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산 자락길 또는 관심이 주는 행복)
5월 하순인데 초여름 같았다. 토요일 우후, 날도 덥고 궁금한 것도 있어 근 열흘 만에 앞산자락길을 다시 갔다. 대구의 앞산에도 능선을 타는 등산길 외에 산책 겸 산행을 할 수 있도록 산중턱에 횡으로 난 자락길이 생겼다. 국궁장 옆에 있는 매자골부터 걷기 시작했다.
초입에 있는 아름드리 미루나무의 꽃이 솜털처럼 날렸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떨어진 꽃들은 주변에 쌓여 마치 눈이 내린 것 같았다. 바로 이어지는 상수리나무 숲으로부터 꾀꼬리의 맑은 노랫소리가 들려와 마음을 경쾌하게 두드린다. 숲속에 요정이 있다면 부르는 노래와 아름다운 목소리가 저런 것일까. 날개의 끝부분만 얼룩진 재색일 뿐 온 몸이 황금색이다.
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눈길은 좌우의 풀과 나무에게로 향했다. 얼마 안가 길 바로 옆에 있는, 지난번에 보았던 한 포기의 도라지한테 눈길이 갔다. 요즘은 산도라지도 귀한 존재다. 만약 누군가에게 발견되면 크기에 상관없이 손을 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 되어 꽃을 피우면 더욱 쉽게 발견될 것이다. 생각난 김에 좀 더 위쪽 산에 옮겨 심어 주었다.
한창 만개했던 아카시아 꽃들이 지기 시작했다. 숲속은 향기로 충만했고,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꽃잎들은 그야말로 자연의 축복이었다. 이미 떨어진 꽃들일지라도 즈려밟고 걸어가려니 황송한 마음에 발 디디는 데 깨금발이 된다.
전에는 그냥 지나쳐버리던 풀이나 나무들을 지금은 내가 먼저 아는 체를 하며 반긴다. 중학교에 다닐 때 같다. 통일벼라는 종자를 개발하고 쌀의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나라에서 다수확상 이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삼 년 째 이 상을 받으시고 저녁을 드시며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의사는 말을 하는 환자와 얘기를 하지만, 농부는 말 못하는 농작물과 얘기를 나누어야 한다.”
아직 내가 나무나 풀들에게 그 정도일 수는 없지만, 그냥 좋아해 오다가 이젠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면 맞을 것 같다.
으아리가 산 중턱 아래에 많이 자생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숲에 관심을 가진 최근이다. 참으아리와 큰꽃으아리는 잎의 모양이 같아 넝쿨줄기와 꽃으로 구별할 수 있으며, 넝쿨의 끝과 곁가지마다 긴 꽃자루 끝에 하얗게 꽃을 피운다. 참으아리의 경우 넝쿨이 매년 새로 돋아 자라고, 꽃잎 끝이 민둥한 네 잎의 열십자 모양에 화경은 3cm 정도이다. 큰꽃으아리는 누런 색의 묵은 줄기에서 새로 벋은 가지 끝에 8장의 꽃받침이 하얗게 꽃잎처럼 발달한 것이고, 꽃의 끝이 뾰족하며 화경이 10~12cm 정도로 크다.
백선은 꽃핀 모습이 수수하고 귀여워 10년도 넘게 모양만 기억하고 있던 것을 2주 전 대구수목원에서 이름을 알게 됐다. 그 후 앞산 자락길을 걷다가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꽃대가 막 올라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늘 보니 여기저기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다년생초로 줄기 하나가 곧게 자라는데, 잎은 높이 30cm 쯤에 녹색 깃꼴 겹잎으로 모여 난다. 잎들 위로 꽃대 하나가 곧게 자라며, 꽃대 끝부분의 여러 꽃자루마다 네 개의 꽃잎을 피운다. 꽃잎의 외부는 하얀색인데 안쪽엔 자주색 줄무늬들이 선명하게 나 있어 신선함을 주고 화경은 4cm 정도이다. 오늘은 특별히 노란 잎에 녹색이 조금씩 섞인 한포기를 보았다. 난처럼 별종이 있는 건지, 병이 든 건지 계속 확인을 해 봐야겠다.
넝쿨딸기도 군데군데 익어가고 있었다. 보리와 밀을 베러 다닐 때면 들려오던 뻐꾹새의 소리를 올 해 처음으로 들으며, 딸기열매를 몇 개 따먹었다. 충청도 고향에서 보던 멍석딸기는 넝쿨에 흰빛을 띄고 가지 끝마다 여러 개의 열매가 모여 달려 여기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떨기나무로 자라는 일반 산딸기는 하얀 꽃이 줄기와 곁가지 끝마다 모여 피지만, 넝쿨딸기는 자주색으로 하나씩 핀다.
찔레꽃 역시 하얗게 총상으로 피었다가 이젠 지려하고 있었다. 형들이 찔레나무에 장미를 접붙이곤 하던 것을 초등학교 때 어깨 너머로 보며 배웠고, 나도 장난삼아 해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유행가 가사처럼 붉게 피지는 않지만, 찔레나무의 새순을 꺾어 먹었던 친숙한 꽃이다.
국수나무꽃 역시 요즘 한창이었다. 줄기 끝마다 작은 꽃들이 하얗게 모여 피어 마치 솜털 같은 모습이다. 높이 1m 정도의 키 낮은 떨기나무로 줄기의 색깔은 흰빛이다. 새순은 이미 자란 나무의 키 높이 위까지 곧게 자란 후 아래로 휘어지며 자란다. 새순이 국수를 뽑아내듯 곧게 빨리 자라서 국수나무라 이름 지어졌는지 모르지만, 연한 새순을 먹는다고 따가는 아주머니를 본 적이 있다. 먹어보니 아무 맛도 없었다.
이름이 특이한 때죽나무도 곳곳에 꽃을 피웠다. 일반적으로 줄기가 곧거나 높게 자라지는 않는 것 같다. 푸른 잎들 아래로 매달려 별모양의 하얀 꽃을 피운다. 꽃자루마다 씨방이 있고, 그 씨방 아래에 다섯 개의 꽃잎 끝이 뾰족하게 수평으로 핀다. 나무 아래서 꽃이 핀 모습을 한참 올려다보고 있으면, 맑은 날 밤하늘에 총총한 은하수를 올려다보고 있는 듯하다. 꽃이 지고나면 하얀 열매가 난형으로 달리고, 익으면서 검어진다. 꽃과 열매가 순박하고 아름다워 정원수로 충분히 환영받을 만하다고 생각됐다.
가막살나무는 어려서부터 보아왔던 나무 중 하나인데 이름을 몰랐었다. 누가 무슨 뜻에서 그리 지었는지 모르지만, 앞산공원관리사무소에서 붙여놓은 팻말을 보고 우연히 알게 됐다. 키 낮은 관목으로 잎과 줄기가 마주나며 자란다. 꽃은 가지 끝마다 하늘을 향해 우산모양으로, 꽃자루마다 하나씩 좁쌀만 한 흰 꽃을 피운다. 꽃이 지면 꽃마다 푸른 열매가 달리고, 가을엔 붉게 익어 보기 좋으며 먹을 수 있다. 정원수로도 참 좋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꽃말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라고 써져 있어 적어왔다.
뱀무라는 꽃도 길가에 피어 있었다. 잎과 줄기가 집신나물과 비슷하나 꽃모양이 다르다. 뱀무의 꽃은 줄기 끝마다 한 두 개씩 핀다. 꽃잎은 5개로 진노랑에 화경이 1~2cm 원형이며 꽃받침잎이 뒤로 졎혀진다. 집신나물은 줄기 끝에 긴 꽃대가 자라고, 노란 다섯잎꽃이 화경 5mm 정도에 이삭 모양의 꽃차례로 핀다.
산괴불주머니꽃도 곳곳에 흔하다. 얼마 전엔 팔공산 갓바위 주변의 높은 곳에도 핀 것을 보았는데 생명력이 강한 것 같다. 노랗고 작은 색스폰 모양의 꽃이 줄기 끝마다 이삭 달리듯 위로 올라가며 피운다.
아하, 이것은 이름을 모르는데 붙인다면 깨꽃이라 해야 할 것 같다. 키 30cm 정도에 잎은 모양과 맥이 들깨 같고, 꽃은 하얀 참깨꽃을 닮았다.
애기똥풀도 지천이다. 꽃과 줄기가 *)미나리아제비 비슷하다. 다른 점은 잎 뒷면이 흰빛이고 줄기에 흰 털이 있으며, 끝마다 노란 네 잎의 꽃을 피운다. 잎이나 줄기를 자르면 노란 진액이 나와 애기똥풀 이라는 이름이 붙게 됐단다. 소루쟁이도 연녹색의 꽃들을 막 피우기 시작했다. 지난번 왔을 때 하얗게 꽃을 만개했던 산사나무는 어느새 열매가 조랑조랑 달려있다. 가을이 되면 한약재 산사자라고 사람들이 따갈 것이다.
며칠 전 비가 내려서인지 안일사 계곡에 맑은 물이 졸졸 흐른다. 숲 향기에 취하고, 물가의 바위에 앉아 쉬는데 물이 꼭 많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까이선 꾀꼬리와 직박구리와 박새 소리가 들려오고, 멀리선 꿩과 뻐꾸기 소리가 가끔씩 들려온다.
여기에 뺄 수 없는 새 소리가 딱따구리이다.
“ 딱따다다다----, 따다다다다”
소리만 들어도 먹이를 찾기 위해 딱딱하고 마른나무를 파고 있는 지, 습기 먹은 무른 나무를 파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딱딱하고 마른 나무를 팔 때는 성미 급한 사미승이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 같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오늘 잠깐의 여유로 30분이면 걸을 거리에서 자연이 주는 축복을 마음껏 누렸다.
*)미나리아제비: 줄기에 잔털이 있고 속이 비어있다. 잎은 손바닥 모양으로 깊게 갈라지며 다섯 잎의 노란 꽃을 피운다. 독이 있는 식물로 식물 전체를 천연 살충제로 쓴다.
첫댓글 여기의 <관심>이 초안인데
이 것을 수정하여
아름다운 글 란에 <관심이 준 선물>이라고 올렸습니다.
느낌에 어떤 차이가 나시는지요.
산과 들꽃, 산새와 함께 호흡하며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잘 나타난 글일세. 두 게시판의 글이 큰 흐름은 같은데, "관심이 준 선물"이 더 문체가 잘 정리된 것 같네...
감사합니다. ㅎ ㅎ
회장님! 행복 많이 만드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