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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셀라)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여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 시편 6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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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David) - 이스라엘 왕국 제 2대 왕
* 출생 : ?, 유다 베들레헴 |
* 사망 : BC 962경, 예루살렘 |
* 국적 : 이스라엘 |
1. 개요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하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다.
유대인들에게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견고한 왕조를 세운 이상적인 왕으로서, 그와 그의 통치에 관련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 대망이 생겨났다. 다윗은 미래에 있을 성취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신약성서 저자들은 예수가 다윗의 혈통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이슬람 전통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2. 초기생애
다윗은 이새(보아즈와 룻의 손자)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보좌관으로 공적 활동을 시작하였고, 사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요나단과 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사울의 딸 미갈과 혼인하였다.
그는 전사로서 필리스티아(블레셋)족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백성들의 인기를 얻었고, 이를 질투한 사울은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다윗은 유다 남부와 팔레스타인 해안 평야에 자리잡은 필리스티아으로 도망쳤으며, 그곳에서 뛰어난 지혜와 예지력으로 출세를 위한 기초를 쌓기 시작하였다.
현상금이 붙어 추방당한 후, 다윗은 자신의 지파(유다)의 사막 접경지대에서 로빈후드 같은 생활을 하였다.
다른 추방자들과 난민들을 조직하여 지도자가 되었는데, 성서는 이 사실을 "억눌려 지내는 사람, 빚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 그밖에 불평을 품은 사람들이 다윗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다윗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지역 주민들을 도적떼로부터 보호해주고, 만일 약탈당하면 약탈자들을 추격하여 빼앗긴 물건을 도로 찾아다주어 점차적으로 지역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갖게 되었다. 비록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 가끔 가트 지방의 필리스티아 왕들에게 보호를 받기도 했지만 다윗은 유다 동족들에게 자신은 여전히 애국자로, 심지어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사울왕의 결백하고 충직한 종으로 보이기 위해 애썼다.
또한 그는 여러 가지 정치적 행동을 취함으로써 유다 장로들의 호감을 샀다. 이렇게 때를 기다려서 결국 다윗은 사울에 대한 반역자로서가 아니라 그의 진정한 후계자로서, 처음에는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고 나중에는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다. 사울과 요나단이 길보아 산에서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싸우다 전사하자 다윗에게 그런 기회가 왔다.
3. 왕위
다윗은 헤브론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미 왕이 되어 왕권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싸워야 했다. 그러나 이스보셋의 호위병들이 그를 살해하고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유다 지파뿐만 아니라 다른 지파들까지도 포함)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는 것으로 내전은 막을 내렸다. 다윗은 이민족인 여부스족이 차지하고 있던 성곽도시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통일된 새 왕국의 수도로 삼아 이스라엘 종교 최고의 상징인 계약궤를 거기에 옮겨놓았다.
필리스티아를을 철저히 무찔러서 다시는 이스라엘의 안전에 큰 위험이 되지 못하게 했고, 해안지대를 이스라엘 영토로 병합했다. 그는 에돔·모압·암몬 등 이스라엘에 접한 여러 소왕국의 대군주가 됨으로써 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BC 1000년에 시작된 다윗의 통치는 약 40년간 지속되었다(~BC 962).
전사이며 제국 건설자로서 다윗의 명성은 집안의 내분과 이에 관련된 정치적 반란 사건들 때문에 훼손되었다.
그는 왕국을 구성하는 여러 집단을 결속시키기 위해 그들 가운데서 아내를 얻었고 후궁전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가족관계는 전통적인 씨족 사회의 혈연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윗의 아내들은 서로에 대해 매우 소원했으며, 그 자식들도 갈등을 해결하고 왕위계승을 확립하는 선례들을 제공했던 기존의 사회형태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의 셋째아들 압살롬이 맏형 암논을 죽였다.
암논이 이복 누이동생인 다말, 즉 압살롬의 친여동생을 강간하자 거기에 보복을 한 것이다. 이 일로 유배를 당한 뒤 아버지 다윗과 다시 화해하게 된 압살롬은 백성과 궁정대신들 가운데서 인기를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 다윗은 요르단 강을 건너 도망하였고 압살롬은 한동안 예루살렘과 후궁전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결국 압살롬 군대는 패하고, 압살롬 자신은 다윗의 장군 요압의 손에 죽었다. 결국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다윗과 바쎄바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이었다.
다윗의 정치 경력을 기록한 성서 저자들(〈사무엘 상·하〉를 기록한 이들)은 그의 성격을 깊이 꿰뚫어보았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겨놓은 인물이었다. 그는 사울이 미갈을 아내로 주겠다고 하면서 제시한 요구를 2배로 채워줌으로써 가공할 만한 행동과 사람의 마음을 끄는 극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뛰어난 임기응변 능력 이외에도 특별한 상황에서 자신의 행위를 지속적이고 원대한 그의 목적을 이루는 데 유용하게 쓸 줄 알았다. 예를 들어 그가 사울 왕을 살해할 기회를 맞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데 대한 두 이야기(Ⅰ사무 24·26)는 극적인 대결의 순간에서 그의 의연한 태도를 보여줄 뿐 아니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쫓겨다니면서도 기존의 제도들, 특히 야훼께서 기름부어 세운 왕이라는 신성한 직위를 깊이 존중한 인물로서 오랫동안 명성을 얻는 데 이바지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후에도 자신의 정치경력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점에서 다윗은 그처럼 기성제도를 존중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 아말렉 사람인 한 청년이 다윗을 찾아와 사울의 죽음을 전하면서 자신도 사울을 죽이는 데 가담했음을 넌지시 비추었. 그 청년은 좋은 소식을 전했으니까 상을 받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고, 그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다윗은 민족이 재난에 처한 시기에 자신과 사울의 불화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느꼈다. 그는 야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 손을 댄 벌로 아말렉 청년을 죽이고, 자기편 사람들과 함께 감동적인 조가(弔歌)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
헤브론 왕이 된 뒤 얼마 후 다윗은 사울을 열정적으로 따르던 요르단 강 건너편 성읍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사울과 요나단의 시체를 찾아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그곳 주민들에게 전갈을 보내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충성을 보인 일을 치하하였다. 이 일화에서도 그의 행동은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진지하며, 전이스라엘의 화해가 다윗 개인의 앞날과 민족의 생존에 대단히 중요한 상황에서 매우 적절하게 취해졌다.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났을 때, 부모의 사랑과 정치 권력 사이에 뼈저린 갈등이 일어났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으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하면서 애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수하의 장군 요압(왕이 자신에게 친히 내린 명령을 어기고서 젊은 반역자를 죽였음)으로부터 왜 지지자들보다 원수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느냐는 질책과 함께, 그렇게 하면 백성의 신망을 잃어 왕권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노년의 노력과 지혜를 다해 이스라엘의 여러 분파를 화해시켜 하나로 묶으려고 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당시 베냐민 지파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일으킨 또 다른 반란을 진압하였다.
4. 정치적 업적
다윗은 이스라엘 최초의 성공적인 왕이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통일했고, 효과적으로 다스렸으며, 항구적인 왕조를 세웠다. 이와 같이 그는 사울 왕이 실패한 일을 성공시켰고, 이스라엘 역사와 전통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사무엘 하〉 9~20장과 〈열왕기 상〉 11~22장은 그의 통치와 왕위계승을 알려주는 주요 자료들이다. 이 '역사'는 다윗의 치세 직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데, 그런 점에서 서양의 가장 오래된 실록일 것이다. '다윗 가문의 역사', 또는 '왕위계승사'로 알려진 이 기록들은 특히 카리스마적인 정치적 지도자들과 권위를 세습 군주제로 바꾸려고 했던 다윗이 어떤 문제들에 직면했었는가를 밝히는 거울이 된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 몇 세기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지파 동맹 형태로 느슨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세겜을 중심으로 한 북쪽 지파들의 동맹이 가장 유명했는데, 에브라임 지파가 그 동맹을 주도했다. 지파는 씨족들의 집합체였고, 씨족은 단순히 확대된 가족이었다. 이스라엘 사회의 혈연적·가족적 특성은 셈족 전통의 기본적인 특성으로서, 오늘날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 사회에 그대로 남아 있다. 금세기에 그 곳에서의 사우디 왕조 수립은 3,000년 전 다윗이 안고 있었던 문제점과 그가 이루어낸 업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유사점을 제공해준다.
예를 들어 다윗을 한동안 유배당하게 만들었던 압살롬의 반란과 당시 살아남은 아들 가운데 장자였던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후원자들에 대항하여 왕권을 장악하려고 한 사건의 경우, 이 두 사람은 지역 및 지파 전통에 호소하여 다윗 제국의 형성에 수반된 권력의 급속한 중앙집중화에 불만을 갖고 있던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아 거의 성공의 문턱에까지 갔었다.
압살롬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면서 자기는 성문에 앉은 장로처럼 왕정 이전 시대의 방법대로 재판을 하겠다고 했다(Ⅱ사무 15). 그는 자기 아버지 다윗이 권좌에 오를 때 유용하게 써먹었던 방법, 즉 지방 씨족들에게 호소하는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이 되려고 했다. 훗날 솔로몬의 통치가 끝났을 때 지파 전통이 다시 살아나서 통일 왕국은 분열되었으나 사회 발전의 냉엄한 추세에 따라 지파 사회는 다시 세워지지 못했다.
그러나 다윗 시대는 물론 그 이후까지 지파주의적 유산은 매우 강하게 유지되었다. 다윗의 위치에는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측면이 있었다. 다윗이 자신의 왕위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고 그 합법성을 세울때 문제에 봉착했던 이유는 왕이라는 지위가 이스라엘의 사회 구조와 전통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고대 근동 왕권을 본떠 수입해온 낯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다 지파를 구성한 부족 연합에서 다윗의 지위는 안전했다.
그가 씨족 구조의 전통적인 사회 정치 수단을 능숙하게 사용함으로써 지파들을 결속하고 유다를 다스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유다는 그의 왕권을 '적법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왕조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그는 필리스틴티아와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전지역을 안전하게 만들고, 그 다음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정치와 예배 중심지로 삼음으로써 이스라엘 전체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이 노력은 충분치 못했다. 솔로몬이 죽은 뒤 왕국이 둘로 나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와 제의의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결국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다윗 성' 예루살렘이 유대인들의 거룩한 성이 되었고, 다윗 집안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5. 종교적인 역할과 중요성
이스라엘의 종교 전통에서 다윗 왕가 또는 가문은 하느님과 민족을 이어주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즉 왕을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 보게 된 것이다. 고대의 많은 전통에서와 마찬가지로 왕을 신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존재로 생각하게 되었다. 메시아라는 말은 다윗 계열의 왕들의 칭호인 '하메시아'(기름부음을 받은 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훗날 재난을 당하게 되자 하느님의 권세를 위임받아 백성과 영토를 구속해줄 새로운 중재자인 메시아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름으로써 이 희망이 성취되었다는 확신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다윗은 그 백성들의 기억 속에 2가지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 하나는 그들의 정치 권력을 토대로 한 위대한 인물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의 신앙의 중추적 상징이다(신성한 왕권).
다윗이 스스로 이러한 지위를 얻게 된 과정과 그의 가문, 그리고 그의 도시에 대해서 〈사무엘 하〉 5~8장에서 추적해볼 수 있다.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다윗은 그곳 주민들과 시온 산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종교 제도를 다스리기로 했다. 이전 군주(여부스족)는 왕인 동시에 대제사장으로서 도시와 그 신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하였으나, 이스라엘에는 왕이 중재자 겸 제사장 역할을 한 선례가 없었으며, 성곽도시를 통치와 예배의 중심지로 삼았던 예도 없었다. 다윗은 여부스족의 시온 산 제의를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의(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례에 맞추어 수정했다.
다윗 시대부터 약 4세기 동안 계속된 전체 왕정을 통해 왕은 시온산 예배에서 단순히 예배 집행자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느님과 민족 사이의 관계에서 자신의 직무를 통해 몸소 구현하는 인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겜과 다른 곳에서 행해지던 왕정시대 이전 이스라엘의 예배에서는, 각 지파의 지도자를 통한 하느님과 백성 간의 계약이 양자 사이를 잇는 끈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의 고대제의를 수용·변형시킴으로써 이스라엘에 새로운 예배를 도입했는데, 그 예배는 왕 자신의 지위와 그 지위가 가지는 신성한 의미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야훼라고 불렀다.
다윗은 이 이름을 예루살렘(이 도성의 옛 이름은 '살렘'이었을 것임)에 거하는 지존자의 거룩한 이름으로 삼고, 야훼가 그 도성을 정복했음을 암시했다. 신에 관한 이전의 모든 이름이나 칭호는 정복자이자 이스라엘의 하느님인 야훼의 속성 혹은 칭호가 되었다(예를 들면 '엘 엘리온'[El 'Elyon: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 사용하던 이름이 다른 이름들을 대신하긴 하였으나, 예배의 내용은 비슷하게 남아 있었다.
야훼가 세상을 창조하였고 민족들을 다스리고, 범우주적 통치의 상징과 방편으로서 왕을 세웠다. 시온은 야훼가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선택한 다윗이 거하는 곳으로서, 야훼가 친히 보좌를 두고 좌정하였으며, 왕은 그의 대리자로서 오른쪽에 앉았다. 다윗은 이렇게 예루살렘이 건설될 때부터 그 곳에서 다스려온 제사장왕(king-priests)의 계열을 이어나갔으며, 이런 상황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 한 전설에 따르면 족장 아브라함이 오래전 그 계열을 대표하던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고 축복을 받았다.
자신의 왕위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는 수단으로 예루살렘의 고대 제의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복의 힘이었던 야훼 제의라고 고쳐 부른 후, 다윗은 새로운 성지와 그곳에서의 예배를 왕정시대 이전의 이스라엘 경험과 관련시키기 위해 중요한 이전을 했다.
즉 그는 계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 그것을 제의의 중심 대상으로 삼았다. 전승에 따르면 계약궤는 이스라엘과 함께 광야를 유랑했고, 그들을 약속의 땅에 이르는 길로 인도했다. 그것은 직4각형의 나무궤로서 원래 덮개가 없었으며 야훼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상징하였다.
야훼와 계약궤는 너무 긴밀해서 계약궤를 야훼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야훼가 자기들을 위해 싸운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서 계약궤를 들고 전쟁터에 나갔으며 야훼가 자신들과 함께 유랑한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광야에서도 그 궤를 가지고 다녔다. 예배에서도 계약궤가 사용되었는데 해마다 절기 때 행해졌던 순례 행렬에서도 운반되었다. 그것은 야훼 임재의 상징이었고 심지어 구현이었다. 왕정시대 이전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시온에서 거행되는 다윗 왕가의 제의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윗으로서도 계약궤와 또 그것과 관련된 모든 옛 경험을 새로운 의식에 끌어들이는 것 말고 달리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다윗은 시온 산 예배를 각색하고 왕을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임재의 실체와 수단으로 이해함으로써 인류의 종교사에, 특히 서양 전체의 경험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 때문에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가 되었고, 다윗은 장차 올 메시아의 원형이 되었다. 메시아의 상징으로서 다윗의 귀환 혹은 다윗 '자손'의 도래라는 말이 역사 안에서 역사를 심판하고, 구속하고, 새롭게 하기 위한 신의 통치와 임재를 강조하는 말이 되었다. 다윗은 이렇게 해서 미래의 성취, 최종적인 평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등장하기 전 두 세기를 풍미했던 묵시문학의 발전과정에서는 다윗의 상징적인 역할 중 신의 중재자 신분이 강조되었다. 다윗의 자손은 천상적인 인물로 더욱 강조되어, 결국 세계의 민족들 위에 군림하는 하느님의 아들로 발전되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러한 기반 위에서 일어났다. 이 새로운 종교는 시온 산 제의의 신비주의에서 다윗에게 부여된 칭호와 기능들을 가지고 예수의 경력을 해석했는데, 그 전통에 따르면 다윗은 제사장 왕으로 일했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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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David)
이스라엘 민족의 두 번째 임금이었던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이었다. 구약 성경에서는 그를 하느님 백성의 위대한 임금으로 묘사하고 있다. 400여 년 동안 지속된 왕조의 기초를 놓고 황금기를 연 그는 기원전 1010년경부터 970년경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다윗의 생애에 관한 기록들은 사무엘기 상권 16-31장, 사무엘기 하권 1-24장, 열왕기 상권 1-2장과 역대기 상권 10-29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구약 성경 속 개념생애
1) 임금이 되기 이전
다윗은 유다 지파에 속한 자로서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이사이의 아들로서 양치는 목동이었다. 예언자 사무엘은 하느님의 명을 받아 베들레헴으로 가서 그분께서 손수 뽑아 임금으로 세우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성별하였다. 그것은 그분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임금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될 사울의 자리를 다윗이 잇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악령에 시달리던 사울을 위해 비파를 타는 궁중 악사로 지내기도 했던 다윗은 필리스티아인 투사 골리앗을 무찌른 일로 인해 백성들의 영웅이 되었다.
이 때문에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적의로 가득 차 그를 없애 버리려고까지 하였다. 다윗은 사울과는 달리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요나탄과 필리스티아인들을 죽인 대가로서 아내로 얻은 사울의 딸 미칼의 도움을 받아 자기를 죽이려 했던 사울의 음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후 사울이 길보아에서 필리스티아군에 의해 죽임을 당할때까지 사울의 위협을 피해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2) 임금이 된 이후
사울이 죽자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의 임금으로 추대되었고 약 7년 후 사울의 아들인 이스 보셋이 죽은 뒤 통일국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었다. 이스라엘 전체의 임금이 된 다윗은 여부스족이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빼앗아 다윗 성이라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 또한 적대적인 주변 민족들인 필리스티아, 모압, 에돔, 암몬, 아람 등을 정복하여 이스라엘 역사 이래 가장 강력하고 강대한 나라를 건설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단합시켰다. 다윗은 또 예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인 상징이며 화합의 상징이었던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자신의 권력을 더욱 굳건하게 하고 예루살렘을 국가적인 예배 의식과 정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성전을 건축하려고 결심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나탄을 통해 다윗의 왕조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지속될 것이나 성전은 아들 솔로몬이 짓게 될 것임을 알려 주셨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손으로 성전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생애의 말년을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 의식을 재정비하고 행정과 군사 체제를 강화하며 성전을 세우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보냈다.
한편 다윗이 위대한 임금이기는 했지만 역시 인간적인 부족함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는 부하였던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강탈한 죄를 범했으며 인구 조사를 함으로써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또 아들인 압살롬의 반란과 아도니야의 왕위 계승 음모등 자기 집안의 소요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
다윗은 또 시편에 실려 있는 작품들의 상당수를 지은 작가이기도 하다. 다윗이 노래한 시편 가운데는 하느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이’가 지닌 신성, 그의 영원한 사제직, 그의 대속적인 죽음, 그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앞으로 올 왕국 등 메시아적인 의미를 담은 것들도 있다. 그는 음악적인 재능도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3)다윗 생애의 의의와 예언자들의 예언 안에서 본 다윗
구약 성경에서 전해 주는 다윗은 이스라엘 임금들의 본보기로서 하느님께 충실했던 참된 임금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백성을 다스리도록 그분께서 직접 뽑아 세우신 임금이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왕조와 나라는 길이 뻗어나갈 것이며 그의 왕위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약속과 함께 다윗과 계약을 맺으셨다.
다윗은 ‘하느님의 사람’이라 불렸으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임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이라고 불렸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한결같은 은혜를 베푸셨다. 다윗을 잇는 후대의 임금들이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다윗 왕조는 영원하리라고 다윗과 맺은 계약을 잊지 않으셨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킬 미래의 다윗에 관해 언급해 주었는데, 그들이 행한 예언의 토대는 다윗의 왕조가 영원하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이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영원히 다윗의 왕좌에 앉아 정의와 의로움을 세울 메시아적인 통치자를 예고했다. 예언자 에제키엘도 하느님께서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적인 임금으로서의 다윗을 다시 세우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음을 선포했다. 이 밖에도 호세아, 아모스, 즈카르야 예언자 등도 장차 다시 일으켜 세워질 다윗 왕권을 예언했다. 이렇게 다윗의 이상적이고 영원한 왕권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믿음의 토대가 되었다.
2. 신약 성경 속 개념
다윗이라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가장 많이 나타난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예수님의 족보는 다윗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며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이 또는 다윗의 뿌리로 묘사되기도 한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하면서 앞으로 태어날 예수님이 조상 다윗의 왕좌를 이어받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밝혔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나올 메시아(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다윗의 주님으로서 다윗을 훨씬 능가하는 더 위대하신 분이시다. 이처럼 신약 성경에서 다윗이라는 이름을 예수님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구약에서 예고한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다윗은 하느님께로부터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실 약속을 받은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나아가 그는 예수님께서 실현하시게 될 메시아적인 예언을 담고 있는 시편의 저자로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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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인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스라엘의 전승 안에서 레위 지파는 야곱과 레아의 셋째 아들인 레위의 자손들로 구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레위인이라는 말이 본래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그렇게 제한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레위인이라는 말은 혈통이나 가계를 나타내는 명칭이라기보다는 기능적이거나 직무상의 명칭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세 그룹으로 나뉘는 고대 이스라엘의 성직자 계열(대사제, 사제, 레위인)에서 가장 낮은 서열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레위인이라는 말이 처음에는 레위 지파 사람들을 가리켰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파의 경계를 넘어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포함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 레위인에 관한 구약 성경의 자료들은 일관성이 없으며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여러 의문점들을 내포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탈출기와 후대의 다른 문헌들을 보면 레위인이라는 명칭은 사제 지파에 속해 있었거나 사제직과 연관되어 성전에서의 직무를 수행하던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레위 지파 안에서 아론의 후손은 사제가 되었고 아론의 직계가 아닌 다른 레위인들은 사제를 도와 성막과 성전 그리고 예배 의식에 관련된 일을 하였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사제들은 레위 지파 또는 넓은 의미에서 레위인들의 후손들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레위인에 관한 자료들은 일관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레위인들이 등장하는 문헌들을 보면 대부분 사제들과 레위인들 사이에 직무의 차이가 있음이 전제되고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레위인이라는 용어는 사제라는 말보다 더 넓은 범위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구약에서 레위인들이 특별히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한 사람들로 선택된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시나이 산에 머물러 있었을 때였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맏아들 대신 레위 지파를 선택하시어 당신께 봉사하도록 결정하셨다. 그 이전까지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 그들의 모든 맏배를 살려 주신 것을 기념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맏물은 그것이 사람이 되었든 동물이 되었든 곡식이 되었든 모두 하느님께 봉헌되어야 할 그분의 특별한 소유물로 여겨져 왔다. 한마디로 레위 지파는 하느님을 위해 성별된 지파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을 때에도, 레위인들은 그분께 대한 충실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로부터 선택을 받는 은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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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인들은 사제들을 도와 성전과 성막의 일을 하였다. 레위인들의 직무는 군주제 아래서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특히 다윗 임금은 레위인들의 직무를 과감하게 혁신하였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레위인들은 만남의 천막을 설치하거나 계약 궤를 옮기는 등의 관리 업무를 담당했고 성전이 세워진 후에는 성전의 주 관리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레위인들은 성전과 성막의 예배 의식에 필요한 봉사를 했다. 제단에 올리는 빵이나 곡식 예물을 준비하고 성전에서 사용하는 거룩한 기구들을 깨끗이 닦고 관리했다. 아침과 저녁 봉헌 예물을 바치는 시간에 하느님을 찬양했고 안식일과 축제 때 사제들을 도와 번제물을 준비하는 일을 했다. 그들은 또 성가대원, 악사, 문지기, 행정과 재판관, 성전을 꾸미는 장인, 성전 주변이나 성전의 방들과 뜰 그리고 성전 재물의 관리자, 왕실 봉사 담당 관리들의 감독자 등으로 일했다. 또 사람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가르치는 일도 하였는데(신명 33,10; 2역대 17,8-9; 느헤 8,7.9 참조), 이 일은 나중에 율법 학자들에게 넘어갔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직무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때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과 달리 레위인들은 가나안 땅에 영토를 배분받지 못했고, 다만 가나안 땅 전체에 걸쳐서 약 48개의 도시가 그들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받을 몫과 상속 재산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었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을 수 있었고 받은 십일조 가운데 십일조를 주님께 예물로 바쳐야 했는데, 그것은 아론 사제를 통해 주님께 들어 올려졌다.
이스라엘 백성은 희생 제사의 음식을 나누고 국가적인 축제를 거행할 때 레위인들을 초대하여 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야만 했다. 그들은 생계 수단으로 삼을 만한 토지나 재산 같은 것들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베푸는 자선에 의지해야만 했다. 이는 그들이 온전히 하느님의 일에 헌신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레위인들이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는 나이는 20세나 25세 또는 30세였고, 은퇴는 50세였던 것 같다. 죄 벗는 예식을 행함으로써 하느님께 봉사하도록 불린 그들은 연중 대부분은 자기들 도시에서 살다가 정해진 기간이나 자기 차례가 되면 성막이나 성전으로 가서 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서는 규정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함으로써 죽음을 면치 못한 일부 레위인들의 경우를 소개한다. 왕국이 분열된 이후에 북왕국의 많은 레위인들은 정치적, 종교적 피난처를 찾아 남 유다로 내려갔지만 일부 레위인들은 북 왕국의 우상숭배에 빠져 들기도 했다.
바빌론 유배 이후에는 이스라엘로 돌아온 레위인들의 수가 사제들보다 적어 즈루빠벨 성전 시대에는 그들이 사제들보다 훨씬 작은 집단으로 전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하느님께 불충실한 결과로 예전에 비해 신분도 낮아졌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도 주로 하찮은 일만을 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
신약 성경에서는 레위인에 관해 언급한 경우가 드물다. 요한복음 1장 19절에서 레위인들이 사제들과 함께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들은 아마도 예배 의식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그들을 메시아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부류의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을 피해 간 레위인의 모습은 레위인들이 관장해 왔던 예배 의식이 형식에 치우치거나 사랑 없이 행해졌음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한편 레위라는 말은 세리였던 마태오의 다른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고 예수님의 족보에서 조상들의 이름 가운데도 있다. 히브리서 7장 11절에서는 레위 사제직이라는 말을 아론 사제직의 다른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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