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aa의 책이 또 나왔다. 최근 자주 출간된다. 그의 글은 최근 신문에도 나오고 있다. 아마도 이제 그의 글은 돈을 지향한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aaa이 책을 내는 것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가 책을 내서 돈을 버는 것에 대해 대꾸할 필요도 없다. 그가 내는 책이 돈 만을 위하려고 내지 않는다고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데 비치니 않는다는 것에 있다. 돈이라도 좋다. 다만 내가 간파하는 것은 츨간 하는 책 속으로 당신의 소인배를 감추려는 것은 확실하다. 내가 이렇게 책을 내는데 나의 그 나머지가 타인에게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과연 그럴까. 당신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마 그동안 당신이 행했던 그 소소하였지만 쌓이고 쌓여서 당신이 스스로 허물 수 없는 자상에 죽을 것이니까. 무슨 말이야냐 하면 당신은 처음부터 마음의 평형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게지. 그러니까 기본이 안 되어있다고 하는 것이지. 진정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평형상태를 유지하려고 무척 노력하지. 그런데 당신은 그렇지 않고 또 그걸 모르지. 아마 평생 그걸 모르고 죽을 거야.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아마 최근 책을 내려고 무척 힘들었겠지. 그러나 그런 책에다 당신의 인격을 결부시키면 그 못난 동당벌이를 대입하면 책을 절대 사고 싶지 않지. 모르는 사람은 일부 사겠지만. 자료는 자전에 많이 나와있고 다른 책들을 보면 되는 것들도 있다. 이 말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당신 수족이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도서관에 안 가요." 이렇게 해놓고 정작 도서관에서 자기의 얼굴을 나 한테 들켰을 때의 그 자식의 초라함을. 당신이 이런 애들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당신의 제자가 당신의 가까운 주위에서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 이러저런한 것들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벗어나려고 허공에다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겠지.
남자 김승진의 {스잔}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엔딩을 같이
초겨울 치고 날이 좋다. 왼쪽 창가이자 운동장에서 내 머리 높이로 비치는 해가 너무 좋다.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느낌이다. 뭐 눈이 부시기는 해서 눈을 찌푸리지면서 한참을 쳐다본다.
[우물에서 하늘보기}, 황현산
{오늘은 시작하기 좋은 날입니다}
- 복수? 진짜 승리는 내 길 가는 것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갈등하는 번역}
{창의적 질문법}
- 한치의 시간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
- 톨스토이 : 시간이란 없는 것이다. 다만 있는 것은 일순간뿐이다. 그 일순간에 우리의 전 생활이 달려있으니 모든 힘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녹문집}1.2
{비스겐슈타인 철학일기}
{과학이 내게로 왔다}
{자아의 원천들}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 책을 사고 싶다. 정유정 소설가가 서평 비슷하게 써논 신문의 기사를 보고 말이다. 인간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삶이 힘겨웠던 20대에도 안담하고 갈었던 무명시절에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환멸이 덮쳐올 때에도, 그리하여 한 인간으로서 내적 균형의 회복이 절실할 때마다, 나는 그의 책을 읽는다. 시종일관 담담한 어조는 어둠에서 건져 올린 삶의 의미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성찰을 더욱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의 대답은 이렇다. 삶은 우리에게 의미 즉, 살아가는 이유를 요구한다. 정유정 소설가의 말
- '높이 오른 파도는 언젠가는 부서집니다. 그 파도가 일으키는 것은 바람입니다.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파도를 보지말고 바람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파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봅니다. 바람이 어디서 불고 있는가를 주시합니다. 여기 실린 이야기들은 바람을 주시하고 있던 중에 얻은 깨달음입니다. (...) 아무쪼록 한까번에 많이 읽기ㅣ보다는 매일 찬찬히 살펴서 오늘, 영양가 있는 내 이야기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병하
- 형형색색의 불빛 희망을 수놓다.
{이이의 356일) 또는 {이이의 최고의 한 해}라고 할까.가장 정치적인 한해를 골라 한 해를 더듬없는 그런 책.. 사람 자연 인간 가족 정치 행정 등이 다 나올 것이 아닌가? 이걸 써보자. 시간 감정 등등이 다 나올 것이다. 그러면 이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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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 {성인식}-고아가 되기 전에는 어른이 된 것이 아니다.
누가 나가야 이기는가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토요판] 박성민의 2017오디세이아 (23) 문-안의 분열(마지막회)
12월13일 안철수가 탈당했다. 총선을 불과 4개월 앞둔 새정치민주연합으로서는 최악의 결과였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벌인 ‘혁신 경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결론으로 끝나고 말았다. 나가도 될 사람들은 나가지 않고 꼭 붙잡아야 할 안철수는 당을 떠났다. 상대에 대한 불신이 (두 사람 모두 원하지 않았을) 극단적 선택으로 내몬 것이다. <게임이론>의 ‘죄수의 딜레마’ 모델은 게임 당사자인 두 경쟁자의 ‘합리적 선택’이 왜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보여준다.
어느 범죄의 공범으로 지목된 A와 B가 조사를 받는데 검사는 이들이 이번 범죄뿐만 아니라 다른 범죄도 저질렀다는 심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범죄는 증거가 없으므로 자백이 중요하다. 검사는 이 둘을 다른 방에 격리시키고 이렇게 제안한다. 만약 과거의 범죄에 대하여 자백하면 가벼운 처벌(0.5)을 내리겠지만 당신이 자백하지 않았는데 다른 방에 있는 공범이 자백하면 당신은 무거운 처벌(3.0)을 받게 될 것이라고 위협한다. 만약 두 죄수가 서로를 신뢰하고 둘 다 자백을 하지 않으면 이번 범죄에 대해서만 둘 다 비교적 가벼운 처벌(1.0)을 받게 되지만 나만 살겠다고 둘 다 자백을 하면 비교적 무거운 처벌(2.0)을 받게 된다.
다른 방에 있는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선택은 자백을 하는 것이다. 먼저 상대가 자백을 한다는 것을 가정하면 당연히 나도 자백을 하는 것이 좋다. 자칫하면 독박(3.0)을 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만약 상대가 자백을 하지 않을 거라고 가정될 때도 자백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가벼운 처벌(0.5)만 받게 될 테니까. 두 사람이 모두 이런 합리적 선택을 하게 되면 둘 다 비교적 무거운 처벌(2.0)을 받게 되는 것이 죄수의 딜레마다.
플라톤 테제와 오웰 테제
문재인과 안철수 모두 혁신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두 사람이 전면적으로 손을 잡고 ‘문·안 비대위’를 합의하는 것이 아마도 최선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상곤 혁신안’과 ‘혁신전대’에 대한 서로의 불신이 파국을 불러왔다. 만약 문재인 대표가 안철수 탈당 선언 직전이라도 “나는 여전히 분열의 우려 때문에 혁신전대에 반대하지만 안철수 의원의 탈당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 혁신전대 수용밖에 없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면 안철수의 탈당을 막았을 것이다. 그리고 안철수는 문재인의 그런 선언을 혁신에 대한 강한 의지로 평가하고 혁신전대 대신 ‘문·안 비대위’로 타협했다면 (이미 의원들이 두 사람에게 백지 위임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강한 혁신 드라이브를 걸 수 있었을 것이다.
‘소통이론’의 대가인 위르겐 하버마스의 “어떤 불신과 불리한 조건에서도 사회통합을 향한 합리적 토론은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합리적 이성에 바탕을 둔 대화를 통하여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하버마스의 이성적 낙관주의가 아쉬운 순간이었다.
세계적인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는 <언어에 대한 지식>에서 버트런드 러셀과 조지 오웰을 인용해서 ‘플라톤 테제’와 ‘오웰 테제’를 대비시킨다. 플라톤 테제는 러셀이 말한 ‘세상과의 접촉이 짧고, 개인적이며,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지식을 알 수 있을까?’로 집약된다. 반대로 오웰 테제는 ‘이렇게 많은 자료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인간은 이다지도 조금밖에 알 수 없는가?’로 요약된다. 러셀은 ‘인간 이성의 가능성’에 주목했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을 고양시키는 계몽에 주력했고, 오웰은 전체주의 사회의 ‘인간 의식의 조작 가능성’을 경고한 것이다.
2012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를 주 단위로 승자와 득표율까지 거의 정확히 예측했던 통계전문가 네이트 실버는 <신호와 소음>에서 통계학을 기반으로 어떻게 잘못된 정보(소음)를 거르고 진짜 의미있는 정보(신호)를 찾을 수 있는지를 여러 사례를 들어 흥미롭게 설명했다. ‘소음에서 신호를 분리하려면 과학적 지식과 자기 인식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겸손’과 예측할 수 있는 것을 예측하는 ‘용기’, 그리고 이들 사이의 차이를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실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우리의 능력을 더 겸손하게 평가함으로써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여의도에는 소음이 넘친다. 많은 정보가 ‘찌라시’에 사실인 양 떠다닌다. 한편에서는 (‘종일 편파 방송’이라는 비판을 받는) 종편을 통해 정치 정보를 얻고, 또 다른 편에서는 에스엔에스(SNS)와 팟 캐스트를 통해 정보를 얻는다. (균형을 잃었기 때문에) 엄청난 정보를 접하지만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확증편향’에 빠져 올바른 판단을 할 능력을 잃었다.(나는 소음 때문에 신호를 놓칠까봐 보지도(종편), 하지도(SNS), 듣지도(팟캐스트) 않는 차단의 원칙을 택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외눈박이 ‘키클롭스’ 때문에 숱한 위기를 맞게 된다. ‘들은 것은 믿지 말고, 본 것도 절반만 믿어라’는 지혜로운 격언이 있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그런 신중함은 차치하고, ‘들을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온 나라가 홍해 갈라지듯 쫙 갈라져 있다. 대화나 토론은 상대의 의견을 듣고 내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듣기도 전에 결론을 내린다면 소통은 불가능하다.
노무현 정부 때 <메이드 인 USA>의 저자인 프랑스 사람 ‘기 소르망’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요즘 한국과 프랑스에서는 반미가 유행인데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을 받고는 “반미가 미국에 대한 태도는 아니죠. 그저 하나의 선택일 뿐입니다”라고 답했는데, 그 뜻은 누군가가 친미의 입장을 이미 선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반미를 하기로’ 정했다는 냉소적인 비판이었다. 지식인연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조롱이었다.
‘협력적 경쟁’ 관계의 두 사람 ‘경쟁적 협력’의 길이 아닌 ‘비판적 경쟁’의 길을 선택 당분간 둘 모두 지지율 오르고 박원순의 지지율은 떨어질 것
‘혁신안’과 ‘혁신전대’가 탈당을 결행할 명분이 되는가 둘 다 비판받을 지점이 있어 그나마 ‘양초’라 조롱당하는 두 사람 모두 강해지는 건 다행
문과 안이 입증해야 할 세가지
대통령을 비롯해 온 국민이 이런 사고에 빠져 있으면 ‘창조’나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물리적 ‘관성’이나 개인적 ‘타성’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듯 사회도 (하던 대로 하는) ‘경로의존성’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다양한 견해를 포용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 국가도 정당도 마찬가지다. 왜곡된 정보는 편향된 사고를 낳고 편향된 사고는 잘못된 결정을 낳는다.
지나친 ‘당파성’은 지지층 결집에는 ‘득’이 되지만 외연 확장에는 ‘독’이 된다. 한국에서 대통령은 ‘초당파적’ 국가원수와 ‘당파적’ 행정부 수반을 겸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통합을 위한 국가원수의 역할은 거의 하지 않는다. ‘역사 교과서’ 이슈는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면서 초당파적으로 협력을 구할 수 있었는데도 박 대통령은 이 이슈 역시 당파적으로 접근했다. 정당도 마찬가지다. ‘정체성’은 중요하지만 이념적 순결성이나 운동적 경직성으로는 외연 확대를 할 수 없다.
‘보수는 하나만 같아도 동지로 보고, 진보는 하나만 달라도 적으로 본다’더니 문재인과 안철수의 오월동주는 결국 깨지고 말았다. ‘협력적 경쟁’(당내 주류·비주류) 관계였던 두 사람이 ‘경쟁적 협력’(문·안 비대위)의 길이 아닌 ‘비판적 경쟁’(분당)의 길을 선택했다. 당분간 두 사람의 치열한 경쟁은 ‘보완재’인 두 사람의 지지율을 함께 끌어올릴 것이다. 반면 안철수와 ‘대체재’ 관계인 박원순의 지지율은 떨어질 것이다.
2017년 대통령을 향한 도정에서 ‘도전자 포지션’인 문재인·안철수 두 사람은 캠페인으로 세 가지를 입증해야 한다. 첫째,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나라를 잘못 이끌고 있다. 반드시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 둘째, 나와 우리 당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보다 더 나은 비전과 리더십이 있다. 셋째, 내가 더 경쟁력(승리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문재인·안철수의 협력적 목표이고, 둘째와 셋째는 경쟁적 목표다.
야당이 정권교체에 성공하려면 “정권교체를 원하는가?”, “야당이 더 나은 대안인가?”라는 두 질문 모두에 “그렇다”고 답하는 국민이 더 많아야 한다. 아무리 정권교체 여론이 높아도 ‘더 낫다’는 인식을 주지 못하면 정권은 교체되지 않는다. 국민들은 ‘웬만하면’ 야당에 정권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야당의 모습은 웬만하지가 않다. 국민들은 야당에 세 가지를 묻고 있다.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대한민국의 안위를 맡길 만큼 ‘강한가?’, 야당이 제시하는 방법대로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어도 되는가?’, 나 같은 보통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귀 기울여주고 ‘돌봐줄 수 있는가?’ 이러한 목표를 놓고 문재인과 안철수는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2017년이 다가오면 결국은 ‘누가 나가야 이기는가?’로 승부가 갈릴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명이 곧 사라질 모양이다. 안 그래도 그동안 ‘새정치’도 없고, ‘민주’도 없고, ‘연합’도 없다고 조롱을 받았는데 이제는 안철수가 탈당했으니 더 이상 ‘연합’은 필요없게 되었다. 문제는 야당이 연합을 깨고 총선·대선 승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민주화운동가 출신의 세 명의 대통령 모두 이질적인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집권했다. 김영삼은 노태우와, 김대중은 김종필과, 노무현은 정몽준과 손잡고 대통령이 되었다. 2012년 문재인도 안철수와 연대했기 때문에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1990년 3당 합당 이래로 한국의 정치 지형은 새누리당 대 반새누리당의 구도가 유지되고 있다. 새누리당은 통합 없이, 연대 없이 집권 가능한 유일한 정치세력이지만 야권은 연합 없이, 연대 없이 집권이 어렵다.
그런데도 총선을 앞두고 연합을 해체하는 이유를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물론 아직도 ‘통합전대’나 ‘후보단일화’를 통해 연대의 가능성을 전망 내지 희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합치기 위해 헤어졌다’는 것은 좀 코미디 같은 논리 아닌가. 다만 안철수의 탈당으로 두 사람의 지지기반이 달라 연합의 시너지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확인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성과(?)다.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이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안철수의 탈당이 한국 정치의 ‘창조적 파괴’가 될지, 아니면 ‘무책임한 분열’이 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수학이 아닌 산수로 보이는…
당내 누구보다 혁신의 의지가 강했던 두 사람이 혁신의 방법 때문에 갈라선 것은 아무리 봐도 아쉽다. ‘혁신안’과 ‘혁신전대’가 탈당을 방치하거나 결행할 만큼의 절대적 명분이 되는지 모르겠다. 안철수의 비판대로 혁신안이 아쉽고 부족하기는 하지만 평가를 받을 만한 점도 분명히 있다. 문 대표가 분열의 우려 때문에 혁신전대를 반대한다는 것도 군색한 논리다. 불확실한 분열 때문에 ‘확실한 더 큰 분열’을 안 막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안철수 입장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절대 분열은 안 된다는 논리를 접하며 영화 <부당거래>에 나온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대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무슨 계산법인지는 몰라도 분열 이후 두 사람 다 원래 이렇게 될 예정이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제 갈 길로 가고 있는 이 상황이 나는 너무 놀랍다. (총선 결과가) 수학이 아니라 산수로 보이는데 말이다. 아마도 두 사람 모두 바라보고 있는 결승점이 2016년이 아니라 2017년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양초의 난’으로 조롱을 당하는 문재인·안철수 두 사람이 권력투쟁을 통해 점점 강해지고 있고, 지도자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7년 대선 레이스의 출발 총성이 울렸다. 내년 총선이 끝나면 대선 주자들의 희비가 엇갈릴 것이다. 이번 대선은 누가 또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까? 예측할 수 없는 게임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지난 1년간 <2017 오디세이아>를 연재했다. 기대에 못 미치는 부족한 글에 지면을 내준 <한겨레>와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에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끝>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1991년 설립한 ‘민(MIN) 컨설팅’ 대표. 30년간 정치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수많은 선거를 이끌었다. 전략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승리를 위한 캠페인 방법을 몸으로 익혔다. 세계 최고의 전략컨설팅 회사를 꿈꾼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다. ‘힘든 일은 있어도 나쁜 일은 없다’는 인생관으로 버틴다. 책과 영화, 커피를 사랑하며 걷는 것을 즐긴다. ‘2017 오디세이아’를 통해 차기 대선을 향한 여정을 1년간 독자들과 함께했다.
명종대는 조선의 대표적인 폭정(暴政) 시대다. 이 같은 폭정의 실상을 무마하고 식자층을 회유하기 위함이었는지 명종 때는 거의 해마다 과거가 실시되었다. 원래는 3년에 한 번이 정상이다. 명종 16년(1561년) 식년시에서는 이산해(李山海)가 11등으로 급제했고, 명종 17년(1562년) 별시에서는 정철(鄭澈)이, 명종 19년(1564년) 식년시에서는 이이(李珥)가 장원으로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선다. 선조 때 당쟁이 시작되면서 동인을 이끌 이산해와 서인을 이끌 이이·정철이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이이는 급제하던 해에 장원으로서 정6품 호조좌랑에 임명된다. 이산해는 3년 먼저 급제하기는 했지만 장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종9품에서 출발했다. 정상적인 승진 절차를 거쳤다면 이미 명종 19년에 이이가 이산해를 따라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산해는 명문가의 자손인 데다가 과묵하면서도 뛰어난 머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실력자 윤원형이 일찍부터 사위로 삼으려 할 정도로 당시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특진을 거듭해 명종 19년에 이산해도 정6품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된다. 같은 정6품이지만 요직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이산해가 앞서 있었다. 이이는 이듬해 정언에 임명된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오히려 이산해가 이이를 3~4년 정도 따라잡으면서 역전시킨 셈이었다.
반면 확실한 후원자가 없던 이이는 여러 가지로 불리했다. 명종 20년 정언으로 임명된 이후 이듬해에는 다시 병조좌랑, 정언, 이조좌랑 등 정6품직을 왔다갔다하다가 선조의 즉위를 맞게 된다. 한편 이산해는 정언을 거쳐 명종 20년 홍문관 부수찬, 이조좌랑을 거쳐 명종 22년에는 정5품 홍문관 교리(敎理)에 올라 선조의 즉위를 맞는다.
이이와 이산해는 시기만 다를 뿐 선조의 가장 큰 총애를 받았던 두 사람이다. 이이는 경학(經學) 쪽으로, 이산해는 행정과 문학 쪽으로 최고를 자부하던 신진 기예였다. 선조의 즉위는 두 사람 모두에게 기회였다. 선조는 이이의 학문 강의와 직언(直言)을 좋아하고 아꼈다. 이이에 대한 선조의 각별한 총애는 선조 6년(1574년) 말 이이를 승지로 승진 임명한 데서도 드러난다. 승지는 정3품 당상관이다.
이산해의 승진 속도는 더했다. 선조 3년 직제학을 거쳤으니 이이보다 2~3년 정도 앞서 나아가고 있었다. 선조 4년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정3품 당상관)에 제수된다. 그리고 이이가 응교로 있던 선조 5년 이산해는 이조참의로 자리를 옮긴다.
그런데 선조 6년과 7년 이산해가 대사간과 이조참의를 반복적으로 오가며 승진이 지체되는 사이 이이는 승진을 거듭했다. 마침내 선조 7년 4월 13일 대사간을 맡고 있던 이이가 병으로 물러나고 나서야 그 자리를 이산해가 물려받는다.
그러면 누가 먼저 정2품 판서에 오르게 될까? 이산해는 선조 13년(1580년) 10월 20일 형조판서에 특별 임명된다. 이산해가 판서에 오르던 선조 13년 9월 이이는 여전히 부제학에 머물러 있다. 이듬해 이이는 대사헌을 거쳐 호조판서에 임명된다. 이산해보다 1년 뒤졌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이이의 시대였다. 병조·
이조판서를 두루 거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조 17년(1584년) 이이는 50을 바라보던 나이에 아쉽게도 세상을 떠나 정승에 이르지 못한 반면 이산해는 70세를 넘기며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산해보다는 이이를 더 기억한다. 생전에 영예를 누린 이산해와 죽어서 불멸의 명예를 누리는 이이, 공직자라면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양자택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