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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김진백
1993년 마산 출생, 경남대 가정교육과 군휴학(창원중부 방범순찰대 본부소대 상경),
청년작가아카데미 2기 수료, 2013년 경남 고성 디카시 공모전 우수상,
2014년 제28회 10·18문학상 시 부문 당선
임주아
김완수
1970년 광주광역시 출생, 1998년 전북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과정 졸업,
2009년 제1회 '강원문학' 신인상 수필 부문 당선, 2013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2013년 암사동 유적 세계유산 등재 기원 문학 작품 공모전 동화 우수상,
2014년 계간 '시조시학' 여름호 신인 작품상, 2014년 제10회 5ㆍ18문학상 시 부문 당선,
2014년 제1회 농어촌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
2014년 제2회 평택 생태시 문학상 우수상, 현 학원장
나루
전북 김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5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자이크
이인서
쨍하는 소리와 함께 앞집 유리창이 깨졌다 얼음판을 돌로 친 것처럼 어느 일성이 내놓은 모자이크, 여전히 붙어있는 파편들은 찡그린 얼굴 같다
작은 구멍이 난 곳을 정점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간 사나운 선들, 그 앞을 누군가 서성거리고 창밖의 나무 한 그루가 모자이크 처리된 채 서 있다
살얼음이 낀 12월의 안쪽은 왠지 범죄 냄새가 난다 조각 난 얼굴 위로 가끔 변검을 한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모자이크 속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깨어진 균열의 힘으로 버티고 서 있는 집, 깊숙한 구석까지는 채 다다르지 못한 금
깨진 햇빛 조각 하나가 섞여 있는 창문
문을 꽝, 닫으며 뛰쳐나가는 여자 뒤로 은행나무 마른 가지들이 뿌연 하늘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있다
이인서
안양시 만안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유이우
1988년 송탄 출생. 평택시립도서관 기간제 근무 중.
어머니의 계절
최영랑
빈집엔 봄이 오지 않고 여름도 오지 않고 빈집의 계절만이 서성거린다
빈집은 쉽게 들어갈 수 없고 대문 안에 들어서도 속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곳은 시끄럽고 어스름한 저녁 누구라도 거부하는 빈집만의 습관이 있다
그림자 없는 대문에서 빈집의 툇마루를 바라보면 그곳은 포근했던 무릎, 포근한 미소가 떠올라 헐렁한 하루가 부풀었다 사라진다 눈을 감고 나는 경직된 다리를 뻗는다
가끔 무릎을 내어주는 거기, 정류장처럼 너그럽다 잡초들이 슬그머니 들어와 영역 다툼에 휘말려도 장독대의 도깨비풀이 항아리 속을 욕심내어도 그냥 말줄임표만 사용할 뿐이다
빈집은 기다린다 밤나무가 뒷마당에 밤톨을 툭 툭 던지고 바람이 기왓장을 와장창 깨뜨릴 때도 빈집은 그냥 “좋은 날이야”라고 말한다 빈집은 어느 때보다 여유로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내가 바라보는 집이 자꾸만 멀어져 간다 그 집에 가까이 가야 한다 들어가 마당을 지나 툇마루에 가서 닳은 무릎을 위로해주어야 한다 어머니의 계절
최영랑
1958년 전북 정읍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당선소감
빈집이 되어버린 어머니… 그대로 사랑합니다
폭풍으로 집이 무너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여진이 가시질 않아 따끈한 차 한 잔을 들고 출렁이는 생각들을 눈발에 하나둘 날려 보내고 있었습니다. 평온해지려는 시간 속으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당선 소식이었습니다. 예지몽이었나! 무너짐이 새로운 시작이라니….
낙숫물을 즐겨 바라보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단했던 댓돌에 둥근 홈이 생겨나고 그곳에 빗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제부턴가 현실과 꿈속을 넘나드시는 어머니, “좋은 날이야”라고 하시면서 활짝 웃을 때마다, 가슴에 찬바람 부는 빈집으로 웅크리고 계셨음을 알기나 하시려나. 아무리 덮어도 빈집이 되어버린 어머니, 지금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합니다.
돌이켜보니 고마운 분들…. 새로운 상상력을 분출하게 해주신 김영남 선생님, 늘 따뜻한 벗이 되어준 정동진카페 식구들, 누구보다 기뻐하실 부모님, 묵묵히 응원해주던 남편 그리고 경표, 경훈, 친구들, 일일이 마음 전하지 않아도 소식 듣고 기뻐해주실 저를 아는 분들과 기쁨 나누고 싶습니다.
언어들을 문장에 가둬 놓고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 때쯤, 동토의 땅을 새롭게 일굴 수 있도록 해주신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들 이름에 허물이 되지 않도록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길을 내어 주신 문화일보에도 감사드립니다. 개성적인 시인으로 거듭 태어날 것을 약속합니다.
눈이 내립니다. 빈집에 가봐야겠습니다.
툇마루에 가서 다리 한번 쭉 뻗어 봐야겠습니다.
심사평
모성 통해 사랑과 고통의 본질 깨달아
신춘문예는 한국 문학의 축제다. 새로운 시인이 탄생하는 축제의 한마당이다. 이 축제에 참여한 이는 맛있는 음식도 나누어 먹고 오랜만에 배도 좀 불러야 한다. 그러나 이번 축제의 상에 놓인 음식들은 숙성과 발효가 되지 않은 겉절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시는 겉절이보다 오래 숙성되고 발효된 맛의 깊이를 요구한다. 그릇에 담긴 음식이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니라면 그릇 또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모순과 부조리를 이야기하는 시라 하더라도 부조리하다는 메시지밖에 없다면 그 또한 시로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박현영의 <유형에 대한 탐구>, 박민서의 <실록>, 김재인의 <오늘의 만남>, 최영은의 <어머니의 계절> 등 4편이었다. <유형에 대한 탐구>는 유형에 대한 구체성이 모호했다. 제목이라는 그릇만 크고 그릇에 담긴 내용은 “유형에 대해 날마다 간구했지만/ 질문은 의문으로 남아/ 이곳을 비추는 하나의 불빛이 된다”처럼 모호했다. <실록> 또한 “무화과 묘목을 심으려고 판/ 마당 한 귀퉁이에서 녹슨 자물통이 나왔다”고 했으나, ‘녹슨 자물통’이 시의 내용물로 제시만 되고 그 의미에 대한 추구가 결여되었다. <오늘의 만남> 또한 수사는 화려하나 ‘만남’의 내용이 빈약하다는 점에서 신뢰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모성을 ‘빈집’에 비유한 <어머니의 계절>은 비교적 완성도가 높았다. 모성을 통해 사랑과 고통의 본질을 깨닫고 있다는 점 또한 돋보여 당선작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시를 쓰는 일도 노력하는 일이다. 당선자는 더욱 노력함으로써 한국 시단의 밑거름이 되는 시인으로 성장해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 정호승시인
(경향신문)
선수들
김관용
전성기를 지난 저녁이 엘피판처럼 튄다
도착해보면 인저리타임
목공소를 지나 동사무소, 골목은 늘 복사된다
어둑해지는 판화 속에서 옆집이라는 이름을 골라낸다
옆집하고 발음하면 창문을 연기하는 배우 같다
보험하는 옛애인이 전화한 날의 저녁은
폭설과 허공 사이에서 방황하고
과외하는 친구의 문자를 받은 날 아침은
접시 위의 두부처럼 무심해진다
만약이라는 말에 집중한다
만약은 수비수 두세 명은 쉽게 제쳤으며
늘 성적증명서보다 힘이 셌다
얇은 사전을 골라 가장 극적인 단어를 찾는다
아름다운 지진이란
지구의 맨 끝으로 달려가 구두를 잃어버리는 것
멀리 있는 산이 침을 삼킨다
하늘에선 땅을 잃은 문장들이 장작 대신 타고
원을 그리며 날던 새들의 깃털이 영하로 떨어진다
원점은 어딘가 빙점과 닮았다
양철 테두리를 한 깡통처럼
전력을 다해 서 있는 트랙처럼
잠시라도 폼을 잃어선 안 된다
김관용
1970년 서울 출생 1997년 2월 울산대 철학과 졸업
2014년 8월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현재 동국대 불교학과 박사과정
당선소감
“책으로 만났던 이들이 나를 선택… 눈밑이 뜨거워”
올해는 유독 어머니의 투병이 아름다웠고 건강을 찾은 그녀에게서 상상할 수 없는 감사의 의미와 진폭을 깨달았다. 서랍 어디쯤에 크로키한 태양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점퍼 안쪽 주머니에, 또는 뒷주머니에 꼬깃꼬깃 넣고 다녔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을 까맣게 잊었다.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누구나 잊고 산다. 나는 어느 지층에 숨어 있던 언어였을까. 어떤 문장은 대답할 수 없어서 무거웠고, 어떤 대답은 질문의 근처에서만 맴돌았다. 밤의 유전자가 열목어처럼 자라는 것인지, 열목어에선 왜 자꾸 눈먼 단어들만 떠오르는지. 열차가 지나간다.
우선 영덕 스님께 감사드린다. 막막하던 내게 화엄을 소개해 주셨고 감수성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난 스님이 야단치셨던 그 계절을 잃고 싶지 않다. 이원 선생님, 퇴고를 가르쳐주셨던 그 분을 감격스러운 8주라 부르고 싶다. 12월1일 임택수형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차영일…, 말을 아껴야 할 사람들.
서울에서 이주해 적응하기 힘들던 울산생활이 있었다. 이런 형태의 이주는 언제나 상투적이고 적응의 실패는 늘 언어가 문제다. 세리을이란 고교 문학동아리에 들었고 재미있었다. 오래전이지만 이런 일들은 대체로 잊히지 않는다.
무엇보다 책으로만 만나뵈었던 분들. 나를 선택하셨다. 말들이 수증기처럼 끓어오르며 눈 밑이 뜨겁다. 그런데 어떻게 표현하더라도 굳어진 수증기는 이렇게만 고정되는 것이다. 이시영, 황인숙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시 심사평
“균열의 외성… 자본의 시대, 시가 필요한 이유 증명”
선자들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네 편이었다. “벚꽃은 지상에서 초속 5센티미터/ 속도로 떨어지고 있겠지”라는 빛나는 감성을 품은 ‘휠체어 드라이브’는 무리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직관을 형상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세계를 조용히 응시하는 이 시편은 시인의 상상력이 뜻밖의 시적 전개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간밤 느티나무 찻상이 쩍/ 갈라졌다”는 직핍으로부터 출발한 ‘느티나무 찻상’은 사물의 갑작스러운 붕괴로부터 빛과 향을 흡입하는 착상이 신선하고 발랄했다. 그러나 이 시인 역시 예상 가능한 상상력의 구도에서 비약하지 못한 채 익숙한 은유로 생의 비의를 드러내는 데 안주했다. 어느 병동에서의 남녀의 갈등을 바둑에 빗대어 “버릴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결심을 가진 백과/ 그것을 초조하게 바라보는 흑 사이”로 묘사하며 사뭇 긴장감을 자아내는 ‘직선을 이탈한 두 남녀가 모이 점’ 역시 우리 삶의 한 단면을 아프게 드러냈으나 곳곳의 상투적인 시행들의 병렬로 인해 이른바 언어 자체가 살아있는 ‘물활’(物活)의 경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응모작들 중 가장 두드러진 작품은 ‘선수들’이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도 그러했지만, 이 시인은 무슨 제재를 다루든지 일거에 대상을 장악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과 리듬으로 시를 운산(運算)하는 범상치 않은 솜씨를 보여주었다. 특히 표제작인 ‘선수들’은 언어와 언어가 충돌하며 파열하는 섬광 같은 것을 뿜어내면서 자기 시를 “전력을 다해 서 있는” 삶의 트랙으로 밀어붙인다. 그리하여 이 시는 시적인 것으로부터의 일탈을 통해 ‘다른 시’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한치의 오차도 허락지 않는 이 주밀한 자본의 세계에서 시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균열과 의외성이다. 트랙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결말을 짐작할 수 없는 것으로의 이 과감한 투신의 성과를 당선작으로 미는 데 우리는 주저하지 않았다.
이시영 황인숙
(부산일보)
탕제원
박은석
탕제원 앞을 지나칠 때마다 무릎의 냄새가 난다
용수철 같은 고양이의 무릎이 풀어지고 있던 탕제원 약탕기 속 할머니는 자주 가르릉 가르릉 소리를 냈었다 할머니의 무릎에는 몇 십 마리의 고양이가 들어 있었다. 가늘고 예민한 수염을 달인 마지막 약, 잘못 쓰면 고양이는 담을 넘어 달아난다.
밤이면 살금살금, 앙갚음이 무서웠다. 고양이를 쓰다듬듯 할머니의 무릎을 만졌다 몇 마리의 고양이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던 할머니들이 절룩거리며 나타났다 빗줄기가 들어간 무릎의 통증 등에 업힌 밭고랑 한가득 들어 있는 무릎
탕제원 오후는 화투패가 섞인다. 화투 패는 오래 달일 수가 없다 약탕기 안에 판 판의 끗발들이 성급하게 달여지고 있지만 가끔은 불법의 처방이 멱살을 잡기도 한다.
약탕기 속엔 팔짝팔짝 뛰던 용수철 몇 개 푹 고아지고 있는 탕제원, 가을 햇살은 탕제원 주인의 머리에서 반짝 빛난다. 무릎들이 무릎을 맞대고 팔월 지나 단풍을 뒤집고 있다.
박은석
1971년 광주 출생. 웅진홈스쿨 교사
당선 소감
"10년간 맴돌던 그늘 벗어나 기뻐"
제가 사는 곳은 해마다 가장 먼저 폭설이 찾아옵니다. 마치 고요한 은둔처같이 골목과 거리들은 고요합니다. 폭설에 묻힌 저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찾아왔습니다. 고맙습니다.
10년을 그늘에서만 맴돌았습니다. 중심을 흔들면 나뭇가지에 얹혔던 눈뭉치들이 우수수 쏟아졌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물의 끝에는 시가 있었습니다. 시는 나의 폭설이고 그 폭설의 중심이고 바깥이었습니다.
당선 전화를 받고 목도리를 두르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신천온천탕도 탕제원도 모두 고요했습니다. 그래도 가끔 미끄러운 눈길을 조심조심 걸어 목욕탕 문을 여는 노인들처럼, 술값내기 화투를 치는 탕제원 노인들처럼 그렇게 분별을 잃지 않는 시를 쓰겠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격려로 이끌어주신 문효치 선생님, 박남희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평생 시의 길을 함께 걸어가기로 약속했던 김희숙 시인, 권행은 시인 따뜻하고 심성 고운 두 언니에게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 은총이와 기범이에게도 기쁜 소식을! 끝으로 심사위원 선생님께 두근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시를 가슴에 품고 꿈을 꾸는 모든 지인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
올해 투고된 작품은 많았으나 전체적으로 그 수준은 평이했다.
최종 심사에 오른 작품은 시 부분에서는 '대장장이 아버지' '피아노는 왜 뿔을 숨겼나' '최신버전 백신 다운로드하기' '탕제원' 4편이고, 시조 부분에서는 '겨울 꽃밭' '블랙커피를 읽다' '소금꽃' 3편이다.
'대장장이 아버지'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성찰과 표현의 아름다움은 돋보였으나, 당대적 현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측면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피아노는 왜 뿔을 숨겼나'는 피아노라는 시적 대상을 통해 현대적 삶의 고단함과 삭막함에 대해 재치 있고 도전적 자세로 표현해내고 있는 점은 주목되었으나 너무 표현의 신기성에 치우친 점, 이해불가의 내용이 상당수 끼어들어 있는 점 등이 지적됐다. '최신버전 백신 다운로드하기'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로 당대 사회적 특성을 담아내고 있고 표현의 참신성이 돋보였으나, 시적 표현의 형식들이 역시 신기성에 머물러 감동을 주지 못했다. 이에 비해 당선작 '탕제원'은 표현의 묘미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점이 주목을 끌었으며 무엇보다 대상을 참신하게 바라봄으로써 신선미와 함께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는 점이 점수를 받았다.
시조 부분에서 보자면 '겨울 꽃밭'은 시조형식의 정제성을 잘 지키며 막내고모에 대한 추억을 참신한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는 점이 주목되었으나, 표현의 참신성이 떨어졌다. '블랙커피를 읽다'는 대상의 선택이나 표현의 참신성이 매우 뛰어나 주목을 끌었으나 삶과 관련된 주제가 분명치 않다는 점이 한계였다. 이에 비해 당선작 '소금꽃'은 시조형식의 정제성을 바탕으로 바다와 그 바다를 둘러싼 사람들의 생애를 소금꽃으로 상징화해내고 이를 참신한 표현으로 풀어가는 점이 매우 탁월하다는 평을 받았다. 시와 시조 부분에서 공히 훌륭한 작품이 나와 공동 당선을 결정했다.
강은교·이우걸·김경복 시인
(한국일보 2편 공동수상)
백지의 척후병
김복희
연속사방무늬 물이 부서져 날리고
구름은 재난을 다시 배운다
가스검침원이 밸브에 비누거품을 묻힌다
바닥을 밟는 게 너무 싫습니다
구름이 토한 것 같습니다
낮이
맨발로 흰색 슬리퍼를 끌면서 지나가고
뱀이 정수리부터 허물을 벗는다
구름은 발가락을 다 잘라냈을 겁니다
전쟁은 전쟁인거죠
그는 무너진 방설림 근처에 하숙하고
우리 집의 겨울을 측량하고 다른 집으로 간다
우리 고개를 수그려 인사를 나누었던가
폭발음이 들렸던가
팔꿈치로 배로 기어가 빙하를 밀고 가는 정수리
허물이 차갑게 빛난다 눈 밑에서 포복하던 생물들이 문을 찧는다
인질들이 일어선다
김복희
1986년 전남 진도 출생
전남대 극어국문과 졸업
고려대 국어국문과 대학원 재학
당선소감
지진이 나도 무너지지 않는, 잘 휘어지는 건축물을 짓고 싶습니다
자주 슬프고 화가 많이 납니다. 그런데 무서워져서 화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시가, 저로 하여금 무엇도 할 수 없도록 가슴을 뜨겁게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하는 이상한 입 모양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저를 자꾸 방에서 나오게 하고, 어디론가 데려가고, 사람들 앞에서 말을 더듬게 합니다. 많이 더듬어서, 더듬는 것으로 기공이 많고 잘 휘어지는 건축물을 짓고 싶습니다. 지진이 나도 무너지지 않고 사람들을 잘 재워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 건물에서 잘 자고 싶습니다. 그런 건물 부자가 되어서 세 같은 거 받지 않고 다들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책 없이 낙관적인 저를 살펴준 가족과 친구들아, 고맙습니다. 진도에서 태어나 노화도, 고금도, 완도, 광주를 거쳐 지금 서울입니다. 당신들이 제가 모자란 짓을 저지를 때 지켜봐 주고, 다정해 주어 이만큼 삽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신 강헌국 지도교수님, 고맙습니다. 글과 음악과 농담을 공유하는 문우들, 많은 술과 커피를 함께 마셔주고, 서로의 글을 읽어주기도 하는 아름답고 미친 바보들, 고맙습니다. 제가 종종 없어져도, 다시 나타날 때마다 어깨동무해주세요. 부탁합니다. 오랫동안 책으로만 만나 뵈었던, 그래서 저 혼자 좋아했던, 남진우 이문재 황지우 심사위원님들,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쓰겠습니다. 시 쓰는 게 좋다는 제 말을 들어주신 신용목 이영광 권혁웅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도 조용히 쓰겠습니다.
몇 해 전, 당신께서 하신 말, 멈춘 자리에서 오래 머무르라는 그 말이 제 창문입니다. 방에서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다른 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뛰어내리지 않고 계속 쓰겠습니다.
201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방의 전개
윤종욱
밤새 발밑에는 좁은 사막이 쌓였어요
새벽은 불투명하게 돌아왔고
매일매일 더 늙은 모습으로
우리는 입이 말라 버린 나무
조금씩 빠르게 허물어지는 어둠처럼
우리는 잎이 진 사람
침묵을 정확하게 발음해 보세요
턱 끝까지 숨이 막힐 만큼
우리가 창문이 없는 방이었을 때
내일을 열어 볼 수는 없었어요
우리가 방에서 갈라져 나온 뒤에
우리는 식탁의 높이에 맞춰 앉았어요
모래를 모두 쓸어 낸 몸으로
표백된 셔츠를 입고
찻잔의 깊이와 끓는 물의 부피를 재며
우리는 눈대중으로도 알고 있었어요
어둠이 얕은 곳에서는
언제 눈을 떠야 하는지를
어디에 눈을 둬야 하는지 말이에요
시계는 벽을 등지고 있었는데
시계는 무엇이든 가리키려 하고
우리는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해요
사막의 발단을 출발하여
가느다란 아가미가 발생하기까지
우리는 진화하는 걸까요
밖은 왜 여전히 어두운 거예요
우리의 아침을 활기차게 열어 보세요
분주한 아침이 지나고 나면
엄마가 시키는 대로 문을 닫고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어요
윤종욱
1982년 경북 예천 출생
강남대 국어국문과 졸업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재학
당선소감
방 안에 갇힌 나의 방에서 창문을 두드리고 깨뜨려
방 안에 빈방이 들어와 앉는다. 나는 빈 방 안에 닫혀 있다. 닫힌 방은 나를 열어 보지 않는다. 나는 초점이 나간 머릿속을 뒤척인다. 밤새도록 침묵이 휘몰아친다. 침묵은 나를 깨트린다. 나는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다. 나는 아무 말도 아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아닌 나는 여기에서부터 다시 발생한다. 다시 눈이 생기고 다시 귀가 생긴다. 다시 어둠이 보이고 다시 어둠이 들린다. 최초의 방식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가 어둠에 희석되는 동안 방 안에는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한다. 고립된 나의 세계와 스스로 자립하려는 세계. 안의 세계와 밖의 세계. 어둠이 무서운 나는 스스로 자립하려는 세계에게 목을 건다. 목은 점점 더 길어지고 점점 더 길어진 목은 점점 더 발끝에 닿아 있다.
그러므로 다시 방 안이다. 방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존재는 누구에게나 존재에 대해 묻는다. 나는 시간을 허비하는 데 시간을 허하며 나는 방의 안과 겉을 뒤집는 데 몰두한다. 나는 오랫동안 창문을 두드리며 나는 오랫동안 창문을 깨트린다. 아마 신선한 공기와 칼날 같은 빛이 반쯤 잠든 나를 깨울 것이다. 까먹지 않는다면 방은 곧 전개된다.
김행숙 이원 선생님, 황지우 이문재 남진우 선생님, 한국일보사에 헤아릴 수 없을 모든 마음을 드립니다.
심사평
발명과 발견, 색깔 다른 두 신인 서로의 장점 배웠으면
시에서 발견과 발명은 구분된다. 발견이 낯익은 대상에서 낯선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라면, 발명은 대상과 무관하게 낯선 의미를 빚어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발견은 소통 가능성(서정시), 발명은 소통 불가능성(비서정시)과 직결되고, 다시 발견은 언어의 투명성(우리), 발명은 언어의 불투명성(나)과 연관된다. 우리 현대시는 발견과 발명 사이에 서식한다.
최종적으로 두 편을 놓고 논의가 이어졌다. 발견인가, 발명인가. 한 작품은 습작기가 단단해 보였다. 방(가족)을 중심으로 대상을 장악하고 그것을 질서화하는 능력에 신뢰가 갔다. 동봉한 응모작 수준도 일정한 편이었다. 반면, 다른 한 작품은 앞의 작품과 대척점에 자리했다. 재난 상황이라는 대상을 넘어 낯선 이미지를 통해 이질적 세계를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전자는 발견의 시, 후자는 발명의 시에 가까웠다.
발견의 시가 윤종욱씨의 ‘방의 전개’였고, 발명의 시가 김희씨의 ‘백지의 척후병’이었다. 윤종욱씨의 경우 ‘방의 발단’이나 ‘숲’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고, 김희씨의 ‘토마토라 한다’도 인상적이었다. 윤씨는 안정감이 돋보였고, 김씨는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커 보였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두 신인을 동시에 문단에 내보내기로 했다. 서로 다른 개성이 발명을 아우르는 발견, 발견을 아우르는 발명의 길을 열어나가면서 우리 시의 풍요로움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 탄생 장소와 시간이 같은 두 신인에게 두 배의 축하를 보낸다.
최종심에 오른 나머지 두 편의 시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김유씨의 ‘성찬의 시간’이 갖고 있는 미덕은 가독성이었다. 일상적 언어를 능란하게 직조하는 능력이 깊이의 시학과 결합한다면 보다 성숙한 차원으로 올라설 것이다. 고동식씨의 ‘금단’은 진술(아포리즘)이 묘사를 압도하는 대목이 못내 아쉬웠다. 진술과 묘사 사이의 균형을 찾아낸다면 조만간 우리 시의 전면에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분발을 바란다.
남진우, 황지우, 이문재 시인
(조선일보)
면(面)
정현우
면과 면이 뒤집어질 때, 우리에게 보이는 면들은 적다
금 간 천장에는 면들이 쉼표로 떨어지고
세숫대야는 면을 받아내고 위층에서 다시
아래층 사람이 면을 받아내는 층층의 면
면을 뒤집으면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복도에서, 우리의 면들이 뒤집어진다
발바닥을 옮기지 않는 담쟁이들의 면.
가끔 층층마다 떨어지는
발바닥의 면들을 면하고,
임대 희망아파트 창과 창 사이에
새 한 마리가 끼어든다.
부리가 서서히 거뭇해지는 앞면,
발버둥치는 뒷면이 엉겨 붙는다
앞면과 뒷면이 없는 죽음이
가끔씩 날선 바람으로 층계를 도려내고
접근금지 테이프가 각질처럼 붙어있다
얼굴과 얼굴이 마주할 때 내 면을 볼 수 없고 네 면을 볼 수 있다 반복과 소음이
삐뚤하게 담쟁이 꽃으로 피어나고 균형을 유지하는 면, 과 면이 맞닿아 있다
어제는 누군가 엿듣고 있는 것 같다고
사다리차가 담쟁이들을 베어버렸다
삐져나온 철근 줄이 담쟁이와 이어져 있고
밤마다 우리는 벽으로 발바닥을 악착같이 붙인다
맞닿은 곳으로 담쟁이의 발과 발
한 면으로 모여들고 있다
1986년 평택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5년 입학 ~ 2011년 졸업)
현, KBS1라디오 작가
음반, 라임 2집 ‘바람에 너를’
당선 소감
가슴속 마지막 흰 눈…
한 알 한 알 잊지 않고 꼭 먹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살아 있는 것이 귀라는데, 묻고 싶었다. 할아버지를 껴안고 들썩거리는 아버지 등허리에 내 얼굴을 실컷 묻고 싶었다.
닫힌 자물쇠가 조금씩 열린다. 먼저 심사위원님들 감사합니다. 가능성을 열어주신 박주택 선생님께 이 영광 올립니다.
격려해주신 이성천, 안영훈, 이문재, 김종회 경희대 교수님들 고맙습니다. 항상 용기 주신 노은희 작가님, 아들 세건,
영감 주셨던 전기철 선생님 사랑합니다. 임경섭 선배님, 작은 거인 민지, 문예창작단 감사합니다. 보랏빛 나무 빵수 누나
유학 멋지게 마치길. 그린마인드 요리, 맑은 민혜, 광렬 호열 삼촌 경주 갈게요. 이병철, 서윤후, 김산, 정형목 시인 건필하시길.
벗 진걸, 준기, 기문, 학수, 기혁, 대진, 대학원 동기들, 경석, 순자, 광배, 연주 행복하길. 나의 우상 혜경, 혜은, 하늘색 꿈 지윤 누나, 가족 같던 김보민, 박지현, 김희수 아나운서님, 인생의 스승 나의 피터팬 KBS 박천기 PD님, 조력자 김홍련 작가님, 귀감을 주셨던 방귀희 선생님 함 께하고 싶어요.
미군으로 복무 중인 누이, 오랫동안 투병해 온 아버지, 그리고 당신. 방 한 칸에서 살았던 여섯 살, 방 하나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당신을 따라 분리 수거함을 뒤지곤 했습니다. 옷이며 신발이며 저에겐 보물이었고 날개였습니다. 기억하나요. 할머니의 입술에
당신 입술을 맞추던 날, 할머니가 소복이 눈으로 쌓이던 날, 가슴속 가장 큰 방 속에서 당신과 있었다는 것을. 당신의 따스한 방이 되고 싶어요. 남부럽지 않은 지금도, 분리 수거함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나의 은인, 정삼선 사랑합니다. 시를 놓지 않던 십년의 겨울,
제 가슴속 마지막 흰 눈이 날립니다. 한 알 한 알 잊지 않고 꼭꼭 먹겠습니다. 살아가겠습니다.
심사평
우리 시대 삶의 다양한 ‘면’을 성찰
본심에 오른 응모작 가운데 집중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면(面)’(정현우), ‘우산 없는 혁명’(고원효), ‘야간개장 동물원’(박민서)
세 편이었다.
‘야간개장 동물원’은 지상의 거울로서 밤하늘의 별자리를 헤아리는 상상력의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낮에는 잠을 자다가 밤에만 나타나는 천상의 동물들을 통해 야성을 상실한 채 일상에 매몰돼 살아가는 현대인의 처지를 반어적으로 노래한 이 작품은 단아한 이미지의 직조가 인상적이었다.
‘우산 없는 혁명’은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올해 외신면을 달군 홍콩의 우산 혁명을 소재로 하고 있다. 쉽고 친근한 어조로 쓰였음에도 이런 유의 시가 빠져들기 쉬운 상투성에서 벗어나 있었고 우리 현실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재기와 사유의 깊이를 엿볼 수 있었다.
‘면’은 평면 측면 얼굴 경계선 바닥 방향성 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면이란 단어를 활용하여 우리 시대 삶의 다양한 ‘면’을 성찰한 작품이다. 인간이든 건물이든 세상 모든 것은 결국 면들의 만남과 어긋남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로부터 갖가지 문제가 발생한다고 이 작품은 들려주고 있다. 이 시에 담긴 지혜는 통속적 잠언을 훌쩍 뛰어넘은 것으로서 오래 되새길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세 작품을 앞에 놓고 장시간 고민과 토론을 거듭하다 선자들은 ‘면’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다른 두 응모자의 경우 여타의 투고작들이 충분한 믿음을 주지 못한 반면 정현우의 작품은 모두 고른 수준과 밀도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 본심에서 논의된 응모자로는 ‘바람의 혈관’의 김민구, ‘자백’의 김창훈 등이 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다른 응모자들에게도 건필을 기원한다.
남진우, 정호승시인.
(세계일보)
로로
김성호
나는 너에 대해 쓴다.
솟구침, 태양의 계단, 조약돌이 되는 섬; 깊은 수심에 가라앉은 이야기를 떠올리다가 나는 너를 잊곤 한다.
로로, 네 빛깔과 온도를 나는 안다. 네 얼굴이 오래도록 어둠을 우려내고 있는 것을 안다. 더 이상 깊지도 낮지도 않은 맨살 같은 나날을 로로, 나는 안다.
네가 생각에 잠길 때 조금씩 당겨지는 빛과 무관한 조도를 안다. 마음에 마음이 부딪혔다. 소리가 났다. 그쯤은 네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어서 내 망각은 너의 미래에서 쑥쑥 자란다.
마을은 물에 잠기고 고통은 가장 가볍다. 로로, 내 한 살 된 부엉이를 로로라 부를 때 날개에 대해 적고 싶은
두려움도 모른 채 쿵쾅이는 마음을 너는 알까? 여긴 쓸려갈 거야,
온 마을의 고양이가 낮 동안 밋밋하게 비상하는 것을, 환호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너는 알까? 로로, 우리 모두는 네 내면과 살았다. 나는 그곳에서 눈에 띄지 않는 한 형상이었다. 우린 오래도록 있어도 고요한 줄 몰랐지. 나는 오늘 온통
상처투성이여서 내일도 빛을 삼키고 반짝일까 무섭다. 사지를 갖추고 내일이 지상에 엎드릴까 무섭다. 로로, 나는 널 부르면서 여전히 네가 고스란히 피어오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동안만은 날 잊곤 하는 걸까. 로로, 네가 들린다. 언제일까?
로로, 나는 너에 대해 쓴다.
내면에 내면이 쏟아졌다. 카스트라토
구름, 비틀림, 작은 의식, 이런 것들을 떠올리곤 하다가 나는 다시 너를 잊어버린다
김성호 시인
1987년 충북 청주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당선소감
시를 바라보지 못한… 그 고통이 날 살렸다
시인이 됐다.
엄마 함순옥
아빠 김기화
누나 김은정
이원 선생님
이준규 선생님
세계일보사 그리고
뽑아주신
문정희 선생님
김사인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시를 썼더랬다. 여름 내내 고양이와 지냈더랬다. 거울엔 내가 있었고 뭘 읽었는데 기억나지 않고 산책로에서 어둠을 바라보다가 너무 무서워져서 걸음을 돌리는데 집에 돌아가기가 더 무서웠으며 아무 문장이나 나를 받아줄 거라 사과를 내리치는 칼에 씻기는 날 시 연주를 하고 시 배역을 맡고 욕지거리에 반찬을 입에 물고 이건 반찬이다, 반찬이다, 각설하고 부글거리고 아, 미쇼와 김록이었지 어둠 속에서 쥬스 주스 쥬스 주스 쥬스 춤추는 거 같지, 울 거 같지, 이 식별을 감당해낼 수 없었더랬다. 어제 누군가에게 갔다. 나의 얘기를 했다. 나는 캄캄해졌다. 그가 시라고 생각하지 않소. 아름다운 한 여자라고 생각하오. 어둠은 잠잠하오. 열망 또한 그러오. 그렇게 된 것이오.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옮겨가는 자락을 맡고 도대체가 여름으로, 바보와 천재를 하루에도 몇 십번씩 왕복하는 것이다. 대개는 분노하며 칭호에 가려진 자, 그 고통 속에서 빛을 보리라. 나는 죽느니라, 나는 나다. 대개는 흥분에 차 느껴지오? 물음을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미 그릇된 정신을 선택한 자오. 아프오. 아프오. 고양이가 터지지 않는 게 싫고 좋았더랬다, 절정을 건드렸더랬다, 쭈그러졌더랬다, 흔들리오. 시, 여름이었더랬다, 시, 바라보지 못했더랬다. 이 판단과 오류가 나를 살았소. 다시 계속 속으로 일구며 집어삼키며 그 혼이었더랬다.
심사평
내면을 언어로 투시하는 힘… 음악처럼 다가와
우리는 어떤 새 시인을 기다리는가.우리를 두렵게 하는 동시에 매혹하는 시쓰기, 읽기 전과 후의 우리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해방과 자유의 에너지를 내장한 시쓰기, 그러므로 쓰는 이뿐 아니라 읽는 이에게도 근원적 의미의 모험이어 마땅한 그런 시쓰기의 시인을 우리는 설레며 기다린다.
시라는 이름의 관행적 작문방식에 갇혀 오히려 생과 세계의 피 흐르는 실상으로부터 시 자체가 유리되는 자가당착을 돌파하는 패기의 글쓰기, 한국어의 갱신과 재구성이 그로부터 시발될 글쓰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것은 무조건 정당한가. 바로 이 오래된 물음을 또한 고통스럽게 치르는 가운데 일종의 시적 윤리성을 확보한 글쓰기이기를 바란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희망의 새로움이지 ‘새것 흉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시대 민중시풍의 단순 답습이 오늘의 문학적 대안일 수 없는 것과 똑 같은 이유에서 안이하고 나태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최종환, 맹재범, 김성호로 최종 후보를 압축한 다음, 김성호를 이견 없이 당선자로 확정했다. 최종환이 적출해내고 있는 생의 비극적 아이러니들은 진지하고 시의성 있는 것이었지만, 관점과 시적 사유에서 어떤 투식이 느껴졌다. 더 자신을 던져넣어 돌파해야 한다고 보았다. 맹재범은 생의 구체와 형상화의 신선함이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어설픈 점이 있었다.
김성호는 내면을 언어로 투시하는 힘, 나아가 그것을 시적 문장으로 조직하는 감각과 내공으로 우리를 움직였다. 그는 확보된 관념이나 느낌, 사실의 서술로 시를 삼지 않고, 참 자체가 스스로 드러나는 언어적 형식으로 시가 기능하기를 바라는 듯하다. 안이 비어있는 비인칭의 이름 ‘로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마음과 언어의 섬세한 탄주에 귀를 기울이면, 윤곽이 모호한 듯하나 매우 진실하고 예민한 한 벌의 심미적 긴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김성호의 언어사용이 구현하는 미감과 아우라를, 처음 듣는 음악을 만나듯 체험해 보기를 독자들께 권한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견지되는 한에서만 이런 시는 유효하다는 것, 그렇지 않을 때 요령부득의 주관적 요설이나 겉멋의 함정에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일 수 있다는 우리의 우려가 기억되기를 바란다. 심사 또한 모험이다. 새 시인의 미래에 우리 자신을 걸고자 한다. 각고의 정진을 당부한다.
문정희 김사인
(동아일보)
쌈
조창규
나는 쌈을 즐깁니다
재료에 대한 나만의 식견도 있죠
동굴 속의 어둠은 눅눅한 김 같아서 등불에 살짝 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낱장으로 싸먹는 것들은 싱겁죠
강된장, 과카몰리* 등 다양한 <쌈장 개발의 기원>
봄철, 입맛이 풀릴 때
나는 구멍이 송송, 뚫린 배춧잎을 새로운 쌈장에 찍어먹습니다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
어떤 배설물은 때로 훌륭한 식재료가 되죠
두꺼운 것들은 싸먹기 곤란합니다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에도 누명과 모함은 숨겨있죠
적에게 붙잡히면 품속의 기밀을 구겨 한입에 삼켜요
무덤까지 싸들고 가는 비밀도 있습니다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 난 방충망은 경계가 소홀합니다
누군가 달의 뒷장에 몰래 싸놓은 알들
나는 긴 혀로 나방을 돌돌 말아먹는 두꺼비를 증인으로 세웁니다
사각사각, 저 달을 갉아먹는 애벌레들
수줍은 달을 보쌈해간 개기월식
삼킬 수 없는 과욕은 역류되기도 하죠
보름달을 훔쳤다는 나의 누명이 시간의 부분식으로 벗겨지고 있습니다
* 아보카도를 으깬 것에 양파, 토마토, 고추 등을 섞어 만든 멕시코 식 쌈장
조창규
1980년 전남 여수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당선소감
가난한 꿈으로 사치스러웠던 날들… 詩를 만나 따뜻했다
나는 타인의 재능에 절망한 적 있다. 비교와 차이는 열등감을 낳기 쉬워서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무고한 남을 원망하거나 시기하기 쉽다. 어쩌면 나는 남보다 내 자신을 더 미워할까봐 두려웠는지 모른다.
10년 동안 나는 내 삶의 혁명을 꿈꿔왔다. 그러나 삶을 견디는 것은 힘들었고,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내게 재능은 물론이고 운도 따르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실패한 혁명가에게 시(詩)가 찾아왔다. 한 발짝만 뒤로 물러나면 벼랑인 것을…. 당선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쓴다면 내 양심을 속이는 것.
가난한 꿈으로 사치스러웠던 날들. 좌절로 괴로웠을 때,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고 느낀 순간은 당신을 만날 때였다. 여느 날과 똑같은 오늘, 온몸으로 맞는 눈이 참 따뜻하다.
저마다의 간절함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그래도 내 인생이 무모한 반란으로 끝나지 않아 다행이다.
종교와 예술 사이에서 갈등한 저를 잡아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박주택 선생님, 이원 선생님, 마경덕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시인이 되었습니다.
선규, 현준, 효주, 동기, 소중한 친구들…, 시인이 되는 걸 꼭 보고 싶다고 한 창호 형, 암이 빨리 낫기를 기도할게요. 멀리 떠나온 경희문예창작단에도 좋은 소식이 되기를….
황현산, 김혜순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리며 끝으로 하늘에 계신 친어머니와도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심시평
자연의 변화와 삼투… 파노라마처럼 전개… 시인의 탐구 돋보여
본심의 심사 대상이 된 작품들을 읽으면서, 이 시들을 쓸 때 이 응모자들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어떤 간절한 욕구가 있었는가, 아니면 어떤 경로로 시를 쓰는 과정에 입문하게 되어 습관처럼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질문해 보고 싶었다. 그만큼 장식과 조립에 치중한 시가 많았으며 재주나 재치에 기댄 시가 많았다. 응모작 전체가 고른 수준을 갖춘 예도 드물었다.
김태형의 ‘수상한 식인’ 외 3편은 일종의 은유 놀이로서 ‘노르웨이’라는 거처를 시에 등장시켜 자유자재로 그 거처의 경계를 입술이나 국경으로 늘려 잡으며 유희하고 있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집을 은유해서 ‘노르웨이’ 같은 이름으로 비유해 불러야만 할 것 같지 않은가. 시가 재미있는 지점들을 품고 있었지만 함께 응모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같은 시들에는 이 시를 쓴 시인의 역량을 의심케 만드는 거친 일면이 있었다.
김상도의 ‘졸립다가 마른’ 외 4편은 거미줄에 걸린 줄도 모르는 곤충처럼, 우리의 일요일 같은 휴식이나 평화, 그 뒤에 도사린 위태로움을 슬며시 혹은 경쾌하게 던지는 솜씨가 좋았다. 그런 상황을 ‘졸립다가 마르는’ 같은 형용 어귀로 눙쳐 버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뒤에 붙은 4편의 언어 실험적인 시들이나 나열, 조립의 시들이 이 시의 감동을 반감시켰다.
‘쌈’ 외 4편은 ‘쌈’을 ‘동굴 속의 어둠’,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난 방충망’, ‘달의 뒷장’, ‘긴 혀’, ‘보쌈’으로 비유하고, 이 비유에 어울리는 쌈장을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으로 만들고 난 다음 이 모든 사물과 자연 현상을 흡입하는 나를 내세워 자연의 아름다운 변화와 삼투, 세월과 일식을 파노라마처럼 전개하고 있었다. 유쾌한 유머가 있고, 축소와 확장이 화자의 입을 통해 전개되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시 속의 ‘나’는 쌈을 멋지게 비유해 낼 수 있지만, 과연 이러한 ‘쌈’의 현상들이 시적 화자의 감각들을 통과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응모작들이 각각 다른 경향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5편 모두가 그 나름의 탐구가 있는 점을 높이 사서 ‘쌈’을 당선작으로 선하는 데 합의했다.
황현산 문학평론가 김혜순 시인
(매일신문)
새벽낚시
박예신
물상들이 번져가는 어슬한 하늘 움켜쥔 새벽. 틈으로 푸른빛 스치더니 이내 어둠은
바다를 기억으로 길게 풀어놓는다. 꽤 괜찮은 미끼를 산 낚시꾼이라면 으레 찾는 그 곳.
긴 장대 쥔 어둑한 손들이 끊임없이 베어대는 채찍소리.
벌어진 암흑 사이로는 가늠키 어려운 뭔가가 일렁이는 듯.
침묵은 침묵을 질러대고 산전수전이 무언으로 공간에 쟁쟁한 순간.
뇌리에 깊이 묻어둔 별 몇 개는 음파에 부딪혀
검푸른 바다로 떨어지고 은빛으로 부서진다.
하얀 포말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은빛 조각들이
꾼들의 주린 눈동자 위에 가득 들어찰 때까지.
한 살배기의 미소가 언뜻 지평선에 걸쳐있다. 하지만,
아이가 휩쓸린 별과 아버지가 뿌려진 달은 슬프다.
혹은 애상을, 혹은 사라진 순간을 건진다고 하는
이른 새벽이 연주하는 푸른빛 안개.
감정이 씨줄과 날줄로 낚싯줄에 엉키거나
그물로 한 움큼 건져지는 민생의 곳.
내일도 이곳을 지배할 만감의 울림은
태양의 저쪽 편으로부터 타오르다가
서서히 붉게 사그라든다.
당선 소감
시는 우주 투영…시에 우주를 담고파, 마음 속 별들이 터질 때마다 글쓰기
한 편의 시 속에는 우주가 투영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속에는 자전하는 인생들과 얽히고설킨 산전수전이 클러스터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였다. 어제와 오늘의 모습이 다른 우주 속에 시인들이 묻어둔 시어들을 하나하나 캐내어 이리저리 깎아보고 비춰보는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어느 순간 나 또한 시에 우주를 담고 싶었다. 쉽게 캐내지 못할, 그렇기에 값어치 있는 미묘한 원석들을 시 속에 가득 묻어두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시를 읽고 쓰기 시작한 이유다.
별안간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가 내게 당선 소식을 전했을 때 나는 머리를 어딘가에 쾅 하고 부딪히기라도 한 듯 정신이 아찔했다. 25년을 살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덕분에 나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것도 퇴근길 만원 버스 안에서. 단지 내 작품을 기한 내에 투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성공했다고 느꼈던 나였는데, 2015년을 목전에 두고 이렇게 큰 상을 받아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나는 시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도 없을뿐더러 대부분의 당선자처럼 문예창작과를 나온 적도, 문학 아카데미를 다닌 적도 없다. 나는 다만 이따금 마음속에 고이 숨겨둔 별들이 터져 나오려 할 때면 펜촉으로 풀어내곤 하던 평범한 영문과 학생일 뿐이다. 내가 아직껏 펜을 놓지 않게 된 것은, 8할이 어머니 덕분이다. 비록 어머니께서는 칠 형제를 거느린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글에 대한 뜨거움을 대부분 방직공장 굴뚝 밖으로 날려 보내야 했지만 그 불씨까지 꺼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위대한 도구는 기어코 그 뜨거움을 되살려내었고 감사하게도 나는 그것을 값없이 선물 받은 것 같다. 비록 변변찮은 형편에 학원 한 군데 못 보내 주셨다며 미안해하셨지만 어머니께선 유년시절부터 끊임없는 독서, 글쓰기 그리고 시쓰기를 통해 나를 다듬어 주셨다. 아마 어머니 당신께서 받지 못한 것들을 자식에게만큼은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어머니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리고 싶다.
또한 부족하나마 나에게 문단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신 심사위원님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묵묵히 문단을 이끌고 갈 우직한 한 마리 젊은 소가 될 것을 약속드린다.
박예신
1990년 부산 출생
대구대 영어영문학과 4학년 재학
매일신문 재난안전 수기공모전 우수
심사평
시적 형상성에 재능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가능성에 기대 걸어볼 만
예심을 거쳐 선자에게 의뢰된 작품들은 시심으로 보면 공들여 가다듬은 흔적이 역력하지만 감각이나 인식으로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는 그만그만한 수준의 성취였다. 모름지기 신인이라면 참신함은 물론이지만, 시로써 자신에게 되물으려는 질문 또한 절절해야 할 것이다. 투고된 시편들의 스펙트럼이 연륜의 다채로움만큼 넓지 않았다는 것도 심사자에겐 유감이었다. 마지막까지 논의로 남았던 작품은 김태인 씨의 「안개 서식지」, 김정윤 씨의 「캥거루주머니 속으로」, 박예신 씨의 「새벽 낚시」, 이윤정 씨의 「모자는 만년필을 써본 적이 없다」등이었다.
김태인 씨의 시편은 집요한 비유의 힘이 습작의 공력을 느끼게 하지만, 체화되지 못한 관념이 시를 유연하게 끌고 가려는 동력을 어딘지 모르게 경색되게 한다. 각박한 의욕보다 비약이 가능하도록 여백을 남겨놓는 지혜가 때로는 소중한 것이다. 김정윤 씨의 시편은 정감이나 의식이 가 닿는 지향에서 어느 정도 견고한 시의 토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응시의 대상과 시적 의도가 각각 다른 주파수를 갖고 있는 듯, 일체화되지 못하는 어색함이 화려한 수사를 공허한 독후에 빠지게 만든다.
이윤정 씨의 시편에서는 서로 무관한 사물들이 포개지며 자아내는 맥락의 삼투가 돋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 언급한 분들에 비해 당선의 수준에 훨씬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사변적인 주제조차 사물의 구체성에 풀어 넣으려는 주체의 시선은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판단을 기우뚱거리게 했다. 그러나 시의 대상들이 제 본분을 지켜내도록 비유의 상호성을 끈기 있게 살폈으면 하는 아쉬움을 안게 하는 것이 흠이었다.
박예신 씨의 시편은 시의 미학을 의식하는 문제적 시선이 옅은 대신 해맑고 풋풋한 정감이 잔뜩 묻어나는 시편을 선보인다. 이는 노력해서 얻어낸 습작의 결과가 아니라 그 나름의 재능이 시적 형상성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경우가 아닐까 판단되었다. 그리하여 이 응모자의 세계는 이즈음 신인들이 보여주는 장황하고 난삽한 수사적 중첩에서 한 걸음 비켜선다. 아쉽다면 수사적 평면성을 떨치고 저만의 개성으로 부피가 부조되는 시의 구상력을 함께 건사하는 일이다.
숙고 끝에 박예신 씨의 「새벽 낚시」를 당선작으로 밀어올린다. 습작의 연조로 보아 앞으로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보려는 것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각고의 정진을 당부한다.
김주연(문학평론가) 김명인(시인)
(영남일보)
신발
박진이
발 하나 들어 있지 않은 난전의 신발들
맨발보다 더 시려 보이는 저 표준의 사이즈들은
몇 번을 신어보고 몇 번을 돌아서 보고
몇 번을 벗어두고 나서야
발의 온도를 이해할까
오늘도 얇은 먼지와 흰 눈에게 제 크기를 내어준다
겨울, 한기를 견디던 힘으로 발을 기다리는 일
진열이 아닌 나열의 추운 발
그러나 아무도 저 시린 발은 사지 않겠다는 듯
지나가는 걸음들은 빠르다
맞춤이 아니어서 주인이 없는 발
몇 켤레의 신발을 신어 본 후에야
제 발의 온도를 고를 수 있나
나열의 난전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내내
신발이 발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발이 신발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몇 켤레의 신발이 들렸다 놓였다 신겨졌다 벗겨졌다
뒤꿈치 똑똑 딛고 싶은 저녁 무렵
누가 나열의 난전에 놓인 신발을 사고 싶을까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유리 너머 진열의 신발들에 눈이 흘리는 날
퉁퉁 부은 저녁의 발에 난전의 신발 한 켤레를 신겨 보는데
그새, 벗어놓은 헌 신발도 좋다는 듯
흰 눈발 내려앉고 있다
당선소감
발 시린 심정으로 글을 썼습니다
결혼식장에 있었습니다. 신랑 신부의 퇴장에 맞춰 박수를 치던 중이었습니다. 당선을 알리는 기자님의 목소리가 박수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예식장을 나와 부산에서 수원의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자꾸만 히죽히죽 웃었습니다.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동안 글을 쓰는 내내 발이 시린 심정이었습니다. 따뜻한 겨울이 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매번 내가 쓴 시를 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던 재경씨 고맙습니다. 그리고 정민아, 우석아 사랑한다.
부족한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영남일보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 내 글감이 되어준 정자시장 난전의 신발들에게도 할 수 있다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난전의 신발 속으로 흰 눈발이 내려앉을 것입니다.
심사평
안정적인 호흡…자신의 목소리 자연스럽게 담아
우리가 마지막까지 주목한 작품은 ‘팔꿈치에 관한 단상’ ‘신발’ ‘유령위장’ ‘바람의 건축면적’ 등이다. 네 편 모두 장단점을 두루 가졌다.
본심의 작품 일부는 기성 시인의 영향이 두드러져 본인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점은 불만이다. 띄어쓰기와 맞춤법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팔꿈치에 관한 단상’은 좋은 작품이다. 몸의 시학이란 발상은 우리 현대시의 성과이다. 화자는 팔꿈치를 관찰하고 팔꿈치라는 생을 주목한다. 팔꿈치에서 “나른한 졸음을 꺼”내는 발화는 오후의 햇빛을 거치면서 다시 팔꿈치에서 ‘둥글게 번지는 물결’을 만들다가, “사라지고 키우고 조준을 괴던 그곳에서 악단 하나를 해체해도 좋으리”라는 편안한 저녁의 팔꿈치에 도달한다. ‘신발’과 함께 우리가 오래 주저했던 작품임을 밝힌다.
‘신발’은 선악이 엇갈리는 작품이다. 신발이 맨발보다 더 슬픈 것은 “발 하나 들어 있지 않은 난전의 신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발과 비슷하기 때문에 ‘시린 발’의 다른 모습이다. 따라서 “벗어놓은 헌 신발도 좋다는 듯 / 흰 눈발 내려앉고 있”는 풍경은 가난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하지만 ‘신발’에는 눈에 거슬리는 불편이 있다. 예를 들어 “겨울, 한기를 견디던 힘으로 발을 기다리는 일 / 진열이 아닌 나열의 추운 발”이란 구절은 상투적 인식이다.
‘유령위장’은 독특하다. “이 위는 무엇으로 배가 부를까”에 귀를 기울이면서 “숟가락이 없는 밥”의 가난에 도착한다. “비어 있는 위가 둘인 미라를 발견한다면 / 고대 인류는 / 위장이 두 개라 추정하는 인류사를 새로 쓰겠지”라는 결론과 “배부르게 먹었던 기억은 다 위다”라는 진술에는 공감할 수 없다. 시적 미학이라는 점에서, 전략도 절차탁마도 부족하다.
‘바람의 건축면적’은 건축자재의 하나로 바람을 사용한 점이 놀라웠지만, 그뿐이었다.
박진이씨의 ‘신발’은 그런 점에서 순정적이고 게다가 안정적인 호흡을 얻었다.
유행하는 어법을 도외시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었다는 점이 우리의 호감을 얻었다. 빛나는 구절이 상투성이란 단점을 껴안았다.
당선을 축하한다. 신춘문예 당선이 영예가 되려면, 앞으로 평생 시인으로 살면서, 시를 사유하고 시를 써야 할 것이다.
이하석 시인 송찬호 시인
(농민일보)
분홍잠
김겨리
고수레로 남겨 둔 홍시의 밀린 잠이 붉은 저녁이다
마당을 쓸던 노인이 허리를 굽히자 짧은 옷단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등골,
그 깊은 계곡까지 노을이 들었다
무너지는 한쪽 벽에 봉창 달빛을 빚어 얽는 거미가
바람이 들지 않도록 거미줄을 암팡지게 엮는다
명아주 이파리 스적거림으로 창문을 단 집
구절초 꽃대로 세운 배흘림기둥에선 풍경(風磬) 소리가 향긋하다
노인이 굽혔던 허리를 펴면 가을볕이 어리광처럼 달려든다
도돌이표만 있는 가을볕은 노인의 십팔번이다
음정은 새털구름이고 박자는 떨어지는 은행잎,
아무나 풍월로 읊어도 진양조 장단*
지붕엔 말표고무신 한 짝이 노을로 배꼽만 덮고 누워 있다
갈기털 다 빠진 목덜미에 솟대 그림자를 괴고 잠든 말굽은
아직도 따스한 발걸음을 기억하며
지붕에 올라가 누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긴 한숨을 쉬는 노인의 호흡이 가늘게 떨린다
허공에 써 놓은 점자로 되짚어 가는 길에도
과속방지턱이 있는지 바람도 잠시 주춤하는 법인데
어느새 성성해진 백발과 그믐달만 뜨는 눈썹
슬하에 노을 닮은 은행나무 한 그루만 달랑 둔 노인의 가계(家系)
입술에 허옇게 일어나는 각질을 옷소매로 쓱 훔치니
노을이 찍 묻어난다
노인의 등뒤로 달이 뜬다 어쩌면, 오늘밤
은행잎 한꺼번에 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뜻
노을의 끄나풀이 길다
*진양조 장단:판소리에서 가장 느린 박자
당선소감
“참 아렸던 시간들…정갈한 보폭으로 걸어갈 것”
업무회의 중에 당선 통보를 받았다. 잠시 숨이 고르지 않을 때 창밖엔 혹한에 끌려가는 바람의 이마가 보였다.
지금은 오히려 내가 그 무엇인가에 의해 여기까지 이끌려 온 것 같은데, 무엇이었을까. 12월의 침엽(針葉)은 날카로웠지만 뭉툭한 그 무엇을 찌를 수는 없었다. 나를 들춰내는 일이란 참으로 아린 일이었다.
침잠해지는 시간이면 습관처럼 끼적이던 습작들을 꺼내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 여린 살갗으로 무엇을 치대고 누구를 감싸안을 수 있을까. 종내 허기진 등골처럼 움푹 파인 상념으로 자판에 올려놓은 손가락들이 가늘게 떨리곤 했다.
가끔씩 머리맡에 쌓이는 잠들을 흔들어 깨우다 내가 잠들곤 했다. 검은 비닐봉지로 나무젓가락으로 구겨진 종이컵으로 가위눌리던 시간들. 빈 들에 서 있는 허수아비가 떠올랐다. 바람을 견디고 이슬을 견디고 어둠을 견디는 것보다 더 힘겨운 건 내가 빈 들의 일부도 되지 못한다는 거.
내 시의 여백이 되어주신 홍·정·심 시인과 당진 시인들께도 감사드리며, 아내와 군복무 중인 두 아들, 어머니, 항상 뭉클한 감동입니다. 모든 지인들께 소박한 덕담이고 싶은 겨울, 얕은 시심을 헤아려 주신 농민신문사와 손해일· 황인숙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리며, 이제부터 내딛는 한발 한발 정갈한 보폭으로 걸어가겠습니다.
김겨리(본명 학중)
1962년 경기 안성 출생 홍익대학교 졸업 현대로템㈜ 근무
심사평
“시각·청각·촉각 생생…풍부한 언어구사 인상적”
총 열여덟명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왔다. 전반적으로 농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았는데, 자연 풍광을 그리기보다 사소한 자연 하나하나를 씨앗으로 사람살이를 싹틔워 형상화하려는 자세가 마음에 와 닿았다. 다들 알다시피 농촌의 삶이란 평화롭기만 한 게 아니라 고된 것이고, 그 고된 만큼의 보상은 없어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끼기 쉬운 것이다. 그로 인한 서글픔이나 분노와 절망감을 ‘세월호’ 등으로 외연을 확대한 작품, 그리고 현란하나 발랄한 어법으로 자신의 내면에 집중한 작품도 눈에 띄었다.
최종심에 오른 이는 김학중·조미희·장서영·이복희 등 네명이다. 모두 시 쓰기가 몸에 익은 솜씨로 저마다의 삶의 결을 보여주는 바여서 당선작 하나를 고르기는 지난한 일이었다. 재치있는 어법으로 말을 꼬고 비트는 조미희의 언어에 대한 감수성, 감칠맛 나게 시어를 운용하는 장서영의 우아하고 발랄한 정신, 오브제(사물)마다 생의 질척거림을 겹쳐 보여주는 이복희의 웅숭깊음, 제쳐두기 아쉬운 이들의 재능은 언제라도 빛을 볼 것이라 믿는다.
당선작은 김학중의 <분홍잠>이다. 가을 정취 물씬한 농촌 풍경을 배경으로 홀몸어르신의 하루 일상을 담았다. 내용이나 시어를 군더더기 없이 길게 끌고 나가는 힘이 있다. 줄글인데도 운율이 만져질 듯하다. 즉 언어구사가 풍부하고 내재율이 있는 시다. 농촌 홀몸어르신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시각 청각 촉각에 생생히 스치는 듯하다. 배경은 농촌이지만 홀몸어르신 문제가 어찌 농촌만의 문제일까.
시적 대상에 제 감정을 흘리지 않고 객관적 거리를 두어야 독자를 보편적 감정으로 이끈다는 걸 익히 아는 시인이다. 축하드린다!
손해일시인 황인숙시인
(한라일보)
오래된 신발
고창남
인도에는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면
떠올랐다 가라앉은 먼지들과
가볍게 부풀어 올랐을 세상의 호들갑이
풀어진 끈을 갈고리처럼 엮어 꽉 조여 맨다.
만년설처럼 쌓여만 가는 아득한 먼지 속에서
태양은 너무 용의주도하고
그림자는 자주 길 밖으로 흘러내린다.
인도에는 수많은 상처가 있다.
바람만 불어도 가시가 돋쳐 구멍 숭숭 뚫리고
나는 다만 그날의 일기를 기록한다.
지구의 표면을 닦는 순례자의 발걸음
덜거덕거리는 신발이 몸 안의 길을 따라 걷는다.
때론, 갠지스 강이든가 어디든가 가닿지 못한 그리움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를 때
우리라는 존재는 우리가 소망하던 우리가 아니다.
오래된 신발에서 오래된 잉크냄새가 난다.
평생 써 내려가야 할 미완의 경전
어제 걷던 길을 오늘도 걷는다.
인도에는 부처가 있다.
신발장 문을 열 때마다 온 생이 몸을 뒤척인다.
당선소감
"다시 시의 바다로 헤엄쳐 갈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있다. 감사하다.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에 감사할 줄 안다.
살아갈수록 자주 길 밖으로 내몰린다. 내내 앓으면서도 소리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다. 열심히 살아야지, 잘 살아봐야지 하는 생각은 허공 속 메아리로 현실의 삶을 받쳐주진 못했다.
다만 내 살 속에 기억이란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다. 미래의 별들은 들판에 내리는 눈처럼 가슴을 후벼 파기도 하고 하나의 풍경이 되기도 하고 녹아서 사라지기도 하였다.
누구도 품어주지 못하는 존재감으로 시의 바다를 헤엄쳤다. 병이다. 고칠 수도 떼어낼 수도 없는 병이다. 이번 수상으로 잠시 쉬어갈 수 있겠다.
포구에서 잠시 쉼을 허락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를 드린다. 부모님과 묵묵히 자리를 지켜준 아내 윤현미, 그리고 사랑하는 예람, 은결에게 감사를 드린다.
탐라장애인종합복지관 활동지원센터 직원들과 장애인활동도우미를 하시는 선생님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끝으로 아낌없는 격려와 성원을 보내주신 이호동 김기평님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는 다시 시의 바다로 헤엄쳐 나갈 것이다. 마치 불치병 환자처럼. 오래된 일기장을 편다.
1965년 제주출생
제주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방송정보학과 졸업
1999년 제주신인문학상 수상
심사평
신뢰할 수 있는 역량을 택했다
새로운 시인의 등장을 기대하는 설렘은 첫째 새로운 안목에 대한 기대이며 다음으론 시인으로서의 역량이다. 그 설렘을 가장 먼저 겪는다는 점에서 심사위원은 행운이랄 수 있다. 2015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작들의 수준은 편차가 많았으나 시세계가 다양하고 기대가 되는 시편 또한 적지 않았다.
결심에 남은 작품은 김미경의 '나는 노래를 잘해요', 임경현의 '내 빛바랜 여자', 리호의 '폭설의 카르마', 고창남의 '오래된 신발' 등이다. 이 가운데 '나는 노래를 잘해요'는 4·3 사건을 다루는 문체가 유려하고 이미지의 흐름이 좋으며 무거운 주제에 비해 경쾌한 리듬감이 돋보였으나 감정의 구도가 단편적이고 무엇보다 장시 형태여서 제외되었다. '내 빛 바랜 여자'는 일상적 삶의 낮은 자리에서 대상을 불러내는 차분한 음성을 가졌고 '늦은 점심에 나무그늘 얹는 젓가락 한 쌍'같은 절구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긴장감과 새로움을 만들어내진 못했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은 '폭설의 카르마'와 '오래된 신발'이다. '폭설의 카르마'는 중의적인 시적 구조와 남다른 상상력으로 좋은 점수를 얻었으나 주제를 충분히 녹여내지 못해 다소 전달에 어려움을 겪고, 언어에 대한 천착이 당차지 못해 가다만 듯한 아쉬움이 남았다. '오래된 신발'은 완성도가 있고 시를 끌고 가는 힘도 안정적이었다. 작품의 수준이 고르고 그만큼 만만찮은 자기 연마의 과정을 짐작케 했으나 우리가 친숙하게 읽어온 '낯익음'의 유형이라는 점 때문에 손을 들어주는데 망설임이 따랐다. 진지한 논의 끝에 두 작품의 장점 중 후자를 택하는데 두 심사위원은 합의했다. 새로운 안목 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역량을 선택한 것이다.
당선자에게 기존의 장점에 더해 자신만의 개성적인 발성법을 보다 치열하게 밀고나오기를 당부하며 아낌없는 축하를 보낸다.
황학주 시인 김병택 문학평론가
(경상일보)
걸어가는 나무
정지윤
그들의 발소리는 너무 조용하여
먼 훗날 겨우 발견될 뿐,
아르볼 께 까미나(arbol que camina)
태양을 찾아가는 나무의 뿌리는
아마존의 고대 지도를 기억한다
끝과 시작이 맞닿은 유랑
기억을 더듬는 긴 촉수의 뿌리들은
수십 개월 느리게 이동한다
걷는 나무에게 숲은 한낮 궤도일 뿐
달과 달 사이로 시간이 흐른 뒤
숲은 파헤쳐졌다
나무들은 뿌리 앞에서 뒤틀림을 멈춘다
태양을 훔치는 뿌리들은
제 뿌리를 등 뒤에 남기며 다시 앞을 향해 걷는다
숲을 향해 숲이 되기 위해 걷는 일
아마존을 느린 걸음으로 가는 아마존의 나무들
언젠가 숲이 초원에 이르는 날
절룩거리며 걸어 나와
제 그림자와 뒤꿈치에 박힌 상처들을 전할 것이다
나는 잠시 멈춰선 채
먼지 같은 시간을 바라다본다
고통은 크기만큼 가벼워지는 것이어서 깔깔거리며
저마다 제 이름을 깊은 곳으로 불러들인다
아르볼 께 까미나(arbol que camina)
당선소감
직관·초월로 빛나는 언어의 집…따뜻한 시 쓸 터
시가 오는 길을 늘 열어두고 기다릴 겁니다.
알 수 없는 이끌림의 자리에 시가 있었습니다.
앎으로 가득한 세계를 넘어 직관과 초월로 빛나는 언어의 집으로 이끌어 준 수많은 질문과 질문 끝의 닫힌 문들, 그러나 그 닫힌 문이 곧 열린 공간의 시작임을 이제 압니다.
이미지와 의미들과 숱한 상황들을 붙잡고 표현하기보다 그것들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일은 아직 멀지만 이제 조급해하지 않겠습니다.
춥고 힘든 계절을 견디고 있는 이들에게 미약하나마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삶의 온기가 느껴지는, 이 산과 저 산의 봉우리를 깊게 울고 가는 시를 쓰겠습니다.
넓고 깊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나침반이 되어 주신 이영진 선생님 고맙습니다.
귀한 자리에 설 수 있게 손을 잡아주신 심사위원님과 경상일보에 깊이 감사드리며 정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정지윤
1964년 경기도 용인 출생
제1회 민중문학상 신인상 시 부문 수상
제22회 전태일문학상 시 부문 수상
제6회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 부문 수상
심사평
명징한 이미지로 내면세계 깊이 있게 투시
응모된 작품 수준이 비슷하여 우열을 가려내기가 힘들었다. 대부분 산문적 요소가 많고, 시가 지녀야 할 함축성이 없으며, 문장이 장황하게 길었다.
최종적으로 선자의 관심을 끈 작품은 3편이었다. ‘물의 부스러기’ ‘사파리동네’ ‘걸어가는 나무’였다. ‘물의 부스러기’는 물을 꽃으로 인식하는 대상에 대한 시선은 돋보였으나, 사유의 깊이가 부족하고 평이한 점이 흠이 되었다. ‘사파리동네’는 인간의 삶을, 초원에서 먹이를 찾는 동물에 비유한 추상력이 좋았으나, 의인화와 서술적 표현이 지나쳐 산만했다.
이에 비하여 ‘걸어가는 나무’는 산만하지 않고 간결하며, 내면적 깊이도 있었다. 식물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태양을 찾아가는 나무의 뿌리가 수 십 개월 느리게 이동하는 일월의 섭리나, 숲이 되기까지의 상처와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을 무리 없이 전개하고 있다. 특히 대상과 내면의 등가적 유추가 섬세하며, 이미지가 청신하여 신뢰감이 갔다. 신인에게는 자기만의 화법과 개성적 표현력이 있어야 한다. 이해하기 힘들며 장황하고 모호한 시가 많아진 요즈음 한국시단 풍토에, 명징한 이미지로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투시한 작품은 아주 드물다. ‘걸어가는 나무’는 언어가 간결하고, 투명한 이미지가 환기해내는 전이적 상상력을 부여하는 능력을, 중요한 가능성으로 인정하여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한다.
권달웅시인
(한경청년시)
비커의 샤머니즘
김민율
굴러다니는 돌 하나 주워 주머니에 넣고 숭배한다
소원을 돌에게 말하고 우물에 던진다
대낮의 우물은 하늘을 번제하는 제단
저녁의 우물은 마력이 기거하는 당집
아이를 바쳤다는 소문에 이끼가 끼어 있다
물의 나이테를 열고 바깥을 엿듣는 누가 있다
두레박을 내려 몇 번이나 얼굴을 퍼올려도
제단에 바쳐진 아이가 사라지지 않는다
비커는 어린 시절의 설화
눈금에 다다를 수 없는 기억이 웅크리고 있다
수년 동안 던진 크고 작은 돌들이
내 뒤통수와 등짝을 닮은 기억을 보글거리며……
눈금 바깥을 초월하고 있다
물이 기포로 기포가 증기로 변하는 것은
아이의 주먹을 펼치는 주술일까
모든 손마디를 다 펼치면 ‘아무것’이란 게 우글거리는
이미 기억을 개종한 내가
한 손에 다른 비커를 움켜쥐고 있다
김민율
1978년 강원 강릉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학원 강사
당선 소감
“가장 좋은 때, 가장 좋은 선물 받았다”
시를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열 손가락으로 나를 세기에 충분했던 무렵이었던 것 같다. 농부인 아버지는 십장생 그림을 잘 그리셨다. 그림 귀퉁이에 적어 넣은 글귀의 출처를 알게 된 것은 내 가슴이 한 귀퉁이였음을 눈치챌 무렵이었다.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와 노천명의 시 ‘사슴’의 구절은 꿈을 동경하듯 목을 젖혀야 읽을 수 있는 높이에 걸려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고개를 젖혀놓는 목침에 올라서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시구와 눈을 맞추곤 했다. 이것이 나와 시의 첫 만남이었던 것 같다.
시와 오랫동안 헤어져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던 무렵, 주머니 속에서 웅크린 손을 꺼냈다. 잡을 수 없는 것까지 잡으려고 굵게 자라 있는 손가락이 보였다. 이 무렵 스승 오규원 선생님을 뵈었다. 내 글을 읽으시고 고개를 젖혀 내 눈을 보시며 말씀해 주셨다. “세계를 보는 눈이 있다”는 한마디가 나로 하여금 나를 믿게 했고 비로소 웅크린 손이 아닌 주먹을 쥘 수 있는 손으로 시인의 첫걸음을 가다듬을 수 있게 했다.
홀로 걷는 밤길에 불 밝혀 주신 차주일 선생님, 늘 기도해 주시는 김효현 목사님, 무엇보다도 애태움이란 기도를 오랫동안 놓지 않으신 부모님, 첫걸음을 옮겨 심을 영토를 내어주신 심사위원 김기택, 이원, 권혁웅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된 것 같다. 첫걸음을 잘 기르겠다는 약속을 하며 고개를 젖혀 먼 곳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심사평
우물과 비커 … 새로운 상상력으로 접목한 ‘이종교배’
한국경제신문만의 특징인 ‘청년 신춘문예’라는 타이틀답게 푸르고 뜨거운 청년정신이 깃든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투고작들을 읽으면서 낯설고 도전적인 작품이 더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청년의 언어에서 보고 싶은 것은 ‘두려움’이라는 불가능을 ‘열정’이라는 가능으로 바꾸는 마술이기 때문이다. 응모자들은 이 점을 한번 뒤척여보면 좋겠다.
김솔, 김민율, 배지영, 장우석의 작품을 두고 논의했고 최종적으로는 김민율과 배지영으로 좁혀 여러 논의를 거듭했다. 김솔의 ‘바오밥 씨 이야기’ 외 4편은 일상을 유머러스한 서사 구조로 만들어내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언어의 탄력이 약하다. 시적 긴장을 확보할 수 있는 언어를 고민해 본다면 좋겠다.
장우석의 ‘이태리타월’ 외 4편은 삶과 현실의 비루함을 과장 없이 풀어내는 면이 돋보였다. 심각한 진술을 언어유희를 통해 극복하는 감각도 있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약해졌다. 후반의 폭발력을 보강하면 좋겠다.
배지영의 ‘크림’ 외 5편은 상상력이 신선했다. 때로는 과감하고 때로는 간결한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 진술에 그치는 아포리즘이 걸렸다. 솔직한 언어와 솔직한 시적 언어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면 보다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김민율의 ‘비커의 샤머니즘’ 외 4편은 응모작 전반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집중하고 있는 세계가 보였다는 점에서 믿음이 갔다. 성실한 습작 기간을 거쳤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당선작인 ‘비커의 샤머니즘’은 구조가 튼실한 작품이다. 우물과 비커의 ‘이종교배 상상력’이 신선했다. 이 점이 새로운 서정성을 확보하게 했다. 우물-비커, 돌-눈금, 기억-개종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정확한 전개가 내용의 설득력을 갖게 했다. 절제된 감정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니 보다 자유로운 시적 탐험을 시도해 보아도 좋겠다. 시인으로서 첫 호명을 축하한다.
김기택, 이원, 권혁웅 시인.
(국제신문)
아령 또는 우리의 王
김분홍
이것은 두 짝, 권력에 관한 보고서이다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는 당신은 스킨십을 좋아해
자르려는 자와 붙어 있으려는 자의 대립으로 각을 세우고
같은 말을 쫑알대는 손가락에 권력이 붙는다
살을 섞으며, 당신을 사랑했다
뼈를 추리며, 당신을 증오했다
같은 동작을 세뇌시키는 당신은
뼈대만 남은 마지막 자존심
당신의 부름에 암묵적으로 동조한다
12월의 볼륨까지는 고백이 필요하다
온몸을 좌우로, 상하로 굴곡 있는 성격을 만든다
당신의 몸에서 땀방울이 떠나고 있다
권력의 잔고가 쌓인다
가슴에 왕을 만들 때까지 밥그릇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아령을 찌그러뜨리며 근로자들이 첨탑 농성을 하고 있다
아령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
사랑하는 우리의 왕
당신의 권력에 군살 한 근 붙지 않는다
당선 소감
늦은 나이에 이룬 등단의 꿈 소중히 키우겠다
시는 들숨과 날숨이며 근육 운동이라고 말한 옥타비오 파스의 시론을 읽으며 시가 아령이라고 상상합니다. 군살 없이 잘 다듬어진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화해 불가능한 단어들을 조합시켰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개미처럼 문장들을 이리저리 옮겼으나 詩는 나를 외면했습니다.
밥 먹고 잠자는 일 빼고는 시를 읽고 썼습니다. 뿌리를 신고 있는 화분 속의 신비디움이 긴 목에 꽃망울을 매단 날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생애 첫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을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잊을 수 없을 감동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그렇습니다.
시를 쓰겠다고 27년 다닌 회사를 박스 한 개에 포장했을 때, 나를 왕비처럼 대접하겠다고 격려해 준 남편, 사랑하는 아들 재훈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자식들 기도를 하시는 눈먼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어린왕자를 그려주던 권영란, 1박 2일로 시 이야기를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진혜진,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계실 김영남 선생님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시인이라는 평생 직업을 주신 세 분의 심사위원 선생님 특별히 감사합니다. 누가 되지 않도록 치열하게 쓰겠습니다. 더불어 국제신문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김분홍
1963년 충남 천안 출생. 본명 김미자.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심사평
활달한 어조에 흥미로운 상상력 응모작 중 압권
시단에도 성형이 대유행이다. 잘 빚어진 작품들은 많으나 고유한 생기를 찾기가 힘들다. 뿌연 관념과 성찰 없는 묘사와 휘황하기만 한 이미지의 더께가 시의 숨구멍을 틀어막고 있다. 장황한 요설까지 더하여 사물과 현실의 빛나는 구경은 갈수록 희박해져 간다. 꿈틀거리는 생의 비의를 추적하면서 경화된 시어의 권위를 의심하는 불화와 불온의 젊은 시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착잡한 예심 인상을 교환하며 심사진은 각 2편씩을 가려 뽑아 모두 여섯 분의 작품을 본심에서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응모자들 모두 산문적 일상을 품고 떠오르는 시적 부력에 대해 더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최종심에 남은 것은 성영희와 김분홍의 작품이다. 고른 기량과 자신만의 고유한 화법을 가지고 있어서 두 분 모두 당선의 자격이 있었다. 성영희는 더러 튀어나오는 비문과 산문적 진술이 거슬렸으나 사물을 초점화해서 날카롭게 묘사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김분홍의 경우는 무엇보다 언어와 사유의 힘이 팽팽한 긴장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특히, 활달한 어조에 흥미로운 상상력을 담은 '맹꽁이 울음'과 드물게 사회학적 상상력을 선보인 '아령 또는 우리의 王'은 전체 응모작 가운데 단연 압도적이었다. 자칫 알레고리의 단순성에 빠질 위험이 없지 않았으나 명징한 현실 인식과 날렵한 진술이 오히려 알레고리를 중층적으로 해석하는 힘이 되고 있음을 주목했다.
장고 끝에 심사진은 세련된 수사의 범람 가운데 현실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잃지 않는 김분홍을 당선자로 선정하는 데 만장일치로 합의하였고 자폐적인 언어 미학에 빠진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리라 믿는다.
최영철, 전동균, 손택수 시인
(전북일보)
갈매새, 번지점프를 하다
박복영
아찔한 둥지난간에 올라 선 아직 어린 갈매새는 주저하지않았다.
굉음처럼 절벽에 부딪쳐 일어서는 파도의 울부짖음을
두어번의 날갯짓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어미가 날아간 허공을 응시하며 뛰어내린 순간,
쏴아, 날갯짓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하강하던 몸이 떠올랐다.
한 번도 바람의 땅을 걸어본 적 없으므로 가는 발가락은 오므린 채 가려웠다.
하강은 추락을 꿈꾸지 않는 법.
가슴 깃털을 헤집고 파고드는 처녀비행의 속도는 두려움이 되지 않았다.
끊임없이 밀려와 절벽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꽉, 물고
허공에 길을 찾는 갈매새가 잠시 수평선을 읽었다.
굽은 부리에서 거친 파도의 현이 흘러나오자
휜 바람줄을 따라 기우는 날개가 다시 팽팽해졌다.
태어나서 처음 바람을 거스르는 동안 갈매새는 바람의 부피를 다 가늠할 수 있을까.
포물선의 꼭지점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슬아슬한 궤적이 허공에서 지워지고 바람줄을 따라가며
바람이 풀어놓는 행의 단서를 찾는 동안 가슴 가득 차오르는 생의 씨앗들.
의문들이 빠져나올 때마다 날개가 책장처럼 펄럭였다.
갈매새가 날개를 당기며 내려다 본 벼랑 끝엔
벗어둔 신발 같은 텅 빈 둥지 옆으로
누군가 방생한 키 작은 해국들이
코카콜라 병뚜껑 같은 머리에 노랗게 흰 뼈를 우려내고 있었다.
박복영
1962년 군산출생
월간문학,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천겅문학상 시조 대상
한국문협, 빈터 동인
당선소감
"혹평 아끼지 않은 아내에 감사"
때늦은 전화를 받고 무작정 걸었습니다. 어금니 깨문 바람이 흩뿌리는 눈발의 서사와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으로 버팅기는 앙상한 마른 이파리의 둥근 몸 같은 메타포처럼. 점퍼에 말아 넣은 몸을 구부려 그렇게 한참을 걸었지요. 시린 무릎이 저려올 때까지.
내가 찾는 말은 무엇일까. 나뭇가지에 흔들림을 주는 바람의 유혹이며, 흔들리며 화답하는 나뭇가지의 언어임을 알았지요. 흔들리거나 흔들림을 주는 우리네 삶처럼.
시의 자유 속에 등뼈를 세우고 방향을 가르쳐 주신 이향아 시인님, 이동희 시인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고맙게 잘 자라준 아이들과 어둡다며 밝은 시를 써 보라고 혹평을 아끼지 않은 아내와 빈터 동인들, 수원의 김, 윤, 홍 시인과 원주에서 늘 서두르지 말라고 다독여주신 임일진 선생님께 이 감사를 전합니다.
심사평
"밀도·울림 있어 신뢰할 만한 작품"
생명력을 가진 것들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도전하고 실험합니다.
문학 역시 그러한 것은 생명체라는 증거일 것입니다. 독자들은 새로운 문학의 모습을 신춘문예 당선 작품을 통해서 발견하려고 기대합니다. 그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올해에도 참신한 방향을 궁구하고 모색하려는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크게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모하다 싶은 실험, 일체감과 통일성이 부족한 작품도 있었습니다. 안이한 타성에 젖어 있거나 목적의식이 두드러져 보이는 주제, 수사적 표현에서 독창성이 의심되는 작품들도 있었습니다.
예선을 거쳐 올라온 아홉 사람 중에서 이정희 씨와 박복영 씨가 최종까지 남게 되었습니다.
이정희 씨의 ‘손이 만평이다’는 여유 있는 호흡과 적절한 전환이 돋보이지만 처음 3행에 걸었던 기대가 아무런 암시도 없이 끝나버린 아쉬움이 컸습니다. ‘칼’은 은유와 생략으로 간결미를 보인 반면 그만큼 추진하는 에너지가 부족했습니다.
이에 박복영 씨의 ‘갈매새, 번지점프를 하다’가 최종 당선작으로 무난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박복영 씨의 다른 시들, ‘점묘화법’, ‘소리의 걸음을 읽다’ 등도 비슷한 밀도와 울림을 보여주어 더욱 신뢰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용도 없이 시끄럽고 현란한 작금의 세상에서 응답도 보상도 없는 문학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여러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부디 여러분이 걸어가는 문학의 길에 눈부신 광명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향아, 이동희 시인
(강원일보)
벽과 담의 차이
봉윤숙
우리의 이야기는 지붕 속에서 산다
지붕을 가지고 있는 벽과 지붕이 없는 담 안엔
사슴벌레 달팽이 사금파리 장지뱀 등 여러 종류가 산다
벽은 못, 시렁 아버지의 맥고모자
달력의 날짜로 불리기도 한다
드나들거나 넘을 수 있는 높이의 담은
그림자와 낙서의 한 영역이다
벽은 문 없는 간극과 문의 사고가 가끔 어긋나기도 하지만
옷들은 그 사이에서 잘 기대어 무늬를 새긴다
담을 넘어간 소리는 키 큰 소문이 되고
담 밖에 있던 사람이 훗날
벽의 못에 걸리기도 한다
담은 올록볼록한 퍼즐 같다 퍼즐을 맞추려 틈새의 흐름을 허용한다
그 사이로 번식하고 바람이 드나들며 물길도 흐른다 구멍이 없어 마음,
다만 낙서로 대신하는 일들이 있고 수직의 소문들이 넓다
커다란 순록을 보면 따뜻한 벽이 생각난다
그들은 스스로 진화된 지붕을 가지고 있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뿔로 계절은 완성되고 빨강은 절판된다
숲은 담이다
나무들은 지붕이 없으므로 흔들린다
이야기가 없을 때는
흔들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봉윤숙
경기 부천 生
숭의여대 문창과 졸업, 중앙대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수료
당선소감
링거액처럼 떨어지던 은유들아 고맙다
내가 죽었다. 교통사고였다. 그러나 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눈뜨니 새벽이었다. 다시 태어난 느낌이다.
내 앞의 계절은 시였을까? 귀를 쫑긋거리는 이야기들이 벽과 담을 넘나든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끌림의 미학. 아니, 기우뚱거리는 불안. 손끝을 날아올랐다가 살포시 내려앉는 공포. 일어서지 않는 언어를 일으켜 세우려는 즈음 아버지는 벽의 못에 걸려 이제는 이야기가 되셨다.
웃는 얼굴의 아버지가 새삼 그립다. 매만지지 못 한 바람은 무늬를 새길 수 없고 꿰지 못하는 것들이 늘 범람했다.
똑 똑 링거액처럼 떨어지던 은유들아 고맙다.
숭의여대 강형철 선생님, 전기철 선생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은유의 날개를 달아주신 김영남 선생님과 정동진 회원님들 모두 고맙다.
곁에서 함께 해준 신랑과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 있어 행복한 날들의 연속입니다.
심사평
낯선 형식이지만 기본 위에 축조된 시
본심에 200편 가까운 응모작이 올라왔다. 최종 논의된 작품에서 `달과 비누'는 이미지 형상화 능력이 뛰어났으나 모호했다. `내 마음 속 국어사전'은 삶과 죽음의 도정에서 학습하는 언어를 국어사전으로 은유한 전개가 돋보였으나 단순 평이가 흠결로 `달과 비누'와는 상반된 흐름을 보였다.
`물고기는 첨벙하는 소리가 귀다'는 참신한 설정과 감각적 이미지 전개가 돋보였으나 응모작의 수준차가 컸다는 점에서 `벽과 담의 차이'를 당선작으로 올린다.
`벽과 담의 차이'는 활달한 수사와 짜임새 있는 전개로 재치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근사한 시를 넘어 좋은 시는, 낯선 형식이되 의미를 배반하지 않는 시다.
정서적 고양과 정화, 공감 공명이라는 시의 기본 위에 축조된 시다.
신인다운 패기를 잃지 말고 정진 대성하시길 바란다.
심사위원 이영춘·홍성란 시인
(문화일보)
어머니의 계절
최영랑
빈집엔 봄이 오지 않고 여름도 오지 않고 빈집의 계절만이 서성거린다
빈집은 쉽게 들어갈 수 없고 대문 안에 들어서도 속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곳은 시끄럽고 어스름한 저녁 누구라도 거부하는 빈집만의 습관이 있다
그림자 없는 대문에서 빈집의 툇마루를 바라보면 그곳은 포근했던 무릎, 포근한 미소가 떠올라 헐렁한 하루가 부풀었다 사라진다 눈을 감고 나는 경직된 다리를 뻗는다
가끔 무릎을 내어주는 거기, 정류장처럼 너그럽다 잡초들이 슬그머니 들어와 영역 다툼에 휘말려도 장독대의 도깨비풀이 항아리 속을 욕심내어도 그냥 말줄임표만 사용할 뿐이다
빈집은 기다린다 밤나무가 뒷마당에 밤톨을 툭 툭 던지고 바람이 기왓장을 와장창 깨뜨릴 때도 빈집은 그냥 “좋은 날이야”라고 말한다 빈집은 어느 때보다 여유로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내가 바라보는 집이 자꾸만 멀어져 간다 그 집에 가까이 가야 한다 들어가 마당을 지나 툇마루에 가서 닳은 무릎을 위로해주어야 한다 어머니의 계절
최영랑
1958년 전북 정읍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당선소감
빈집이 되어버린 어머니… 그대로 사랑합니다
폭풍으로 집이 무너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여진이 가시질 않아 따끈한 차 한 잔을 들고 출렁이는 생각들을 눈발에 하나둘 날려 보내고 있었습니다. 평온해지려는 시간 속으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당선 소식이었습니다. 예지몽이었나! 무너짐이 새로운 시작이라니….
낙숫물을 즐겨 바라보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단했던 댓돌에 둥근 홈이 생겨나고 그곳에 빗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제부턴가 현실과 꿈속을 넘나드시는 어머니, “좋은 날이야”라고 하시면서 활짝 웃을 때마다, 가슴에 찬바람 부는 빈집으로 웅크리고 계셨음을 알기나 하시려나. 아무리 덮어도 빈집이 되어버린 어머니, 지금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합니다.
돌이켜보니 고마운 분들…. 새로운 상상력을 분출하게 해주신 김영남 선생님, 늘 따뜻한 벗이 되어준 정동진카페 식구들, 누구보다 기뻐하실 부모님, 묵묵히 응원해주던 남편 그리고 경표, 경훈, 친구들, 일일이 마음 전하지 않아도 소식 듣고 기뻐해주실 저를 아는 분들과 기쁨 나누고 싶습니다.
언어들을 문장에 가둬 놓고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 때쯤, 동토의 땅을 새롭게 일굴 수 있도록 해주신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들 이름에 허물이 되지 않도록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길을 내어 주신 문화일보에도 감사드립니다. 개성적인 시인으로 거듭 태어날 것을 약속합니다.
눈이 내립니다. 빈집에 가봐야겠습니다.
툇마루에 가서 다리 한번 쭉 뻗어 봐야겠습니다.
심사평
모성 통해 사랑과 고통의 본질 깨달아
신춘문예는 한국 문학의 축제다. 새로운 시인이 탄생하는 축제의 한마당이다. 이 축제에 참여한 이는 맛있는 음식도 나누어 먹고 오랜만에 배도 좀 불러야 한다. 그러나 이번 축제의 상에 놓인 음식들은 숙성과 발효가 되지 않은 겉절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시는 겉절이보다 오래 숙성되고 발효된 맛의 깊이를 요구한다. 그릇에 담긴 음식이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니라면 그릇 또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모순과 부조리를 이야기하는 시라 하더라도 부조리하다는 메시지밖에 없다면 그 또한 시로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박현영의 <유형에 대한 탐구>, 박민서의 <실록>, 김재인의 <오늘의 만남>, 최영은의 <어머니의 계절> 등 4편이었다. <유형에 대한 탐구>는 유형에 대한 구체성이 모호했다. 제목이라는 그릇만 크고 그릇에 담긴 내용은 “유형에 대해 날마다 간구했지만/ 질문은 의문으로 남아/ 이곳을 비추는 하나의 불빛이 된다”처럼 모호했다. <실록> 또한 “무화과 묘목을 심으려고 판/ 마당 한 귀퉁이에서 녹슨 자물통이 나왔다”고 했으나, ‘녹슨 자물통’이 시의 내용물로 제시만 되고 그 의미에 대한 추구가 결여되었다. <오늘의 만남> 또한 수사는 화려하나 ‘만남’의 내용이 빈약하다는 점에서 신뢰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모성을 ‘빈집’에 비유한 <어머니의 계절>은 비교적 완성도가 높았다. 모성을 통해 사랑과 고통의 본질을 깨닫고 있다는 점 또한 돋보여 당선작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시를 쓰는 일도 노력하는 일이다. 당선자는 더욱 노력함으로써 한국 시단의 밑거름이 되는 시인으로 성장해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 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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