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서(Ssu shu , 四書)
(요약)
1313~1905년 중국의 관리 등용시험인 과거에 공식 과목으로 사용되었던 4권의 고대 유가 경전.
(병). Si Shu. (웨). Ssu Shu. (영). Four Books.
* 중국의 전통 문화를 집대성하다(유가 학파 창시) -시대 : BC 520 혹은 497경 중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가 사상은 춘추 시대 공자에게서 시작되었다. 공자는 서주 시대의 질서 회복을 목표로 정명을 내세웠고 이를 위해서는 인(仁)이 기초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유가 사상은 전국 시대에 이르러 맹자와 순자로 이어졌다. 맹자는 공자의 인 사상을 계승했으며, 순자는 예를 중시한 자하파를 계승했다. 맹자는 인 사상을 바탕으로 성선과 왕도 정치를 주장했으며, 순자의 사상은 성악을 바탕으로 하며 법가로 이어졌다. 춘추 시대 공자에게서 비롯된 유가 사상은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중국의 사회, 사상, 정치,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상이다. 춘추 시대 제자백가 중 가장 먼저 성립되었으며, 전국 시대의 맹자가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공자는 노(魯)나라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조상은 송(宋)나라의 몰락한 귀족이었다. 그는 조실부모했지만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17세에 노나라의 말단 관리 신분으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예(禮)》를 익혀 서주 시대 문화에 접근했다. 공자는 청년 시절부터 주 무왕의 조카로 성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틀을 세운 주공을 이상적인 인물로 삼았고, 동주의 수도 낙읍에서 유학하며 서주 시대의 문화를 경험했다. 그는 30대에 이르러 학문에 큰 진전을 보였으며, 노나라의 수도 곡부에서 사학(私學)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귀족 자제들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데, 공자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공평하게 교육시켰다. 이때 문하생으로는 자로, 증점, 염백우, 염구, 중궁 등이 있다. 공자는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삼환(三桓), 즉 계손, 숙손, 맹손 등의 공격을 받아 노 소공이 제나라로 쫓겨나자 소공과 함께 제나라로 향했다. 그는 제나라 경공과 함께 음악을 논하는 한편, 정치를 묻는 경공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를 강조했다. 정명주의는 각자가 자신의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자의 주장은 제나라 대부 안영의 반대에 부딪혀 실행되지 못했으며, 이에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나라로 귀국한 공자는 중도(中都)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1년 만에 그곳의 질서와 예의, 윤리의 기틀을 마련했고, 점차 인망이 높아지자 기원전 500년에는 대사구(大司寇, 지금의 최고법관)가 되었다. 그리고 노나라와 제나라의 협곡(夾谷) 회담에 참석해 과거 제나라에게 뺏겼던 문수(汶水) 북부 일대의 땅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공자의 관직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공자는 노나라의 왕권 회복을 위해 삼환 타도를 주장하면서 삼환과 대립했다. 당시 노나라에서는 제례 의식을 치르고 제사에 사용된 고기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신하를 예우했다. 그런데 공자는 삼환의 농락으로 고기를 하사받지 못했고, 이에 그는 관직을 버리고 노나라를 떠날 결심을 했다. 공자, 공자는 서주 시대를 이상적인 시대로 생각하고 여러 나라를 유랑했으나 그의 정치 이념을 받아들여 주는 곳이 없었다. 노나라를 떠난 공자는 몇몇 제자들과 함께 위, 송, 조, 정, 진, 채 등 여러 나라를 유랑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 이념을 실현시켜 줄 군주를 찾았으나, 부국강병을 제일의 목표로 삼던 춘추 시대와 그의 사상은 맞지 않았다. 결국 10년이 넘는 세월을 떠돌던 그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 육성과 저술에 전념했다. 그는 고전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관점에 따라 《역경(易經)》, 《서경》, 《시경》, 《예기》, 《춘추(春秋)》, 《악기》 등을 정리했다. 공자는 주공이 살았던 서주 시대를 이상적인 시대로 생각했다. 따라서 서주 시대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실현 방법으로 정명을 내세웠다. 정명은 계층 간의 직분과 한계를 명확히 한 것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직책과 직분에 충실하면 사회 제도와 조직은 순조롭게 운영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형성된 질서는 반드시 도덕적 관념 인(仁), 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그는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말고, 교육을 통해 도덕적 인의 완성자인 군자(君子)를 길러 낼 것을 주장했다. 결국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도덕 철학은 인이었으며, 공자가 주장한 예(禮), 효(孝), 제(悌), 충(忠) 등 나머지 덕목들은 인의 실천 방법이었다. <효경도>《효경》은 효도에 관하여 공자가 한 말을 기록한 책이다. 공자의 사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수많은 제자들에게 전해졌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공자는 3천여 명의 제자를 가르쳤으며, 그중 우수한 제자가 72명이었다고 한다. 특히 덕행에서는 안회, 민자건, 염백우, 중궁, 언어에서는 재아, 자공, 정사에는 염유, 자로, 고대 문헌에서는 자유, 자하 등이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이들은 공자가 죽고 난 후 모두 여덟 개의 파로 나누어졌다. 그중 증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효 중시파와 자하를 우두머리로 하는 예 중시파가 중요했다. 이후 공자의 사상은 전국 시대에 맹자와 순자로 이어진다. 전국 시대는 오직 강한 국력을 가진 나라만이 계속되는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시대로, 당시 유가는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유가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맹자가 뛰어난 언변으로 공자 사상을 전파한 후부터였다. 그리하여 맹자는 공자 다음 가는 성인을 의미하는 '아성(亞聖)'의 자리에 올랐다. 맹자는 전국 시대 추나라 출신으로, 노나라 공족 맹손씨의 후예이다. 그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단기지계(斷機之戒)로 유명해진 어머니 예(倪)씨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공자의 제자이며 《중용(中庸)》의 저자인 자사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공자의 인 사상을 계승했으며, 공자가 제시하지 못한 인을 실천하는 근거를 '성선(性善)'에서 찾았다. 즉 인간의 성품은 나면서부터 착하며, 인간 본성에는 네 가지 마음씨가 있다고 했다. 이것을 사단(四端)이라 하며,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쌍히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잘잘못을 아는 마음)이 있다. 그는 이러한 사단을 자각하고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 인의예지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특히 맹자는 인 사상이 정치에 실현되면 왕도 정치가 성립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당시 전국 시대에 유행하던 무력 및 권모술수를 통한 패도 정치와 대립되는 개념이었다. 왕도 정치는 군주의 도덕적 실천에 의지하며, 구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백성을 기르는 양민, 백성을 가르치는 교민을 주장했다. 구체적인 정책으로는 정전제, 학교 교육, 농사철 보호 등을 제시했다. 또한 맹자는 민본을 정치의 근본으로 여기고, 백성들을 위하는 정치를 펼치지 못한다면 군주 방벌도 가능하다고 했다. 이는 역성혁명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혁신적 사고였다. 1989년 발행된 공자 우표 공자 탄생 2,540주년을 맞아 중국에서 발행된 우표. 공자와 그의 사상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맹자가 공자의 인 사상을 계승했다면, 전국 시대 순자는 공자의 예를 중시한 자하파를 이었다. 그러나 순자는 자유와 자하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유가를 따르면서도, 유가와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맹자의 성선설과 정반대의 개념인 성악설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는 악과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을 제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교육을 강조했다. 또한 인간은 무리를 형성하므로 각자의 본분을 지키지 않으면 분쟁이 생긴다고 보았다. 이렇듯 순자의 예는 공자의 예처럼 고정된 규범이 아니라 법적 강제력이 부여된 것이었기 때문에 기존 유가와 차이를 보였다. 이런 점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이사와 한비자 같은 법가들이 탄생했다. 유가는 시대에 따라 변화, 발전하며 중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통일 국가가 등장하면서 통치자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사용되었고, 한나라 무제 때에는 유교(儒敎)로 승화되어 중국의 국교로 불렸을 정도였다. 중국 역사에서 도교나 불교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적도 있었으나, 통치 이념으로써 2,500여 년간 개인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 전반에 막강한 역량을 발휘했다. 또한 유가는 중국의 전통 문화를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 역대 시문학은 《시경》, 문물과 제도는 《예기》, 최초의 왕조부터 주나라까지의 역사는 《춘추》, 점복과 관련된 것은 《주역》 등의 유교 경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가는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특히 조선은 유가를 바탕으로 정치, 사회, 법률, 학문, 문화 등을 이룩해 나갔다. ㆍ 기원전 551년 : 유가를 창시한 공자가 춘추 시대에 주나라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태어나다. ㆍ 기원전 479년 : 공자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다. ㆍ 기원전 312년 : 맹자가 공자의 인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고 제자 육성 및 저술에 힘을 쏟다. |
중국의 학생들에게 유학을 처음 가르치는 데 주로 사용되며 4서를 배운 후에는 더 광범위하고 어렵다고 알려진 5경(五經)을 배운다.
1190년 중국에 유교를 부흥시킨 대성리학자 주희(朱熹)가 〈사서장구집주 四書章句集註〉라는 주석서를 쓴 뒤로 4권의 책이 함께 간행되기 시작했다. 1415년부터는 주희 혹은 그와 같은 경향의 주석서에 대한 지식이 과거시험에서 경전 자체만큼이나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각각의 주석서까지 포함하여 4서는 그리 많지 않은 내용의 4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번째 <대학>은 어진 정치, 즉 인정(仁政)과 군주의 덕을 연결시킨 정치윤리학에 관한 짧은 글이다. 2번째 <중용>은 〈대학〉보다는 길고 나머지 3권의 책보다는 추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천도(天道)·충서·덕·성(性)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 2권의 책은 모두 5경 가운데 하나인 〈예기 禮記〉에서 발췌한 것인데, 주희가 각각 서문을 썼다. 3번째는 <논어>로 고대 성인 공자(孔子:BC 551~479)의 언행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
논어
* 대학(Ta hsueh , 大學) (요약) 고대 중국의 현인 공자와 그의 제자 증자가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간략한 유교 경전. (병). Da xue. (웨). Ta hs 수세기 동안 유교의 오경 가운데 하나인 〈예기 禮記〉의 한 편으로만 전해져왔으나, 12세기 철학자 주희(朱熹)가 4서 가운데 하나로 독립간행함으로써 유명해졌다. 〈대학〉에 따르면 세상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먼저 자기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가정의 질서를 잘 유지해야 하며, 또 이를 위해서는 먼저 심성을 바르게 하고 성실하게 자기 생활을 세워야 한다[修身齊家治國平天下]. 이와 같은 덕은 만물을 연구해서 지혜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은 덕치와 천하태평은 군주의 개인적인 덕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군주의 덕이란 학문이 지혜로 발전할 때 비로소 발현되기 시작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희는 〈대학〉 서문에서 〈대학〉은 개인이 발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각 개인은 자비심[仁]·정의[義]·예절[禮]·지혜[智]를 길러야 하지만, 모든 사람이 높은 덕을 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사시대 고대 중국 황금기의 전설적인 5명의 왕, 즉 복희(伏羲)·신농·황제(皇帝)·요(堯)·순(舜)의 경우에 그랬듯이 하늘은 덕이 가장 높은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대학 유교경전. 자사가 지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송대에 주희가 '예기'에서 '중용'과 '대학' 두 편을 독립시켰다. 주희의 '대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1419년으로 그 후에 널리 보급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 중용(中庸) (요약) 사서의 하나로, 유교의 철학적 배경을 천명한 유교경전. 내용≪대학≫·≪논어≫·≪맹자≫와 더불어 사서(四書)라고 한다. 유교에서 사서라는 일컬음이 생긴 것은 중국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이다. 주희(朱熹)가 ≪예기≫ 49편 가운데 <대학>·<중용>을 떼어내어 ≪논어≫·≪맹자≫와 함께 사서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후 사서는 유교의 근본 경전으로 반드시 읽어야 하였다. ≪중용≫은 이와 같이 ≪예기≫ 속에 포함된 한 편이었지만 일찍부터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 왔으며, 한나라 이후에는 주해서가 나왔으며 33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송나라 정이(程頤)에 이르러 37장이 되었다가 주희가 다시 33장으로 가다듬어 독립된 경전으로 분리시켰다. ≪중용≫의 작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종래에는 ≪사기 史記≫의 <공자세가 孔子世家>에 “백어(伯魚)가 급(伋)을 낳으니 그가 자사(子思)였다. 나이 62세에 송나라에서 곤란을 겪으면서 ≪중용≫을 지었다”라는 대목이 있어 공자의 손자 자사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청대에 고증학이 대두되면서 자사의 저작이라는 정설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학자는 진(秦)·한(漢)시대의 어떤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저작이라 고증하기도 하고, 또는 자사의 저본(底本)을 바탕으로 후세의 학자들이 상당기간 동안 가필해 완성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여 아직까지 유력한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중용≫을 흔히 유교의 철학 개론서라 일컫는데, 그것은 유교의 철학적 배경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장(首章) 첫머리에서 “하늘이 명(命)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대목은 유교 철학의 출발점과 그 지향처를 제시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삶을 누리자면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그 배움에는 길[道]이 있고 길은 바로 본성(本性)에 바탕하며, 본성은 태어나면서 저절로 갖추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태어나면서 저절로 갖추어진’ 본성을 유교에서는 맹자 이후 ‘순선(純善)’한 것이라 생각하였으며, 송대에 와서 정립된 성리학은 이에 기초해 전개되고 있다. ≪중용≫은 33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전반부·후반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전반부에서는 주로 중용 또는 중화 사상(中和思想)을 말하고, 후반부에서는 성(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中)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며,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不偏不倚無過不及)을 일컫는 것이고, 용(庸)이란 떳떳함[平常]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희는 설명하였고, 정자(程子)는 기울어지지 않는 것[不偏]을 중이라 하고 바꾸어지지 않는 것[不易]을 용이라 하였다. 중화 사상은 중용을 철학적 표현으로 달리 말한 것인데, 이 때의 중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발로되기 이전의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마음이 발해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중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라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우주 만물이 제 모습대로 운행되어 가는 것을 뜻한다. 성(誠)은 바로 우주 만물이 운행되는 원리이다. 그 원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꿰뚫어 있다. 그래서 “성은 하늘의 도이고 성되려는 것은 사람의 도”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성실한 것은 우주의 원리이고, 성실해지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라는 뜻이다. 결국, 사람은 우주의 운행 원리인 성을 깨닫고 배우고 실천하는 데에서 인격이 완성되며, 결국에 가서는 천인합일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신라 원성왕 4년(788) 관리 등용법인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태학(太學)에 설치할 때 그 과목 중에 ≪예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삼국 시대에 ≪예기≫의 한 편으로서 ≪중용≫을 접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고려 말 정주학을 수용한 이후에는 사서의 하나로 ≪중용≫을 극히 존숭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권근(權近)은 사서에 구결(口訣)을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모든 유학자들이 ≪중용≫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성리학이 바로 ≪중용≫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 사회에 있어서의 학술의 전개와 민족 문화 발달에 중용적 철학 사상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
* 논어(論語) (요약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유교경전. (내용) 공자는 서기전 551년 노(魯)나라 양공(襄公) 22년에 태어났다.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어서 가난에 시달리고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도 부지런히 이치를 탐구하고 실천에 힘써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20대에 이미 이름을 떨쳐 제자들이 따르게 되었으며, 그의 관심은 예(禮)와 악(樂)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있었다. 당시 노나라는 계손(季孫)·맹손(孟孫)·숙손(叔孫)의 삼환씨(三桓氏)가 정권을 농락하는 형편이었다. 공자는 51세 때 대사구(大司寇)까지 역임했으나 자신의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 뒤 천하를 다니면서 정치적 혁신을 실현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68세에 고국으로 돌아와 후진 육성에 힘썼다. 공자는 인(仁)의 실천에 바탕을 둔 개인적 인격의 완성과 예로 표현되는 사회질서의 확립을 강조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이상국가를 지상에 건설하려 하였다. 만년에 육경(六經) 편찬에 힘쓴 것은 후세에게나마 그의 이상을 전하고 실현을 기약하려는 뜻에서였다. 공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그의 사상은 실천을 전제로 한 도덕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따르는 제자가 3천인이 넘었다 하는데, 그 가운데 72인이 뛰어났다고 한다. ≪논어≫의 편찬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① 자하(子夏)를 비롯한 공자의 제자들, ② 자하·중궁(仲弓)·자유(子游) 등, ③ 증삼(曾參)의 문인인 악정자춘(樂正子春)과 자사(子思)의 무리, ④ 증삼과 유자(有子)의 문인 등이 그것인데, ≪논어≫가 공자 자신의 손으로 기록, 정리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논어≫라는 책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양(梁)나라의 황간(皇侃)은 “이 책은 공자의 문인에게서 나온 것이다. 먼저 자세히 따진 뒤에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한 뒤에야 기록했으므로 ‘논(論)’이라 하였다. ‘어(語)’란 논란에 대해 대답하고 설명한다는 말이다.”라고 말하였다. 원(元)나라의 하이손(何異孫)은 ‘논어’가 “글뜻을 토론한 데서 생긴 이름”이라 했고, 청(淸)나라의 원매(遠枚)는 “논이란 의논이란 뜻이며 어란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라고 풀이해서 의견이 다양하다. ≪한서≫에 의하면, 한나라 때에는 세 가지 종류의 ≪논어≫가 전해오고 있었다 한다. 제(齊)나라 사람들이 전해온 제논어, 노(魯)나라에서 전해 온 노논어, 그리고 공자의 옛집 벽 속에서 나온 고문(古文)의 논어가 그것이다. 지금 전해지는 ≪논어≫는 전한 말의 장우(張禹)가 노논어를 중심으로 편찬한 교정본(校定本)이다. ≪논어≫는 모두 20편으로 나뉘어 있고, 각 편의 머리 두 글자를 따서 편명으로 삼고 있다. 예컨대, 첫 편인 학이(學而)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에서 따 왔다. 따라서 ≪논어≫의 내용 구성은 ‘배움’에서 시작해 ‘하늘의 뜻을 아는 것(知命)’까지로 되어 있다. ≪논어≫의 내용은 ① 공자의 말, ② 공자와 제자 사이의 대화, ③ 공자와 당시 사람들과의 대화, ④ 제자들의 말, ⑤ 제자들간의 대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들 모두는 공자라는 인물의 사상과 행동을 보여주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 나라에 유교가 전해진 것은 중국과의 접촉이 활발해지고 통치질서와 정치윤리에 대한 요구가 드높아가던 삼국시대였다. ≪논어≫도 이 무렵에 전래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삼국사기≫에는 642년에 죽죽(竹竹)이라는 화랑이 인용한 ≪논어≫의 구절이 보인다. 설총(薛聰)이 구경(九經)을 이두로 읽었으며 강수(强首)가 불교보다 유교의 도리를 배우겠다 하여 뒤에 외교문서 작성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사실은 유교적 교양의 바탕인 ≪논어≫가 당시에 이미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증거한다. 682년(신문왕 2) 국학이 체계를 갖추었을 때 ≪논어≫를 가르쳤으며, 그 뒤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로 인재를 선발할 때도 ≪논어≫는 필수 과목이었다. 고려조에 들어와 문묘(文廟)와 석전의 의례를 갖추는 한편, 사회적·정치적 제도를 정비한 성종은 990년(성종 9) 서경에 수서원(修書院)을 설치해 전적과 문헌을 수집하게 했는데, 물론 ≪논어≫도 여기에 수장(收藏)되었다. 이 무렵 서적의 인쇄와 역사서 편찬, 그리고 궁중의 경연이 성했는데, ≪논어≫는 경연에서 자주 거론된 경전이었다. 조선시대는 오경(五經)보다 사서(四書)를 중요시하는 주자학이 사상·문화 전반의 이념으로 등장하였다. 따라서 사서의 중심인 ≪논어≫는 시골 벽촌의 어린 학동들까지 배우게 되었다. 이황(李滉)은 논어의 훈석(訓釋)을 모으고 제자들과의 문답을 채록해 ≪논어석의(論語釋義)≫를 지었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의 문인 이덕홍(李德弘)의 ≪사서질의(四書質疑)≫가 그 면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 뒤 학자들의 주석이 수없이 많지만 대개는 단편적인 글귀에 대한 나름의 의문과 해석, 아니면 공자의 인격에 대한 찬탄에 그치고 있다. 한(漢)·당(唐)의 훈고와 송(宋)·명(明)의 의리(義理)에 매이지 않고 문헌비판적·해석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논어≫를 해석한 저작이 정약용(丁若鏞)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이다. 한대에서 청대에 이르는 중국의 거의 모든 학자들과 우리 나라 선비, 그리고 일본의 연구성과까지 검토, 비판해 독자적인 주장을 폈다. 논어의 첫 간행은 1056년(문종 10)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논어≫를 포함한 비각소장(祕閣所藏)의 제 경전을 여러 학원(學院)에 나누어 두게 하고, 각각 한권씩 찍어냈다 한다. 이어 1134년(인종 12)에는 이것을 지방의 여러 학관에 나누어주었다. 조선시대에 세종은 주자소를 건립하고 ≪논어≫를 포함한 다량의 서적을 간행해서 각 지방에 보급하였다. 한문으로 된 경전을 우리말로 풀어 이해하기 쉽게 하려는 노력은 전래 초기부터 있어 왔다. 설총이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을 풀이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말의 정몽주(鄭夢周)와 권근(權近)은 각각 ≪논어≫에 토를 달았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다음 전문기관을 설치해 경전의 음해(音解)를 찬하게 하였다. 세조 때에는 구결(口訣)을 정했고 성종 때에 유숭조(柳崇祖)가 ≪언해구두(諺解口讀)≫를 찬집하였다. 선조는 이것이 미비하다 하여 1581년(선조 14) 이이(李珥)에게 명해 사서와 오경의 언해를 상정(詳定)하게 하였다. 사서는 1593년에 이이의 손으로 완성되었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졌다. 이들 언해는 불완전한 번역이었으나 순한문본과 함께 널리 이용되었다. |
이 책은 공자의 제자들, 그 가운데 특히 증자(曾子)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공자의 가르침 중에 가장 믿을 만한 자료로 여겨진다. 4번째는 4서 가운데 가장 긴 <맹자 >로 모든 유학자들에게 존경받는 맹자(BC 371~289)의 가르침을 싣고 있다.
* 맹자(Mengtzu , 孟子) 맹자(孟子), 공자의 사상을 이어 발전시킨 유학자 (개요) 본명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자거(子車 또는 子居), 시호는 추공(鄒公). 공자의 정통유학을 계승 발전시켰고 공자 다음의 아성(亞聖)으로 불린다. 그가 내세운 기본원칙의 핵심은 백성에 대한 통치자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다. <맹자 >는 그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서 인간의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있다. 성선설은 현대에 와서도 유교학자들 사이에서 열띠게 논의되고 있는 주제이다. 1. 초기생애 맹자의 가문은 귀족가문으로 현재의 산둥 성[山東省]에 해당하는 작은 국가 추(鄒)에 정착해 살았다. 맹자는 추나라에서 BC 371년경에 태어났는데 그의 일생은 여러 면에서 공자의 일생과 닮은 점이 많았다. 추와 노(魯:공자가 태어난 나라)는 인접한 국가였고 공자와 마찬가지로 맹자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의 어머니는 묘지·시장·학교 부근으로 3번이나 이사해(孟母三遷) 마침내 맹자가 학교 근처의 면학적 분위기에 적응해 공부를 열심히 하게끔 교육적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외에도 학업에는 인내와 열성이 중요하다는 잊지 못할 교훈을 주기 위해, 베틀 위의 베를 찢어버린 맹모단기(孟母斷機)의 일화로 유명하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맹자의 어머니는 수천 년 동안 전형적인 어머니상으로 숭배되어왔다. 젊은 학자 시절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으로 수업했다. 이렇게 해 공자 사상의 정통성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마침내 맹자도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고 잠시 제(齊)나라의 관리로도 일했다. 그는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제후들에게 인정(仁政)을 베풀라고 조언했다. 그당시는 혼란기였기 때문에 제후들은 인정보다는 패도(覇道)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인정에 바탕을 둔 왕도(王道) 정치를 역설한 맹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주(周:BC 1111경~255)나라는 사회적·정치적 위계질서가 분명한 봉건주의 원칙에 바탕을 둔 국가였다. 따라서 신분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사이에는 분명하게 규정된 특권과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야심과 음모로 인해 지위의 찬탈과 형벌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봉건제도는 뿌리째 뒤흔들리게 되어 엄청난 정치적·도덕적 무질서가 야기되었다. 공자에게 큰 근심을 주었던 이러한 상황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악화되었고, 그결과 맹자가 태어나 활약했던 시대에는 중국 역사상 전국시대(BC 481~221)라고 불리는 난세가 도래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제후들에게 개인적 덕행과 선정(善政)을 강조한 맹자의 가르침은 소귀에 경읽기와 같은 형국이었다. 비록 자신의 원칙이 주의를 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맹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펴나갔다. 2. 백성을 위한 철학자 맹자에 의하면 통치자는 2가지 측면에서 백성의 복지를 보살펴야 된다고 한다. 즉 백성들의 생계를 보장하는 물질적인 상황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도덕적·교육적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그는 백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해주는 구체적 계획에 대해 언급했고 이 이야기가 〈맹자〉에서 3번이나 나온다. 또한 조세경감, 자유무역, 천연자원의 보존, 노약자를 위한 복지대책 수립, 보다 공정한 부의 분배 등을 주장했다. "생계수단이 든든할 때라야 든든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恒有産 恒有心)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맹자는 패도를 버리고 왕도를 따라 인정을 펴야 한다고 꾸준히 제후들에게 권유하는 한편, 천명(天命)을 얻음과 함께 통치자는 백성들의 복지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과감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백성이 국가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토지와 곡식의 신은 그 다음이다. 통치자는 가장 마지막에나 놓이는 구성요소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들으라고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인 〈서경 書經〉에 나오는 "하늘은 백성이 보는 대로 보고, 백성이 듣는 대로 듣는다"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맹자는 이처럼 분명하게 백성의 복지를 주장했고 정부의 민주적 통치원칙인 인정을 지지했다. 맹자는 여러 나라를 방문했지만 그의 고결한 통치철학을 실천에 옮기려고 한 제후는 아무 데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맹자의 좌절감은 깊어갔고 마침내 고국인 추나라로 돌아와 여생을 후학 양성에 바쳤다. 〈맹자〉는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기록해놓은 것을 집대성한 것으로 각장 상하 2편, 총 7장 1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3. 성선설 맹자의 철학사상은 공자의 가르침을 확충해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인'(仁)을 가르쳤고 맹자는 성선설을 사상체계의 핵심으로 삼았다. 맹자에게 자명한 진실은사단(四端 : 4개의 마음씨, 즉 惻隱之心·羞惡之心·辭讓之心·是非之心)을 인간이 타고 났다는 점이다. 이 사단을 잘 발달시키면 4개의 최고의 덕인 인(仁)·의(義)·예(禮)·지(智)가 된다는 것이다. 맹자가 주창한 성선설은 수천 년 동안 중국 사상가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맹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직관적 지식과 직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고 개인의 덕성함양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최대한으로 수양한 사람은 자신의 성품을 안다. 자신의 성품을 안다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맹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고대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순(堯舜)과 같은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언제나 주요사상가로 여겨져왔지만 특히 송대(960~1279)의 성리학자들이 그의 사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 1,000년 동안 맹자는 중국인들에 의해 유교의 공동창시자(공자와 함께)로 숭배되어왔으며 공자 다음의 성인으로 존경받아왔다. |
-----------------------------------------------------
*** 중국 유학의 태두 - 공자孔子
* 출생 : BC 551 |
* 사망 : BC 479 |
* 본명 : 공구(孔丘) |
* 국적 : 중국 |
본명은 공구(孔丘),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사상가이자 정치가. 일찍 학문에 눈을 떠 많은 제자들을 길렀으며, 50세 때 잠시 관직에 있다가 그만두고 천하를 주유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고향에 돌아와 후학 양성과 고전 정리 작업에 힘썼으며 BC 479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말을 모아 제자들이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그중 유명한 것으로는 《논어(論語)》,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춘추(春秋)》 등이 있다.
중국 2,500년 역사를 일관되게 지배해온 이념이 있다면 아마도 유학(儒學)일 것이다. 진시황제 시절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얼마 간을 제외하면 모든 중국인들의 정치, 교육, 사상을 지배한 이념이 바로 유교이다.
한 사람의 사상이 2,500년간 수많은 군주들과 정치가, 사상가와 교육가, 일반 민중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 때문에 유교를 종교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공자라는 인물을 석가모니나 예수와 함께 인류의 4대 성인으로 분류하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다.
유교의 역사가 공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와 예수는 각기 한 종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지만, 유교의 창시자는 공자가 아니다. 그는 제사, 천제(天祭), 장례 등의 의식이 수 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려 하다가 옛것에 애착을 느꼈고, 이러한 의식이 주는 소속감과 일체감이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즉, 그는 '옛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 일을 자신의 의무로 삼았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지금의 산둥 성으로 추정되는 노나라 창평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 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가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양력 9월 28일은 동아시아에서 공자의 탄신일로 여겨지고, 타이완에서는 이 날을 '스승의 날'이라 하여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의 〈공자세가〉 편에는 공자의 출생에 대해 이렇게 나와 있다. "공자의 선조는 송나라 공방숙이다. 방숙은 백하를 낳고 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숙량흘은 안씨의 딸과 몰래 통정하여 공자를 낳았다. 출생하면서 머리 위가 볼록하다 하여 구(丘)라는 이름을 붙였다."
공자
《사기》에 근거하여 해석하면 공자는 이른바 사생아라 할 수 있다. 공자의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연유된 명문가였으나 몰락하여 시골에 와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부장이었으나 공자가 세 살 때 사망하여 그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궁핍하게 자랐다. 하지만 그는 마을의 늙은 선생 아래서 열심히 공부를 했고, 어려서부터 종교의례, 제도, 관습 등에 밝았다.
춘추전국시대 전쟁도
17세에 공자는 창고를 관리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 관직에 올라 일을 보면서 노나라의 대학에서 《시경》을 배웠고, 함께 일하던 관리에게서 예법과 음악도 배웠다. 공자는 《시경》의 저자인 주공(주를 창건한 무왕의 동생으로 주의 행정조직을 확립했다)을 흠모하여 그를 마음의 스승으로 삼고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주공 시대처럼 예의가 바르고 평화로운 세상이 공자의 이상이었다.
공자의 나이 36세에 노나라 환공의 후예인 삼환씨(三桓氏), 즉 계손(季孫), 숙손(叔孫), 맹손(孟孫) 세 권세가가 난을 일으켜 노나라 왕인 소공이 쫓겨나고 나라가 세 조각으로 분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자는 소공을 따라 기원전 517년 제나라로 가서 제나라의 왕과 신하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예(禮), 악(樂), 사(射, 활쏘기), 어(御, 마차술), 서(書, 서예), 수(數, 수학)의 육례(六藝)에 능통하고 고전에도 밝았던 그는 곧 훌륭한 스승으로 주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제나라에서 정명주의적 정치 이상에 대해 가르치고 예법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제나라 왕 경공은 그를 고문으로 세우려 했으나 예절의 번잡함과 비현실적인 면을 들어 대부 안영이 반대하자 뜻을 꺾고 말았다. 이에 실망한 공자는 2년 만에 귀국했고, 노나라 정공의 눈에 들어 다시금 지위가 오르게 되었다.
당시 여전히 혼란했던 노나라에서는 계손씨 밑에 있던 양호(陽虎)라는 자가 세력을 모아 정권을 얻기 위해 삼환씨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다. 삼환씨는 총력을 기울여 양호의 세력을 격파하였고, 당시 노정공의 신임을 얻고 있던 공자 역시 양호의 난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결국 양호는 거사에 실패하고 제나라로 도망치게 되었다. 양호의 난을 진압할 때 큰 역할을 했던 공자를 시기하여 권신 소정묘가 숙손첩과 함께 힘을 모아 공자에게 도전하려 했으나 공자의 서슬 퍼런 불호령을 듣고 결국 목이 잘렸다는 일화도 있다.
그 이후 노정공과 삼환씨는 공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지침을 따르게 되었다. 52세에는 노나라의 최고 직책인 대사구(大司寇)라는 지위까지 올라 노나라와 제나라의 강화회의에 참석하여 제나라가 빼앗아 간 노나라 땅을 돌려주도록 하였고,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염치를 알게 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이미 삼환씨의 횡포로 노나라는 재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다가 노정공마저 사치와 도락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공자는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 결국 자신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을 깨달은 공자는 벼슬을 사직하고 삼환씨의 압박을 피해 노나라를 떠났다.
이때부터 공자의 끝없는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는 위, 송, 조, 정, 진, 태 등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자신의 뜻을 펼 만한 이상적인 나라를 찾았으나 어느 나라에서도 공자를 반기지 않았다. 당시 각 나라의 왕들은 예의를 숭상하고 백성들을 위하기보다는 부국강병할 수 있는 빠른 방법을 찾고 있었다. 때문에 엄격한 도덕과 예를 설파하는 공자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공자는 자신의 뜻이 현재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교육에 힘을 쏟게 되었다.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공자
오랜 외유를 마치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 공자의 나이는 이미 68세였다. 노나라에 돌아온 후 그는 후학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이전 시대의 고전을 집대성하는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그의 말을 모아 제자들이 남긴 저서에는 《논어(論語)》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춘추(春秋)》 등이 있다. 《논어》는 공자의 언행을 문하생들이 모아서 엮어놓은 일종의 언행록이며, 《시경》은 고대 여러 나라의 구전가요를 제자들이 모아서 편찬한 것이다. 《서경》은 고대 중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며, 《주역》과 《춘추》는 역사서이다.
아들인 백어가 죽고, 아끼던 제자 안회와 자로도 잇달아 세상을 떠나며 공자는 만년을 불행하게 지내다가 기원전 479년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공자의 유교 사상은 진나라 시황제 때 많은 탄압을 받았다. 법가 사상을 숭상하였던 시황제는 유학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행위에 반발하자 공자의 저서를 불태우고 유교를 논하거나 배우는 행위 일체를 금지했다. 그러나 진이 무너지고 한나라가 들어서면서 유교는 국가 이념으로 숭앙받았으며 나라의 인재를 뽑는 각종 과거시험에도 채택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기 전까지 유교는 전 중국민을 지배하는 기본 이념이 되었고, 일본과 한국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공자의 기본 사상은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주나라 때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그 방법으로는 '정명(正名)'을 들고 있다. 정명주의는 "명분이 바르면 말이 순하고, 말이 순하면 일이 이루어지며, 일이 이루어지면 예악이 흥하고, 예악이 흥하면 백성이 손발을 가지런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면 명분이 바르게 되고 명분이 바르면 민심과 사회가 안정된다는 의미이다.
그는 전통의식인 친족윤리, 즉 효(孝)와 제(悌) 사상을 통해 모든 정치·사회규범을 도출해내고자 했으며, 법률과 형벌에 의한 통치를 반대하고 인(仁)에 바탕을 둔 덕치주의(德治主義)를 주장했다.
그가 이룬 주요한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 개방이다. 공자 이전까지는 귀족 가문에서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필요한 학문을 가르치고, 상급 관리가 하급 관리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공자는 모든 사람이 자기수양을 통해 덕을 닦을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미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도 처음으로 실시했다. 그는 배움이란 지식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 포함한다고 정의했고,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공직에 나아가 사회를 변모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 볼 때 현대 교육의 기틀을 세운 것이 바로 공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중국 경제발전의 낙후성을 유교에서 찾으려는 학자들도 있고, 공자의 가르침이 현실성이 없는 이상주의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중국 공산정부 수립 후 그런 움직임은 더욱 거세져 공자의 사상을 봉건 시대의 구습(舊習) 정도로 치부해 타파하려는 정치적인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공자의 유교 사상은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 주요 사상이며, 현대에 이르러 서양에서도 주목을 받으며 아시아 전역에서 다시금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
*** 5경(Wu ching , 五經)
(요약)
오경은 〈역경 易經〉·〈서경 書經〉·〈시경 詩經〉·〈예기 禮記〉·〈춘추 春秋〉를 말한다.
이 가운데 〈예기〉·〈춘추〉를 제외하여 '3경'이라고 한다. 여기에 〈악경 樂經〉을 더하면 6경이 된다. 이름이 크게 알려져 〈사고전서 四庫全書〉에서 중국의 저술을 넷으로 구분할 때 경(경전)으로 분류되어 사(역사)·자(철학)·집(문학)의 앞에 놓인다. 2,000년 동안 이들 고전은 고대의 성인 공자의 이름과 결부되어 중국 사회·법률·정치·교육·문학·종교의 규범으로 작용했다.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큰 영향을 끼치기는 했지만, 중국의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5경을 배우기 전에 이보다 덜 까다로운 4서를 먼저 배운다. BC 136년 한 무제는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고, 당시 5경을 가르치기 위해 설치된 박사는 그 명칭이 20세기까지 이어져왔다. 당나라에 들어 태종이 공영달에게 명하여 〈오경정의〉를 짓게 하여, 〈주역〉·〈상서〉·〈모시〉·〈예기〉·〈춘추좌씨전〉이 5경의 정본으로 확정되었다. BC 124년 5경은 태학의 주요 교과과정으로 채택되었고, 606년부터는 관직 등용의 기준이 되었다.
한 무제 (전한의 제 7대 황제)
*** 역경(易經, 주역) 1. 개요 중국 유학(儒學)의 주요 경전 가운데 하나. BC700년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과 우주의 변화를 해석하는 중국 사상의 바탕이 되는 책이다. 주(周) 나라 때에 길흉을 점치는 원리로 널리 쓰였기 때문에 <주역(周易)>이라고도 한다. 이 책을 ‘역경’이라고 부른 것은 송(宋)에 이르러서인데, 특히 정주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가 <역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후 유학의 여러 경전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경전으로 알려졌다. 2. 구성과 내용 <역경>은 64괘를 설명하는 <경(經)>과 64괘를 해석하는 <십익(十翼)>으로 구성된다. <십익>은 ‘역’의 이해를 돕는 10권의 책으로 주나라 시대에 덧붙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단전(彖傳)> 상·하, <상전(象傳)> 상·하, <계사전(繫辭傳)> 상·하,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 등으로 구성된다. 이중 역의 철학적 이론을 설명하고 있는 <계사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데, <계사전>은 ‘역’을 점을 치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연철학과 실천윤리를 해설하는 학문의 수준으로 높였기 때문이다. <계사전>에서는 역 철학의 핵심을 음과 양의 대립과 조화라는 ‘음양이원론(陰陽二元論)’에 두어 이후 동양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3. 특징과 영향 <역경>은 자연 만물의 변화와 생성의 법칙을 ‘음양 이기(二氣)’의 원리로 해설하고 있다. 태극(太極)과 음양(陰陽), 팔괘(八卦)로 표상된 이 원리는 조합을 통해 64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며 이후 중국 철학의 기본 원리로 큰 영향을 미쳤다. 흔히 ‘역’을 만든 네 명의 성인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중국 신화에 나오는 복희(伏羲), 주(周) 나라를 세운 문왕(文王)과 문왕의 아들 주공(周公), 유학의 시조 공자(孔子)를 말한다. 이들을 ‘역유사성(易有四聖)’이라고 하는데, 이는 <역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추정되고 있다. |
*** 서경(Shu Ching , 書經, Shu Jing, 상서, 尙書, 서경집주, 書經集註) (요약) 중국 유가 5경 가운데 하나. (병). Shu Jing. (웨). Shu Ching. 서경(Shu Ching) 〈상서 尙書〉라고도 한다. 〈서경〉의 일부는 후대에 쓰였다고 밝혀졌지만 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서경〉은 모두 58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33편을 〈금문상서 今文尙書〉라 부르고 나머지 25편을 〈고문상서 古文尙書〉라 한다. 〈금문상서〉는 원래 29편이었지만 일부를 분할하여 편수가 늘어났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BC 4세기 이전에 작성된 진본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문상서〉는 원래 16편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오래전에 소실되었다. 4세기에 나타난 모작(模作)은 원본의 제목을 붙인 16편에 9편을 더하여 모두 25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의 5편은 중국의 전설적인 태평시대에 나라를 다스렸다는 유명한 요(堯)·순의 말과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6~9편은 하(夏:BC 2205경~1766경)나라에 대한 기록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다음 17편은 은(殷)나라의 건국과 몰락(BC 1122)에 대한 기록인데, 은나라의 멸망을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이 타락한 탓으로 돌리고 있다. 주왕은 포악하고 잔인하며 사치스럽고 음탕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마지막 32편은 BC 771년까지 중국을 다스렸던 서주(西周)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
*** 시경(Shih Ching , 詩經) (요약) 공자가 문학적 표현의 정형이라고 일컬었으며 주나라 초기부터 춘추시대 중기까지의 시가 305편을 모았다. 내용은 매우 광범위하며 형식은 4언을 위주로 하고 부·비·흥의 표현방법을 채용하고 있다. 크게 풍·아·송으로 분류되고 모두 노래로 부를 수 있다. 풍은 민간에서 채집한 노래 160편이다. 아는 소아 74편과 대아 31편으로 구성되며 궁중에서 쓰이던 작품이 대부분이다. 송은 주송 31편, 노송 4편, 상송 5편인데, 신과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악곡을 모은 것이다. 대대로 〈시경〉에 대한 연구는 활발했으며 한대에 유가 경전에 편입되었다. 판본으로는 〈노시〉·〈제시〉·〈한시〉·〈모시〉가 〈시경〉 해석과 연구의 주류를 이루었다. 청대의 〈시경〉에 대한 연구는 후대 학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고대 성인 공자(BC 551~479)가 편집했다고 하는데 그는 이를 문학적 표현의 정형이라고 일컬었다. 많은 주제를 포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재가 줄곧 "즐겁되 음탕하지 않고 슬프되 상심하지 않기"(樂而不淫, 哀而不傷) 때문이다. 주(周)나라 초기(BC 11세기)부터 춘추시대 중기(BC 6세기)까지의 시가 305편을 모았다. 크게 풍(風)·아(雅)·송(頌)으로 분류되며 모두 노래로 부를 수 있다. 풍은 민간에서 채집한 노래로 모두 160편이다. 여러 나라의 노래가 수집되어 있다고 하여 국풍이라고도 하는데, 주남(周南)·소남(召南)·패(邶)·용(鄘)·위(衛)·왕(王)·정(鄭)·제(齊)·위(魏)·당(唐)·진(秦)·진(陳)·회(檜)·조(曹)·빈(豳)의 15개국 노래로 분류된다. 대부분이 서정시로서 남녀간의 사랑이 내용의 주류를 이룬다. 아는 소아(小雅) 74편과 대아 31편으로 구성되며 궁중에서 쓰이던 작품이 대부분이다. 형식적·교훈적으로 서사적인 작품들도 있다. 송은 주송(周頌) 31편, 노송(魯頌) 4편, 상송(商頌) 5편으로 구성되는데, 신과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악곡을 모은 것이다. 주송은 대체로 주나라 초기, 즉 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소왕(昭王) 때의 작품으로 보인다. 노송은 노나라 희공(僖公) 때의 시이다. 상송은 〈시경〉 중에서 가장 오래된 시로 여겨져왔으나, 청대 위원(魏源)이 후대의 작품이라는 증거를 제시했다. 〈시경〉의 내용은 매우 광범위하여 통치자의 전쟁·사냥, 귀족계층의 부패상, 백성들의 애정·일상생활 등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형식상으로는 4언(四言)을 위주로 하며 부·비(比)·흥(興)의 표현방법을 채용하고 있다. 부는 자세한 묘사, 비는 비유, 흥은 사물을 빌려 전체 시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말한다. 이러한 수법은 후대 시인들이 계승하여 몇 천 년 동안 전통적인 예술적 기교로 자리잡았다. 대대로 〈시경〉에 대한 연구는 활발했으며 한대에 유가 경전에 편입되었다. 판본으로는 〈노시 魯詩〉·〈제시 齊詩〉·〈한시 韓詩〉·〈모시 毛詩〉가 〈시경〉 해석과 연구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중 현존하는 판본은 모장(毛萇)의 〈모시〉인데, 정현(鄭玄:127~200)의 전(箋)과 공영달(孔穎達:574~648)의 소(疏)가 포함되어 있다. 남송 때 주희(朱熹)가 쓴 〈시집전 詩集傳〉은 영향력이 큰 주석본이다. 청대의 〈시경〉에 대한 연구는 후대 학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
*** 4서3경언해四書三經諺解
4서의 언해는 교정청(校正廳)에서 간행한 것과 이이(李珥)가 언해하여 그 후손이 간행한 것 2종류가 있다.
* 교정청(校正廳) (요약) 조선시대 국가적인 서적편찬사업을 할 때 교정을 위해 설치하였던 임시관청. 법전·실록 등을 편찬할 때마다 수시로 만든 관청으로, 편찬사업이 끝나면 곧 폐지했다. 구체적인 예로, 1470년(성종 1) 〈경국대전 經國大典〉의 교정작업을 위하여 설치된 바 있다. |
흔히 전자를 '교정청본 사서언해', 후자를 '사서율곡언해'라고 하여 구별한다. 교정청본 사서언해는 선조(宣祖)의 명으로 교정청에서 '사서삼경언해사업'으로 간행한 경진자(庚辰字) 활자본인데 〈대학언해〉 1권, 〈중용언해〉 1권, 〈논어언해〉 4권, 〈맹자언해〉 14권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의 언해 방식과 형태는 이보다 앞서 간행되었던 〈소학언해〉(1588)와 일치한다.
지금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원간본 전질이 보존되어 있는데 책의 안쪽에 만력(萬曆) 18년의 내사기(內賜記)가 있어 1590년 이전에 이 책이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근대 이후의 사서언해 정본(正本)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문헌이다. 또한 국어사적 측면에서도 중세어 말기 자료로서 〈효경언해〉(1590)와 함께 방점(旁點)과 ㅿ·ㆁ 표기를 보여주는 최후의 문헌이라는 점에서 그 자료적 가치가 있다. 이 책은 원간본이 한양대학교 국어연구원에서 1974년 영인되었고, 1820년에 간행된 내각장판본(內閣藏板本)이 1982년 경문사에 영인된 바 있다.
사서율곡언해는 교정청본이 간행되기 이전에 선조의 명으로 이이가 4서에 구결을 달고 언해했던 원고본이었는데, 이이가 죽은 뒤인 1749년(영조 25) 홍계희(洪啓禧) 등이 교서관(校書館)에서 활자로 간행한 것으로 〈대학율곡선생언해〉·〈중용율곡선생언해〉·〈논어율곡선생언해〉·〈맹자율곡선생언해〉로 되어 있다.
유희춘(柳希春)의 추천으로 선조로부터 9경(九經)을 모두 언해하라는 명을 받았던 이이는 1584년부터 죽기까지 4서의 언해 초고만을 이루어놓았을 뿐이었다. 그후 선조가 1585년 교정청을 설치하고 여기서 4서의 언해를 완료하여 간행했는데 이 교정청본은 그 이후로도 계속 중간(重刊)된 반면, 이이가 번역한 것은 간행되지 못했다. 영조 때에 이르러 그 후손 이진오(李鎭五)는 율곡이 언해했던 사서언해의 원고본 및 사본(寫本)을 모아 홍계희의 도움으로 간행했다.
비록 간행이 늦었지만 이 책의 실제 언해가 이루어진 시기는 교정청본보다 앞서기 때문에 내용면에서 교정청본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경서 내용에 대한 언해에 있어서도 이이의 사상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어 유학연구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 국어사연구 자료의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은 18세기에 간행되었지만 언해가 이루어진 당시인 16세기 국어의 영향도 감안하여 취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언해 내용에 있어서 원전의 한자어를 가급적 언해본에도 그대로 사용하려는 노력이 보이며, 문체도 당위법(堂爲法)을 주로 사용하는 등 교정청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사서율곡언해는 그 원간본이 1973년에 성균관대학교에서 영인된 바 있다.
3경의 언해도 선조의 명으로 교정청에서 4서의 언해와 함께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나, 간행되지 못한 채 임진왜란을 겪게 되었다. 또한 그 원고본마저 산일(散逸)되어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1년에 교정청이 다시 설치되고 나서야 간행이 추진되었다. 임진왜란 이전에 사서언해와 함께 원고가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방점도 삭제되고 표기상에도 많은 수정이 가해져서 활자로 간행된 것이다.
1606년에 〈주역언해〉(9권)가 간행된 이후 1613년에는 〈서경언해〉(20권)가 간행되었고 다시 5권으로 간행되어 3경의 언해간행은 완료되었다. 이들 삼경언해는 교정청본 사서언해와 함께 관본(官本)이라는 후광을 입고 그뒤로도 중앙이나 각 도 감영(監營),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각 처의 서사(書肆)에서 계속 중간본·복각본이 간행되어 널리 유포되었다. 사서삼경언해의 중간본들은 대개 원간본에서 방점과 ㅿ·ㆁ등의 표기가 없어진 것을 제외하면 내용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 언해(諺解) (요약) 조선시대 한문이나 백화문(白話文)으로 된 원전(原典)을 한글로 번역한 일 또는 번역한 작품. 이는 한글을 언(諺) 또는 언문(諺文)이라 부르는 데서 생긴 명칭으로 시대와 대상과 방법에 의해 구체화된 번역의 한 하위개념이라 할 수 있다. 같은 내용의 원전을 번역한 〈번역소학 飜譯小學〉·〈소학언해 小學諺解〉에서처럼 일반적으로 번역은 의역(意譯)의 성격을, 언해는 직역(直譯)의 성격을 각각 나타내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로 보면 이들 모두 언해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언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시대와 대상 및 방법면에서 갖추어야 할 요건이 있다. 첫째, 언해의 '언'이 한글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시대적인 상한선은 당연히 한글창제 이후여야 하며 하한선은 개화기까지로 보아야 한다. 예컨대 현대에 이루어지는 〈조선왕조실록〉의 번역도 한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언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우리의 문자생활이 한문위주에서 한글로 바뀐 이후의 번역에 대해 '언해'란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정의될 때 언해는 적어도 언문일치(言文一致)가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둘째, 일반적으로 언해의 대상은 완전한 한문과 백화문에 한정된다. 조선시대에 사역원(司譯院)에서 사용되던 몽골어·만주어·일본어의 학습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일이나 번역한 책은 언해라 하기 어렵다. 백화문으로 된 중국어 학습서인 〈노걸대 老乞大〉를 한글로 번역한 〈번역노걸대〉·〈노걸대언해〉 등만이 언해의 범주에 든다. 셋째, 한글에 한자가 혼용된 번역은 언해의 범주에 포함되지만, 이두(吏讀)로써 번역된 〈대명률직해 大明律直解〉·〈양잠경험촬요 養蠶經驗撮要〉 등은 언해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이두에는 새김과 음이 차용된 한자만이 쓰일 뿐 한글이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언해의 구성은 한글로 된 번역문과 함께 그에 해당하는 원문이 문단으로 나누어져 짝지어 놓이며 대조된 원문에는 일반적으로 한글로 구결(口訣)이 달려 있다. 조선시대 언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간경도감(刊經都監) 간행의 불경언해와 교정청(校正廳)에서 간행한 경서언해는 한글로 구결을 단 원문과 그 번역문이 나란히 짝지어 놓여 있다. 언문에 구결을 다는 것은 언해에 앞서 먼저 이루어지는 절차이기도 하다. 문법체계가 다른 언어인 원문을 번역함에 있어서 원문의 문장구조를 파악하고 난 뒤 그에 따라 원문의 구절 사이에 적당한 우리말 문법형태소를 삽입하여 번역의 기초를 삼는 것이다. 따라서 구결이 확정되면 번역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때에 구결을 다는 사람과 그 구결에 따라 언해하는 사람은 동일인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일 경우도 있다. 원문의 구결을 원문과 함께 제시해주는 언해의 체계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번역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고, 원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글창제 이후 시작된 언해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빠른 것은 〈훈민정음언해〉이다. 이는 〈월인석보〉(1459) 책머리에 실려 전하는데 실재 언해된 것은 〈석보상절〉(1477)의 편찬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으로 언해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세조 때부터이다. 1461년(세조 7)에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능엄경언해〉를 비롯하여 10여 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불경이 언해되어 간행됨으로써 불경언해는 초창기 언해의 주종을 이루게 된다. 성종 이후에도 계속하여 불경언해가 이루어지지만 질과 양에서 세조 때의 것에 미치지 못했다. 불경언해서 외에도 이미 세조 때에 〈구급방언해〉(1466)가 간행되었고 성종 때에 〈내훈〉(1475)·〈삼강행실도언해〉(1481)·〈두시언해〉(1481) 등이 간행됨으로써 언해는 점차 다양한 분야의 문헌으로 확대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불경언해가 조선시대 언해의 초창기에 주종을 이루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선시대의 국가이념이었던 유교경전에 대한 언해는 16세기말에야 비로소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선조 때 교정청에서 편찬된 경서언해는 불경언해에 비해 시기적으로 약 100년 이상 뒤지고 있다. 이것은 유교경전의 언해를 위해서는 원문 구결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데 구결의 확정이 그만큼 용이하지 않았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초기에 중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언해는 16세기부터 지방으로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언해의 확산은 문화사적으로도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언해는 한글을 보급하는 데 기여하고 대중들에게 한글로 문자생활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은 물론 번역을 통한 새로운 정보의 제공이라는 측면에서 문화 향상과 학문 발달에 기여했다. 18세기 후반 영·정조 때에 가장 많은 언해서가 간행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 시기에는 각종 교화서(敎化書)와 역학서(易學書)가 대대적으로 언해되었고, 30여 종의 윤음언해(綸音諺解)도 이루어졌다. 또한 앞선 시기에 간행되었던 각종 언해서들도 그 수요의 확산에 따라 상당수 중간(重刊)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의 문화수준의 향상과 아울러 한글문헌의 독자층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언해는 역사적으로 문화발전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발전해왔다. 언해는 당시의 문화발전의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역사적 연구자료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귀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교정청의 경서언해와 이이(李珥)의 사서언해(사서율곡언해) 사이에 나타나는 원문 구결과 그에 따른 번역의 차이는 당시 유학자들의 경전 해석에 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한국 유학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자료가 된다. 특히 언해는 한글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언해문은 당시의 언어사실을 반영한다. 이에 따라 국어의 역사적 연구에 있어서 언해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세국어와 근대국어 등 국어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이들 언해서는 일차적인 중요자료가 되는 것이고, 이제까지의 연구 또한 언해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