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화대종주2 – 코재에서 연하천까지(첫날)
5월 26일 화대종주 시작 날.
새벽 3시 20분에 잠이 깼다. 잠자리의 예민함과 산행에 대한 긴장감이 컸기 때문이리라. 남편, 아들은 잠에 곤히 빠져있다. 해가 긴 계절이기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남편에 이어 아들이 기상, 남편과 난 사과, 계란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아들은 空食.
06:20 화엄사로 출발.
추정하기를 남편 배낭 무게 15kg 내외, 내 짐 8kg 내외, 아들 짐덩이 35kg 내외.
짐을 나눠지자는 엄마의 요구를 단칼에 거부하는 아들이 오히려 내 맘에 짐이 된 채, 화엄사를 향해 출발했다. 종주 확인을 위해 화엄사에 들러 스템프를 찍으로 가는데 스템프 찍는 장소를 잘 몰라 30여 분을 허비했다. 아이고 아까운 시간! 맨몸이라면 아무 문제가 안 될 텐데.
07:10 화엄사에서 출발. 연기암 가는 길은 남편과 자주 걸었던 길이기에 편안했다. 지리산 짙은 숲속을 흐르는 물소리 새소리가 청량음료 같다.
이제 연기암을 거쳐 코재까지 4km를 가야 한다. 코재의 험난함을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고 직접 다녀온 남편 아들도 시인한 터라 마음 무장을 단단히 했다. 1km쯤 갔을까 내 뒤를 따르던 아니 나를 보호하며 뒤 오던 아들의 숨소리가 헉! 헉! 힘들게 들렸다.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어’ 앞서가는 남편을 불러세워 휴식을 가졌다. 갈수록 쉬는 시간과 거리는 짧아지고 휴식시간은 길어졌다. 급기야 아들의 배낭에서 맥주 4캔을 꺼내 내 짐에 보탰다. 또 1캔은 나와 아들이 나눠 마시고 간식거리도 일부러 먹어치웠다. 그런들 얼마나 가벼워졌겠는가. 앞으로의 고난이 걱정이었다.
그나저나 코재는 언제쯤 나오려나. 한 땀 한 땀 걷다 보니 45~50도 기울기의 온통 너덜길이 나왔다. 두렵게 기다렸던 코재 구간이란다. 너무 큰 기대(?)를 했나? 악명만큼 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넹기에 다다르니 평지가 나왔다. “야! 평지다.” 기쁨도 잠시, 노고단 대피소까지 지름길 600m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11시 40분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했다. 아주 오래전에 왔던 기억 속 노고단 대피소가 이래저래 반가웠다. 상당히 잘 정비된 대피소 안 식탁에 점심을 차렸다. 어제저녁 남은 밥에 불고기 쌈. 아들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입맛마저 떨어져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노고단 고개를 넘어 연하천 대피소롤 가는데 13:00에는 꼭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공사로 인해 폐쇄됐다. 이정표를 따라 노고단 고개에 닿았는데 아들이 길을 잘못 온 듯싶다고 되돌아가자고 했다. 순간 다급해졌다. 1시 안에 노고단 고개를 통과해야 하는지라 아들은 무거운 짐을 진 채 노고단 대피소를 향해 달음박질을 한다. 우리도 따라 잰걸음을 했다. 대피소 직원에게 확인한 후, 우린 다시 왔던 노고단 고개 오르막길을 있는 힘을 다해 걸었다. 아들은 13:00에 맞추느라 걸음이 쏜살같다. 책임감이란 참 무겁고 힘든 일이다. 등의 배낭이 천근만근일 텐데 길 찾아 엄빠 길잡이하는 아들이 미안코도 든든했다. 왔던 길을 재탕하며 걷는 일, 거의 4~50분을 헛걸음한 셈이니 힘도 기운도 쏙 빠졌다. 노고단 고개의 연분홍 철쭉도 노고단 정상에서 볼 수 있는 지리산의 아름다운 능선도 시간에 쫓기고 힘듦에 지쳐 그저 바라보기에만 그쳤다.
1시를 넘겨 1시 20분에야 노고단 고개를 넘어 연하천 대피소를 향했다. 관리인의 안내에 따라 연하천 대피소에 미리 전화하여 우리 출발 시간을 알렸다. 연하천 대피소 산행은 우리가 막차를 탄 셈이었다. 뒤에 따라오는 산행객이 아무도 없다고 하니 자유를 얻은 듯, 지리산이 온통 우리 차지인 듯 기쁨이 일었다.
“와~~! 돼지령이다.” 예전에 2번 다녀간 적이 있고 깊숙한 오솔길 정취와 흙길의 감촉이 아직도 기억 속에 살아있는 돼지령이다. 오전의 힘듦을 깨끗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우거진 숲속의 연분홍 철쭉과 붉은병꽃들이 1300m 고지에 온 우리를 환호하듯 활짝 피었다. 평소 무덤덤한 남편도 연속 감탄사로 보답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좋을 수도 있을까! 역시 지리산은 지리산이다.” 발도 마음도 편한 돼지령 임걸령을 지나 시야 좋은 삼도봉에 도착하여 바라본 겹겹으로 아름다운 지리산 능선은 힘겨운 산행의 보람이자 특혜였다.
이제 오늘 남은 길은 토끼봉과 명선봉을 지나 연하천 대피소까지 4km다. 1500m 고지까지 오르고나면 금세 내리막으로 겨우겨우 오른 1500m 고지가 1400m 고지로, 다시 또 고지를 올려놓으면 또 다시 내리막길... 수없이 반복되다 보니 힘이 팔리고 주저앉고 싶었다. 걷고 또 걷고 걸었지만 4km라는 끝은 나오지 않고 오르내리막만 계속 반복되었다.
연하천 대피소에 18:00까지는 당도해야 하기에 마음은 바쁜데 발걸음은 갈수록 느려졌다. 걱정했던 코재는 오히려 효자였다. “우리가 왜 이리 힘든 일을 사서 하는 거야?” 다시는 화대종주 절대 안 하겠다고 다짐, 다짐했다.
명선봉에서 연하천 대피소까지의 거리가 무척 지루했었다는 남편과 아들도 얼마나 지쳤는지 연하천 대피소 가는 길을 묻고 물어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무작정 걷는 수밖에 없었다. 환상이었는지 아니면 너무 간절했는지 “연하천이다!” 연노랑빛 나뭇잎을 보고 연하천 지붕으로 착각한 아들이 외쳤다. 무거운 짐덩이 지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18:49 연하천 대피소 도착.
남편과 아들이 내 등을 밀며 먼저 발을 딛게 했다. 아담한 연하천 대피소, 반갑다 못해 감동으로 뭉클했다. 연하천 대피소 간판 앞에서 인증샷!! 피곤과 지침이 온데간데 없어졌다.
아들은 재빠르게 저녁준비에 돌입했다. 먼저 도착한 산객들은 저녁이 한창이었다. 옆 젊은 부부가 장어구이를 가져왔다. 보답으로 우린 삼겹살을 건넸다. 오늘 총 길이 22.5km를 걷고 먹는 저녁, 그것도 지리산 깊은 골짝에서 먹는 저녁. 아들이 직접 썰어 구운 벌집 삼겹살, 내 1년 먹을 양을 다 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또 코펠에 끓인 꼬들꼬들 라면맛은 어떻고! MSG는 절대 못 먹을 것이라고 철저하게 외면했던 나, 국물에 밥까지 말아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환경 살림까지 실천하였다.
아들과 나는 맥주와 소주로 오늘을 건배! 물로 건배하는 남편, 술 생각이 꿀떡 같을 텐데. 아무에게도 말 안 할 테니 한 잔 권해도 끄떡없다. 독한 사람!! 아들 덕에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보람찬 식사를 하였다. 설거지도 세면도 치약도 비누도 전혀 쓰면 안 되는 곳이기에 불편함이 컸지만 모두들 잘 준수하였다.
밤 9시면 소등, 각각 남녀 숙소에 들었다. 목조로 된 2층 침대였다. 비 예보 때문에 취소자가 많아 여자 숙소엔 총 6명뿐이었다. 모두 1층에 배치, 2층엔 아무도 없기에 난 2층으로 올라가 잠자리를 잡았다.
드디어 휴식이다.
‘내가 왜 여길 왔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화대종주’. 답을 찾지 못했다. 답을 찾을 겨를이 없었다.
지금 이 시간 아들 등에 짐덩이가 없다는 사실이 지리산에서의 내 첫날 밤을 편안하게 맞게 했다.
첫댓글 "내가 왜 여기 와 이 고생을 하고있지?" 에 대한 깨우침, 땀방울의 보람은 다음편인가요?
아무에게도 말 안할테니 한 잔 권유..ㅋㅋ.안 드실 줄 알았지요. 1300m 고지의 연분홍 철쭉, 붉은병꽃 무리들 얼마나 장엄했을까요. 산중 삼겹살, 꼬들꼬들 🍜 라면. 지리산 맛입니다. 엄빠 보호, 안내하느라 고생한 아드님 든든합니다.
엄빠가 등에 맨 것은 짐. 아들 등에 있는 건 짐덩이.^^아들 짐이 좀 가벼워져 걱정 무게가 좀 가벼워졌습니다.
사모님의 마음이 고스란이 느껴지네요.
사진 속 두분의 모습과 아드님과 함께 찍은 사진은 그 어느 사진보다 아름답습니다.
힘들고 고단한 산행 뒤의 맛난 저녁.
함께 섞여서 먹고있다는 착각을 했네요.
임걸령 약수 한잔 하시지그랬어요.
후일 복기하듯 지리산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떠올릴것입니다.
부럽습니다.
화대종주 절대 안하겠다는 다짐
다짐도 엄청 부럽습니다.
저는 옛적 피아골의 아름다운 감탄을 떠올리며,
노산 이은상 피아골에서
화려체로서 찬미글
회상하며, ^^
사모님 너무 고생 많으셨군요.
가족의 뿌뜻한 자산은 부럽기만 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언제 힘든 산행을 했나 싶네요. 벌써 몸은 잊어가고 있나 봅니다.
산행 당시엔 오직 힘들다는 생각 뿐인지라 사방 둘러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위대한 지리산을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없음이 참 아쉽고도 안타깝습니다.
임걸령 약수는 한 조롱박씩 먹었답니다. 지리산 곳곳의 약수, 역시 골 깊은 곳의 물인지라 청량하기 그지 없더군요.
댓글들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들 등의 짐덩이. 엄마의 마음.
힘든 산행이었겠지만
곧 그리워질 지리산이 되겠지요~
아마 두고두고 회자될 얘깃거리임에 틀림없을겁니다.
우리 사모닝 짝짝짝 박수 올립니다.~
어쩜 이리 대단하신지요.~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등짐크기에 저도 놀랍니다.
꼭 필요한것 만 준비했을 텐데ᆢ
다음 글도 소중히 읽어 보겠습니다.^^
사모님의 강단! 여린 듯 강하신 분^^ 아드님 등에 짐이 사진으로 보기에도 헠! 이런 대단한 이벤트에 부모님과 함께, 부부가 함께, 아들과 함께!! 정말 대단한 가족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