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지혜의 품에 안기려 화대종주(2) - 와, 성공이다. 코재 넘어 노고단까지
그래도 긴장했나 보다. 늦게 잠이 들었음에도 새벽 4시 좀 지나 잠이 깼다. 산행의 안전과 성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무장하는 기도문을 쓰며 출발을 기다렸다.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6시 20분 팬션을 출발하였다. 출발하면서 보니 아들의 배낭이 너무 크고 무거웠다. 저울이 있다면 재보고 싶었다. 아마 30kg은 넘을 듯했다. 내 배낭은 15kg, 강하주 배낭은 10kg 내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들의 배낭이 너무 무거워서 짐을 나누자고 했으나 아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늘 일정은 화엄사-연기암-국수등-집선대-코재-무넹기-노고단대피소-돼지령-임걸령샘터-임걸령-노루목-삼도봉-화개재-토끼봉-명선봉-연하천대피소까지다. 거리로는 이정표 상으로만 무려 19.1km다. 이 짐들을 짊어지고 오늘 일정을 무사히 마쳐야 한다.
이번 산행엔 딸이 마련해준 지리산 종주수첩에 스템프도장을 찍어 종주를 기념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출발하여 잠시 후에 이른 아침 화엄사 일주문을 지난다. 올 때마다 만나는 부처님들이 여전하다. 눈을 가린 부처님과 귀를 가린 부처님, 입을 가린 부처님 좌상이 우리 세 사람을 맞는다. 좌대에 법구경의 말씀이 적혀 있다.
눈을 가린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불견(不見), 남의 잘못을 보려 힘쓰지 말고, 남이 행하고 행하지 않음을 보려 하지 말라. 항상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옳고 그름을 살펴야 한다.”
귀를 가린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불문(不聞), 산 위의 큰 바위가 흔들리지 않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비방과 칭찬의 소리에도 평정을 잃지 않는다.”
입을 가린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불언(不言), 나쁜 말을 하지 말라. 험한 말은 필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 악담은 돌고 돌아 고통을 몰고, 끝내는 나에게 되돌아오니 항상 옳은 말을 익혀야 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면서 이번 산행과 그 이후에도 불견(不見), 불문(不聞), 불언(不言)의 삶을 다짐해 본다.
스님들이 빗자루를 들고 아침 청소 중이다. 지리산종주 인증 스템프를 찍기 위해 인증서에 찍힌 주소대로 찾아가니 대웅전에 이르렀다. 염치를 무릅쓰고 청소하는 스님께 물어보았다. 절 입구 오른쪽 철문 옆에 있다고 무심하게 말했다. 할 수 없이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가 절 밖으로 나와 오른쪽 철문 옆에 마련된 첫 번째 인증 스템프를 찍으며 산행을 출발하는 마음을 새롭게 한다. 인증서에 도장을 찍기 위해 시간을 30분 정도 지체한 셈이다. 오늘은 일정이 길어서 빠듯한데 말이다.
화엄사 일주문 앞의 다리를 지나 왼쪽으로 이정표와 함께 지리산 출입 게이트가 있다. 신우대나무의 좌우 호위를 받으며 가지런하게 다듬어진 돌길을 따라 연기암으로 통하는 길을 걷는다. 강하주 씨와 수차례에 걸쳐 다녀본 바가 있는 애정하는 길이기에 아껴가며 걷고 싶지만 오늘은 발걸음이 빠르다. 일정이 길고 멀어서다. 정녕 오늘의 일정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사실 강하주 씨와 종주에 나서면서 마음으로 염려가 있었다. 짐보다도 몸에 대한 것이다. 심하지는 않지만 좌측 골반 부위에 종종 통증을 느끼고 있는 나, 그리고 내리막길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강하주 씨의 무릎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노고단고개까지 올라가 본 후 그 결과에 따라 중도 하산할 것인지 아니면 산행을 계속할 것인지를 결정하려고 했다.
어찌 되었건 익숙한 돌길을 따라 연기암 입구까지는 수월하게 도착하였다. 다시 노고단고개를 목표 삼은 이정표를 따라 본격적인 등산길에 들어선다. 잠시 후에 참샘터에서 목을 축인다. 아들의 배낭이 너무 무거워 보여 ‘뭐가 그리 가득이냐’고 물으니 500cc짜리 캔맥주가 무려 20개 가까이나 된단다. 그 무게만도 거의 10kg에 가깝다. 맥주가 그리 좋을까. 누가 아빠 아들 아니랄까 봐. 나는 그렇게 술을 많이 준비해가지도 않겠지만 내가 그렇게 준비해간다면 강하주 씨가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 아들이라서인지 안타까워만 할 뿐 별로 미운 말을 하지 않는다. 이미 준비해 버린 것이라서인가?
참샘터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국수등이 나오는데 거리만 놓고 보면 여기가 화엄사와 노고단 고개의 딱 중간 지점이다. 화엄사로부터 3.5km, 국수등에서 노고단까지가 3,5km니까.
이제 서서히 너덜길이 시작된다. 긴 계단 끝에 중재에 이르는데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길에 접어든다. 지난 겨울에 황량한 겨울 맛을 느끼게 했던 얼음 절벽이 짙게 푸르른 신록 속에서 물소리를 내는 계곡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윽고 휴식 공간으로 마루를 만들어 놓은 집선대에 도착한다. 집선대 앞에 집선대 3단 폭포가 펼쳐진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땀을 훔치며 숨을 고른다. 그리고 이제 눈앞에 나타난 유명한 코재를 만날 마음을 단단히 준비한다. 화대종주 중 화엄사 노고단 코스의 꽃(?)이라고 할 가장 힘든 코스가 바로 집선대에서 코재까지의 구간이다. 집선대까지는 비교적 순탄한 길이지만 집선대를 지나서는 경사가 심해 길이 코에 닿을 듯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걱정했던 것보다 강하주 씨가 가파른 코잿길을 잘 오르고 있다. 오히려 이 정도냐면서 여유를 부리며 잘 가고 있어 오늘 등정에 성공을 예감한다. 코재 이정표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마지막 오름길에 박차를 가해 오른다. 드디어 무넹기다. 무넹기는 물이 부족하여 노고단 부근 계곡물의 일부를 화엄사 계곡으로 돌렸다고 하여 '물을 넘긴다'는 뜻에서 '무넹기'라 불리고 있다고 한다.
무넹기에서 우측방향으로 계단을 따라 한참을 가다 보면 노고단대피소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아침 6시 20분에 숙소를 출발하여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하니 11시 40분이다. 화엄사~노고단 7km(실제는 9km)를 5시간 20분 정도에 걸쳐 가장 힘든 첫날 오전 구간을 무사히 마쳤다. 첫구간을 무사하게 마쳤음을 노고단대피소 스템프를 찍는 것으로 확인하였다.
아, 다행이다. 여기까지 성공하면 이번 화대종주는 성공할 수 있다. 종주를 계속할 것인가 하산할 것인가를 결정하기로 했던 노고단대피소에서 하산할 생각 자체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젠 그냥 가면 되는 것이자.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가. 출발할 때 숙소에서 준비해 간 점심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하고 오후 산행을 위해 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첫댓글 화엄사~노고단 굉장히 가파른 구간을 오전에 돌파하셨군요.
무거운 배낭이 마음에 쓰이네요.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19.1km. 평탄한 길도 이만큼이면 헉헉소리가 날 정돈데, 오르막 산길을 이렇게 걷는다니, 그것도 10kg, 15kg, 30kg 짐을 등에 매고!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사모님 글과 다른 느낌, 두분의 경험도 글도 참 부럽습니다.
父女의 약속으로 인증서에 도장으로 30분 지체도 아름답습니다.
자식들로 부모는 새롭게 당차게
힘을 얻기도 합니다
불견. 불문. 불언의 삶을
저도 다짐해봅니다.
냉동캔 하나하나 신문지에 감아서
짊어지고들 왔더군요.
그 시원한맛은 그 무게를 충분히
감당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