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화대종주 4 -장터목대피소~천왕봉~치밭목대피소
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 몽롱한 정신에 깨어보니 오전(새벽) 12시 30분이었다. 숙소가 날아갈 듯 세찬 바람이 씩씩거리며 지리산에 엄포를 놓고 있었다. 尿증으로 화장실이 다급한데 어떡하지? 화장실(시골 ‘뒷간’ 같음)이 숙소를 반 바퀴 돌아 건물 뒤편에 있던데.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난 또 무서움을 무릅쓰고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바람이 어찌나 세던지 내 몸이 휘청휘청 흔들렸다. 언젠가 tv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지리산’의 공포스럽던 장면들이 생각나 온 신경이 곤두섰다. 다시 잠을 청해 누웠으나 잔 듯 만 듯 02:20에 눈을 떠 잠을 포기하고 핸폰에 산행일기를 썼다. 벌써 천왕봉행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숙소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린다. 도대체 산이 뭐길래, 지리산 화대종주가 뭐길래 이런 고난을 자처하는 것일까? 묻고 싶었다. 이 깊은 밤, 내려치는 비와 사람을 후려치는 바람을 맞으면서 산행을 감행하는 이들의 대담성이 한편 경건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들이 무사히 목적하는 곳을 다녀올 수 있길 바랐다.
우린 04:05에 숙소 공용공간에서 만나 비로 인해 천왕봉 일출 구경에 대한 기대는 무너졌지만 오늘 일정을 의논했다. 3년 전 겨울 화대종주 때에도 휘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보지 못한 천왕봉 일출을 이번 기회에도 못 보게 된 남편과 아들, 실망감이 컸으리라. 천왕봉에 서둘러 갈 필요가 없게 된 우린 푹 끓인 국산 누룽지로 배 속을 든든하게 채우고 05시 22분에 천왕봉(1,915미터)을 향해 출발하였다. 꿈에라도 다시 안 올 장터목을 인증샷으로 이별했다.
천왕봉 가는 길!
설렘일까 기대일까 두려움일까. 다른 곳을 향할 때완 확연히 다른 감정이 나를 지배했다. 천왕봉까지 1.7킬로미터. 1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경사도는 1500고지에서 1915고지이니 400여 미터 올라가면 된다. 우리에게 펼쳐질 길이 궁금했다. 마지막 오르막길이려니 생각하니 지리산에 너그러워진 마음.(천만의 말씀, 고난의 길, 지리산을 겪으면서도 순진하기는~) 보슬비가 오고 있었다. 껴입은 우비가 따뜻했다.
장터목을 벗어나 산길에 접어들었다. 널따랗고 완만한 오르막길에 서니 시야가 확 트였다. 비내리는 안개 낀 지리산을 저만치 앞서 배낭 진 남편이 걸어가고 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 같기도, 천국 문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목자 같기도 하였다. 진짜 천국이 있을까?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차분히 30여 분 걷고 나니 깎아지른듯한 험악한 오르막길이 나왔다. 스틱을 짚으려는데 내 스틱의 마지막 한 마디가 어디로 사라져버렸다. 남편과 아들은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가 살폈지만 결국 못 찾았다. 잃어버린 스틱 조각도 그렇지만 나의 허술함이 힘과 시간을 축내고 말았다. 거기다가 아들이 강요하다시피 내미는 스틱을 사양 끝에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어야 하는 마음이 미안하고 또 미안하여 어찌할 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랴. 받아들이고 나머지 길을 가기로 한다.
제석봉, 통천문을 지나 천왕봉이 가까워질수록 산새가 험악하고 바람 세기가 사람이 날아갈 정도였다. 바위에 붙어 엉금엉금 기어올라 드디어 천왕봉에 도착했다.(06:44, 1시간 20분 소요)
아쉽게도(대략 예상하기는 했지만) 천왕봉은 비안개와 세찬 바람으로 겨우 표지석만 뚜렷했다. 사방이 운무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 천왕봉은 꼭 다시 한번 와야겠다.’ 별 희열, 감동 없이 내디딘 천왕봉에서 15분간 머물며 인증샷만 원 없이 찍었다. 비바람 속을 헤치고 젊은이들이 천왕봉에 속속 도착했다. 그들의 건강한 기상이 참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다. 07:00. 더 이상 미련 없이 천왕봉을 뒤로하고 아점 해결과 대원사 가는 길목에 있는 치밭목 대피소를 향해 출발했다.(4.0킬로미터)
흙이 아닌 대부분 돌들로 이뤄진 길이었다. 거기다 계단은 또 왜 그리도 많은지. 관절 테프에 무릎 보호대까지 했는데도 수없이 반복되는 오르내리막길에 관절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관절에 치명타인 내리막 계단은 아예 뒤로 걷기를 하였다. 체력 소진에 다리까지 힘이 풀려 오르막에선 나무, 바위에 의지하며 올랐다. 가다보니 치밭목대피소가 1km 정도 남았다. 아들이 바삐 움직여 미리 치밭목을 향해 달린다. 먼저 가서 식사를 준비하려함이렸다. 섬세한 배려가 사무치게 고맙다. 저도 힘들 텐데. 무거운 배낭을 멘 채 달리는 아들의 젊음이 지리산의 든든 튼튼 씩씩함과 잘 어울렸다. 아들보다 20여 분 늦게 도착해 아들이 준비해 놓은 아점, 난 미역국밥 남편은 설렁탕 아들은 짬뽕국밥을 먹었다. 설익은 밥도 아들의 정성과 수고, 사랑 넣어 꼭꼭 씹으니 고소하기 이를 데 없다. 간편식 또한 제맛이 났다. 세상이 참 편리하게 변했다. 지리산에서의 끼니는 이걸로 끝. 엄빠 매끼 챙기느라 신경 썼을 아들, 얼마나 홀가분할까.
발음 어려운 ‘치밭목’대피소는 취가 많아서 치밭목이라 했을까? 지리산 길마다에 취나물이 유독 많았다. 앉은 자리에서 잠깐 뜯어도 금방 한 소쿠리 가득 찰 것 같았다. 여유 있게 아점을 마치고 대피소를 나서는데 대원사에서 출발했다는 여자 산객이 아들과 함께 산행 중인 우리 가족이 부럽다며 자신의 소망이라고 덧붙인다. 아들이 주관하여 지리산 화대종주를 실행한 엄빠가 과연 몇이나 될까? 새삼 아들에 대한 고마움이 지리산을 향해 뻗친다. 이후 나는 지리산을 대함에 있어 남다른 의미로 맞아들일 것이다.
첫댓글 천왕봉 정상에 우뚝 서계시는 사모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고난의 길 힘겹게 오른 천왕봉. 별 희열을 못 느꼈다하시는데 감격의 순간 평생 못 잊으실 겁니다. 땀 흘리며, 세찬 비바람 맞으며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한 화대종주 의 발걸음 축하드립니다. 완승!
부러우면 가야 되는데 저도 갈 수 있을까요?
스스로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시지요?
사진 속에서 다 보입니다.^^
우리 사모님 강함을 잘 보여 주셨네요.
애쓰셨고 대단합니다.
생생한 산행일기로 아기편지에 올려 주셔 감사해요.
지리산 천왕봉 일출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우스갯 소리도 있어요. 변화무쌍한 날씨 변덕으로 인해 그만큼 일출 보기가 힘들다는 의미겠지요.
몇년 전 다녀왔던 천왕봉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리산은 산중의 산이라는 생각은 변함없어요.
너무나 힘드셨을텐데 천왕봉에서의 한 컷이 그힘듦을
잊게 하지는 않았을런지요...
글에서 사진에서 힘들었을
산행의 과정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오래 동안 기억속에
뿌듯하게 남아있겠지요.
대단하시고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