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 모아 태산이라니 / 이정희
삐죽 웃음이 나온다. 내가 들고 있는 쓰레기봉투의 여기저기 터져있는 모습이 마치 상대방에게 몇 방 얻어터진 권투선수 얼굴 같아서다. 얼마나 더 넣을 거라고 그리도 내리눌러 이 모양새를 만들었담. 언젠가 TV에서 알뜰하다고 소문난 한 주연급 여자 탤런트가 쥐어터진 쓰레기봉투를 들고 살금살금 내다버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된 것을 보고 박장대소한 적이 있다. 그 순간 그녀와 나 사이에 흐르던 달콤한 동질감이라니.
한몫 잡을 수 있다고 소문난 물 좋은 신규 아파트 분양에 단 한 건 끼어들어 재산을 획기적으로 늘리지 못한 죄, 아이들을 위해 넣어 두었던 주택청약 저축이 1순위를 기록한 지가 언제인데 한 번도 활용한 적이 없이 세월만 보낸 죄, 그리하여 분명 강남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강남여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죄를 자책하며 애꿎은 쓰레기봉투만을 괴롭히고 있으니 참으로 가리사니 없는 여편네요 요샛말로 주변머리 없는 여자가 바로 나란 사람이다. 어찌 그뿐이랴. 자산 불리는 일 같은 것은 시뻐하는 척, 그런 세상일에는 관심 두지 않는 척, 얼마간의 내숭도 떨었으니 위선자는 왜 아니랴.
나야말로 돈이 좀 많았으면 좋겠다.
한때 산을 좋아한 나머지 고향땅 정든 산허리 어디쯤에서 푸새를 가꾸며 조촐하게 살았으면 하고 꿈꾸던 적도 있었다. 허나 해맑았던 새댁이 충충한 중년으로 변하는 사이에 나의 그런 물색없이 고왔던 마음도 세월 따라 흘러가 버렸다. 이런저런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북새통 같은 도회의 삶에 어지간히 길들여진 까닭이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적 여건이 두루 갖추어진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하늘을 가르며 솟아오르는 초고층 아파트의 높이만큼이나 당당해져가는 돈의 위세도 겪어 알게 되었고, 광에서 인심난다는 속담도 옛말만이 아님을 이미 체득한 터이다.
부동산 재테크를 못했다고 해서 나를 철저히 무능한 사람으로 치부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못한 게 아니라 안한 것이다. 나로서는 제법 변(辯)이 없는 것도 아니니, 나 같은 사람-남편 명의의 집에서 같이 사는-이 청약을 하게 되면 정말 둥지가 없어서 애면글면하는 이들이 당첨될 확률이 적어지지 않을까 염려했고 적극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지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그들의 기회를 막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내 나름의 휴머니즘(!)의 바탕에서 투기를 멀리 했음에도 마음은 한결같이 평안하거나 느긋하지만은 않다. 오다가다 이재에 밝은 사람들이 한 몫 챙긴 짜릿한 성공담을 신나게 풀어 놓기라도 하면 상대적으로 나의 무능이 한없이 부각되면서 그들의 놀라운 두뇌 회전과 배포와 끈기가 은근히 부러울 때가 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천편일률 노후 문제를 화두를 삼아 재력이 바로 행복이라고 의기양양하기 마련이어서 은근히 주눅 들게 하거나 나의 인생관을 뒤흔들어놓기도 한다. 무릇 소신이한 어떤 정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지킬 수 있는 것을 말할진대 나의 마음바탕은 그런 그 수준에도 못 미쳤던가. 이래저래 이중적인 낭패감에 휩싸인다.
가까운 친구가 아들 혼인 날짜를 잡아 놓곤 집을 사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더니 발등을 찧고 싶다는 하소연을 해왔다. 올라도 너무 올랐단다. 부동산대책이 나오고 곧 집값이 잡힐 것이하 해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오히려 더 올라 버렸다는 것이다.
알뜰하기로 소문난 그 친구가 팔았을 발품과 수고를 생각하면서 나는 또다시 혼란에 빠진다. 꼭 그렇게 집을 사줘야만 할까. 유난스레 아들을 귀히 여겨 아르바이트 한 번 못하게 하고 근 삼십 년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 어엿한 전문인을 만들었는데 결혼할 때 아파트까지 얹어줘야 부모 노릇을 잘하는 것일까.
아들의 집은 물론 딸네 것도 심지어는 미래의 손자의 집까지 장만하려드는 가수요가 늘고 천정부지로 값은 뛰어 상대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살 집조차 구하지 못한 채 소외감과 박탈감에 시달리는 건 아닌지.
몇 푼 안 되는 쓰레기봉투의 사용을 줄이고, 같은 질의 싼 물건을 사기 위해 시시때때로 세일매장을 뒤지고 다니는 나의 재테크 방식은 그들의 시각으로 보면 참으로 소극적이요 어리석은 일이며 딱하기조차 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크게 못 벌면 작은 것이라도 아껴야지.
주부가 쓰레기를 어디 하루라도 아니 만지는 날이 있던가.
저녁 어스름에 누구에게 들킬세라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며 쥐어터진 봉투를 들고 나가던 그 예쁜 탤런트를 떠올리며 오늘도 나는 씩씩하게 쓰레기를 버리러 나간다. 누가 보아도 좋고 웃는데도 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유능하지 못한 어미의 대책 없는 고지식함으로 인하여 아이들의 혼삿길이 막힐까봐 그것이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