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지혜의 품에 안기려 화대종주(3) - 멀고 먼 연하천
노고단(老姑壇)은 신라 화랑들이 이곳에서 탑(塔)과 단(壇)을 설치하고 수련을 하면서 천지신명과 노고할머니께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노고'는 '할미'를 뜻하고 국모신인 서술성모(수호신의 하나로 여신에 해당함)를 의미한다. 해발 1507m의 높이를 자랑한다.
천왕봉으로 통하는 길은 노고단고개에서 오후 1시까지만 통과하도록 관리하고 있다. 그 이후엔 위험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은 후 공사 중인 노고단 대피소 옆길을 폐쇄해버려서 길을 찾아가다가 잘못들었나 싶어 다시 대피소까지 되돌아왔다가 가는 바람에 30분 정도 지체되어 천왕봉으로 통하는 길 입구에 1시 15분에 도착했다. 관리직원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서야 겨우 출입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제 노고단고개-2.8km-피아골삼거리-1.7km-노루목-1.0km-삼도봉-0.8km-화개제-1.2km-토끼봉(해발1533m)-3.0km-연하천대피소까지 10.5km를 가야 한다. 예약한 연하천대피소 입실 마감 시간이 6시까지란다. 먼 거리에 비해 주어진 시간이 적어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오전에 이미 지친 몸인지라 조그마한 오르막길에도 쉽게 피로감이 느껴진다. 다행스럽게 길은 부드러운 능선길이었고 느낌이 촉촉한 흙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간간이 활짝 핀 철쭉이 웃으며 반기는 바람에 피로를 잊게 만든다.
돼지령을 향하여 지리산의 능선을 따라 걷는다. 돼지령은 진달래와 철쭉이 유명한 평전에 원추리꽃 뿌리를 좋아하는 멧돼지가 출몰하던 곳이라고 하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봄에 야생화 군락지로 유명한 곳이라니 멧돼지들에게도 유명한 곳인가보다.
돼지령을 조금 지나면 피아골 삼거리가 나온다. 피아골은 6·25전쟁 뒤에 그 이름을 딴 반공영화가 나옴으로써 흔히 전쟁 때 빨치산과 이를 토벌하던 국군·경찰이 많이 죽어 '피의 골짜기'라는 뜻으로 붙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옛날 이곳에 곡식의 하나인 피를 가꾸던 밭이 있어 '피밭골'이라 했는데 후에 그 이름이 피아골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다음백과)
곧이어 임걸령(1,320m) 탐방로 안내 표지판이 나온다. 노고단 정상 표고가 1,507m이니 노고단에서 임걸령까지는 내려오는 길이 이어져 비교적 수월하게 지나왔다.
임걸령 고개 숲길 안쪽에 임걸령 샘물이 있다. 천하제일의 물맛을 자랑한다는 임걸령샘에서 목을 축이며 그 유래를 새겨본다. 조선 명종 때의 의적 두목 임걸년(林傑年)이 삼남 지방을 무대로 활동을 하면서 이 샘의 물을 마셨다고 하여 임걸령(林傑嶺) 샘물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높은 곳에서도 샘물이 쉼 없이 솟아나는 것은 지리산의 속이 촉촉하게 젖어있는 까닭이리라.
이어서 노루목으로 향한다. 노루목(1,480m)은 그 이름이 노루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노루가 지나다니던 길목이라서, 산에서 세 갈래 길을 흔히 노루목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는데 아무래도 두 번째 노루가 지나다니던 길목이라는 설에 더 호감이 간다.
아직 갈 길이 멀기에 반야봉 삼거리에서 반야봉을 향하는 표지판 앞에 선다.
<반야>란 우리말로 번역하면 '지혜'란 뜻으로, 어리석은 자가 머물면 무심의 지혜를 얻는다는 곳이라는 '지리산' 지명의 뜻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갖가지 나무마다 돋아나는 새순의 빛깔이 다르고 크기와 모양이 다르고, 의미 있는 이름 또한 다르다. 지리산에는 해발 1,500m가 넘는 20여 개의 봉우리가 천왕봉, 반야봉, 노고단의 3대 주봉을 중심으로 20여 개의 긴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능선마다에서 만나는 피어나는 철쭉꽃이 있고, 아직 시들지 않은 채 땅에 뒹굴고 있는 떨어진 철쭉꽃잎들을 보며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녹슬은 해방구>의 빨찌산 김점분 대장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쫓기면서도 이 철쭉꽃을 보았겠지. 아름답게 보였을까. 슬프게 보였을까. 해방이 보였을까. 평화가 보였을까.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다.
반야봉으로 가려는 마음은 굴뚝 같으나 쫓기는 일정이라서 눈요기로 반야봉을 훔치고 곧장 삼도봉으로 접어든다.
삼도봉 명칭은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전라남도 구례면 산동면,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에 걸쳐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삼도봉(三道峰)은 불무장등능선이 흘러내리는 시발점이다. 해발 1,550m의 이 봉우리 이름이 삼도봉으로 된 것은 근래의 일이란다. 원래는 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바위 모양이 '낫날'같다고 하여 '낫날봉'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것이 등산객들에게 와전되어 '날라리봉'으로 불리다가 이름의 어감이 천박하다고 하여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이정표를 세우면서 '삼도봉'으로 명명했다. 이 봉우리에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가 분기하므로 삼도봉이란 명칭은 적절한 것 같다. 삼도봉 표지석을 앞에 놓고 보니 갈등과 분열로 서로 으르렁대는 현실이 떠올라 삼도를 아우르는 품이 그립다. 언제 지리산의 품을 가진 위인이 나타나 난국을 평정할 수 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삼도봉을 지날 때가 이미 6시를 가리키고 있어 연하천 대피소에 연락을 취하였다. 조금 늦겠다고. 지금 삼도봉임을 말하니 화개로 내려가라는 것이다. 서둘러서 가겠다고 했으나 산을 만만하게 보지 말라는 훈계까지 들어야 했다. 그래도 공손하게 최선을 다해 도착해보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조심하시라며 혹시 무슨 일이 생기거나 더 늦어지면 연락하라고 친절한 말씀에 그것도 감사해하며 걸음을 재촉하기로 한다.
삼도봉(1,550m)을 지나 화개재까지는 지척이다. 화개는 말 그대로 꽃이 활짝 핀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화개재는 화개장터와 산내 운봉지방의 물물교환을 위해 넘나들던 고개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돌과 목계단으로 되어있다. 토끼봉은 반야봉을 기점으로 24방위의 동쪽에 해당하는 묘방(卯方)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체력이 거의 바닥이 났나 보다. 아내도 아들도 말수도 부쩍 줄었고 묵묵히 한 발자국씩 습관적으로 내디딜 뿐이다.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준비한 물병을 연신 입에 대본다.
명선봉 가는 길은 토끼봉 올라가는 길보다 길고 지루한 느낌이다. 연하천을 앞두고 마지막 봉우리여서인지 모르나 왠지 길고 멀고 힘들다.
이 고생을 왜 하지? 이 땀의 결실은 무어지? 끝없이 이어지는 길 따라 회의의 질문 또한 끝이 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과 내리막길. 그래도 군데군데 활짝 미소지으며 화사함으로 반겨주는 철쭉이 그나마 청량함으로 견딜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명선봉을 거쳐 연하천 산장에 이르는 길은 비교적 평탄하고, 숲 사이의 길을 걷게 되지만 지친 몸이기에 그도 적잖은 인내가 필요하다. 심신이 거의 인내의 한계를 느끼는 가운데 연하천산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꼭 오랜 여행 끝에 내 집에 돌아온 것처럼 아늑한 마음이다.
도착하자마자 기념사진을 찍고 곧장 사무실 앞에서 스템프를 찍어 인증을 확인한다. 그리고 너무 힘들어서 10분 정도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각자의 숙소 잠자리로 향한다.
오늘 아침 06시 20분에 출발하여 지금 오후 6:50분이니 12시간 30분 만에 숙소에 도착한 셈이다. 거리는 지도상 19.1km이지만 실제 걸은 걸음 수는 47,095걸음, 31.55km라고 휴대폰의 앱은 알려주고 있다.
첫댓글 헠, 31.55km!! 19.5km도 힘들겠다 했더니 산길 31.55! 대단대단들 하십니다!!!
연하천 대피소앞 미소가 몹시 아름답습니다.
저는 백담사 가기전까진
피아골이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피아골 Km 숲 경관 찬미 감탄
골짜기 미풍 예찬이 없이 급히 걷기 바쁘셨군요.
4만7천步의 위력 , 31.55km 목표 달성 , 건재
대단하십니다 .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