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요즘 이상하다. 잔뜩 건강에 신경을 쓴다. 혹시나 명퇴를 앞두고 심경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어찌 저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삼십 년간 다닌 직장을 그만두자니 자신이 퇴물이 되었다는 생각이라도 드는 것일까. 노는 것도 건강이 있어야만 가능하니 잘 놀기 위해 미리 워밍업을 해 두자는 것인가. 아내가 전보다 달라진 것이 분명하다.
홍삼 드링크 건만 해도 그렇다. 황금빛 비닐 팩으로 포장된 세트가 어디서 났는지 전혀 귀띔도 없이 부엌 구석에 숨겨 두고 마시면서 숫제 내게 권하지도 않는다. 혹 얻어 마실 기회가 있을까하여 부엌을 기웃거려 보지만 그때는 아내가 숫제 홍삼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추리영화에나 나올 듯하게 배가 싹둑 잘린, 비닐 팩을 싱크대에서 발견하면 허탈해진다. 정말 감쪽같다. 권하지 않는 물건을 취하는 건 신사의 양심과 법도에 어긋날뿐더러, 훔쳐 먹는 게 몸에 좋다는 확증도 없기에 아내의 아량만 기다릴 뿐이다.
사람이 꼭 음식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것은 아니다. 새벽에 자주 아내가 침상에서 몰래 빠져나가 아디로 사라지곤 한다. 잠결에 아내의 이불 속으로 손을 뻗치면 온기와 공허라는 상반된 느낌에 당혹하게 된다. 혹 부엌에서 특식을 만드는가 싶어 귀를 쫑긋해 보지만 기척이 없다. 방문을 열고 거실의 어둠과 맞닥뜨리면 불길한 생각이 와락 엄습한다. 어디 갔을까. 억측을 하며 다시 침상에 누워 뒤척이다 보면 아내는 러닝머신을 했다거나 목욕탕에 갔다가나 앞산에 다녀왔다며 상기된 얼굴로 방에 들어선다. ‘나도 데려가지 그랬느냐, 당신 혼자만 오래 살고 싶냐?’ 한마디 잔소리를 할까 하다가도 애써 그만둔다.
그간 아내는 비타민을 배척해 왔다. 아침에 내가 챙겨 주면 손에서 미꾸라지 빠져나가듯 온갖 이유를 들어 잘도 회피한다. 미국 사는 딸이 귀국할 때마다 온갖 비타민을 보따리로 안겨 주며 잊지 말고 챙겨 드시라 신신당부하지만 쇠귀에 경 읽기가 따로 없다. 그런 아내가 요즘 욕심을 내듯 영양제를 손수 챙겨 먹는다. 거기다 몸에 좋다는 육 년 근 홍삼 드링크를 몰래 혼자 마시니 이런 변화가 무조건 좋지만은 않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시중의 섬뜩한 속설도 있기에 걱정스러워서 한번 전후 사정을 따져 보는 것이다.
내가 홍삼에 연연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한때 몸이 차서 한의원에 찾아갔더니 몸이 더워지고 체질이 좋아지도록 일정 기간 홍삼을 상복하라는 처방을 해 주었다. 이 년 홍삼액을 꾸준히 마셨더니 큰 효과가 있었다. 그 결과 지난 몇 년 동안 여름엔 불편할 정도로 땀이 많았고, 겨울에도 이전보다 추위를 덜 타게 되었으며, 몸의 활력을 되찾은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홍삼의 약효가 떨어졌는지 최근 다시 몸이 차다는 느낌이 든다. 차제에 홍삼이라도 좀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에 부엌에서 홍삼 드링크 세트를 발견한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아내의 변신에 대한 답이 뚜렷하지 않아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평소 아내의 반응으로 보아 필시 ‘내가 일찍 죽으면 다른 여자 좋은 일 시키려고?’란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반응이 전혀 달랐다. “당신 홀아비로 남겨 두고 불쌍해서 내가 어떻게 일찍 죽어요.” 그 말에 갑자기 내 눈에 눈물이 핑 돌았고 목에 메어 왔다. 평소 내가 혼자 뭘 하는 모습이 얼마나 측은했으면 저런 소리를 할까. 언젠가도 비슷한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저 갸륵한 마음 앞에 나도 홍삼 드링크를 좀 나누어 마셔도 도냐고 묻지 않기를 잘했다.
얼마 전에 아내가 건강 검진을 했고, 결과가 좋지 않아 의사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우선 체력을 강화하라며 홍삼 복용을 권하더란다. 마침 이웃 친구가 고맙게도 홍삼 드링크 세트를 보내와 부엌에 놓아두고 시험 삼아 몇 번 마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요즈음 내 몸이 차가운 것 같다며 귀한 것이니 당신 마시라며 건네준다.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약은 나누어 먹지 않는 법이라며, 이번에는 당신이 마시라며 사양했다. 부엌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홍삼 팩들을 가지런하게 박스에 담아 잘 보이는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차가운 아내의 몸이 더워지면 생기가 돌고 건강해질 게 분명하다. 아내가 건강을 되찾으면 굳이 새벽에 나를 두고 사라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앞산에도, 헬스장도 나와 같이 가려고 기다려 줄 것이다. 내친김에 혼자 새벽에 나가면 무섭지 않느냐, 혼자 가지 말고 나를 깨워 보디가드 삼아 데려가라고 했더니 꼭 마음에 맺힌 것이 있는 사람처럼 한마디 한다. “글 쓴다고 밤을 새우고 겨우 새벽에야 코 골며 곤히 자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깨워요.”
아내가 식탁의 저 홍삼 드링크를 열심히 마셨으면 한다. 다음에는 내가 전문점에 직접 들러 더 좋은 제품을 구해 아내의 건강을 챙겨 줘야겠다. 나처럼 아내에게도 홍삼이 좋은 효험이 있었으면 한다. 아내의 건간 검진 결과에 다시 눈길이 머문다. 내가 어떻게 내 건강만 챙기고 아내의 건강을 돌보지 않았던가. 부부의 건강은 두 사람이 함께 서로 돌봐야 할 대상이 이닌가. 구르는 두 바퀴가 함께 튼튼해야 수레가 오래가는 법니다. 홍삼 드링크는 하나의 작은 상징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부부가 함께 열어 가야 할 사랑과 건강한 삶의 노정에 하나의 각성제로서 손색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