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네 집
그 여자네 집은 징검다리가 있는 개천 건너편에 있다. 개천가 좁은 길 옆 축대에 새집처럼 얹혀 있다. 드라마 주인공 홍도네 집이다. 나는 그 집이 왜 그런지 맘에 쏙 든다. 볼 때마다 그 집에서 살고 싶어 꿀꺽 침을 삼킨다. 그 집에는 책이 많다. 구석에 자리한 계단 한쪽에도 책이 층층이 쌓여 있다. 아마 다락이나 벽장으로 오르는 계단인 것 같다. 가끔 그녀가 그 벽장 같은 어둑한 장소로 숨어드는 것을 보았으니까.
그리고 젊은 처녀의 둥지다운 오밀조밀한 장식도 소박하지만 정겹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그녀가 꾸는 꿈이 그 집엔 살아있다. 그 작은 공간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그녀의 가난하지만 풍성한 삶이 꿈과 뒤섞여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언젠가 방영되었던 드라마 <하트 투 하트>를 즐겨봤던 이유다.
달콤새콤한 로맨틱 코미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 드라마의 배경에 나는 주목한다. 홍도네 집 말고도 마음이 가는 장소가 또 있다. 주인공 고이석이 일하는 병원이다. 어린 시절 가끔 놀러갔던 친구 박혜경 아버지의 병원, 박소아과 같아서 더 마음이 가는지 모른다. 살림집 같아 친근한 병원 건물이다. 동네 가운데 자리한 평범한 집에서 고이석은 스승과 같이 정신과 진료를 하고 있다. 고이석과 홍도는 어찌어찌하다 티격태겨하며 서로 좋아하는 사이다.
병원이라면 대형 종합병원이나 고급스러운 시설을 자랑하는 개인병원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타 드라마와 사뭇 다르다.
대문이 커다란 고이석의 본가는 저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집 역시 내부 시설은 오래된 냄새가 나는, 세월이 반들반들 윤기를 만들어 내는 그런 집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내용에 앞서 나는 그런 배경들로부터 또 다른 감흥을 맛보곤 한다. 그것은 스토리에서 받아들이는 정서를 한층 풍성하게 해주는 묘미가 있다.
요즘 방영되는 드라마에서 사람살이의 배경은 거의 아파트, 고급 오피스텔, 더 나아가 펜트하우스들이다. 그 비슷비슷한 화려함과 너무나 세련된 도시적인 풍경은 아직도 이질적이고 정감이 가지 않는다. 어차피 사람들의 이야기가 드라마화한다고 볼 때 우리네와, 아니 내 삶과 닮은 풍경에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어쩌면 그런 것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못난 심리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어떤 그리움 같은 아련한 정서를 맛보게 해주는 그런 집들이 나는 좋다.
어린 시절, 나는 나지막한 목책을 두르고 디딤돌 몇 개를 지나 다다르면 현관문 하나에 창문 하나 있는 작은 오두막을 곧잘 그리곤 했다.
부자로 잘 사는 사촌 올케는 내게 꿈을 크게 가지라는 말을 자주 했다.
"고모, 나는요, 언제나 아주 큰 부자를 꿈꾸곤 했어요."
그럴 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난 틀렸네, 맨날 오두막집이나 꿈꿨으니 말이야'
그래서 그런지 내 삶은 여전히 볼 품 없고 사촌올케는 큰 부자로 산다. 문제는 그 부자 언니가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다는 데 있다. 자주 만날 때도 마음 편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한때는 신경쇠약으로 고생한 적도 있고 지금 왕래가 없어 모르긴 해도 이런 저런 육체적, 정신적 고통도 겪는 눈치다. 그리고 세월은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누구에게나 흔적을 남기며 흘러가고 우리의 시간은 똑같이 소멸을 향해 달려간다. 사촌오빠가 돌아가셨을 때 커다란 빈소가 텅 비다시피 문상객이 없어 내심 놀라면서 언니가 꿈꾸었던 ‘큰 부자’의 삶을 생각했다.
여건만 허락하면 서울을 떠나 한 그루 큰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작은 뜰이 있고 넓지 않은 대청마루가 있는 조그만 집에서 살고 싶은 꿈은 아직도 살아있다. 그리 되면 똥개라도 한 마리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그 녀석은 마당에서 뛰놀 것이다. 여전히 내 꿈은 허접하다. 현실에 있지도 않은 가상의 집, 홍도네 집을 좋아하는 것은 꿈하고 상관이 없다.
사는 이의 꿈이 가득 서려있어 조금도 초라하지 않은 그 작은 집의 정겨움이 그냥 좋은 것이다.
첫댓글 전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살고 싶다 란 꿈이 있었죠 전 다 이뤄고 살았지요 이뤄본들 외롭기만 했어요. 주변에 한국 여자가 한 사람도 없었걸랑요.
'다 이루었다...' 그 말은 오직 한 분만 하신 걸로 알고 있는디.... ㅎㅎㅎ
언젠가 잠깐 호주에 머물렀을 때 바닷가 마을 어느 집에서 파티를 즐기는 광경을 보았어요.
삶이란 건 그런 건가봐요. 아무리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두고 있어도 사람살이는 서로 어울려야 비로소 완성되는....
@이복희 그렇더라구요 죽음에이르는 병이고독 이라더니...
내 얼굴에 있는 이목구비를 보지 못하고 살 듯
내가 살고 있는 집의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 것 같습니다.
소박한 작은 집도 궁궐같은 기와집도.....결국엔 두어 평 무덤이 종착역이라 하지 않던가요.ㅎㅎㅎ
작은 것이 아름답고 소박한 것이 편안한 삶. 이런 것이 행복이라고 뒤로 꾹 찔러주시네요. ^^
편안하게 읽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