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공은 낚시꾼인가, 그는 명재상이었다
정 성 삼
나는 약 2년 만에 「명심보감」의 새로운 해설서를 윤호정, 박경숙 선생과 공동집필하여 서재문화사 박종우 사장의 도움으로 출판하였다.
명심보감에는 유가(儒家)를 대표로 하는 공자와 맹자·순자의 어록과 노자와 장자로 대표하는 도가(道家)의 현인들과 태공(太公)의 어록이 비중있게 다루어져 있다.
여기서는 태공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태공이 어느 시대 ,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 보았다.
태공은 주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도와 주왕조(周王朝)의 기틀을 닦은 명재상(名宰相)으로 무왕 때 제나라 제후가 된 정치인이다.
그는 성씨가 강씨(姜氏), 이름은 상(尙)이다.
강상을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부르게 된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당시 은나라 마지막 왕 폭군으로 알려져 있는 주왕시대(紂王時代) 주씨족(周氏族)의 수령이었던 서백창(西伯昌·文王)이 강상을 만난 후, “나의 조부 고공단보(太公)께서 꿈에서라도 만나 보기를 간절히 바랐던 인물이 나타났다.”고 하여,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성을 붙여 ‘강태공’이라 한다.
이는 낚시꾼을 태공처럼 시대의 흐름을 읽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란 뜻을 비유하여 좋게 이르는 말이다.
강상을 「논어」에서는 그의 벼슬을 밝혀 태사공(太司公),「명심보감」에는 태공(太公)으로 불렀으나, 여기서는 강태공으로 부르기로 한다.
앞에서 말한 서백창을 문왕(文王)이라고 한 것은 그가 주왕(紂王)을 정벌하려고 준비하던 중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뒤를 이은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중국 천하를 통일한 후 아버지를 임금으로 추존한 시호가 문왕이다.
강태공은 주왕(紂王) 때 위수(渭水)지역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칠십이 넘도록 글 공부만 하였다.
남편이 집안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아 가난에 찌들린 그의 아내가 가출하였다.
아내가 집을 나가자, 그는 위수 강가에 나가 낚시를 하면서 지냈다.
그 세월이 자그마치 10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문왕이 강태공을 만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어느 날 문왕이 사냥을 나갔으나 빈손으로 돌아가는데 위수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한 노인을 만났다.
그가 바로 강태공이었다.
문왕이 노인에게 다가가 “낚시를 즐기시나 보군요.”라고 말을 건네자, 강태공은 이렇게 말하였다.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을 낚고 있습니다. 먹이로 고기를 낚고 있는 것은 봉록을 주어서 인재를 등용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군자는 자신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즐거워하고, 소인은 눈앞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제가 지금 낚시질하는 것은 그와 비슷합니다.”고 하였다.
이어서 정치문답이 계속 되었다.
문왕이 “어떻게 하면 천하 백성의 민심을 얻을 수 있습니까?” 강태공은 “천하는 군주(君主)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닙니다. 만인의 천하입니다. 천하의 이익을 백성들과 함께 나누려는 마음을 가진 군주는 천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천하의 이익을 혼자 독차지 하려는 자는 반드시 천하를 잃게 됩니다.
하늘에는 사계절이 있어서 음(陰)과 양(陽)이 순환하고 그로 인해 땅에는 생산이 이루어지며, 재물과 보화가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인(仁)이 있는 곳에 모이게 됨으로, 어진사람이 정치를 하면 그 덕(德)은 저절로 나타나 어렵지 않게 천하의 민심도 얻을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강태공은 문왕과 대화를 나눈 후, 문왕에게 발탁되어 재상(宰相), 곧 태사(太司)라는 벼슬을 받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갔다.
그는 탁월한 지혜로 문왕에게 뛰어난 모략과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제시하여 은나라의 제후들이 주나라를 따르게 하여 주왕조(周王朝)를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때 세운 주나라 봉건군주국가가 719년 중국 역사상 최장수 국가가 되었다.
무왕으로부터 강태공은 제나라 제후로, 주공(周公)도 함께 노나라 제후로 임명되었다.
주공은 종주국(宗主國)인 주나라 왕실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어서 아들 백금을 대신 보냈다.
주공이 제나라와 노나라의 미래를 예견한 말을 소개하고자 한다.
강태공은 제나라 제후로 부임한 지 다섯 달 만에 국정보고(國政報告)를 하였다.
주공이 “그동안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습니까?”하니, 강태공은 “예의를 간소화하고 그곳의 풍속과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따랐습니다.”고 하였다.
백금은 3년이 지난 뒤에 보고를 하였다.
주공이 왜, 이렇게 늦었느냐? 하니, 백금은 “그곳의 풍속과 예의를 바꾸고, 삼년상을 치르느라 늦었습니다.”고 하였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주공이 훗날 노나라가 제나라를 섬기게 되겠구나.”고 하였다고 한다.
주공이 예언한 대로 제나라는 춘추시대 오패(五覇)이자, 전국시대의 전국칠웅(戰國七雄)중 하나로 강대국이었으나 노나라는 약소국가였다.
강태공 시대를 지나 5백 년 후 유가(儒家)를 창시한 공자는 춘추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주대(周代)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주대시대는 문왕과 무왕 시대를 의미한다.
당시 사회는 효(孝)를 숭상하고, 노인과 어린아이를 중하게 여기고 현자를 정중하게 대접하는 등 어진정치를 펼쳤다.
이때 주대문화(周代文化)의 기틀을 닦은 자가 강태공과 주공이다. 특히 강태공은 가정, 사회, 국가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어록을 남겼다.
그 가운데, “내가 효도하지 않으면 어찌 내 자식이 효도하겠느냐.?”(명심보감 효행편)라는 말은 후세사람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교훈이다.
강태공이 살던 시대는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가 효도하고, 효도를 받는 사회였다.
강태공이 중시한 효사상은 ‘가정에서 孝로 이룬 화목이 사회와 국가를 편안하게 한다’는 유가사상으로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대한 인물이 위대한 역사를 만든다는 교훈을 강태공의 행적으로 동양 최고의 명재상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