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
친정에서 보(褓) 하나를 가져왔다. 너비가 60에 길이 50센티쯤 되는 ‘다후다’*로 된 것인데 어머니는 “그까짓 것을 어디에다 쓰려고….”하면서도 소중히 싸주었다. 집에 와서 보니 크기가 어중간해 탁자보의 쓰임도 아니고, 번들거림이 심하여 벽걸이로도 마뜩잖았다. 그렇다고 버림치로 낼 것은 아니어서 서랍장에 넣어두었다.
어머니는 춘분 무렵이면 깃발을 만들었다. 네모반듯하게 끊어낸 다후다 천에 물고기가 그려진 습자지를 올려놓고 재봉질을 하면 노루발 끝에서 민어와 조기, 방어들이 부화하여 나왔다. 미끈한 몸통에 비늘과 지느러미가 돋고 눈이 생겨나면 인두질을 했다. 웬만한 온도 변화에도 진득한 무명과는 달리, 다후다는 성질이 파르르하여 까딱했다간 오그라들기 일쑤였다. 마지막으로 참빗살 같은 아가미가 붉게 수 놓이면 방안은 금세 “파드닥” 물질 소리로 가득하고, 완성된 깃발은 고기떼를 따라 문지방을 넘어 마당으로, 바다로 힘차게 나아갔다.
춘분날이면 섬은 축제 분위기였다. “신랑 입장!” 소리에 맞춰 식장에 들어서는 새신랑처럼 섬 집 장대와 고깃배의 돛대 끝에는 색색의 깃발이 늠름하게 나부꼈다. 선창에서는 첫 출어를 앞두고 풍어제가 열렸다. 고사상은 정성을 다한 제물들로 가득했는데 어린 내가 보기에는 아버지가 칼로 오려 만든 왕 문어 꽃이 최고였다. 오색찬란한 옷을 입은 무녀가 북채로 “둥!”하고 용왕신을 부르면 하얀 도포 차림의 아버지가 앞에 나가 큰절을 올렸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깊이 머리를 숙여 풍어를 비손했다.
그날엔 수평선을 넘어오는 찬바람에서 순한 기운이 만져졌다. 시퍼렇기만 하던 바닷물에도 연두빛이 설핏했다. 북소리에 맞춰 깃발이 예민한 촉수로 돛대를 흔들면 사방 천지에 축문이 내걸렸다. 뱃고사가 끝나면 깃발은 소망을 안고 바다로 갔다. 사람들은 두 손을 모은 채 깃발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가는 것을 뚫어져라 보며 만선이 되어 오기를 바랐다.
바다의 봄은 언제나 높은 파도를 넘고서야 왔다. 섬은 풍랑에 휩싸인 배처럼 자주 출렁댔다. 살아 있는 것들을 삼켜버릴 듯한 바람 앞에 모두가 숨죽인 밤,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있으면 마당 장대 끝에서 짐승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면 뱃사람들의 비명에 잠긴 얼굴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어느 해였던가. 입춘 무렵에 바다로 나갔던 순덕이 아재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딸 셋을 낳고 늘그막에야 아들을 얻은 기쁨에 큰바람이 온다는 예보를 듣고도 그물을 실었다. 아들이 생겼으니 배를 더 열심히 타야 한다며 사립문에 숯과 빨간 고추를 매단 새끼줄을 단단히 쳐두고 나선 것이 마지막이었다. 감때사납던 바람이 금줄마저 삼켜버린 그날 밤, 집안 곳곳에서는 깃발들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며칠 태풍이 지나간 아침 바다는 순한 햇살로 반짝였다. 섬은 퀭한 눈빛으로 바다의 끝 선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다는 단절을 선언하듯 침묵으로 빗장을 쳤다. 사람들은 깃발이 빗장을 제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지만, 깃발은 배와 함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사라지거나, 모든 것을 바다에 묻고 저 혼자 돌아오기도 했다.
궂긴 소식이 날아들면 마당 장대에서 깃발을 내렸다. 깃발이 없는 섬은 적막 같았다. 슬픈 곡조의 해조음과 바닷새 소리뿐, 사람들의 말소리라곤 들리지 않았다. 어른들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침울했고, 아이들은 진혼제를 지켜보며 슬픔을 배웠다.
영원할 것 같던 침묵도 깃발이 오르면 끝이 났다. 깃발은 장대 끝에 매달렸다가 한 해의 어장을 마무리하는 날이면 뱃사람들처럼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임무를 다한 깃발들은 먹이 사냥에서 맹수의 이빨에 사지를 찢긴 동물의 최후 같았다. 어머니는 정성을 다했다. 흩어진 신체를 수습하듯 만신창이가 된 깃발을 가지런히 접어 부엌 한쪽에 따로 떼어두었던 짚 위에 얹어 태우고, 남은 재는 뒤안 대밭에 묻었다. 새벽이면 어머니가 가없이 올리던 기도도 함께 묻혔다.
집집 방문 틈으로 재봉질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하면 어느새 춘분이 와 있었다. 춘분날 아침이면 어머니가 밤을 새워 만든 깃발이 마당에 내걸리고, 다른 집 하늘가에서도 새 깃발이 나부꼈다.
깃발은 숨이 되었다. 섬의 혈관 속으로 푸른 피돌기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몸을 추슬러 일어났다. 전신이 찢기면서도 다시 바람 앞에 서는 장대 끝 깃발처럼, 스스로의 깃발이 되어 파도에 맞서 바다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