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얏, 호~ 날아오른 희망버스
직장, 가족, 관계와 역할들에 둘러싸여
저 건너의 삶을 공감하고 아파할 겨를이 만만치 않았다.
고속으로 플레이시킨 영화처럼 미처 지금의 감정을 정리하기도 전에
이미 넘어간 다른 장면에 감정을 바꿔야하는 상황,
웃으려 했는데 울어야하는 씬으로 휘리릭 넘어가버린 상황처럼
속도에 치인 삶이었다.
유독 어려움이 많은 우리 학교 아이들의 비명 섞인 삶에 푹 들어가
안타까움이나 짧은 격려를 해치우 듯 건네고
몇몇 선생님들과의 1분짜리 단막 대화라도 주고받다 보면,
이주호발 교육물폭탄과 이명박발 브레이비크식 교육테러에 분노하다 보면,
소금꽃이고 김진숙이고 까맣게 잊어졌다.
다만, 억수의 비라도 쏟아지던지, 깜깜의 폭우에 번개라도 번쩍하면,
잠깐 들어온 정신이 크레인을 기억하고,
폭우에 흔들릴 크레인에 그녀는 어찌 살아있을까?
절대량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어떻게 떨궈내고 있을까? 하는 마음이
잠시 들어오곤 했었다.
비 온 뒤의 출근길, 청량함에 부픈 가슴이,
아스팔트를 기고 있는 지렁이를 보는 순간도 그랬다.
열심히 살아 굵고 길어진 그 생명을 보는 순간,
어쩌다 저리 흙에서 멀어졌을까?
제 흙으로 돌아갈 수나 있을까?
너무 열심히 아스팔트를 건너는 그 네의 몸짓에
어떻게든 나뭇가지라도 해서
풀 숲이라도 옮겨줘야 마나를 망설이던 그 때도 그러했다.
때론, 건물을 나온 순간이 땡볕이어서,
드러난 몸이 금새 아찔해질 때,
달궈진 철판 크레인위의 그녀는
이 뜨거운 찜볕을 어찌 버티고 있을까? 하기도 했지만
그도 금새, 여전히 다른 생각이 그녀를 대신해 자리잡곤 했었다.
이렇듯 순간순간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쌓여가는 안타까움이나 분노로 무거워진 마음은,
무게도 덜고 결리는 마음 줄기도 쭉 편 채 살고 싶은 마음을 원했고,
하여 작정한 것이 희망버스였다.
며칠 전부터 생각했기에 느긋했던 30일의 아침,
불쑥하니 몇 달만에 내려온다는 큰 놈의 귀향 통보에
두어 가지의 반찬/국에 정신없이 손을 놀린 뒤,
‘큰애가 온다는데, 꼭 가야하냐’는 남편의 말을 뒤로한 채,
지체하면 흔들릴까 작심한 마음을 서둘러
1박 준비도 덜된 가방을 매고 나섰다.
이 더위에, 물난리에, 휴가에, 누가 올까 싶었는데, 웬걸이었다.
잔뜩한 사람들이 이도 저도 놓고,
이심전심의 측은지심과 김진숙의 절박함을 자신의 삶으로 등치한 채,
여기 저기 삼삼오오 밝게 들떠 있었다.
몇 분의 아는 얼굴을 제하고는 처음인 분들이 신기하고 대단해보였다.
잠시 후, 단단히 들뜬 동행들,
희망버스가 맺어준 고마운 인연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순간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트는데는.
몇 년을 순간으로 줄이는 신뢰와 연대의 마법이 작동했는지
탁하니 마음을 드러내고 자신을 말함에 주저함이 사라진 희망의 공간엔
왜,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지를
솔직토크와 시낭송과 노래와 개그로 아우르며,
김진숙을 꽃술로 40여명의 꽃 잎이 어울린 고운 꽃으로 피어났다.
그녀가 선물한 사랑과 연대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 분도 졸면 안됩니다, 3분씩 순서대로 소개 나갑니다” 하며 밀어 붙이는
사회자의 만만찮은 포스와 멘트로
충남 천안삼거리 공원을 출발한
‘초등생/ 재수생/대학생에 가족단위/ 개별 성인’ 41명이
두근거리는 소개의 자리를 거절못하고 서기 시작했다.
첫 주자는 교사 시절 전교조충남지부 조합원이셨던 홍동중학교의 교장선생님.
홍동의 아이들에 대한 절절한 애정과 교육현실을 말씀하시더니,
힘차게 전교조 결성시의 초심이 담긴 “굴종의 삶을 떨쳐~~” 노래까지 뽑으신다.
이어, 2008년 촛불 때 머릿채를 잡혀 끌려갔다던
긴 머리의 아름다운 촛불 물보라님이
‘남편에 아들을 동행해서 왔다’하니,
그녀의 아들이 이어 일어나,
“부모님을 보며 불의에 눈감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한다.
옆자리 그녀의 남편은,
“사실 오기 싫었다. 허나 아내와 방학 중 와 있는 아이를 이해하고자 함께했다” 하더니
부부가 아들까지 함께 노래도 부른다. 분위기가 뜨기 시작했다.
자신을 공주시 시골 중학교의 1학년 담임이라고 소개한 교사는
13명 중 6명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있고,
이혼과 실업, 빈곤으로 연락이 되지 않는 엄마 아빠을 그리워하는
아이들과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아이들의 마음이 채워질지에 대한 고민이 무겁다고 했다.
이어 민주당 시의원인 그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조남호 회장의 구속과 해고철회의 길에 끝까지 함께 있겠다 한다.
다음은 공무원을 짤린분이었다.
이 후 복직투쟁의 7년째이고,
경찰서 교도소도 수차례 떠돌았다는 그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가 참 힘들다’며,
‘쌍용차나 용산의 철거민이나 아픈 상황들이 너무 많고,
이 과정에서 권력이 짐승이 되는 것을 보았다’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함께 꿈꾸며 만들어가자’ 한다.
이어 노무사분,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화내고 분노해야 할 때 그러했는가 생각하면서
아들과 함께 왔다.”고 했다.
“분노할 때는 참지 말고 분노해야 한다.
아직도 ‘희망버스’를 모르는 주위를 보면서 언론과 정치권에 분노한다”고 하면서
아들을 “여행가자고 해서 데려왔다.
구름도 보고, 하늘도 보고, 비올지 모르니 속옷 정도 챙겨서
가족 대화여행, 사색하는 여행을 하자.”고 꼬셔서 왔다며 고백에 이어
“아들 미안하다” 며 사과하는데, 일어난 아들이
“사기 당해 아빠 따라온 재수생 아들입니다.” 하여 모두 웃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 안에서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좀 더 사회에 관심을 갖고 사회문제에 분노하는 대학생이 되고 싶습니다”며
참 의젓하게도 말하고 앉는다.
이어 사회적 기업을 하신다는 분.
시민들이 100만원씩 십시일반한 투자금으로 만들어진
이윤의 10%는 노동자가,
다른 10%는 주주가,
나머지 80%는 사회에 환원한다는
이 통 큰 기업은 이미 몇 개의 사업 추진으로 600만원을 지역에 기부했단다.
이어 두정동에 “희망칼국수‘를 열어
칼국수를 고아원 아이들에게도 실컷 먹이고,
노인분들께도 대접하고 있다는 시민기업가는
김진숙씨를 생각하며 ’담쟁이‘라는 시를 낭송한다.
이어 천안의 교사, 빛고을 광주 출생이며,
고향에 대한 애착이 있다고 밝힌 그는,
초등 3학년 때의 기억“운동장이 자욱했다.
하늘에 헬기가 뜨고, 큰 길에 나갔다가
마침 지나던 시민군 트럭에서 건네진 빵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며
좀 전의 재수생이 졸업한 학교의 교사라고 밝히더니,
000야! “참, 반갑다” 며 인사를 건넨다.
이어, 고등학교 3학년 때 전교조가 결성되었고,
‘가멜’별명의 담임선생님을 포함, 9분의 선생님들이
전교조 가입을 이유로 해직되시면서,
당시 시험 기간이었음에도
시험을 거부하고 해직되신 선생님들을 돌려달라고
우르르 뛰쳐나갔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단다. 하여,
정규교사 발령 받자마자 전교조에 가입했단다.
이어 “학교 다닐 때 많이 맞았다. 고등학교 때도 많이 맞았다.
그래서 아이들을 때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후,
한 5년 전 마지막으로 때린 후 지금은 때리지 않는다.”고 했다.
끝났나 했는데 느닷없이
본인은 뼈대 있는 집안 00손00대손이라며,
재밌고 개그스레 소개하더니
“노래 한자락 할까요?”에 답도 필요없이,
‘포장마차’노래를 구성지게 뽑는다.
~~~이놈의 노동자 살림은 제자리
~~세상은삐까번쩍 거꾸로 돈다네
우리도 같이 질럿다.
정말 끝인가 했는데,
다시 이어지는 개그.
“뼈대 있는 집안 자손은 마이크 잡으면 두곡은 불러야 합니다.” 면서
노가바 “송아지~~~개00!~~”를
비가 오다 멈추다 하는 희망 길을 내내 크게
‘이명박, 개새0~~’를
속시원히 질러부리고서야 마친다.
이어 50중반의 선생님, “참회하는 맘으로 희망버스를 탔다’ 한다.
‘요사이 도망가려는 맘이 생기는데 이를 참회하고 싶었다”며,
“타길 잘했다, 이리 함께한 여러분을 보면서 더욱 그런 맘이 든다” 했다.
이어진 “삼성이 만든 네이스가 고등학생들의 성적을 완전 망가트린” 얘기에선
“진작에 네이스의 문제를 전교조가 지적하고 대안을 요구했었지만
외려 교사들을 탄압하고 문제를 눌러 감춘 것이
고등학생들과 교사들에게 엄청난 성적관련 혼란을 초래했다.”며 분노한다.
이어 다른 분은 “저를 구하기 위해 차를 탔다.
시민인 노동자, 시민인 학부모, 시민인 자영업자로,
시민으로서의 우리 삶을 지키기 위한
아이디어, 시간, 돈을 내어 힘을 만들면, 바로 그것이.
김진숙을 구하고, 불법으로부터 나를 구하는 길이다”
이어 화물차를 운전하신다는 분은
“기름 값이 너무 비싸 한달 전에 화물차를 처분하고
지금은 쉬고 있다”고 했다.
“여기 있는 분들이
이 시대를 이끌어 가시는 분들이고,
미래세대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라며
“짧은 시간이건 긴 시간이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하니,
이어 일어선 분,
“내 차례가 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스러워,
마치 군대에서 매 맞는 순서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며
입을 연 이 분은, “35M의 높이는 무서운 높이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은 일을 하는 김진숙씨를 보면서
이리라도 가서 뵙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다.”하신다.
“카메라를 처음사서 고 노무현대통령의 모습을 찍었었고,
오늘은 여러분을 찍고 있다“며 카메라를 내밀었다.
이번엔 젊은 선생님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안양의 만도 기계에 다니셨단다. 노조가 만들어질 때,
땀에 젖은 노조작업복을 입고 들어오신 엄마가,
“강한 노조가 생겨서 고등학교 대학교의 학자금을 받을 수 있게됐다.” 며
기뻐하셨단다. 그 엄마의 뒷바라지로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된 그는,
방학임에도 등교한 담임반 아이들에게
오늘 종례를 하면서 '영도 가는 이유'를 짤막하게 말해주었다 했다.
“샘이 영도에 가는 이유는, 너희들과 내 자식 때문이다.
열심히 일했는데 쉽게 내동댕이쳐진다면,
어떻게 그런 세상으로 제자들과 아이들을 보낼 수 있겠냐 ”고.
이어 최자연씨.
어떤 분이 저를 ‘불온한 시민(웃음)’ 이라 했는데,
저는 다만 맘이 짠해서 그래요.
발레오 공조 해직자들이 천안역서 농성할 때
그 주변을 서성이게 되고, 감자 삶아서 가져다 주게 되고,
요샌 유성기업 해고 된 분들께 갑니다.”
그이는 김진숙 씨가 좋아한다는 글을 봤다며,
‘직녀에게’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별이 너무길다~
슬픔이 너무길다·~
...
우리는 만나야한다~
를 맘껏 소리쳐 불렀다.
이어 “구석에 숨고 싶다.”며 말을 연 그녀는
“원래 세상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털어논다.
오늘 쫓아온 내가 좋아하는 이 친구를 보면서,
김진숙씨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참 ,힘들겠구나. 작지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따라왔다 했다.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가는 건 아닌가 싶어
‘내가 가도 되겠느냐’고 친구에게 물었을 때,
“한 명 한 명이 모여 힘이 된다.”는 답에 용기를 내어
“그 분을 잘 모르지만 예쁘게 삶을 사시는 분을 만나는 길에
여러분까지 뵙게 되니,
나도 좀 더 잘 살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는 그녀와
1+1을 만든 그녀의 친구도 함께 인사를 한다.
이어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라는 촛불 남성이
“이리 소개하다보면 뒷사람은 볼짱다봐서리 재미없어지는데”로
운을 떼면서 “저는 용접하고 있습니다.
낙동강 하구둑 4대강 관련 공사를 하고 있기에 참 부끄럽습니다.
소금 꽃 그 분, 저희 작업자들이 주로 입는 옷이 청잠바인데,
불똥 튀는거 땜에 그 위로 가죽조끼를 한겹 더 입고 나면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합니다.
여성의 몸으로 용접했던 그 분은 보통 분이 아닙니다.
게다가 용접할 때 나오는 가스를 들여마셔야 하기에
최고로 버텨야 20년 이상은 할 수 없는 막장의 일입니다.
이 일을 하다 해고되고,
‘동료의 해고를 철회하라’며 죽음의 크레인까지 오른 그녀를 만나야겠기에
당진에서 달려왔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크레인 위로 올라 가고 있습니다.”하니
이어 촛불 부인,
“말 주변이 없어서 3분 채우기 힘들어요”(웃음)
“노. 래. 해!”
“노래도 못해요”(웃음)
“춤. 춰. 라!”
“춤도 못춰요” 하시더니
“우리자식들을 위해 희망버스가 작은 시작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대원고속과 경기고속의 노동자를 존중하고 노동조합과 사주가 공존하는
사례를 들어가면서 소박하고 간절하게 담아낸다.
다음, “고3 엄마입니다.
고3엄마 이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아이만큼 예민해진 엄마가 되어버렸습니다.(웃음)
이번 여행을 딸, 신랑 다 같이 오고 싶었지만 저만 대표로 왔습니다.
저는 친정 부모님, 시부모님 다들, 별난 딸이나
별난 며느리로 저를 이해하고 이뻐해주시는 통에
이리 소신껏 다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어 촛불여인, “2차 희망버스 때 아프리카tv 생중계 보면서 분노했고 아팠습니다.
하여 제가 하는 일에 후회 없도록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다.
“아빠가 버스 운전을 하시는데, 버스도 알고보면 비정규직이 많아서,
갑자기 회사를 그만 둔 분이 비정규직이라 계약이 끝나서 그런거라고 했을 때
맘이 너무 아팠다.”며 나도 비정규직이지만
비정규직이 너무 많은 우리나라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란다.
이미 2차 때와 촛불에서 공인된 가수,
사회당 당원이라는 잘생긴 애기 아빠가 일어난다.
“희망버스의 차수가 늘어나는데, 4차 5차 없이
한진중공업이 해고복직 되었으면 좋겠다.”며 앉으려는 그에게
“노. 래. 해”가 연호된다.
그러자 그에게서
부드럽고 강한 울림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마치 상처에 발라진 연고처럼
스르르~
아픈 곳에 스며서는
서로가 서로를 어루며
‘동지’를 합창하게 만들었다.
뛰어난 음색에 “앵 콜!”이 터지고
‘솔아, 솔아’를 부르는 그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마라~ 는 그의 목소리로
우리의 희망여행과 진보적 지향에 대한 자존감은
더욱 짙은 솔 빛으로 한껏 고양되었다.
이어 등장한 ‘이 가수’와 함께 산다는 부인,
“너무 좋겠다.’는 부러운 시선에
“웬만해선 집에서는 이리 깊은 울림을 내지 않아요.”하더니
6학년짜리 딸 얘기를 꺼낸다.
그녀의 딸래미는 촛불 함께 다니는걸 참 좋아했단다.
이번 일제고사 때, 학교에서 딸아이만 시험을 안 봤는데,
담임교사가 밤 9시 전화하고, 교감이 밤10신가 전화해 말렸지만,
딸래미는 서울 현장학습체험하러 갔단다.
그러다 방학 전 어느 날, 아이가 복도를 지나는데,
교감선생님이 “네가, 그 아이냐?” 며 유심히 쳐다보니,
“사춘기에 눈치가 늘은 아이는 두려워하기 시작했단다.
학교에서도 많이 힘들어한다.”는
그렇게 “겁이 생긴 아이,
혹시나 이번 여행에 엄마가 다치고 잡혀갈까봐 걱정하는 아이를
집에 두고 온 것이 내내 맘에 걸린다.”는 그녀는
“집회도 우리의 힘든 삶도 축제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힘 없는 하나 하나가 모여 희망을 만들고
우리 아이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며 앉는다.
맨 뒷좌석, “저는 말 주변이 없습니다.
소개의 순서가 점점 다가오는데, 아! 운명의 시간이 오는구나(웃음) 싶어
두근거리는 순간, 이리 일어날 차례가 되었네요(웃음).”하며 말문을 열더니,
“휴가 마지막 기간에 왔습니다.
말은 여기서 줄이고, 낼 탈 때 음료수로 때우겠습니다.”며 앉자,
마지막 소개자. “한진중공업해고자 김진숙씨의 처지와
내 처지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뜨겁고 끈끈한 연대의 꿈, 꿈이 있어야
사람다운 세상이 오고,
꿈을 꿔야 진보 진영이며,
우리가 꾼 꿈들이 세상을 바꾼다.”면서 마지막답게 정리를 마치니
6시간 30분 희망대장정의 목적지, 부산에 들어서고 있었다.
충남 희망버스 총무가 짤막 공지를 하는데,
“이번 희망버스는 평화의 버스입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기조에 합의했고,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를 실천할 것입니다.
이명박의 국가폭력이 전경찰을 앞세워
우리의 희망여정과 시민권,이동권을 막을테지만
그래도 우리는 평화입니다
...
허나, 이리 명심한 우리의 평화는
부산의 초입부터 단단히 당했다.
경찰이 버스를 막아버린 것이다. 40분을 가로 막고
‘전부 내려서 걸어가라’고 한다. 5분이면 걸어가니 교통정리를 위해서
다들 차에서 내려 걸어가라고 명령한다.
참, 기가 막혔다.
우리가 가려하는 좌회전의 진행로는 뻥뻥! 잘 뚫리고 있는데다,
희망버스를 제외한 모든 차종이 당연한 좌회전의 권리를 운전하고 있었으며,
다른 모든 관광버스들이 맘껏 좌회전 하고 있었으니
...
우리는 분노하였다.
그래도 우리는 평화적 행동을 지키면서,
‘천안에서 7시간을 온데다가, 초등생이 타고 있고,
도착지는 네비로도 1.7km인지라 5분 안에 날아갈 수 없으며,
버스에서 하차하는 시간은 불과 1~2분으로
목적지의 교통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테니,
현행범도 아닌 시민과 어린이 40명의 통행을 무조건 가로막는 것은 불법이다.’라며
40분을 설득했고, 단호하고 상식적이며 평화로운 주장의 일관성으로
‘시민권’과 ‘보행권’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위에서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는 경찰의 하소연과
‘우리는 부산에 온 손님이며, 손님을 이리 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우리의 입장을 끝으로
다시 5분을 달려갔으나 행사는 끝나 있고,
바로 청학성당으로 이동하라는 문자가 공지되었다.
경찰 말로는 7,000이라는데,
우리가 탄 택시 기사님의 말로는
“저리 깔을라면 만 명 이상 있어야 할 것”이란다.
‘경찰이 교통을 완전 통제해서 영도 주민의 교통 불편은 짜증날 정도이며,
이리 막힌 채로 서 있으면 8만원은 벌어야 하는데 5만원도 못번다’며
‘뭐 이리까지 난리치냐’ 며 경찰통제를 지적한다.
가다 서다 하던 택시가 아예 서버렸다.
그러자 친절한 기사님, ‘왠만한 길은 다 막아 차량 통행을 금지시키고,
버스 노선을 멀리 뺑뺑 돌려버리니, 차라리 내려서 걸어 가되,
어찌 가는 것이 최단거리인지를 1안/2안/3안으로 친절하게 정리해 주셨다.
이어 ’오늘의 교톨 통제는 주민들을 짜증나게 해서
희망버스에게 불편의 화살을 돌리게 하려는
고도의 계산인 듯 싶다는 분석까지 내노신, 암튼 이 멋진 기사님 덕에
청학성당4km까지는 접근할 수 있었지만 거기부터가 문제였다.
큰 길에는 경찰차가 꼬리에 꼬리를 대고 수km씩 붙은 채
도로와 인도 사이의 버스차벽을 만들어 놓았다.
조현오경찰청장, 부산경찰서장의 지시로
전국에서 동원된 경찰이 방패에 진압복에 무장한 채
새까맣게 수십, 수백의 대오로 인도를 막아 있었고,
아예 찻길에 친 차벽까지 해서 무슨 계엄령이라도 발표된 듯
영도는 그지없이 심란했다.
게다가 인도로 지나는 사람들에게
주민증을 내노라며 검문을 해댔쌌고,
지나는 승용차나 택시를 일일이 세워 탑승자의 신원을 확인했다.
영도의 아랫길/윗길/큰길/작은길/골목길까지
수십씩 모여 있는 전경들이 길을 막고는
뭔가 ‘희망스럽다’ 싶으면
휙~가로막았다.
아줌마, 아저씨, 학생, 청년, 아가씨, 노인 할거 없이
“어디 가냐?”
“주민증 좀 봅시다.” 를
하고 있는 이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시라!!
80년 광주 마냥
공수부대 대신 경찰의 위협적인 검문검색이
시민권을 깔아 뭉개는 풍경이,
2011년 여름영도에서 실제 상황으로 벌어졌던 것이다.
계엄령을 연상케 하는 경찰폭력을 지시한 경찰청장과
조남호에 대한 분노에도
희망버스의 소금꽃들은 평화를 지켰다.
저만치 경찰의 검문이 보이면,
더 위의 꼭대기로 올라올라 갔다.
차는 물론 손수레도 비집기 힘들것 같은
좁은 길, 영도의 골목길들을,
생 처음 누비고 돌고, 오르락 내리락
30분의 길을 세 시간 째 빙빙 돌고 또 돌았다.
셌이 함께였지만
멀리서라도 검문한다 쫓아올까봐 붙어서도 못다녔다.
한 5미터씩 떨어져 각자 길을 가는 것처럼 하면서,
검문에 대비, 돌면서 본 청학동의 주소를 외우기도 했다.
드디어 어찌 어찌
청학성당이 저기쯤 보이나 했는데,
큰 길을 통과해야만 했다.
수십의 경찰이 삼거리의 갈래마다 막고 있는
그 길을 지나야만 했다.
아! 경찰 하나가 딱하니 막아 선다.
“어디 가시죠?”
“집에 갑니다.”
“집이 어디죠?”
“청학 20번지입니다.”
말하다보니 말투까지는 차마 나오지 않아
아차 싶긴 했지만,
부산에도 서울 사람 살거이고,
전경도 여러지역 차출일 수 있으니,
‘에라, 모르겠다’ 표정 잡으며 그냥 지나려는데,
살짝 입꼬리 올라간 경찰이
“주민등록증 좀 봅시다!” 며 다시 막아선다.
이크, 3초간 생각.
‘그냥 간다, 길어지기 전 무시하고.’로 정리 후
“왜 그래하죠?”하며
걸음에 힘주며 가는데,
쫒아 막아서며 삼차 사차 요구하던 경찰이
한 50m쯤 지나자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휴, 하마터면 몇 시간이 날아갈뻔 했다.
다른 일행 둘도 검문에 걸렸었다니,
이리 돌고 피하느라 새벽 12시 다 되어
충남 희망버스들이 한 둘씩
청학성당 주변 영도조선소 앞으로 도착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만에 만나는 얼굴들이 살아돌아온 형제자매인냥
반갑고 고마웠다.
그리 간 그 곳의 지척에 김진숙이 있었다.
마음의 미안함을 조선소 앞 바닥에 내려 놓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부드러워진 가슴으로
5,000이 어우러졌다.
모르는 서로에게 신뢰의 정을 순식간에 붙이고,
무거운 관계에 말랑함을 입히는 문화 난장의 공간에서,
김진숙이 만들어준 평화의 공간에서,
세벽 4시까지 놀았다.
깊은 감동으로 끝 없이 이어지는
노래, 전율의 몸 짓, 발언을 보면서,
자꾸 해도 새삼 벅찬 공연과 대안의 주장을 들으면서,
마주한 동행들과 말랑한 속내를 부비면서
공감의 에너지를 키워서 주고받았다.
시원한 맥주에 곁들여.
참 희안한 일도 있다.
5,000여명의 사람이 있는 곳에 여자 공중화장실 칸이 딱 2칸 이었다.
근데 그 중 한 칸이 막혀 있던지라 나머지 한 칸으로 쓰려니
도대체 줄지 않고 보통 40-50명씩 늘어서 있는데,
반대편 남자화장실 쪽에서 제안이 들어온다.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 2개만 남자들이 쓸테니,
한개 있는 대변용의 문달린 화장실을 여성들보고 쓰란다.
하여, 여성의 긴 줄을 반으로 뚝 끊어 저쪽으로 보내니,
긴 줄이 급속히 줄면서 한 20분 기다리면 되는
선순환이 일어났다!
이 모든 과정이 ‘누구의 불평도 없이, 예의 갖춰 조정’되는 걸 보자니,
‘인간이 인간과 나누는 최고의 관계 맺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1박 2일 중 가장 벅찬 순간은
김진숙씨가 우리에게 건넨 전화통화의 시간이었다.
그 전문이 ‘오마이 뉴스’등의 여러 포탈에 실려 있으니
느낌만을 말하고 싶다.
먹 빛 새벽,
하늘에서
영도의 공기를 진동하며 내려온
살아 있는 음성.
그 잔인한 85호크레인 위에서도
인간의 자존심,
노동자의 자존심을 지켜내는 이의
당차고 시원한 음성이라니!
무지하게 큰 그녀의 울림은
일성만으로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나이 들어 작아진 감정 구멍,
꼼수들과 정권들에 휘둘려
거의 점으로 남은 줄 알았던 마음 저 아래의 감정할 줄 아는 구멍이
확 뚫려 버렸는지,
그녀의 이어지는 말에 집중하려해도
마음 안의 구멍에서 뭔가 자꾸 흘러나와 주체할 수 없게 만들었다.
눈물도 쉽지 않은 우리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너무 미안하고/ 안쓰럽고/ 소중하고/ 귀해서/
꼭 지켜내야 할 것 같은 무엇을,
잃으면 안되는 무엇을 가슴에 안겨주는
그 음성의 주인 김진숙은,
우리에게 자꾸만 ‘고맙다’고 했다.
“힘내라!” 며,
‘변할 세상에 대한 확신’을 ,
단어나 문장이 아닌
‘크레인 위에 녹인 진실’로 내미는 그녀는,
참 아름다은 사람이었다.
보지도 만나지도 못했지만,
반드시 살아서 만나야만 하는,
희망버스들이 살기 위해서도,
희망버스의 아이들이 웃을 수 있기 위해서도,
모든 억울함과 부당한 모멸들이 당당히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도
만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그녀는, 우리가 되었다.
우리도 이미 그녀가 되었다.
모든 절망 따위들,
폭력의 차벽을 둘러친 자본과 권력 따위들,
김진숙을 ‘그냥, 죽으라’ 비아냥거리는 따위들을 이겨내고,
서로가 서로가 된 우리는
반드시 살아서 만나리라.
우린 기운이 났다. 신났다.
김진숙이 날려준 힘으로 신명과 토론을 만들어 잠들기 전 새벽 4시까지,
부산의 청년밴드를 환호하고, 한진 유성의 해고가족들을 만나고,
발언들과 제안을 얘깃거리 삼아 토론도 하고,
맥주에 과자와 땅콩을 안주 삼아 주거니 받거니 깔깔했다.
새벽 4시가 넘어 어딘가는 희붐해질 시간이 되어서야
충남의 희망버스들은 도로에 등을 붙이고, 하늘을 덮은 채 두런두런 잤다.
그렇게 두 시간쯤 자고 일어난 새벽 6시. 와우! 였다.
세상 이런 장관이...
눈 뜬 영도조선소 앞에는 여전히 토론하는 사람들에
부산 청년밴드 내려간 마이크에서 7080을 부르는 안양의 희망버스들에
바로 그 옆과 앞에 누운 채, 자다 깨다 공연에 연호하는 사람들에
50M 쯤 길어진 화장실의 줄에도 아무런 짜증 없는 담담함의 진수에
커피를 내려 나눠주는 분들에
닭을 삶아 수백의 아침을 진상하려 작정한 군산의 누구들에
...
이게 웬일인가?
쉽지 않을 평화와 나눔의 공간이 새벽 세상에 와 있었다.
어릴 적, 밤새 흰 눈이 바꿔 놓았던 하얀 눈 꽃 세상 마냥,
깊은 감동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 희망버스들은 영도 시민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미 주입된 그 분들의 편견이나 오해도 이해했다.
1박 2일의 밤, 영도의 슈퍼에서
밤샘을 위한 깔개와 음료수와 과자와 맥주를 사고,
안주도 사고, 청학시장 입구의 과일가게에서 과일도 사고,
자갈치 시장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자니,
김진숙이 있는 영도와 부산이 가깝게 느껴졌다.
밤을 지샌 바로 옆의 영도바다에 감탄했고,
영도의 골목과 사람들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랬다.
일만오천의 희망버스들은,
충남을 포함한 우리 모두들은
아무 것에도 폭력하지 않았고,
버스 밑에 드러누워 차량통행을 막지도 않았으며,
타고 온 버스들은 주차장에 주차하였고,
그들이 떠들어댄 교통체증도 유발하지 않은 채,
어버이연합 등의 한심한 극우테러 폭력에도
우리가 약속한 평화를 지켜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은 폭언과 거짓보도로
희망버스와 국민들에게 오보의 폭력을 휘둘렀다.
희망버스의 평화엔 눈감거나 비아냥거리고,
희망버스가 부산의 교통을 마비시키며,
폭력의 무리일거라는 억측을 현실인양 부추기고,
확성시켜 떠들었다.
여기에 뽕짝 맞춘 부산시장은 프랭카드로 희망버스를 모욕하고,
김모 국회의원은 극우테러의 폭력을 격려하는 등,
참 파렴치하고 몰지성적이며, 비인간적이고 무례한 작태를 마구해댔다.
다신 보고 싶지 않은 면상들이지만 김진숙을 생각하며 지워주겠다.
그 자리에 아름다운 부산과
사이사이 친절했던 부산 시민들의 배려를 담을 것이다.
야만의 폭력을 훨~훨~ 날은, 희망버스
희망을 가로 막고
희망을 야유하고
희망을 테러하고
희망을 깔아뭉개던 너희들
너희들의 차벽을 날아
1만 경찰 철통폭력을 날아
조남호 이명박의 머리 위를 날아
절대 못간다던
니들의 잔대가리 위를 날아
우리는 갔다.
희망을 빵구내고
부산 초입부터 희망을 멈추게 하고
온갖 잡질들에 꼼수들로 작전해댔지만
우리는 날아서,
단숨에 가버렸다.
용용 죽겠지만, 포기해라
폭력과 해고를 멈춰라
우린 살아야겠다
더 이상 자본의 해고테러와
이명박의 정치테러
조현오의 경찰테러
어버이연합의 후안무치 극우테러
추선희 어버이 연합 사무총장의 시내버스 테러와
조중동의 왜곡테러
KBS의 도청테러를
그냥두지 않겠다 .
사람답게 살아야겠으니
중단시켜야겠다.
날아서.
희망으로 날아서.
(2011.08.03)
첫댓글 가 본 것보다 더 생생합니다.
"깜깜의 폭우에 번개라도 번쩍하면, / 잠깐 들어온 정신이 크레인을 기억하고, / 폭우에 흔들릴 크레인에 그녀는 어찌 살아있을까? / 절대량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어떻게 떨궈내고 있을까? 하는 마음이 / 잠시 들어오곤 했었다."
정말, 번개 칠 때만 그들을 생각하는 저의 삶입니다.
정회원 등업 감쏴합니다~ ㅎ
그나저나 한턱을 내밀어야할테데,
오른쪽을 내밀까요, 왼쪽을 내밀까요? ㅋ
현장에 있었던 사람중에, 그 중에서도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
자꾸 눈물이 납니다 그날이 생각나 또 웁니다
사람에게 집중된 따뜻한 시선.. 희망버스 느낌이 확 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가요. 나중에 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