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7.
-안녕하세요? 가평 강연에 대한 메일을 잘 받았습니다. 보내주신 내용만으로는 어떤 강연을 원하시는지 잘 알수가 없네요. 시간 되실 때 전화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분과의 통화는 이 글을 올리고 난 뒤에 오 분 정도 이루어졌다. '학생들을 차별하지 않는 기술' 등에 관한 얘기를 주로 할 건데 괜찮겠느냐고 했더니 자기들이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어제 한화(주) 사이언스 운영사무국 직원에게 보내드린 문자다. 이 문자를 보내기 30분 전쯤 나는 그 직원으로부터 한통의 메일을 받았다. 한 달 전쯤에는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15분) 직원에게 전화를 받았는데, 경기도 가평에서 교사 30명을 대상으로 하는 한 시간 짜리 강연을 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올해 2월 정년퇴임 후 '교사에서 백수'로 직함이 바뀐 나는 속으로만 "why not!"을 외치며 흔쾌히 승락을 했던 것이다. 추후 연락을 주겠노라고 해서 달력에 날짜만 적어놓았는데 어제 메일을 보내온 것이다. 어제 내게 전화를 한 분은 세바시 직원이 아니었고 한화 사인언스 운영사무국 직원이었다.
그런데 어떤 내용의 강연을 원한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이 강연 ppt를 8월 12일까지 보내달라는 짧은 편지와 함께 첨부 파일로 보내온 '한화 사이언스 챌린지 2016' ppt를 열어본 나는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국내 최대규모의 미래과학 기술인재발굴 프로젝트'라는 문구였다. '과학분야에 재능이 있는 전국의 고등학생 과학여영재후원' 과 '<한국의 젊은 노벨상>을 지향'이란 문구도 눈에 띄었다. 2011년에 시작하여 2015년도까지 총 3,407팀(6,764명)이 참가하였고 그들 중 117팀(240명)을 선발한 내용도 있었다. 올해도 본선진출 30팀에게 연구활동비를 지원하고 지도교사들에게는 우수교사상을 시상하고 상금도 지원하는 그런 구조였다. 8월 25일 경기도 가평에서 만나게 될 30명의 교사가 바로 우수교사상을 수상한 그 분들인 셈이었다.
내가 세바시에서15분짜리 강연을 한 것은 3년 전의 일이다. 강연 주제는 '학생을 차별하지 않는 방법 다섯 가지'였다. 학교가 '차별이라는 룰로 운영되는 곳'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은 내가 이미 수많은 보통 학생들에게 차별의 상처를 주고 난 뒤의 일이었다. 사실 내가 편애한 학생들이 영재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른바 '문제아'라고 일컬어지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어느 핸가 한 학생으로부터 "선생님은 그 애를 바라볼 때만 눈이 빛나요!"라는 충격적인 말을 들은 적도 있었지만 그 때 '그 애'도 영재는 아니었다. 아니, 영재일 수가 없었다. 내가 29년 동안 근무한 학교가 사립 전문고였으니 말이다.
나도 '우수교사상'이란 것을 한 번 수상한 적이 있었다. 우리 학교가 남자상고에서 남여공학으로 바뀐 그 다음해의 일이었다. 전남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영어말하기 대회'에 출전한 세 명의 여학생이 인문고 학생들과 함께 겨루는 결선에서 우수상(2등)을 받은 덕에 내가 지도교사상을 받게 된 것이다. 내 눈을 빛나게 한 '그 애'는 그 세 명의 여학생 중 하나였다. 영어발음도 좋았지만 문학적 감수성이 남달라 시를 쓰는 영어선생인 나로서는 그 애를 볼 때마다 눈이 빛나는 것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지 않은 것이 나로서는 얼마나 다행한 일이 모르겠다.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면 '그애' 뿐만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바라볼 때 눈이 빛날 수 있는 교사가 되기를 갈망하지는 못했을 테니 말이다.
<공부의 배신-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 책에는 'Excellent sheep' 이라는 영어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놓기만 하고 안 읽고 있다가 한화에서 보내온 ppt를 열어본 뒤에야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여는 글의 제목은 '스무살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책은 여러 의미로 수무 살 무렵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 할 수 있다. 내가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한번 생각해보라."며 누군가 내게 이야기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들. "대학이란 애초에 어떤 의미였을까?" 등등
-스무 살 무렵의 나는 오늘날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몽유병자처럼, 좀비처럼 그냥 별 생각 없이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은 채워나가야 할 인생의 '빈칸'이었다. 진학은 그저 '다음 일'에 불과했다.
-내가 예일대학에서 우정을 주제로 문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학생들과 함께 모여 앉아 혼자 있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자아성찰 능력은 정신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핵심적인 전제조건이며, 자아성찰의 주요한 전제조건은 고독이라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한동안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 전까지는 자아성찰, 고독, 정신적인 삶 같은 것은 생각해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잠시 후 한 학생이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저 '똑똑한 양떼excellent sheep'에 불과하다는 건가요?"
이 책의 1부 제목은 양치기와 "양"이다. 우리는 똑똑한 양떼일 뿐이다./무엇이 우리를 양으로 만들었을까/순한 양으로 사는 법, 과도한 장애물 넘기/1등급 목장, 명문대의 실제 등이 1부에서 다루는 내용들이다. 저자가 미국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우리 교육의 현실과 닮은 꼴이다. 아니, 우리의 현실이 더 끔찍하겠지만.
책을 읽다가 잠시 덮고 포털 검색창에 공부의 배신을 써넣었더니 'EBS다큐프라임 명문대는 누가 가는가?' 라는 제목의 유튜브 동영상이 올라 와 있어서 보았다. 익산에서 중학교를 다니면서 명문자립형사립고(전주 상산고가 아닐듯...) 입학을 준비하는 한 여학생의 하루 일과는 경쟁의 강박에 시달리는 어둡고 우울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부모의 지나친 기대나 간섭 때문은 아니었다. 학생 엄마 말로는 딸이 너무 일찍 철이 들어 스스로 잘 알아서 하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안스럽다고 했다. 아빠라는 사람도 퍽 푸근해보였다. 여학생의 머리 속에 박힌 미래의 꿈은 의사였다. 동영상의 마지막 엔딩은 이랬다.
학생: 일반고를 갔으면 그래도 여기서는 괜찮겠다는 생각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었을 텐데 여기 와 버리니까....여기로 왔다는 것은 그만큼 제가 (힘들거라는) 각오를 한 거고 그 만큼 애들의 수준이 높다는 걸 알고 온 건데 이제 부딪쳐야하니까 두려운 거죠."
나레이터: 고등학생이 된 **이는 얼마 전 첫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중학교 내내 전교 1,2등이던 수학성적은 395명 중에 313등이었습니다."
"395명 중에...."
나는 속으로 100등 이쪽 저쪽일 것으로 생각했다가 313등이라는 말에 그만 넋이 다운 되는 것 같았다. 다운 된 넋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한 것은 창원에서 보내온 한 고등학생의 편지였다. 사실은 편지를 읽고 있는 동안에도 우울한 마음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동영상 충격의 여파 때문이었겠지만 교직을 꿈꾸고 있는 여고 1년생의 소망에 가득한 상큼발랄한 언어들에 대해 내 스스로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 지, 어떤 내용으로 답장을 보내주어야할지 조금은 아득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반전의 순간이 왔다. 편지를 다 읽고 난 뒤에는 먹구름처럼 내려 앉았던 우울하고 칙칙한 기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은 오늘 받은 편지의 전문이다. 나는 이 편지의 어느 대목쯤에서 기분이 좋아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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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안녕하세요. 저는 경상남도 창원의 **여고에 다니고 있는 1학년 박**예요.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그 후 아이들을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책을 읽고 선생님을 알게 되었는데요. 대충 짐작하셨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교사라는 훌륭한 꿈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에요. 그 중에서도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를 꿈꾸고 있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선생님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저에게 진심으로 다가왔고,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학교도서관에서 더 찾아보다가 선생님께서 쓰신 또 다른 책인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을 발견하고 정말 기쁜 마음으로 바로 빌려서 읽었어요. 이 메일은 선생님께서 쓰신 책을 읽고 꿈을 확실히 할 수 있었고, 그 꿈에 대한 탐색의 기회를 갖게 된 한 학생의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메일이에요. 책을 읽는 내내 저는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생일에 시를 선물로 준다는 것이 매우 인상 깊었어요. 그 시들과 선생님께서 아이들과 직접 주고받은 메일들을 읽으면서 저도 선생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물론 지금 저희 담임선생님께 불만이 있는 건 절대 아니랍니다. 선생님의 시를 읽고 있으면 그 한 단어마다 선생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 단어를 선택하셨을지 느낌이 와요. 거기에는 학생들을 향한 진실된 사랑과, 선생님께서 느끼신 것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요. 저는 어릴 적부터 시를 참 좋아했고 읽는 것뿐만 아니라 시 짓기를 참 좋아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학교에서 시를 사랑하는 학생 10명이 모여 만들어진 자율동아리인 '시 두레박'에 매일 아침마다 참여한답니다. 공부만으로도 힘들기는 하지만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친구들과 시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인 줄 몰랐고, 앞으로도 시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 같아요.
저는 선생님을 책으로 느낄 수 있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저를 아예 모르시기 때문에 저에 관한 얘기를 조금 드릴게요. 음...제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에요. 중학교 때를 생각해보면 창피할 정도로 공부도 안 하고 놀기만을 좋아했던 저는 이 꿈을 가지고 180도 변신한 것 같아요. 주변 친구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엄마 아빠가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확 변해 버린 거예요. 저도 어쩌다가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되었는지가 신기하고 또 신기할 따름이에요. 그게 어느 누구의 압박 때문이 아니라 꿈을 가지면서 스스로 변한 것이라는 게 뿌듯해요. 저는 워낙에 활발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가기를 무지 좋아 했던 터라 공부를 하기 시작하니까 공부가 너무 재미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성적도 쑥쑥 올랐어요. 사실 고백하자면 지금 독서실 컴퓨터실에서 메일 쓰고 있는 중이에요ㅎㅎㅎㅎ 평소 메일을 잘 이용하지 않아서 비밀번호도 까먹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아 정말 이 선생님 한번 뵙고 싶다'하는 생각이 들었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앞을 보니 이메일 주소가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선생님, 저는 등하교할 때나 독서실에 갈 때처럼 틈나는 시간마다 제가 교사가 되었을 때를 상상해보고 그 때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상상해 보면서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를 고민해보는 습관이 어느 새부턴가 생겼어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여태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상황들에 대해 생각 해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교사라는 직업이 결코! 만만하지 않은 직업이라는 것도요.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꾸중이나 지적 대신 말로 아이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들 스스로가 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정말 감동 받았어요. 항상 가슴을 울리는 말로 깊은 깨달음을 주시는 것도 멋지구요. 또 저는 선생님께서 제 마음속에 있던 '내가 되고 싶은 교사의 모습'과 정말 비슷하다는 것에 많이 놀라기도 했어요. 저도 선생님처럼 아이들에게 절대 매를 들지 않을 거예요. 소중한 생명들에게 매를 든다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있어서는 안 되는 무서운 일이라고 봐요. 또 매는 멀리 내다봤을 때 아이들의 행동변화에 좋은 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구요. 저는 아이들과 마음으로 소통하며 진실된 사랑으로 다가가는 교사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이 꿈을 이루기 위해 거쳐야 하는 '교대'라는 곳이 쉽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알기에 제 마음 한 켠에는 항상 무거운 짐이 있었어요. 이 짐을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해요. 사실은 너무너무 쓰고 싶은 말이 많은데...선생님의 꿀 같은 방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이만 줄일게요.
선생님, 안 읽어보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만약 제 메일을 읽어주신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저는 선생님께서 이 메일을 통해 선생님 자신이 '멋진 교사'라는 것을 알으시고 앞으로도 많은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셨으면 해요. 마지막으로, 제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위로가 되는 좋은 책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을 존경하는 창원의 한 여학생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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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세상을 낙관적으로 읽고 있는 편은 아니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다만, 세상이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경쟁적이고 비극적일 수 있기 때문에 갖게 되는 신념이랄까 가치 같은 것이 내게는 있다. 그것은 세상이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기 때문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평등을 추구해야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경쟁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교육은 경쟁을 완화하는 쪽으로 노력을 경주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 갈수록 우리 교육의 상이 어둡고 암담할수록 어린 사람의 영혼에서 나온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났을 때 함께 기뻐해주고 격려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 왜나하면 그것이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나를 웃게한 바로 이 대목!!
"그게 어느 누구의 압박 때문이 아니라 꿈을 가지면서 스스로 변한 것이라는 게 뿌듯해요. 저는 워낙에 활발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가기를 무지 좋아 했던 터라 공부를 하기 시작하니까 공부가 너무 재미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성적도 쑥쑥 올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