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함부 4조
박 명 자
6·4 지방선거를 두어 달 앞둔 즈음, 개표사무원 모집 얘기를 들었다. 방송을 볼 때마다 그 현장이 궁금했는데 수당까지 있다니 솔깃했다. 지원 신청은 했지만 자격 요건이 까다로워 잊고 있었는데 뜻밖의 합격 통보가 날아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선거 전날이 아버님 기일이었다. 며칠을 망설였다. 하지만 제사는 저녁에 모시므로 다음 날 아침 서두르면 될 것 같았다.
시댁에 가자마자 나는 무슨 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개표사무원임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가족들은 대단한 일을 맡았다며 다음 날 이른 출발을 도와주었다.
상주 톨게이트쯤 들어서자 선거사무소에서 보낸 문자 메시지가 쉴 새 없이 날아왔다. 불참하거나 지각하여 개표에 지장을 주면 절대 안 된다는 엄한 경고였다.
‘왕복이라도 하겠구만. 아직 다섯 시간이나 남았는데.’
콧방귀를 뀌며 여유를 부리는데 수안보 교통 표지판이 보였다.
“점심은 어디서 먹지요?”
운전하던 시동생이 일찌감치 점심 걱정을 했다.
“여기서 먹고 갑시다. 시간도 많은데, 꿩 샤브샤브! 오늘 내가 한턱 쏠게요.”
뒷자리에 앉은 내가 얼른 말을 받았다.
“어 참! 당신 오늘 돈 벌잖아.”
거들어 주는 남편의 추임새에 내 어깨가 으쓱했다. 평소 수안보를 지날 때마다 꿩 샤브샤브 얘기를 꺼내던 남편과 모처럼 동행한 시동생 내외에게 이런 기회에 선심 한번 쓰고 싶었다. 마침 건너편에 ‘꿩 요리 기능보유자의 집’이라고 쓴 산뜻한 간판이 보였다.
차를 세우고 들어가니 실내도 쾌적했다. 한복 입은 사장님이 메뉴판을 들고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주문을 했다. 그런데 동작이 참으로 굼떴다. 손님도 없는데 한참 만에 음식이 나왔다. 게다가 들고 온 요리마다 자세히 설명을 덧붙이는데, 충청도 특유의 말씨까지 더하니 한나절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샤브샤브래서 끓는 물에 적셔 먹고 국수나 한 번 휘저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꿩 키우는 법부터 아예 특강을 했다.
분위기가 괜찮은지 세 사람의 대화도 함께 무르익었다. 시계를 보았다. 그 많던 시간을 누가 훔쳐간 것 같았다.
“큰일 났네, 시계 좀 봐요.”
나는 얼른 수저를 놓고 카운터로 갔다. 오늘 받을 일당의 갑절이 나왔지만 그런 건 따질 처지도 아니었다.
동서가 재빨리 운전석에 앉았다.
“걱정 마세요 형님, 제가 최대한 빨리 달릴게요.”
고속도로는 그런대로 빠지더니 서울에 들어서자 거북이걸음이었다. 집에 들러 멋지게 치장하려던 계획도 진작 무너졌다. 진땀과 단내가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개표장에 닿았다. 십 분 지각이었다. 입구에는 경찰들이 즐비했다. 서둘러 접수처로 갔다. 개표사무원 박명자. 간신히 이름표를 받아 목에 걸었다. 긴 한숨을 몰아쉬면서 천천히 체육관 안을 둘러보니 거의가 대학생이었다. 나는 오일장에 나온 촌닭처럼 구석에 앉았다. 한 시간의 사전 교육으로 어느 정도 개표 방법을 가늠하고 경찰관들의 보호를 받으며 구내식당에서 이른 저녁식사를 했다.
투표 마감 시간이 가까워졌다. 가장자리 스탠드에는 참관인들이 둘러앉고 긴 테이블을 마주한 우리는 투표함을 기다렸다. 텔레비전에서 본 전경 그대로였다.
우리는 개함부 4조였다. 개함부란 투표함 이상 유무를 확인한 후 시장, 구청장, 교육감 등으로 용지를 분류하는 팀이었다.
이번 선거부터 처음 실시한 사전투표함이 먼저 들어 왔다. 모두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투표함 주변을 세심히 관찰하던 참관인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눈사인을 마치자, 검증을 알리듯 번쩍 들어올린 투표함을 테이블 위에 쏟아 부었다. 우르르 팔을 뻗쳐 자기 앞으로 용지를 쓸어갔다. 노련한 손놀림이었다.
하지만 내 손은 느렸다. 용지를 펴는 일도 어색한 데다 누굴 찍었는지 보느라 더 그랬다. 내가 지지한 후보를 찍은 게 나오면 나를 지원해준 것처럼 고마웠지만, 경쟁자에 기표한 건 야속한 생각과 함께 조바심을 주었다. 이 정부에 저항하는 심술일까. 칸마다 도장을 찍은 사람이 있었다. 또 엉뚱한 자리에 찍은 것도 있었는데, 그런 건 한글을 모르는 분의 답답한 심정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후보자 개인의 능력은 따지지 않고 대부분 소속 당에 따라 정답처럼 한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개표사무원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민심의 속마음을 어찌 들여다볼 수 있었을까.
뒤섞인 일곱 가지 투표용지를 같은 색깔끼리 분류하는 게 예삿일이 아니었다. 처음인 데다 눈까지 침침하여 비슷한 색깔은 실수하기 십상이었다. 그나마 쉬운 일은 용지 그대로 넣은 것이었다. 반을 접고 또 접은 것이 있는가 하면, 쌈짓돈처럼 꼬깃꼬깃 접은 건 시간이 더 걸렸다. 용지 색깔을 분류하기 쉽도록 한다거나 투표함에 넣을 때 반 정도만 접는 것도 현장에서 일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지 싶다.
“개함부!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속도만 낸다고 되는 거 아닙니다. 분류를 제대로 하세요. 그런 식으로 하면 등록이 늦어져 내일 아침까지도 못해요.”
마이크 잡은 진행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나한테 그러는 것 같았다. 마음은 급한데 손은 더뎠다. 혹시라도 우리 조 나이 많은 아줌마 때문에 짜증났다는 뒷말이라도 들을까 봐 있는 힘을 다했다.
옆 사람들이 대충 모아만 주면 나는 고무줄로 가지런히 묶었다. 모서리가 맞는지, 접힌 부분은 없는지, 탁탁 두드려 확인한 후 깔끔하게 마무리하자 마지막 작업은 자연스레 내 차지가 되었다. 젊은이들은 도중에 핸드폰도 만지고 화장실을 다녀와도 나는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팔이 아프고 허리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줌마, 좀 쉬었다 하세요. 우리 조가 제일 빠른 것 같아요.”
조원들의 따뜻한 말이 동지애처럼 느껴졌다. 그제야 나도 고개를 들고 허리를 세웠다. 몇 시간의 작업으로 우리는 동료가 되어가고 있었다.
새벽 3시. 개함부가 제일 먼저 끝냈다. 수고 했다는 인사말과 함께 진행요원들이 빵을 나누어 주었다. 일당처럼 받은 빵 봉지를 들고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와 택시에 앉았다.
후보자들의 현수막이 어둠을 가르는 차량 불빛에 더 또렷이 다가왔다. 여전히 웃고 있는 당당한 표정. 이긴 자에 대한 축하보다 진 자가 겪을 패배감은 내가 때린 것처럼 미안했다.
꿩 먹고 탄 아슬아슬한 곡예, 파김치가 된 내 몸도 후보자들만큼이나 지친 하루였다.
첫댓글 며칠전 총선을 막 치루고 난 다음아라선지 실감이 두 배입니다^^
내가 개표요원이라도 됀 듯 상황설명이 자세해서 좋았습니다. 다음부터 투표용지를 접는 일에도 신경써야 겠네요.오일장 촌닭신세면 어떻고 일당의몇갑절되는 오리샤브샤브값 치루면 어떻습니까.
한번 태어나서 남다른 경험을 했으니 축하합니다.
'나도 젊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입니다.^^
개표과정마다 느끼는 심리묘사가 재미있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 특별한 체험을 그것도 총선 치룬 후에 읽게 되어 저는 무척 흥분되더라구요.
그래서 명자샘께 급하게 부탁했어요. 원고파일 좀 부탁한다고....
카페 가족들이 보면 공감도가 높으리라 여기며 서둘러 올렸는데
뜻밖에도 내맘 같은 분이 없는 것 같아 좀 실망스러웠는데
역시 경애샘이십니다.
명자샘은 책 받으신 분들이 또 카페에서 읽게 되면 식상하지 않겠냐고 난색이었지만
제가 막 밀어부쳤어요. 시의에 적절하고 책을 못 받으신 분도 있을 것이라며....
ㅎㅎㅎ 다행입니다.
여기저기 부탁해서 되도록 수필을 많이 올리려 하는데 어렵네요.
그렇게 올려놓고 반응도 없으면 공연히 미안해서....
실감나는 개표상황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