쏨뱅이 타령
쏨뱅이탕이 자꾸 생각난다. 느닷없는 입맛 타령이라니 별스럽다. 검색창에 쏨뱅이 세 음절을 입력한다. ‘쏨뱅이 매운탕’, ‘완도 직송’, ‘볼락’과 같은 정보가 화면에 줄줄이 뜬다. 육지 사람들에게는 낯선 생선 쏨뱅이. ‘쫌뱅이’로 들릴 수 있는 별난 이름이다.
완도를 떠난 지도 사십 년이 넘었다. 쏨뱅이 생각에 침이 고이는 까닭은 완도에 닿아있다. 초등이 아니 국민학교라 불리던 3학년 가을이었다. 우리 식구는 그 옛날 장보고의 청해진으로 알려진 완도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광주를 지나 해남을 경유하는 길은 먼지가 이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였다. 서울시민에서 섬사람으로 바뀌는 착잡함의 험로였다.
지금 완도는 전복으로 유명하지만, 그때 김과 미역의 고장이었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완도 살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단다. 서울에서 갖은 고생 끝에 새로운 희망을 찾아서 떠나야만 했으니, 이른바 디아스포라, 생존을 위한 이주민 신세였다. 당시 전 재산은 고작 백만 원이 전부였다고 한다. 아슬아슬한 살림살이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먼저 기반을 잡고 있었던 친척 어른을 등대라 여기며 남녘의 끝자락 너머 완도 대교를 건넜다.
완도에서의 첫 새벽이 떠오른다. 창가에는 불안스런 빛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아련한 뱃고동이 들려왔다. 아. 바다... 섬이구나. 어린 마음에도 파도가 차올랐다. 해가 뜨자 친척 어른을 따라 어느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의 첫 식사였다. 깔끔하고 잘 차려진 밥상이 올랐다. 그때 쏨뱅이탕을 처음 맛보았다. 국물엔 짭짤한 간이 스며든 생선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어린 입맛이었지만 긴장을 풀어주는 아늑한 맛이었다.
알고 보니 쏨뱅이는 완도에서 흔한 물고기였다. 어판장이나 시장에 가보면 매대마다 쏨뱅이 여러 마리가 줄에 꿰인 채 팔리고 있었다. 그렇게 그 재밌는 이름의 생선 맛을 알아가면서 완도 사람이 되어갔다. 또한 맞벌이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던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에 오르던 생선이기도 했다. 값싼 쏨뱅이는 어머니에게 유용한 찬거리였다. 어려운 시절, 쏨뱅이는 우리 식구에게 든든한 한 끼를 보장해 주었다.
완도에서 알게 된 해산물이 많다. 파래, 매생이, 청각, 톳, 다시마, 돔, 문저리, 아나고 등. 모두가 고르게 가난했던 70년대였지만 바닷가는 비교적 먹거리가 즐비했다. 한 번은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 어머니가 내어 준 해물 죽을 먹게 되었다. 청각과 톳, 파래 등이 섞여 있었는데 그 모양 탓에 먹기가 곤욕스러웠다. 물론 입맛이 반했던 해산물도 있었으니, 아버지께서 가끔 들어오시던 고소한 아나고였다. 어머니의 쏨뱅이탕과 아버지의 아나고는 용호상박이었다.
불과 십여 년 정도 살았지만, 그 누가 내게 고향을 물을 때면 서슴없이 완도라고 말한다. 비릿한 바다 내음과 넘실대는 물결, 빛나던 황홀한 붉은 낙조, 푸른 바다 위로 쏟아지던 빛의 폭포 등. 유년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있는 풍경이다. 내게 완도와 쏨뱅이는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았다. 쏨뱅이에서 우러나는 바다 내음과 하얗고 연한 부드러운 식감은 고향의 맛이다.
쏨뱅이 국물의 짭조름함을 딱히 설명하기란 어렵다. 반면에 처음 들었던 쏨뱅이라는 이름은 잊을 수 없었다. 대학 시절, 미팅 자리에서 상대 여학생에게 쏨뱅이라는 생선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쫌뱅이요?”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멸치, 삼치, 갈치와 같은 ‘치’로 끝나는 것도 아니요. 고등어. 청어, 방어, 상어와 같은 ‘어’로 끝나는 생선도 아닌 유별난 명칭인 것은 맞다. 아무튼 덕분에 수줍던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쏨뱅이의 생김새는 이름만큼이나 인상적이다. 몸통 전체에 비해 커다랗게 눈이 돌출해 있고, 쫙 벌린 입의 크기도 상당하다. 적갈색을 띠고 있으며 크고 작은 원형의 무늬들이 새겨져 있다. 등에는 제법 날카로운 지느러미가 달려있어 조리할 때 조심해야 한다. 길이는 어른 손바닥보다 좀 더 긴 정도이니 큰 고기는 아니다. 어머니의 쏨뱅이탕에는 이렇게 못생긴 한두 마리가 입을 벌린 채 잠겨 있었다.
왜 어머니는 쏨뱅이를 밥상에 자주 올렸을까? 서울살이 오 년 동안, 고생이 컸던 어머니는 완도에서 아버지와 악착같이 돈을 벌기 위해 식당을 시작했다. 손님은 꾸준하게 늘어났다. 두 분의 하루는 자정 무렵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몇 시간 주무시고 일어난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다시 분주했다. 그렇게 김과 생선구이 그리고 쏨뱅이 국이 상에 오를 때면 손님들의 얼굴은 환해졌다.
얼마 전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께 ‘쏨뱅이탕이 생각난다’고 했더니 말없이 웃으셨다. 순간 어머니도 그 시절이 떠올랐으리라. 엊그제는 어느 지인에게 얻은 감태를 드렸더니 반가워라며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머니 역시나 바닷가에 살았던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음이다. 나 또한 나이를 더할수록 쏨뱅이 국물이 그리운 까닭은 부모님의 세월이 스며있는 유년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나는 비교적 음식에 호불호 없이 잘 먹는 편이다. 맛집 탐방이나 대기표를 들고 길가에서 서성이는 것 따위는 질색이다. 며칠 전 아내에게 ‘쏨뱅이 먹으러 완도에 갈까?’하고 물었다. 아내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작 생선 한 마리 때문에 완도까지 가냐며 되물었다. 평소 타박 없이 식탁에 차려진 대로 먹는 남편이었기에 웬일인가 싶었던 모양이다.
그날 저녁 식사 시간에 아내는 “인근 활어 집에는 쏨뱅이가 없던데”라며 “아마도 맛이 별로 인가 봐”라고 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은 채 수저를 들었다. 아내가 한마디 더 한다. “나이를 먹어가니 옛날 음식이 그리운 모양이네”라고.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감각이 형성될 무렵, 강렬하게 인식된 것은 의식의 창고에 저장된다고 하니. 지금도 치즈나 콘프레이크가 달갑지 않은 것은, 내 유년의 미각에게는 생소한 까닭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찬 바람에 수은주가 떨어질 때면 호빵과 어묵 국물이 생각나는 것도 어릴 날 새겨진 미각 때문은 아니까.
시각보다 강한 것이 후각이라고 한다. 특정 공간에서 풍겨오는 냄새는 망각의 시간을 소환시킨다. 마찬가지로 미각 역시나 이에 못지않은 그리움을 불러내는 힘이 있다. 요즘처럼 마음이 건조해지면 해조음이 들려온다. 그럴 때면 바다 내음과 쏨뱅이 국물이 그리워진다. 뿐만 아니다. 그 안에는 항구의 뱃고동 소리와 어판장으로 달려가던 활어차의 생동감까지 담겨 있다.
쏨뱅이탕의 미감은 마술이다. 세상살이로 마음이 허할 때면 고향의 정겨움이 그리워지는 법. 그 짭조름한 국물이 입안을 적시면 섬 개구리 시절이 홀로그램처럼 머릿속에서 재현된다. 그것은 차원 다른 시공으로 이어준다는 우주의 웜홀과도 같다. 그렇게 그리운 맛의 정체를 찾다 보면 어느새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쏨뱅이 국그릇 앞에 도착한다.
겨울도 끝자락에 서 있다. 더 늦기 전에, 고향 완도와 어머니의 손맛이 생각나는 쏨뱅이탕을 먹으러 가야겠다. 그 따끈하고 바다 향의 풍미가 목을 타고 내려가면 허한 감정에도 생기가 돌 것이다. 사는 것이 별거 있으랴. 쏨뱅이탕 한 그릇이면 충분할 테니. 아내도 나의 입맛 타령을 이해할 것이다. 쏨뱅이 국물의 그리운 그 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