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19 강남향린교회 주관 철거민들과 함께하는 성북구청앞 기도회 메시지>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고난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히브리서 13:12-13)
예수 주변의 인물들은 예수에 대해서 덧 씌워진 죽음의 이유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민중을 선동하는 폭도, 정치적 정복을 꿈꾸는 유대인의 왕, 로마의 정치범, 신성모독자, 성전 난동자. 그 어느 것도 죽음의 이유일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랑하는 스승의 죄없는 죽음의 참 이유를 찾아내야 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찾아낸 의미는 제물이 자신의 죄로 죽지 않듯이 “단번에 모든 인류의 죄를 지신 분”이었다.
예수가 가르치신 세상은 모두가 존중받는 나라, 걸인, 병자, 장애인, 이방인 이런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이 당당한 주인으로 서는 나라였다. 그 나라는 다시는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는 나라였다. 그런데 그 나라를 펼치기 전에 그분은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죄 몫으로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예수가 가르쳐주신 그 나라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나라는 자신들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 나라와 자신들의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있다. 그 갭이야 말로 바로 ‘죄’이다. 그 갭만큼 머뭇거리는 두려움이 또한 ‘죄’이다. 그가 살아계실 때는 “그가 하려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셨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 앞에 서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으로 그가 꿈꾸었던 세상이 끝장나 버린 것이 아니다. 제국의 기득권은 예수를 죽였지만 그들이 가진 꿈을 꺾지는 못했다. 예수의 꿈은 이미 제자들 안에 새롭게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예수께서 죽음의 세력에 타협하지 아니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승리이고 단번에 완성된 것이다.
그분은 자신에게 있는 두려움에 타협치 않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셨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 사이의 갭을 인정하지 않으신 사건이요, 그 갭을 당연한 질서라고 강변하며 우리를 좌절케 하고, 머뭇거리게 하고, 적당히 타협하게 만드는 ‘죄’를 도말하신 사건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건이며 의미이다.
세상은 우리를 묶어 놓고자 하였으나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굴종의 삶을 거부했다. 거룩함의 삶은 굴종하지 않는 삶이다. 제사가 제사를 드리는 제주(祭主)의 삶을 정상으로 돌아오게 하듯이 예수께서 드리신 영문 밖(진 밖)에서의 제사가 그의 수치와 치욕을 따르고자하는 제자들의 삶으로 이어져서 세상이 변화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비로소 성도가 된다. 이 세상이 마침내 거룩하게 성화된다. 이렇듯 히브리서 저자는 십자가로 단번에 모든 악의 세력을 묶고 승리하신 예수를 본다. 그는 예수의 죽음에서 세상의 모든 눈물과 아픔이 단번에 완성된 제물로 드려지는 결정적인 제사를 본다.
예수의 죽음 자체에는 거룩한 징조가 없다. 그냥 평범한 죽음일 뿐이다. 죽음 자체는 말이 없다. 죽음은 자기 죽음의 의미를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그렇고 이 땅의 민중이 당하는 고통도 그렇고...... 단지 억울함과 쓰러림을 남기고 사라질 뿐이다. 그냥 말없이 당하는 고난일 뿐이다.
그러나 그 고난은 거룩한 고난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거룩한 고난으로, 거룩한 제사로 만드는 것은, 아니 그 고통 안에 숨어있는 거룩한 뜻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마치 민가협(1985년 12월 12일 민주화운동 관련 구속자 및 양심수 가족들이 만든 민간단체) 어머니들이 아들, 딸의 구속을 통해 처음에는 망설이고 쓰라리지만 최고의 투사가 되는 것처럼 십자가는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예수의 십자가”라고 고백하면, “그분이 내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라고 고백하면 마치 세제 한방울이 떨어지면 주변의 불순물이 일시에 사라지는 광고같이, 예수의 보혈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난리를 치고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은 기독교를 아주 천박한 종교로 만드는 것이다. 예수의 보혈이 신비의 영약이 되어 이천년의 시간과 지구 반바퀴의 공간을 넘어서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는다. 백날 앉아서 그런 고백을 한다고 고래고래 외쳐도 사실이 그렇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민중을 집단의 주술 상태에 빠뜨릴 뿐이다. 예수의 신적 마술은 그 주문을 외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치 컴퓨터에 걸려있는 비밀번호처럼 새 일을 불러들이는 주문으로 작용하는 듯, 예수의 십자가를 드리대면 하늘에서 신비한 변화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이런 천박함, 이런 맹랑함은 예수를 한낮 도깨비나 부뚜막 귀신 정도로 추락시킨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서 진 밖으로 나아가 고통을 당할 때, 새로운 세상을 제시하고 앞으로 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할 때, 그들이 당하는 아픔과 고난이 세상을 새롭게 하고 정화하는 것이다. 그럴 때, 십자가는 유효한 것이고 세상 어디든지 아픔이 있고 눈물이 있는 곳에 모든 아픔을 단번에 도말 시키는 거룩한 제사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는 자체에서 거룩함이 발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렬이 십자가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죽음이 단번에 완전한 제물이었다는 고백은 그의 죽음으로 그가 꿈꾸었던 세상, 그들이 그리던 세상이 그들 앞에 현실이 되어 다가오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단번에 완성되는 세계를 그들의 죽음에서 보는 것이다.
철거민의 아픔을 가지고 투쟁하는 분들의 고난을 통해서 서민에게 재산을 빼앗아 건설업자인 재벌들에게 헌납하는 잘못된 제도가 폭로되고 민주주의 탈을 쓴 강도짓들이 드러나고 있다. 오늘 철거민들이 당하는 고통은 누군가는 당해야할 고통, 아무나 당할 수 있는 아픔을 대신 지고 가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기를 거부하지만 오늘의 철거민, 첨탑 위로 오른 노동자, 아직도 빈방에서 아사하는 탈북민, 도시빈민들은 지금 누군가 지고 가야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것이다. 그들이야 말로 세상이 지고가야 할 죄를 대속하는 것이고 새로운 세상, 우리가 맞이해야할 구원의 세상을 몸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고난 받는 민중이 지고가는 거룩함의 의미이다. 기독교에서 그렇게 중시되는 ‘죄’는 지극히 개인적인 윤리의 영역 안에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죄는 오히려 그 사회가 하나님의 통치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죄이다.
우리가 도달해야하는 그 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 바로 죄이며,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반하는 죄이다. 그가 부자와 뇌물을 받는 자들의 죄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나무라셨지만 가난과 질병으로 당시의 법을 어길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셨다. 관대하셨다기 보다는 그 사회가 그들에게 적용하는 법 자체를 거부하셨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죄냐 부모의 죄냐’를 묻지만 예수님은 그를 죄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으신다. 그의 앞으로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는 아픔을 당하는 민중의 고통 속에서 또 자신이 당하는 고통과 죽음 속에서, 모든 세상의 아픔이 단번에 완성된 제물로 드려지는 결정적인 제사를 본다. 그 제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영문 밖(진 밖)에 나아가 그분이 가신 길을 함께 갈 수 있다면 이미 악의 세력은 끝장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외면하고 그분 혼자 십자가를 지고 가시라고 한다면 그 십자가는 그냥 한낮 허무한 죽음일 뿐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세상 어디든지 아픔이 있고 눈물이 있는 곳에, 모든 아픔을 단번에 도말 시키는 거룩한 제사로 기능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보는 것,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생기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이 모든 보이는 것의 근원은 믿음 안에서 되어진 것이며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지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모든 사물을 보는 근본에 믿음을 본다. 나와 하나님과의 믿음, 여기서 보이는 모든 세계의 일들이 진행된다고 보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 체제의 모순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보는 사람들은, 우리 앞에 나타날 미래를 내다보면 싸울 수 있다. 그 비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우리가 맞이해야할 세상을 위해 싸우는 것이며 그들의 고난이야말로 우리시대를 새롭게 열어간다. 이 아픔이 우리를 ‘새 인간’이 되게 하고 새로운 세상을 동트게 만든다. 이를 위해 각자가 맡은 분야에서 함께 연대하며 손잡고 새로운 세상,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열 수 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믿음 안에 있으며, 그 세상은 믿음 안에서 우리의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1절의 말씀으로 맺겠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파송사> 여러분들은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며 우리 시대가 해결해야하는 역사의 짐덩어리를 한 몸에 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이야말로 바로 우리시대를 새롭게 열어갑니다. 이 아픔이 우리를 ‘새 인간’이 되게 하고 새로운 세상을 동트게 만듭니다. 함께 연대합시다. 손잡고 새로운 세상,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의 그림을 함께 그려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