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杏亭) 이중광(李重光)
樂民 장달수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淸源里). 지수전(智水川) 맑은 물의 근원이란 뜻에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청원리는 재령이씨(載寧李氏)들 집성촌으로 조선 후기 퇴계학맥의 정맥을 이은 갈암 이현일이 잠시 머물렀던 마을로 유명하다. 마을 가운데 자리 잡은 청강서당(淸岡書堂)은 갈암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 이곳에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며 학풍 진작에 기여한 뜻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서당이다. 마을 어귀에는 ‘청운동학(靑雲洞壑)’ 이라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행정선생명명지지(杏亭先生命名之地)’란 글과 ‘갈암선생장구지소(葛菴先生杖之所)’란 글이 함께 새겨져 있다. ‘청운동학’이란 지명을 행정 선생이 명명하고, 여기에 갈암 선생이 와 머물렀다 는 뜻이다.
인품이 고결하여 속세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선비의 마음을 ‘청운지지(靑雲之志)’ 라 한다. 청운동이라 이름 지은 행정은 속세를 떠나 고결한 인품을 지니고 싶어 했던 선비다. 행정은 누구인가. 바로 이곳 지수 청원리 재령이씨 입향조(入鄕祖) 이중광(李重光)이란 분이다. 행정은 1592년 11월 23일 청송에서 사옹봉사 벼슬을 지낸 이유성(李惟誠)의 아들로 태어났다. 행정은 6세 때 부친을, 9세 때 모친을 잃고 외숙인 설학 이대기의 품에서 자랐다. 설학 이대기는 합천 의병장으로 13세 때 부친을 따라 진주 선영에 서 남명선생을 만나 학문을 익힌 남명제자로 합천의 대표 선비인 황강 이희안의 외손자다. 설학은 조카인 행정을 기르며 그 자질이 뛰어남을 보고 “과연 그 집 아이로다”라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행정은 19세 때 혼인을 하고 한강 정구 문인인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부용당은 행정의 바른 행실과 문장이 남다른 것을 보고 “훗날에 큰 그릇이 될 것”이라며 큰 기대를 걸기도 했다. 26세 때 향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봄에 대과에 나아갔으나, 당시는 인목대비 폐모론으로 조정이 어수선하던 때였다. 폐모론을 인륜을 저버린 행위라 생각한 행정은 “인륜이 다 되었으니 선비가 어찌 입신양명을 바라겠는가”며 탄식을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이로부터 행정은 벼슬에 나아가려는 생각을 그만두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사색하고 경서를 탐구하며 일상의 체험과 실천할 수 있는 학문을 요체로 삼고 정진했다.
1626년 군자참봉(軍資參奉)의 직에 나아가 봉직하다가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낙향한 이유를 물으니 행정은 “오랑캐 난을 당해 왕의 행차는 대궐을 떠나 몽진하기에 이르렀는데 나 같은 사람은 힘없고 관직이 낮으니 이들 오랑캐 침략을 평정할 수 없고 사직도 붙잡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벼슬아치가 어찌 녹봉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 했다. 이조참판인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그 말을 듣고 장하게 생각하여 관직을 복직시키고 제용주부(濟用主簿)로 임명하려 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자년에 다시 오랑캐가 쳐들어오니 조정에서는 용양위부호군을 제수하였다. 행정은 군량을 모집해 왕을 도우러 길을 떠났으나 조령에 다다랐을 때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낙향하는 길에 영양 수비산(首比山)으로 가 삼종숙(三從叔) 석계공(石溪公)을 방문하고 10여일을 머물며 학문을 강론하고, 한편으로 옛날 지조 높은 선비들 행적을 토론했다.
석계공 이시명(李時明:1590~1674)은 갈암 이현일의 부친이다. 한때 소설가 이문열씨가 ‘선택’의 주인공으로 삼은 안동 장씨가 그의 아내다. 그는 1612년에 소과에 급제하였으나 정치가 혼란하고 이어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자 비분강개하여 벼슬도 하지 않았다 한다. 문장과 행의(行義)와 기절(氣節)이 당시 사표(師表)로 많은 사람들이 공경하고 사모한 선비다. 행정은 영양에서 석계공을 만나 학문을 토론한 후 곧 청원으로 내려와 조그만 집을 짓고서 행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던 행단(杏壇)의 뜻을 취한 것으로, 춘추(春秋)의 의리를 평소부터 숭모했기 때문이다.
48세 때 평창고을 원으로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43년 진주목사인 한사 강대수가 방문하여 “어떻게 정사를 베풀면 좋겠는가”하고 물으니 “목사께서는 본래 청렴과 근면으로 정사를 하였으니 어찌 모자람이 있겠습니까마는 진주 고을은 임진란과 병자호란 후에 선비들이 예같이 학문에 힘쓰지 않고 거칠어졌으니 목사께서는 학교를 일으키고 풍속을 바로 잡는 것이 급선무일 것입니다”라 했다.
1657년에는 스승인 부용당의 아들인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이 진주목사로 부임하여 역시 정사를 물으니 “전번에 한사에게 교육을 부흥하란 말씀을 올렸는데, 시행하기 직전에 전출하여 미처 시행하지 못했으니, 그의 뜻을 잇기를 바랍니다”라 하며 “진주는 징사(徵士)인 겸재 하홍도가 우리 유학을 일으킬 만하니 방문하여 자문을 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 했다. 진주목사 성공이 그의 말을 따르니 진주의 유학이 이로부터 다시 부흥했다 행장에 기록돼 있다.
1670년에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가 되고, 10년 후인 1680년에는 2품인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했다. 이때 행정의 나이 90세가 되어도 정신과 기운이 왕성하고 날마다 의관을 바르게 하고 행동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으니 사람들은 지상신(地上神)이라 까지 했다. 1685년 5월 모든 자손들을 불러 놓고 “나는 근간에 정신과 기운이 피로함을 느끼는데, 너희들은 내가 아무런 병세가 없는 것을 믿고 방심 말라”하며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는데, 그 달 28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94세였다. 자손들과 후학들은 행정에게 ‘숭정처사(崇禎處士)’란 호칭을 붙인다. 숭정은 우리나라가 쓴 명나라 마지막 연호다. 그러니까 청나라를 섬기지 않겠다는 행정의 지조를 후세 사람들이 높이 받들어 ‘숭정처사’라 부르는 것이다.
11대손 이병천씨는 “지수 인근 고을의 재령이씨들은 대부분 행정 선조의 자손들입니다. 어지러운 조정에 벼슬하기보다 낙향해 후학을 지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높은 벼슬은 하시지 않았지만, 지조는 대단히 높은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며 행정의 지조는 후손들이 지금도 계승하고 있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