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한 장이 일년 열 두 달을 다 지탱하고 있다.
그림이 좋아서 아쉬운대로 받았는데 벽에 걸려다 열 두 달이 우수수 떨어지고 고리만 남는다.
제법 빳빳하고 두께가 있는 한 장의 그림이었지만
열 두 달을 석 달씩 한 장에 담았어도 그 길이 때문인지
무게를 견디지 못했던가.
고리를 못에 걸자 종이를 물고 있던 플라스틱이 벌어져 버린 것이다.
마치 연말이면 지난 나의 한 해가 언제나 무위로 끝나 허무했듯이
올해도 또 그럴 것이라고 예언이라도 하는 것 같이....
작년 12월 친한 약국에서 겨우 구한 2025년도 달력 하나.
직장생활 할 때는 처치곤란할만큼 많이 들어왔던 달력이었는데...
어느 해 부터인지 연말이면 달력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랜 시절 달력은 사업체나 기업 또는 관공서, 은행의 홍보물로 큰 역할을 했다.
종교시설에서도 신앙을 주제로 그림을 곁들여 달력을 제작해 나눠주었다.
음식점에 가면 주류 광고를 위해 아름다운 여배우나
관능적인 여인의 모습을 배경으로 만든 달력이 어디나 걸려 있었다.
아라비아 숫자로 굵게 날짜와 요일을 표시한 일력만 선호하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날짜 아래 칸이 있어 기억해야 할 일이나 행사를 메모할 수 있는 달력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주로 그림이 마음에 드는 쪽을 좋아해서 까다로운 선택을 했다.
해가 갈수록 그 흔하던 달력을 구하기 힘들어졌다.
쏟아져 내린 날짜들을 다시 플라스틱 거치대에 차곡차곡 집어넣은 다음 투명 테이프로 단단히 봉한다.
가난한 달력이 그제야 제대로 벽에 걸려 날짜를 알려준다.
해년마다 공허하게 보내버리는 나의 시간들도 그렇게 단단히 고정해볼까.
한 장 한 장 뜯어져 버려지다 연말에는 무로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그래봐야 하지 않을까.
내 앞에 놓인 알 수 없는 시간들도 내가 잡고 있기엔 버겁게만 느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자꾸 가고 많은 것을 놓치면서 나의 시간들도 가벼워지겠지.
벌써 3월이네. 뜻없이 중얼거리며 어제 뜯어낸 한 장은
아무것도 없이 하얀 뒷 면이 앞면의 숫자들과 의미없이 등을 맞대고 있다.
어쩌면 서로 멋쩍어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