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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평설>
맑은 영성의 일탈(逸脫)과 보도블럭에 꽃
- 신현순 시인의 ‘그 여정(旅程) 뒤의 설렘’
엄창섭 (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김동명학회 회장)
1. 깊은 사유의 분별력과 투명한 영혼
한 편의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생명의 재해석으로 상상과 추상에 의한 인식의 세계에서 창출되기에 일단 리듬과 형태를 갖춰야 한다. 까닭에 내면적 체험을 버려두고 사회적 현실에 타협하려는 기교에 빠져 주제가 빈곤한 오늘의 현대시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 삶의 비극성을 관망할 정신적으로 불안한 독자들이 따뜻한 감성적 시인과의 조우(遭遇)는 더없이 시사적(示唆的)이다. 비록 개념도 불투명한 이념의 문제로 갈등과 대립의 시간대에서 이같이 ‘불멸의 예술혼’을 줄기차게 꽃 피워내는 신현순 시인의 시집 간행은 자존감의 합리성을 극명한 삶의 좌표로 삼고 지혜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주는 영성(靈性)의 울림은 놀라운 신앙의 반증이다.
모름지기 세월은 강물처럼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로 채워가는 것이기’에 매혹적 형사(形似)와 깊은 사유의 이중거리에 관한 도전은 그 의미가 지대하다. 오랜 날 화자(persona) 자신이 ‘절대자의 음성 듣기를 갈구(渴求)하는’ 시적 당위성에 맞물린 “절망의 목소리는 쇳소리를 내고 있어도 성전의 불이 켜지는 순간 오르간 음률이 흐르고, 비로소 들리는 음성은 희열로 다가오고 있다.”라는 개아적(個我的) 일상의 시적 행위야말로 현재 자양교회에서 구역장으로 봉사하며 영적인 훈련에도 전념하는 그 자신의 일상은 감사의 결과에 해당한다. 까닭에 프란치스코 (Franciscus) 교황이 “살아 있는 자만이 함께 춤추고 기뻐할 수 있다.”라는 그 생명의 존엄성을 ‘지금(now), 살아 있는 여기(here)’에 맞물린 상관성을 당당한 자존감의 실체로서 ‘감사의 시학’ 또한 배경 지식(schema)으로 기억할 일이다.
그 같은 차원에서 결(結) 고운 옷감처럼 치밀하게 직조된 시집인『보도블럭의 꽃』(한국문협, 2023) 평설에서 평자 그 나름의 「맑은 영성의 일탈(逸脫)과 보도블럭의 꽃 - 신현순 시인의 ‘그 여정(旅程) 뒤의 설렘’」으로 결부 짓고, 시적 향방의 추이(推移)를 밝혀낸 ‘무표정의 사람들 무심히 오고 가는 창밖 거리’를 응시하며 “런던탑에 가두어버린 우리는/스타벅스 여왕의 로고 밑에 앉아서/달달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마음을 달랜다( 2017년 겨울)”의 보기나 ‘2호선 전철 경로석에 놓고 내려버린 전철 궤도 따라 돌고 있는’「가방」은 물론 가끔 삶의 일상에서 체득한 ‘망각의 강에 한발 내디디었다 육지로 올라오는 우직한 행위를 반복하며’ “나의 이름이 쇠로 만든 원통 안에서 소행성 따라 돌고 있습니다.//당신은 누구십니까(괌의 서커스)”의 보기처럼 물음 앞에 그 자신을 놓아보는 자아 성찰의 행위는 소중하다.
비교적 호흡이 단조로운 시편인 “봄이 기웃거린다/애절한 그림자 밀쳐내도//손에 잡히는 것은/그리움, 여전히/봄바람이 살을 에이는(미망)”에서나 또는 “백담사 입구/용대리의 한낮, 바람이 분다//산속 바람에 돌풍이 인다(가을여행)”도 그러하나 「여행」, 「어떤 여행」, 「기차여행」은 아직 종착역이 아득한 탓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묵언으로 관조(觀照)할 바다. 이처럼 일관성을 지니고 시어(詩語)의 이중성을 풀어내어 서로의 틈새를 좁히려는 이미지의 형상화에 잇닿은 삶의 애환(哀歡)은 못내 엄숙한 분위기다.
각론하고 미적 주권을 확립하여 시적 독자성을 회복시켜 주어진 인생살이를 삶의 여정에 견준 그 자신의 시편인 “검은 앞치마 두른 웨이터의 손쟁반 위/노란 스크렘블에 얹힌 빨간 토마토가/먹음직스럽다//그래도 여름인 것이다/그날의 마이애미 해변은(어떤 여행)”과 같은 일면이거나 또는 “그 길들을 또 꿈꾼다/이름 모를 너와 나는//말없이 헤어졌다(여행)”라는 시편도 이채롭거니와 “의자가 너무 편해 보인다/빛바랜 햇볕이 나른하게 의자에 걸터앉았다//식은 커피에는 무료한 시간이 매달려있다(하노버에서-독일의 봄날)”에서 원근 조망법의 구도처리로 공감각(共感覺)을 불러주고 있음은 지극히 유념할 정황이다.
모처럼 그 자신이 어둠과 빛의 이미지를 대조적으로 형상화한 “아직 어둡다/드문드문 앉아있는 사람들에게서 쇳소리가 들린다/아닌 것에 포로되어 있는 사람들 교회당 안에 불이 들어온다/새벽의 빛이(새벽에)”라는 일면에서 ‘아담의 꿈, 눈이 떠지면 그것은 진리’로 수용되는 시적 상상을 통해 얻는 일깨움은 ‘①창의(創意) : 사상의 발견 ②공상(空想) : 발견된 사상을 판단력이 주제에 적절하게끔 변화, 전개, 형성 ③표현(表現) : 발견된 것만으로 아직 정돈되지 못한 사상에 적합하고 음조가 좋은 언어로 장식하는 정신작업’이기에 가끔은 묵언으로 조응(照應)할 바다.
2. 영혼의 파동(波動)과 시 의미의 다양성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가슴 따뜻한 열정과 순수성으로 무너져 내린 삶의 현장에서도 저마다의 푸른 생명 언어를 조탁(彫琢)하여 실상이 흐려 있는 영혼의 통로를 끊임없이 확장해야 한다. 그렇다. ‘인간에게는 새처럼 자유롭게 무한공간을 향해 날아오를 날개는 없지만, 꿈이라는 시적 상상력이 있기’에 지조 있는 시인이라면 응당 맑은 영혼을 지닌 충직한 독자에게 꿈의 날개를 달아주는 시대적 소임을 엄숙히 수행하여야 한다. 각론하고 인생의 황혼 녘을 스스럼없이 만보(漫步)하는 담백한 그 자신의 시격(詩格)은 ‘남아있는 사람들 떨어진 꽃잎을 떠올리는 요양원 뜰에 꽃비가 내리는’ 그 <휠체어>와 맞물려 처연한 심사(心事)를 자극한다. 까닭에 무채색의 산수화로 “산문에 뒹구는 작은 돌은 혼자 외롭다/산 아래 마을, 하나 둘 불이 켜지고/번져나는 불빛 속에 그리움 잠긴다//비워낸 시간 높은 산봉우리로 띄운다(구레마을)”와 같이 아아(峨峨)한 정신풍경화로 채색되어 자리한다.
모름지기 그 자신이 수미상관식(首尾相關式) 기법(craft)으로 처리한 “눈 내린 날 진부령/골 깊은, 고갯길/이른 새벽은 고요하다 눈으로 덮인/진부령은/어쩌다 불빛 하나 둘(아직도 묻혀있다)”의 적막함은 물론이고 대조적으로 ‘인연의 끈’이랄까? 모녀의 끈끈한 정은 “이역만리에서 늘 엄마를 걱정하는/딸아이의 어릿광에 먼 창밖을 바라본다//비가 그치고 가을의 열매가 붉게 익을 것이다(전화)”에서 새삼 확증되듯 때로는 눈물겹다. 그 나름으로 ‘이른 새벽의 고요함이나 딸아이의 어릿광에 먼 창밖을 바라보는’ 슬로라이프(slowlife)적인 순수서정성의 미적 주권을 확장하여 갈등과 혼돈으로 치닫는 일상의 삶에서 그 자신의 고독한 정신작업은 이채롭다. 무엇보다 유념할 점이라면, 『탈무드(Talmud)』의 “신의 나라는 열매를 팔지 않는다.”라는 그 교시(敎示)처럼 비록 자비로운 창조주도 우리가 땀 흘리고 노력하지 않으면 크신 은총을 결단코 허락하지 않음은 다시금 기억할 일이다.
이 같은 점에서 궁핍한 영혼의 울림과 시 의미의 다양성을 확인하는 그 소중한 만남은 또 하나의 경이로운 은총(恩寵)이다. 여기서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인 그 자신이 삶의 여정(旅程)인 낯선 지구촌의 여행길에서 “천천히 걷는 걸음의 티베트살이//달라이 라마의 황금빛 방//시간은 정지되어 있고 라마승들의 도포자락이 펄럭이고 있다(TIBET(티베트)가는 길)”와 같이 동시대의 그 누구보다 인식의 깊이를 지닌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시적 흐름이 감각적으로 유희화(遊戲化)하는 현상에서 전의식(前意識)의 심층을 예리하게 토막 내고 파고드는 섬세한 비평적 감각은 높이 평가해도 과장되거나 지나치지 아니하다. 특히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비정한 후기산업사회에 처한 그 자신의 시편에서 쉽사리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절대자에게 드리는 절박한 기도와 눈물겨운 감사의 일깨움이다. 까닭에 “티벳의 수도 라싸, 하얀 눈과 얼음산이 덮여있다/숨이 차오른다 발걸음 서서히(라싸의 하얀 스카프)”도 그렇거니와 시집의 주제 시격(詩格)으로 시 의미가 1연으로 응축된 「보도블럭에 꽃」에서 소유격 조사가 아닌 처소격 조사의 처리로 ‘보도불럭에 왠 꽃(?)’이라는 묘취(妙趣)와 함께 또 ‘뚫고’에서 풀꽃의 강인한 생명력은 엄숙한 역동성에 맞물려 이처럼 유의미할 따름이다.
산기슭도 한참 벗어난 길가/보도블럭과 보도블럭 사이,/뚫고/솟아난 할미 닮은 꽃 한 송이/무거운 고개 숙이고 있다/
척박함에도 생명은 잉태되고/북한산성 가는 큰길에/초가을 바람이 인다//
- <보도블럭에 꽃> 전문
인용한 시편에서 보도블럭은 ‘보도, 차도, 광장 및 건물 주변에 맞물림이나 맞대기 구조로 된 콘크리트 포장재를 모래 바닥층 위에 포설하는 것에 유념할 점이다. 또 한편 정직한 종교성이 신선한 감동을 안겨주는 비법, 그것은 신현순 시인의 차별화된 저력이며 독자의 시선을 끄는 담백한 매혹(魅惑)이다. 그 같은 생생한 일탈의 정신에 예술적인 질감과 터치로 ‘척박함에도 생명이 잉태되는’ 소외된 자에 대한 지대한 관심사로 끝내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다. 이처럼 엄숙한 시적 행위는 따뜻한 감성에서 스며 나온 감미로운 눈물과 천상의 층계를 오르는 고독한 순례자의 창조적인 결과물, 즉 매개적 정신 능력의 범주(範疇)에 합일된 지극선(至極善)의 심성이 저토록 끈질긴 생명력을 안겨주는 경이로움이다.
비록 “밤새 뒤척이다 보니/창문 밖으로 흔들리는 이름 모를 나뭇잎들/서서히 파래져 가는 하늘 속에서 앞뒤로 흔들리고 있다(낯선 파티)”라는 예시의 일면(一面)처럼 ‘낯선 파티’는 아직 끝나지 않아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대이지만, 그 자신은 삶의 매 순간 직물 대상을 응시하며 미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아니한다. 또 한편 불안하게 대응하는 존재의 탐구를 위해 지상에 갈 앉은 낮은 음계와 겸허한 몸가짐, 그리고 푸른 식물성 언어로, 실상이 흐려 있는 영혼의 통로를 끊임없이 정화 시키는데 정신작업에 열중하는 편이다. 그 같은 양상은 그 자신의 육체는 사각 빌딩의 도시공간(서울시 광진구)에 유리(遊離)되어 있으나 내면의식에서 자연의 회귀성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랄까? 생명의 충동감으로 출렁일 따름이다.
까닭에 긍정적인 사고의 창시자인 놀란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의 “시적 치유”를 거론치 않더라도 문학성이 뛰어난 그 자신의 시집은 시의 본말인 서정시의 골격을 위주로 감성적 감응(感應)으로 재해석한 결과는 비중 있게 평가될 것이다. “순간에서 영원으로/시간여행자가 된 사람들/배가 어둠에서 소리없이/노저어 나가고 있다/반딧불이/인도하고 있는 뱃길(햇빛 한자락 찾아서)”에서 다시금 확증된다. 비록 그 자신이 투영된 ‘나그네는 숨을 멈추고 어둠 속의 길을 응시하고 있을 뿐’ 이름 모를 항구에 닻을 내릴 그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아 진행 중이다. 또 그렇게 ‘햇빛 한자락 찾아서’ 그 나직한 숨결의 자잘한 시적 느낌은 지극히 생명적인 사변성(思辨性)이 강하게 수용된 일면이다. 또 한편 인생론적 체험과 일맥상통하는 시 정신은 전율(戰慄) 같은 가슴 떨림이며, 체득한 신비감은 못내 느껍다.
3. 시인의 시대적 소임과 시적 감응
무엇보다 사유의 결과물인 시적 형상화는 깊은 사유(思惟)의 통로인 이중거리로, 맑은 영혼과의 합일을 향한 이미지로 입증되다가 가끔은 반전이다. 이처럼 그 자신은 시사적(詩史的)인 궤적에 몰입하면서도 고독한 순례자로서의 소임을 수행하기에, 소소한 삶의 일상은 경이롭게도 열려 있는 천상, 즉 창조주를 향한 묵언의 응시로 투사될뿐더러 “프랑스 파리 어느 집 소파에 앉았다/벽에 걸린 나신의 명화/정글의 밀림을 꿈꾸는 여자의/가리키는 그 손에 먼/에덴동산이 있다(그림 앞에서)”를 통한 추이(推移)로 유럽 여행길에서 그 자신의 존재감은 더없이 빛난다.
이브는 어떤 기도를 했을까요/에덴에도 절대고독이 있었을까요/달과 별과 꽃과 대화를 나누며 무슨 꿈을 꾸었을까요/
나와 같은 이웃들이 오기를 바라며 기도했 었을 것 같습니다/사람들을/기다리면서/사랑하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향기로운
숲 향기를 우리들과 나누고/아픔의 감미로움도 말해주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사람살이의 아름다움에 목이 메였노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에덴의 눈물> 전문
위에 인용한 ‘어떤 기도’의 합리적 해법에 견주어 멕시코의 국민작가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z)는 “종교의 문제는 신이 아니라 시간이다.”라고 제시하며 미로의 출구로 통하는 길과 출구 밖의 세계가 시간의 직선적 개념의 산물임을 천명하였다. 까닭에 그 자신이 끝내 ‘절대고독’을 극기하고 20세기 후반 영국의 최고 시인 필립 라아킨(Philip Arthur Larkin)의 역설처럼 “시란 맑은 정신의 문제,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한층 더 익숙한 낌새다.
이같이 그 자신의 건강하고 생명적인 시 의식은 양극에 가까운 공간에서 일출 전이나 일몰 후의 박명(薄明) 현상인 백야로 이행되듯 시적 견고성을 ‘사람살이의 아름다움에 목이 메였노라’고 피 흘림하고 있다. 모처럼 ‘한 남자의 삶이 유골항아리 속에 한줌 재로 담겨 밀봉된 화장터 한 켠에서 무언의 짧은 작별시간 뒤, “검은 옷의 사람들은 꽃이파리가 되었다/시계만 뚫어져라 앞만 바라보고 있다/또렷한 초침소리 위에 나지막한 찬송가가 흘러 간다(하얀 이별)”의 보기처럼 그렇게 안쓰럽게도 ‘한 남자의 삶이 유골항아리 속에 한줌 재로 담겨 밀봉된 화장터 한 켠에서 무언의「하얀 이별」은 못내 비장감이 묻어난다. 마치 에드워드 호퍼(Eward Hopper)의 시선이 닿은 모든 대상과 공간은 사각형으로 이루어지듯, 무미건조한 사각형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도시 위로 사각형의 햇빛이 쏟아지는 현상 즉 ‘사각형 유리창 너머에 앉은 자유롭게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에 관계한 짓거리는 숙고할 과제다.
차제에 서울태생인 그 자신은「제3의 문단」등단 이후, 『내 안의 흰 눈』,『풍향계 바람』을 비롯한 시집을 묶어낸 시력(詩歷)에 비춰 천성적으로 따뜻한 영성(靈性)의 소유자다. 뒷날에 평자와 동향(同鄕)인 경현수 시인과 소중한 연(緣)이 닿아 시집 평설을 가름하면서 각별한 기대치라면, ‘2%의 염분이 오염된 바다를 정화 시키듯’ 영감의 비의(秘意)를 매듭짓고 ‘작은 신의 대행자’로서의 엄숙한 역할담당이다. 까닭에 ‘창조적 언어, 영혼의 울림’으로 갈등구조가 잇닿은 상처의 치유를 위해 피 멍든 손으로 영혼의 닻줄 움켜잡아야 한다. 그렇다. 엘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이 “시인의 명성을 갖는 것보다 시적인 가슴(詩心)을 갖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라는 그 역설처럼 인간 관계성의 회복을 위해 창조주 앞에서 절대적 신앙과 ‘날(刃) 푸른 불멸의 시혼’으로 천상의 층계 오르기에도 관심을 새삼 지닐 일이다.
결론적으로 소외된 관계 층위의 회복을 위한 타자 간의 분별력으로 비록 금속성이거나 동물적인 언어에 의해 절망의 끝이 암울한 현상일지라도 그 자신의 지난(至難)한 ‘몸의 시학’은 한층 더 자긍심을 빛낼 일이다. 모쪼록 생명의 충만감으로 시대적 소임을 끊임없이 수행하되 일관된 실험·도전정신으로 눈부신 자존감을 올곧게 지켜내되 현대시문학의 정체성 확장에도 전념해 줄 것을 거듭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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