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긍정적으로 존중하고 있나요?
아이를 보는 눈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아이를 ‘어른의 축소판’이라고 했지요. 그 본성이 성인과 다름이 없고 다만 크기가 작을 뿐이므로 성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도 요구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이가 성인으로 돌입하게 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훈육이 필요하다고 하여 ‘회초리를 아끼면 아이를 버린다.’는 격인이 나왔을 정도입니다. 아이들이 혹사당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 아이들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①아이들은 무한한 잠재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최근, 조기교육이 붐을 이루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무한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임을 믿고 인력개발 차원에서 부모들이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지능의 80% 이상이 유아기에 형성된다는 연구결과라든가 두뇌 세포의 80% 이상이 생후 2년 내에 형성된다는 사실을 토대로 본다면 태아기부터 바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힘을 얻게 됩니다.
최근에 아이들을 교육하는 유치원 교사나 부모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아이들의 신통한 모습(능력)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②아이들은 성인의 축소판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의 성격이 생후 5, 6년 사이에 90% 이상 결정된다는 프로이드의 주장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의 부적절한 양육 때문에 자라서 부적응을 가져오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아이들은 아이답게 자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고 충분하게 존중되어야 한다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건전한 심성을 지니도록 하려면 어려서부터 인격적으로 존중받고 건전한 심리적 특성을 지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③아이들은 독특한 개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닌 존재라는 말입니다. 신체적으로도, 지적으로도, 정의적(도덕적)으로도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개인차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독특성이란 개개 아이들이 그들대로 가지고 있는 ‘자기다움’입니다. 자기다움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기 위해서는 개인차에 대응하는 양육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성인들은 그들을 동일한 존재로 보고 교실이라는 용광로 속에 넣어서 동일한 인간을 만들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동일한 자극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반응 속도 또한 다르지요.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이들의 성격이나 흥미, 습관까지도 그 독특성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긍정적으로 존중한다.’는 화두에 접근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남을 긍정적으로 존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을 우리는 ‘자존감’이라고 말합니다. 자존감은 긍정적 자아개념이 형성된 사람입니다. 자아개념이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견해이기 때문에, 즉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긍정하는 사람을 가리켜 긍정적 자아개념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런 사람이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 남을 존중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누구라도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감정을 존중하는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긍정적 태도가 형성됩니다. 남을 긍정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남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배려합니다. 태도는 매우 온정적이죠.
이런 관점에서 우리들은 내 아이를 어떻게 존중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어머니의 실화입니다.
5학년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스스로 학습을 정리한 뒤에 개인적인 놀이를 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니 줄곧 TV나 컴퓨터 게임에 정신이 팔려 정작 학습을 정리하거나 과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습니다.
‘숙제라도 하고 놀았으면 좋으련만…’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아이는 그저 놀이에 열중할 뿐입니다.
보통 어머니라면 당장 큰소리를 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좀 달랐습니다. 한참을 놀고 잠자리에 들려는 딸아이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는 “엄마는 네가 스스로 공부를 잘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TV나 컴퓨터에만 빠져 있어서 몹시 화가 난다. 그럴 때마다 나무랄 수도 없으니 앞으로는 네가 스스로 잘할 때까지 아무 말을 않겠다. 혹시라도 내가 너를 나무라면 엄마를 나무라렴.”
이 말을 하는 동안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이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반응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도 딸아이는 여전히 노는 데만 정신이 빠져있습니다.
며칠을 보아도 그 모양입니다.
하는 수 없이 “예야, 너 정말 너무하는구나. 이 어미가 한 말의 뜻을 그리도 모르느냐? 너 정말…” 한참 나무라고 있는데 딸아이가 대꾸합니다. “엄마, 아무 말 안 하기로 하지 않았어?”
그 때야 어머니는 이성을 되찾았습니다. “그래, 내가 한 말을 잊었네. 미안하다.”
딸아이도 생각이 있습니다. 엄마가 얼마나 참아내시는지, 그리고 스스로 할 때까지 참아주시는지 시험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딸아이는 좀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스스로 자기 할 일을 찾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무언의 행함’이 밝은 싹을 내민 것입니다.
이 예화는 실제로 있었던 것을 적은 것으로 제가 편역한 ‘꾸짖기 전에 읽는 책’의 한 부분입니다.
‘무언의 행함’을 약속하려면 더 나이가 들기 전에 하여야 할 것입니다. 초등학교 저학년보다는 고학년의 행동변화가 더 더디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잘하고 있을 때는 무관심하다가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무라는 부모는 아이를 존중할 줄 모르는 분입니다. 설사 잘못이 있다하더라도 모든 사물이나 상황에 대하여 갖는 아이의 사고나 감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무한한 잠재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리고 독립된 인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또한 독특한 개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무릇 부모들은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며,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녀에 대한 긍정적 생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2023.3.15. 재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