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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시인이다』의 동일화와 서정성
- 김동선 시인의 그 따뜻한 감성과 차별화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김동명학회 회장)
1. 꽃의 서시(序詩)와 합리적 해법
모름지기 이 땅의 엄격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마저도 현실적으로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는 암울한 혼돈의 시간대에서 당면한 삶의 문제에 관해서 깊은 사유와 자기성찰을 망각하고 있음은 지극히 안타까운 일이다. 만추의 계절이 다가오는 사회현상에서 응당 창조적 영혼의 소유자라면 예언자로서의 소임을 엄숙히 수행할 일이다. 그렇다. 고뇌와 망설임 끝에 그 자신이 등단 직후부터 줄곧 써 모은 순수서정성이 짙게 묻어난 첫 시집『산은 시인이다』(책나라, 2023)를 묶어내는 김동선 시인은 평자와 남다른 연이 잇닿아 2007년 월간『문학공간』의 시 부문 신인상 당선자로 사) 아이코리아 지회장, 양양군 여성단체협의회 회장과 2013-14년 제6대 한국문협 양양지부장을 역임하였다. 일단 그 자신의 첫 시집의 편집구성은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철저한 4단 구조인「제1부 꽃의 서시(序詩)(17편), 제2부 자연적 대상물(17편), 제3부 개아적(個我的) 일상의 동일화(17편) 제4부 따뜻한 감성의 차별성(17편)」으로 총합 68편이 언어의 그물망을 결(結) 곱게 직조한 담백한 시격(詩格)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까닭에 문제 외재화의 합리성을 살려내기 위한 적절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음은 유념할 바다. 아울러 평설의 모두(冒頭)에서 한결같은 그 자신의 애씀과 마음 씀씀이에 삼가 따뜻한 격려와 박수를 보낸다.
또 한편 그 어느 시간대보다 각별한 배려와 분별력에 기인한 공동체 의식’이 절실하기에 마치 복효근의 시집『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에서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참담한 생의 존엄성’을 삶의 잠언으로 일깨울 때, 이 같은 분별력은 “삶과 사랑의 여운은/끊을 수 없는 수정 같은 인연의 고리/인고(忍苦)의 열매 하나로/멜로드라마 같은 한날을 살고 있다(한 송이 꽃을 보며)”의 일면도 그렇거니와 ‘하얀 등(燈) 밝히며 순백의 네 밝은 미소’에 “야속한 그 꽃샘추위와/찬바람 끝에도 못내 피려던/진주 색채의 꽃봉오리다(목련 9)”에 숨겨진 정한의 낡은 한숨도 가슴 따뜻한 그 자신은 인연의 끈을 피 멍든 손으로 움켜잡고 ‘작은 풀꽃의 목숨’으로 읊어내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다. 이처럼 삶의 일상에서 특정한 사람과의 만남은 때로 운명적이듯, 따뜻한 감성과 맑은 영혼의 소유자인 그 자신에게 있어 종종 삶의 공간에서 접하는 대상물을 응시하는 최선의 드러남인 생명 외경의 엄숙성을「『산은 시인이다』의 동일화와 서정성 - 김동선 시인의 그 따뜻한 감성과 차별화」로 전제하고 다양한 음조와 색조로 시의 지평을 열어 보인 ‘언어의 신비 캐내기’에서 사유(思惟)의 속도를 늦추면 눈앞의 대상이 달라 보이듯 그에 관한 관심사는 더없이 신선한 충격이다. 따라서 ‘한 편의 시는 감정의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세계가 숨기고 있는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을 감지하고 표현하는 언어예술’이기에 깊은 사유와 맞물린 명상호흡의 시각에서 ‘아직은 사유하되 멈추지 말라.’는 경계는 엄숙한 깨우침의 현재성이다.
어디까지나 짐짓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을 제시한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지적한 공간상징은 특정한 시인의 정신적 생산물인 시의 형성과정에서 내면 인식과 결부된 시의 틀 짜기와 합일의 처소야말로 상오 합일된 시인의 내면 층위와 결속의 결과이다. 까닭에 언어공해가 심각한 삶의 일상에서 피폐된 영혼의 정화를 위해 치유의 푸른 식물성 언어로, 창조적 영혼을 위해 고뇌의 밤을 밝히는 존재와의 만남이 운명적임은 새삼 간과(看過)치 말아야 할 것이다.
차제에 가끔은 ‘젊은 시절의 그 생명감’을 헤아리다가 “삶이 눈물겨워야 하는 까닭/정녕 이렇게 모를 일이다/겨울도 끝나지 않은 봄의 문턱에서/꽃망울 터뜨리고 있다(벚꽃 6)”의 보기에서나 <갈대>도 그렇지만 그 자신의 또 다른 시편인 “순결한 눈꽃이 지상을 뒤덮어/저토록 푸른 솔도 꽃 피우나니/지상은 시리도록 하얀 별천지다(눈꽃)”에서도 시적 상상력의 확장에 의한 타자와의 합일과 초월적 수용성을 이채로울 따름이다. 이처럼 그 자신의 시편은 전율 같은 긴장감에서 파생되는 자아 성찰로 현대시의 현상과 존재론적 해석에 맞물림은 한층 더 시적 리듬과 형태를 갖추기 위한 합리적 해법에 기인(起因)된 결과이기에, 그 자신의 따뜻한 감성과 충직함에 연계된 시적 감동은 시편의 감상과 해법을 수락한 의미망의 확장으로 새삼 유념할 바다.
2. 순백의 서정성과 개아적 일상
모름지기 ‘상징의 숲을 거니는 시인’은 생태 사회주의를 견지한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지적처럼 ‘생태위기를 벗어나려면 인간중심주의의 경계를 먼저 무너트려야 한다.’ 이 같은 시각에서 차고 처연하되 담백한 시적 이미지는 고통을 눈 뜨게 하는 빛나는 응결체로 작동한다. 까닭에 비록 서정성이 수용된「순백의 서정성과 개아적 일상」에서 그 자신의 대다수 시편에 현대의 불안의식과 감각적 표현 등에 혼돈의 시간대를 걸친 내면 인식의 중량감이 가해져 목가적 서정성이 눈부신 색조(色調)다.
까닭에 강원도의 설악산(雪嶽山)을 시적 모티프로 확장하여 ‘운무 속의 그 경이로움은 거대한 바다로 변형 중이다’라는 그 자신의 시적 해법처럼 “한국 제1의 명산인 이곳은/천혜의 위용(偉容), 그 형상/수백의 폭포와 옛 성지들/명승지와 형형색색의 돌 층과 봉우리//장엄하고 화려한 설악 절경이다(설악산)”에서 다소 인상 비평적이나 ‘신앙의 대상물로 장엄하고 화려한 설악산’의 유추(類推)는 본질적인 다양성이다.
또 한편 주제 시편에 해당하는 <산은 시인이다>에서 종교적 상징성을 지닌 ‘산(山)과 정신작업의 종사자’인 화자(persona)가 ‘영혼, 언어, 달빛, 별빛 등’ 시 의미에서 절감되는 정적인 기운과 상승, 또는 수직의 형태로 그 생명이 대기를 지향한 동적인 역동성은 마침내 ‘산과 시인’의 이원적인 상징구조로 생의 순리에 순응하며 목적 지향적인 ‘세상 모두가 시인을 기다리는’ 현재성을 밀도 있게 빚어낸 현상학이다. 까닭에 여기서 ‘산은 경외심을 일으키는 복원력의 상징’으로 내면의 힘에 의한 신비하고도 강력한 생명력의 생산물이다.
시가 묻혀있는 산/인간의 영혼이 숨 쉬고 있다//
언어도 시를 먹고 산도 시를 먹고/인간, 세상 모두가 시인을 기다린다//
푸른 달빛, 별빛의 미소까지도/끝내 산(山)은 시인을 만든다//
-<산은 시인이다> 전문
위에 인용한 시편은 호흡이 단조로운 시적 의미망의 응축은 금화(金貨)처럼 짤랑거리는 비교적 전의식(前意識)으로 각질화된 고정관념을 깨뜨려 정신적 생산물로 이행된 결과물이다. 따라서 그 자신의 시적 포즈(pose) 또한 마침내 직면한 대상에 몰입한 그 속성은 상반균형에 접속된 양상인 연유로 이처럼 산은 곧 종교적 대상(崇拜)이며 시인인 그 자신이 거처하는 삶의 공간이다.
특히 폴 발레리(Paul Valéry)의 ‘시적 형식은 자신을 회복시키는 법, 안과 밖이 관통된 일원론적 사유로 인간과 우주를 연대시킨 통로’로 수락될 때, 비로소 푸른 식물성 질료를 시적 대상으로 즐겨 처리한 그 자신의 시적 형상화 또한 ‘못다 한 삶의 이야기 모성(母性)의 바다가 달래줄지라도’ “끝없는 욕망은 물길 짓으로/고뇌의 실타래 풀어내듯/때로는 저토록 비틀거리는/술 취(醉)한 몸짓이다(파도 소리)”도 그렇거니와 ‘누구의 추억인지 수채화처럼 그려 놓고’ 잠시 묵언으로 응시하는 시적 형상화를 통해서 “먼 수평선 가물가물/넓은 바다 풍경화 속에/묵송(墨松)의 짙은 검 푸르름의/긴 여행은 스스럼없이 반복되고(바닷가 모래 위에)” 있음은 더없이 유의미하다.
각론하고 그 자신은 낯익은 삶의 일상에서 즉물적 현상인 시적 질료를 찾기 위해 고뇌하는 존재이기에 ‘인류의 정신적 스승’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가 “작가는 독자가 아니라 인류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지적처럼 삶의 매 순간, 푸른 식물성 언어로 소중한 연(緣)이 닿아 부푼 기대감을 회복시켜주고 있다. 여기서 담백한 품격을 지닌 그와의 조우(遭遇)는 거듭 감사할 일이다. 또 한편 <사랑의 서곡>에서 ‘끝내 영원하여 행복한 꽃이다’라고 지상에 갈 앉은 나직한 음조로 읊어내지만, “밤늦도록 그 지성의 독경과/투명한 목어(木魚) 소리에/긴 겨울 쌓인 낙엽들도/적요에 몸 풀고 바위틈에 누워/또 저리도 해탈(解脫) 중이다(현불사 1)”라는 현상에서 불심(佛心)이 깊은 그 자신의 지극선(至極善)의 심성은 지극한 효심으로 이채롭다. 어디까지나 “꽃가마 타고 오셨나요?/대지에는 흰 나리꽃 피었는데/그리움 가득 채워서/당신의 영전에 바칩니다(아버지)”의 보기에서나 또는 모친의 영전에 조시(弔詩)로 드려진 “이 지상의 위대한 이름,/모든 존재의 뿌리이신 어머니/백천 만억의 다양한 그 형상으로/아름답고 아늑한 숲길 되어라//대지의 흙처럼 진실하신 존재다/삶의 흔적으로 얼굴에는 주름 가득하였지/아,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꽃(이 지상의 위대한 이름 - 못다 부른 사모곡)”은 더없이 다정다감하여 비장감이 묻어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 자신의 특이한 ‘육성, 정감, 체취, 사유의 내적 충만’에서 연유한 따뜻한 감성의 시학은 독자적인 골격을 일정하게 지탱한 결속이기에 “아, 못내 그리움의 갈증이다/꿈꾸며 살아야 할 날/달빛에 빛나는 눈물이다(우리의 사랑)”라는 일면에서나 “첫눈 내리는 그날 밤처럼/당신의 마음속에 자리한/하얀 산(山)이고 싶다(그리움)”에서 그 따뜻한 감성과 서정성의 미감은 이처럼 확증되는 분위기다. 특히 사물에 투영한 시적 형상화는 삶의 일상을 통해 종종 접하는 ‘양양 남대천의 연어를 매개로 삼은’ “모천(母川)을 잊지 못한 그리움/저토록 자연의 순리에 거스름 없는/해맑은 꿈, 모성회귀(母性回歸)다.(연어의 꿈)”와도 별개이거나 결단코 무관할 수 없다. 모처럼 ‘요란함과 시끌벅적한 장날의 풍물, 그곳에 가면 활기찬 삶이 있고’라는 그 자신의 시적 해명처럼 ‘시장통의 풍물’ 그 현장은 삶의 장소성(場所性)이기에 “비록 세태로 가슴이 저며 오지만/활인 마트 이벤트나 만물상에 치이고/경제 한파에 억눌려 만신창이니/뉘라서 가난한 저들의 설움 달랠지.(시장통의 풍물)”라는 의미심장한 반문(反問)에 삶의 애환은 이처럼 현상적 드러남으로 자리매김한다. 모름지기 그 자신의 일관성을 지닌 시적 분위기는 독자의 시선을 압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순수서정시 짓기가 어려운 시간대에서도 우직할 정도로 삶의 중량감을 확장하기 위해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는 시적 행보가 감동의 회복과 맞물려 있기에 소홀하게 지나칠 수 없음은 그 나름의 심회(心懷)다. 또 하나 깨달음의 미학을 변형시켜 놓는 눈부신 그만의 시적 보행(步行)은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 지혜로운 삶의 잠언(箴言)을 관통한 서정의 미감으로 빛나고 있음은 묵언으로 응시하고 관망할 점이다. 무엇보다 소중한 삶의 처소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려고 오랜 날, 시적 형상화에 몰두(沒頭)하는 그만의 지난(至難)한 ‘몸의 시학’은 슬픔 그 너머의 빛나는 성채(城砦)로 우리 앞에 자리하고 있음은 시적 매혹이며 생명감이다. 차제에 “아무도 걷지 않은 눈밭 길이라고 함부로 걷지 말라. 네가 남긴 발자국은 뒤에 오는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느니라.”라는 서산대사의 <답설(踏雪)>도 헤아릴 바다. 그렇다. “창조자의 이름에 합당한 것, 신과 시인 말고는 없다.”라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지론을 재론하지 않더라도, 그 자신은 독실한 불자(佛子)로서 일상의 삶에서도 공동체 의식을 깊이 인식한 끝에 소외된 타자를 항상 돌보고 베풂의 삶에 온전히 주의 집중하며 일관성 있게 대응(對應)하고 있다. 무엇보다 난해한 현대시 짓기와 지나친 수사적 기법(craft)도 그 나름으로 경계할뿐더러 그 자신은 격조(格調)를 지닌 순수서정시를 위한 경건한 창조 활동을 충실하고 폭넓게 펼쳐나가는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영감의 비의(秘義)를 해명하는 수행자로서의 시대적 소임’을 엄격하게 수행하는 행위는 자랑스럽고 미더운 모양새다.
3. 서정성의 차별화와 눈부신 존재감
근간 의학계의 실험결과로 ‘종교적인 희열(喜悅)이나 감미로운 예술 행위로 신선하고 깊은 감동을 접하면 호르몬의 일종인 다이돌핀(Didorphin)이 생성되어 인체 내의 면역체계에 강력한 반응으로 암세포를 공격하는 경이적인 기적이 일어남’은 확증된 바다. 특히 그 자신이 힘겨운 삶의 일상에서 “아름다운 예술의 근간이 문학이라 인식하고 상상력의 결정으로 감동을 통해 생의 희열을 체득하고 스스로 성찰하며 지혜롭게 살아가리라.”라는 일관성을 지혜로운 삶의 담론으로 피력(披瀝)함은 충직한 독자의 감응(感應)을 일깨워주기에 부족함이 허락되지 않는 명백한 사실이다. 까닭에 끊임없이 자아를 채근(採根)하며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상호대비 시키되 순백의 언어를 빚어내는 연금술사의 행태는 신선한 감동에 견주어진다.
그 같은 맥락에서 사람(人間)의 정체성은 ‘서로 간에 빛을 비춰주는 실체’이기에 “무한히 약한 존재이나/무한의 가능성을 지닌 까닭/정녕코 모를 일이다//아, 삶을 목숨처럼 사랑하리라(인간)”의 보기도 그렇거니와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 상대적으로 ‘묵언의 응시에도 빛나는 존재이기에’ “당신을 향한 생각에 잠겨/때로는 의미망(網)에 일관하고/여린 향기에 함께 취해 볼/정겨운 형상에 신선한 충동이다(당신의 형상 아름답다)”에서 새삼 확증되고 있다. 특히 대다수 독자에게 거부감이 없는 서정적 미감은 그 자신이 무심의 경지에서 발현시킨 ‘몸의 시학’이기에 못내 이채롭다. 어디까지나 시적 형상화를 위하여 묵언의 응시 끝에 직물 대상의 감응과 맞물린 그 자신의 시편 중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인 ‘어머니’를 비중 있게 반복적으로 읊어주고 있듯이 “밝은 지혜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끝내 생명의 본 성품을 분별하며/그렇기에 귀하고 너그러운 모성은/존경받기에 진정 부족함 없는 실체다(어머니)”에서 확증한 그 지순하고 빛나는 존재감이야말로 ‘우주 법계의 진면목(眞面目)임’은 틀림이 없기에 “창조자의 이름에 합당한 것, 신과 시인 말고는 없다.”라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지론은 지극히 교시적(敎示的)이다.
또 한편 뜨거운 침묵 뒤, 그 일련의 시편에서 예감되는 생명에의 서정적 변용은 내적 충만에서 파생된 정신적 산물이기에 시적 분위기(情調)는 못내 다정다감하다. “사랑에 빠진 붉은 색조의 단풍꽃/아름다운 색조에 저토록 피었다 지는/들꽃도 사랑하는 이도 아름답다(가을은 아름다워라)”라며 직물 대상의 미감(美感)을 서정성에 살려내어 한결같이 읊조려온 그 자신은 이 땅의 누구보다도 자연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관조하면서도 깊은 불심을 자극하여 ‘순결한 사랑과 산의 적막감, 그리고 자연의 장엄함을 노래하는 자존감이 빛나는 실체이다.’ 따라서 경건하고 엄격한 창조 활동을 다양하고 폭넓게 펼쳐내는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영감의 비의(秘義)를 해명하는 수행자로서의 시대적 소임’은 관심 있게 지켜볼 유의미한 삶의 몫이다.
모름지기 그 자신의 순수서정의 시학은 영혼의 상처로 고통에 처한 현대인의 빈곤한 정신에 따뜻한 감성의 자극에 맞물린 내적 충만의 계기로 발화됨은 잠시 명상호흡을 통하여 유념할 일이다. 끝내 담백한 시적 행태의 편린(片鱗)을 기대감에 부푼 산과 시인으로서 시적 이미지를 형사(形似)한 시집『산은 시인이다』야말로 끝내 인생의 중량감에 짓눌리고 위축되어 소외된 타자 간 삶의 유유자족감(愉愉自足感)을 깊은 감동과 맑은 영혼의 울림으로 부추겨 줌은 못내 다채롭다. 그렇다. 한순간의 전율도 감동에 결부시켜 빛냄은 짐짓 숨죽여 지켜보고 관망할 점이다. 비록 갈등과 대립의 이분법으로 절망의 끝을 예견할 수 없는 시간대이지만, 놀랍게도 화자인 그 자신이 ‘잎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아니한다. 그 같은 연유로 미적 주권이 확립된 시편은 생명의 변주에 의한 감동을 충격적으로 일깨워준 유의미한 정신작업이다. 까닭에 미국의 해양생물학자이며 작가인 레이첼 캇슨(Rachel Louise Carson)의 지적처럼 ‘새가 사라진 거대한 숲의 그 참담한 침묵’을 다시금 연상케 하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다.
결론적으로 네덜란드의 범신론자이며 철학자인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가 “도덕과 힘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였듯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끊임없이 변화·발전을 모색하고 고뇌 속에서도 경계 층위를 허물며 설정된 삶의 좌표를 향해 역풍을 가로지르며 비상할 일이다. 모쪼록 김동선 시인의 시집 평설을 마무리하며, 자랑스러운 한국 현대 시문학사와 존엄한 역사 앞에서도 올곧은 집념으로 시대적 소임을 수행하되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지 않고 오직 시 정신이 날(刃) 푸른 삶의 주체로서 ‘새길 트기’에 전념할 것을 거듭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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