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회 주보에 하나원 교육생 가정체험 봉사자 모집 광고가 한 달 전부터 실렸다. 중국연변과 백두산
여행에서 본 두만강 건너편의 한 소년과 북한식당에서 공연하던 북한아가씨들의 모습에서 민족애를 느꼈던 터라 마음이 계속 쓰였다. 체험일이 8월20일 오전부터 21일 오후까지이니 21일 하하아기편지 글감으로도 좋은 체험이 될 거같았다. 그런데 하하씨네 영화관람과 영어그룹스터디를 할 수 없게되고 자신도 없고 두렵기도하였다. 그래서 직접 봉사하지않고 절친한 교우,바올라씨가 봉사하는 동안 따라다니며 체험해보려고 사전교육에 참석했다가 담당수녀님께서 봉사자가 부족하다고 하셔서 봉사하기로 하였다. 북한노래를 부르는데 목이 메어왔다. 내 가슴속의 먹먹함과 울렁임은 정녕 아직 만나지도 않은 북한이탈주민으로 말미암은 게 아닌 내 자신의 마음속 깊이 내재되어 있었던 아픔과 슬픔인 듯하여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 추스렸다.
드디어 20일 오전11시반에 대형버스 두 대가 도착하였고 봉사자들 모두 환영의 박수를 치고 파란색 단체복차림의 하나원교육생들의 모습에 동료 교우들과 함께 또 울컥, 내가 평소 좋아했던 자매님이 “우리가 벌써 울면 안되는데” 하시었다. 성당에 모여 환영식을 하고 차례차례 짝꿍이 정해지면 포옹을 하였다. 서너살된 딸아이를 데려온 새댁과 21살의 아가씨를 포함하여 63명이 왔는데 작년엔 100명이 넘었다한다. 광주에는 600명정도 살고 있고 새터민이란 용어 대신 북한이탈주민이라 부르게 되었다한다. 내 생각엔 북한이주민이 더 나을 거 같다.
나의 짝꿍은 46세로 기구한 사연이 있다하였으나 아픔을 건드리지말라는 유의사항을 지키려 애써 참고 묻지 않았는데 둘째날 스스로 본인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두 번 두만강을 건넜고 결혼도 두 번 하였으니 기구한 사연이였다. 탈북하여 연변에서 조선족남자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았는데 발각되어 다시 북송되어 고문을 받고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영양실조에 걸려 머리칼이 하나도 없게 되고 뼈만 남고 몸에서 진물이 나는 피부병까지 걸려 버려졌다가 가까스로 친언니집을 찾아갔는데 언니가 동생을 처음엔 못 알아보았다고 하였다. 극진한 간호를 받고 북송된지 2년이 채 안되어 언니와 시댁의 도움으로 다시 두만강을 죽음을 무릅쓰고 건너갔다. 남편은 외로웠는지 새로운 여자와 살고 있었고 그 후 한국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버린 후 조선족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단다. 북한민들은 중국인과의 결혼이 허용이 안된다. 그래서 남편과 같이 제주도로 여행와서 공항에서 자수하였다. 국정원의 수사를 3개월 받고 하나원교육 3개월 받으면 한국국적을 갖게 되고 남편과의 결혼이 합법화 된다. 하나원교육수료 후 정착지를 아들이 살고있는 경기도로 지망하였으나 광주로 정해져 울었단다. 아들이 보고싶은 마음 오죽할까 안타까웠다. 살기좋은 광주에 대해 설명해 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시장체험하라고 받은 기프트카드로 옷을 사겠다하여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바올라씨와 그녀의 짝꿍 21세 아가씨와 같이 양동시장을 둘러보고 정찰제가 더 나을 듯 싶어 홈플러스로 다같이 이동하였다. 옷을 사게 도와준 다음 먹고 싶은 걸 물어보았더니 고향에서 자주 먹었던 옥수수와 김치라 하였다. 그건 이미 준비해둔 거였다. 요리선생님인 동료교우의 집에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였다. 모싯잎갯떡,찐고구마,옥수수와 과일은 내가 마련하고 바올라씨가 럭셔리한 마늘소스 돼지고기 냉채와 잡채와 김치찌게를 만들어 진수성찬이었다. 식사후 차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올라씨가 매일 성서읽기를 권유했다. 잠은 각자 집에서 잤다. 이튿날 아침 짚봉산 산책을 하고 아침식사를 모여서 하였다. 메뉴는 전복죽과 웨지감자와 커피였고 더불어 행복했다. 해년마다 하나원교육생과 봉사자들 모두 5.18묘지를 갔었는데 이번엔 갑자기 취소되어 못가게되고 대신 가정체험시간이 늘어났다. 바올라씨의 안내로 암웨이매장을 견학시켜주고 평생교육원에 다시 모였다.
가정체험 소감발표시간에 한 교육생은 오기전에는 짝꿍과 같이 하는게 서먹할거 같아 걱정했는데 친정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하였다. 그리고 이 고마움을 이 순간부터 마지막으로 숨쉬는 순간까지 잊지 않겠다하며 진짜 한 혈육이라는 걸 느꼈고 꼭 통일이 되어야한다고 절실히 느꼈다했다. 또 다른 분은 돌아가신 아버지대신 아버지의 고향을 왔다며 통일의 밑거름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드디어 헤어지는 시간이 되어 이별을 아쉬워하며 포옹하였고 나의 짝꿍은 10월에 광주로 다시 오기 때문에 전화번호를 주며 꼭 연락하라고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아가씨는 서울로 배정되었지만 역시 연락하라고하였다. 바올라씨가 딸이 생겼다하며 좋아했고 지속적으로 도와 주실 분이어서 마음이 든든했다. 행사준비하고 진행해주시느라 애써주신 수녀님! 하느님 사랑 많이 받으시길 받으십시오. 하나원교육생들 모두 잘 정착하여 남한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빨리 통일이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칩니다.
첫댓글 같은 민족이라 수 많은 세월을 달리했어도 동질의 생각,문화가 어딘가에 존재했겠지요.동족이잖아요.
참으로 좋은 체험을 했네요.죽음과 바꾼 자유.많은 역경에 숙연해집니다.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힘들게 찾은 자유, 잘 정착하여 한국에 뿌리 내리도록 우리의 관심과 배려를 보내봅시다.목숨 걸고 왔잖아요.이기적인 남한 사람들의 냉랭한 반응과 무관심에 상처와 실망을 안고 다시 월북도 한다죠.좋은 행사와 봉사에 참여한 루시아님의 마음..모두 아름답습니다. 혈육상봉, 통일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우리 민족은 언제까지 이렇게 헤어져 살아야 할까요.
약해 보이고 유해보이는 언니 모습 뒤의 그 실천력과
강인함과 부지런함이 항시 존경 스럽습니다
상처입고 한편으로는 두려웠을 그분들에게 착한언니가따뜻한 마음나누어 주셔서 하나원에서 받은 어떤 교육보다도남한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요
그 분들께는 더 행복하시라는 마음의 기도를 언니에게는
수고많으셨다는 마음의 격려 보냅니다
앵두꽃이 피면[곽재구]
앵두꽃이 피면
가시내야
북한 가시내야
너에게 첫 입맞춤을 주랴
햇살도 곱디고운
조선 청보리 햇살 거두어다
바람도 실하디 실한
남도 산머루 바람 거두어다
너의 속살 고운 치마폭에 널어놓고
돌산머리 애장터
아메리카나 소비에트나
팔푼 얼간패 좀 보라고
앵두꽃이 피면
가시내야
북한 가시내야
너에게 오천 년 조선 머스마의
까치동 첫사랑을 주랴
좋은 경험을 하셨네요. 다음 기회 있으면 나도 한번 데려가 주세요. 두 손 잡고 같이 울어주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