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지혜의 품에 안기려 화대종주(5) - 감탄, 감탄의 철쭉꽃 향연
아침 8시 20분. 하룻밤 품을 내준 연하천 대피소를 출발하여 다음 행선지는 벽소령 대피소까지 3.6km다. 출발할 때는 비가 제법 내리는 등 걱정스럽게 하더니 벽소령대피소에 이르는 동안 비가 개고 안개만 끼어서 산행하기엔 오히려 좋은 날씨가 되었다.
벽소령대피소는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 종주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벽소령이라는 명칭은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희고 맑아서 오히려 더 푸르게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달구경을 한다면 특별한 맛이 있을 듯한 이름이요 풍광이다. 다름 분이 이 모습을 묘사한 글을 다시 환기함으로 상상해 본다.
「벽소령은 지리산 8경 가운데 하나인 '벽소명월(碧宵明月)'로 유명하다. '지리산 등뼈의 한가운데라고 할 벽소령을 덮고 있는 밀림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은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이 차갑도록 푸른 유기(幽氣)마저 감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벽소한월(碧宵寒月)이라고도 부르며, 여기서 맞는 달밤의 고요는 현묘한 유수로 몰고 가는 태고의 정적 그것이라고나 할까.' 」(이종길 지음 '지리영봉') 수용인원은 120명이란다.
시계를 보니 10시 10분이다.
오늘은 장터목까지 가야 하는데 늦지 않으려면 미리 시간을 절약하기로 하고 출발을 서두른다. 이제 벽소령에서 선비샘까지는 2.4km라고 안내하고 있다. 군데군데 갓 피어나고 있는 철쭉꽃이 돌 지난 아이의 웃는 얼굴처럼 연하고 여리고 예쁜 모습으로 우리를 반긴다. 마치 오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선비샘에서 목을 축인다. 곁에 「옛날 덕평골에 화전민 이 씨라는 노인은 천대와 멸시를 받고 살아, 죽어서라도 남에게 존경을 받고 싶어 샘터 위 상덕평에 묘를 세웠다. 샘터의 물을 마시려면 자연스럽게 허리를 구부리게 되어 절을 받게 되었다」는 선비샘의 전설을 읽으면서.
선비샘에서 동쪽의 낮은 능선을 넘어선 뒤 칠선봉에 닿기까지 작은 언덕과 같은 능선을 여러 차례 오르내린다. 이 구간에는 다소 위험하다 싶은 곳들도 지나게 된다.
여기서 1.8km를 더 가면 칠선봉이다. 칠선봉(1,552m)은 일곱 개의 바위가 정상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마치 일곱 선녀가 모여 노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가까이에서 봐서 그런 일곱 선녀가 노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만 엉켜이쓴 바위의 웅장함은 역력하다. 오늘은 날씨가 흐려서인가 아니면 내 마음이 착하지 않아서인가.
칠선봉을 그냥 눈으로 구경하며 지나친다. 이제 영신봉(1,652m)이다. 영신봉 명칭은 남쪽 기슭에 영신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영신봉까지는 1.5km다. 구간 구간에 바윗길이 나타난다. 따라서 힘이 더 들고 발길은 더딜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더딘 발걸음에 이어지는 험한 바윗길 위로 나타나는 철쭉꽃들. 발길이 더딘 중에도 길이 험한 중에도 숲의 요정처럼 간간이 나타나는 철쭉꽃밭이 우릴 개선장군처럼 양양하게 만들고 순진한 소년 소녀처럼 맑고 밝게 만들었다. 아, 이 장관이라니! 이번 산행에서 전혀 예상 밖의 수확을 들라면 주저 없이 철쭉꽃을 손꼽을 것이다.
0.6km 떨어진 세석대피소에 이르는 내내 철쭉들의 뜻하지 않는 도열을 받으며 길을 간다. 저 앞에 철쭉의 광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 여기가 어디인가! 이름하여 세적평전.
감탄! 또 감탄!! 하면서 오후 1시 50분 세석대피소에 도착하였다. 지리산 대피소 중 가장 큰 대피소로 수용인원은 240명이다. 세석 명칭은 잔돌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스템프 찍는 곳을 물어 2층 숙소 앞에서 인증을 했다.
길을 재촉했지만 철쭉에 한 눈을 파느라 그랬는지는 모르나 늦은 점심을 먹게 되었다. 점심은 라면에 오곡 햇반이다. 점심이 늦어서인지 라면을 이들 연속 먹어도 먹을 만하다. 아니 맛이 있다. 아들이 끓여주니 더 맛이 있기도 할 것이다. 강하주 씨는 아들이 끓여주는 라면이 정말 맛있다며 연신 입맛을 다신다. 좋다. 이런 것을 두고 좋다고 하는 것이 제격이다고 하는 생각을 하며 점심과 점심을 준비해 준 아들과 함께 한 강하주, 그리고 지리산, 세석평전, 철쭉꽃, 나의 다리에게까지 두루두루 감사, 또 감사하다.
세석대피소에서 장터목 대피소로 가는 등산객은 3시에 출입하는 길목을 통과해야 한다. 이번에도 3시에 겨우 맞출 수 있었다.
세석평전의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간다. 눈앞에 올려다보이는 봉우리를 바라보며 잠시 땀을 흘리노라니 크고 작은 바위들이 무더기로 엉켜 있는 봉우리가 나타난다. 촛대봉이다. 해발 1,703m란다. 왜 촛대봉이라 했을까. 바위 모양들이 마치 촛농이 흘러내린 것과 같아서 일까.
촛대봉에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비탈길을 내려간다. 평평한 능선길이 계속 이어진다. 곳곳에 늘어선 기이한 바위들과 고사목들은 묘한 조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다행하게도 이 능선길은 비교적 평탄하여 지친 등산객에겐 평안함을 느끼게 한다. 거기에다가 끝없이 이어지는 철쭉을 비롯한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들이 정신을 아득하게 할 정도로 매혹적이다.
사실 세석대피소를 출발하는 순간부터 세석평전을 가로질러 가는 내내 철쭉꽃이 장관을 이루었다. 아니 장터목 대피소에 이르는 6.3km 구간 내내 계속하여 철쭉꽃의 향연이 펼쳐졌다. 내가 그동안 보아 온 철쭉꽃보다 더 많은 철쭉을 본 듯하다. 아마 앞으로도 이만큼 훌륭한 철쭉꽃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아마 평생 볼 철쭉의 아름다움을 이번 산행 중에 만끽하는 축복을 누리는 듯하여 황홀하다. 내리막을 향하는 굽이에서, 아니면 힘겨워하며 오르는 그 끄트머리에서 요정처럼 화사한 얼굴과 표정과 차림으로 ‘짠!’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듯 철쭉의 아름다움에 취한 채 정신 못 차리는 사이에 어느덧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하였다. 오후 5시 10분이다. 오는 길이 꽃길이라서 기분이 들뜬 탓도 있겠고 또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하니 마음부터 여유가 있다.
대피소에 도착하여 인증샷 사진도 찍고 종주스템프도 찍으며 하룻밤 묵을 준비를 한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 각각 숙소에서 20분 정도 쉬었다가 취사장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잠시 누워 오늘 걸은 걸음을 확인해 보니 34,735걸음에 27.4km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도상의 거리는 13,3km인데.
첫댓글 안개낀 산길, 꽃길이 몽환적인 분위기라
잠시 딴세상에 다녀오신 듯할 것 같습니다. 어마어마한 걸음 수, 거리에 비해 사진 속 모습은 너무나 맑고 밝은 표정^^ 무릉도원을 향하는 듯합니다.
碧宵명월 ㅡ 碧 푸를벽. 宵 밤소
백과사전같은 분의 벽소령 얘기가
따오릅니다 .
철쭉꽃 사진이 돌지난 어린이마냥 연하고 어리고 웃는얼굴 맞습니다
오.... ! 자연의 壯觀은 소년소녀로 만드셨군요
지리산 철쭉제 가서
억수로 비맞았던 옛 시절이 언제였던가...
평생 보아온 꽃보다 더 많은 철쭉을 보셨군요. 황홀한 철쭉축제 향연에
天上체험 초대 받으셨으니
여한이 없는 충분한 인증샷 입니다.
지도 보다 거의 두 배를 걷는
가족의 힘 그 위력,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