용차로 달려 율포에 갔다. 드라이브를 마치고 수산물직판장에 들러 활어를 구입하고 다시 처가에 도착했다.
그 때 처남댁이 말씀하시기를 요새 林公이 오락가락한 것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손 떨림이 보인다고 했다. 오락가락한다는 말은 치매를 의심하는 말씀이고 손 떨림은 파킨슨병을 의심하는 말씀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林公은 머지않아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평생 잔병이 없더니 최근 3년 간 잔병이 많아져 농사일도 접었고 2년 전에는 복부 대수술을 받았다.
요양병원이 좋다지만 林公에게는 적응하기 어려웠던가 보다. 분리불안 증세로 집에 가고 싶어 하고 침대에서 자주 내려와 간병인을 힘들게 했다고 한다. 더욱이 난청에 치매에 파킨슨에 두루 겹쳐 큰소리를 지르니 병원에서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통보가 왔다고 들었다.
어제 새벽 4시 40분.
아내 전화벨이 울렸다. 예감이 좋지 않아 처남을 먼저 떠 올렸다.
처 장조카의 울음 섞인 부음이었다.
인생!
누가 그 인생을 정당하게 평가하리오.
그러나 내 절친 林公은 누가 뭐라 해도
-순수한, 소박한, 정직한, 다정한, 근면한, 검소한, 순진한 사람
-평생, 선산 보존, 부모유택 보존, 영농 귀재, 소지 달인, 청정한 사람
-평생, 가정에 충실한 사람
그가 바로
나의 절친, 처남 ‘임병영(1942-2023)’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처가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2023.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