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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일정씨영천화수회 원문보기 글쓴이: (원보)정정용
*양계정자
*鄭好仁정호인 1597~1655년 자는子見 호가陽溪로 4세때부터 조부 호수공 휘 世雅께 글을 배워 6세때 손모당 문하에서 수학하여 장여헌 문하에 나아가 통강하기도 했다,
14세에 별과 향시에 합격하고 광해10년 1618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도 당시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어수선하여 문을 닫고 대과 응시엔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1623년 왕조가 혁신되자 비로소 1627년에 문과 병과에 급제하니 성균관 학유에 올랐고 1630년에 부친(용양위 부사과 만호공 휘 安藩)의 상을 당하고 1631년에 또 화산권씨 모친상을 당하여 정성을 다하여 부모3년상을 예로 마치고,성균관 학록,학정,전직에 승진 곳바로
당일에 감찰에 전배,형조좌랑,예조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에 전임,조산대부 병조좌랑,병조정량,형조좌랑,거처 예조정랑,춘추관 기주관을 겸직 한것이 내직의 벼슬이었고,,,
외직으론 양산군수,함안군수,진주목사,남원도호부사가 말직으로 病으로 관사에서 돌아가셨다,
내직에서는 명망이 높아 명성이 자자했고 외직에서는 다니는 고을마다 덕망이 높아 고을민들이 선정비를 세웠으며 임금이 公에게 속옷을 하사 하였답니다,
詩
鄭好仁
暝烟歸盡空山靜명연귀진공산정, 자욱한 안개 걷히고 텅빈산은 고요한데
明月尋人夜到家명월심인도야가, 밝은달이 사람찾아 집으로 들어오고
詹角梧桐生淡影첨각오동생담영, 처마끝의 오동나무 엷은그림자 생기면
窓前江水樣寒波창전강수양한파, 집앞에 찬 물결이 강물에 일어나네
隨行散百疑無我수행산백의무아, 가는데 따라 백사람으로 흩어지니 내가 없는것 같고
對酒成三更有花대주성삼갱유화, 술잔을 드니 세사람이되고 또 꽃이 있도다
勝地閑遊天所餉승지한유천소향, 명승지에서 한가로이 보낸것은 하늘이 주시고
淸光偏向此中多청광편향차중다, 해맑은 달빛 기우려 여기를 밝게 비춰주네,
운부사로부터 은해사에 이르러,,,
偶到招是境우도초시경, 우영히 산사 경내에 들어오니
林泉入眼明임천입안명, 숲과 물이 눈에 밝게 부시니
驚禽穿嶽色경금천악색, 놀란새가 높은 산의 노을을 뚫고
倦馬踏秋聲권마답추성, 지친 말은 가을소리 밟아내니
數日難爲別수일난위별, 여러날 지나 이별하기 어려운데
何時續此行하시속차행, 어느때 다시올까
道人來謂淸도인래위청, 도인이 내게 말하기를
雪景看尤淸설경간우청, 눈 덮인 경치가 더욱 청아하다고,,,
운부사에서,
好在雲浮寺호재운부사, 예나 다름없는 운부사에
공年今再攀공년금재반, 20년만에 다시 왔네 (공=손잡을공)3획
樓高寬客眼루고관객안, 누각이 높아 시야가 넓고
木落瘦山顔목락수산안, 나뭇잎 떨어져 산 모습 수척하니
洗遣三生劫세견삼생겁, 삼생의 겁을 씻어 보내고
偸成半日閒유성반일한, 한나절을 한가로이 보냈는데
谷深人不到곡심인부도, 골이 깊어 오는 사람 하나 없고
林外鳥知還임외조지환, 나무숲에서 놀던 새들만 찾아오네,
벗 龍潭에게 준 여러 시중1수
水대依山麓수대의산록, 물레방아 산기슭에 의지해 (물레방아대,자)
無人夜自撞무인야자당, 사람없는 밤중에도 저절로 쿵덕거리네
長鯨初噴浪장경초분랑, 큰고래가 처음 물을 내뿜고
怒虎更跳石工노호갱조강, 성낸 호랑이 다시 돌다리를 뛰는데(징금다리강,자
淅淅聲搖壑석석성요학, 줄줄 흘러내리는 물소리 계곡을 뒤흔들고
轟轟響到窓굉굉항도창, 쿵쾅 방앗공 소리 창가에 울려지니
客來聽不寐객래청부매, 그 소리에 나그네는 잠 못 이루고
更난對紅강갱난대홍강, 붉은등잔을 마주보며 밤을 지세운다네,(난=늦을난,자
(강=등잔강,자
전서강에게 한수
雨過長洲검斷虹우과장주검단홍, 비 개인 긴 모래톱에 무지게 걷히고
微波不起水晶宮미파불기수정궁, 水神궁전에는 물결이 고요하니
半生蓑釣空蒙裏반생사조공몽리, 반평생 강호에서 낚시 드리웠나니
也識天公餉此翁야식천공향차옹, 하나님께서 이 늙은이를 먹어주었구려,,,
*전서강=용궁전씨 휘 삼성,으로 몽룡의 아들의 4째아들로 명계공 휘 정호의,의 장인으로
임진왜란때 중형 삼익과 함께 영천 호수공 의병진에 참가했고 고향은 영천 명산리 대추골, 양계공께서 이집에 전삼익公의 부탁으로 그의 부친의 묘갈을 지었으며, 전삼익公이 돌아가시자 서강공의 부탁으로 전삼익공의 묘갈을 지어 주었다.
又
公嶽초嶢響晩鍾공악초요향만종, 높은 공산위에서 저녁종이 울리는데
重來客子빈成蓬중래객자빈성봉, 다시온 나그네 백발이 성성하구나
逢君辛作조燈詠봉군신작조등영, 그대 만나 다행히 심지 돋우고 읊조리며
永夕方知得酒濃영석방지득주농, 긴긴밤 술 마시고 취해 보리라
辰値黃花霜結朶진치황화상결타, 때마침 국화피어 송이에 서리 맺히고
木垂紅葉錦粧容목수홍엽금장용, 나뭇잎 물든단풍 비단으로 단장한 얼굴일세
谷雲歸處山仍寂곡운귀처산잉적, 골짜기구름 돌아가는 곳에 산은 적막하여
又看窓前月掛松우간창전월괘송, 창가에 달 걸린 소나무를 보노라,,,
*영천시 자양면 성곡동 삼휴정
*삼휴詩를 쓰기 전에 설명이 조금 필요하네요,
*양계공과 삼휴공 휘 호신의 관계는 아주 특별한 관계로 삼휴공은 호군공 휘 수번의 3子로 1605년생 이시지요,
양계공의 종형제중에는 5종계 밖에 없는데, 호수공의 (넷) 아들중에 3子 안번과 4子 수번,만에아들이 있었구요, 만호공 안번에게는 호인과 호문,이요 호군공 수번에게는 호의,호례,호신,이지요, 종반간에 5형제를 후세에는 이를 두고 5종계 집이라 합니다, 이들 중에 맏 형이 양계공이고 막네가 삼휴공이십니다,
삼휴공은 출생하여 3살때 어머님 창녕조씨가 돌아가시고 16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줄곳 할머니 손씨 손에 자라면서 숙모 화산권씨의 품에 자랐다, 어봉공 휘 호문과 동갑生 이다보니 보고 듣는게 없더라도 이치를 살펴보면 짐작이 가는 부분이라 하겟습니다,,,
삼휴공이 어릴때 부터 종형 양계를 가장 많이 따랐다, 손모당 문하에서도 형 들은 자주 밖앗놀이를 나가다가 손선생에게 혼이난 적이 한번이 있었다(호수실기.손선생에 답 한 편지내용),,,
삼휴공은 언제나 양계형 옆에 앉아 공부를 하니 손선생이 가장 어여삐 여겼으며 가장 사랑했다 합니다, 장성 하여셔도 손선생이 양계에게 편지를 보낼때 항상 호신을 통하여 부탁했다,(손모당 문집) 삼휴공의 3형제는 어릴때 중부 만호공 안번에게 글을 배워(명계문집) 모두 종형 양계형이 있는 손모당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또 장여헌 문하에서도 배웠다,
삼휴공이 장성하여 3형제가 모두 명산동에서(현 영천.석동)기거 하시다가 1630년쯤에 양계공이 영천 노항에 하천제를 중수하고 재사,등 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삼휴공이 양계형에게 저는 할아버님이 사시던 곳에 이거하여 살고싶다고 청을 하여 양계공은 반갑게 승낙하며 이거하는 축하 詩를 지어 당시의 반가운 심경을 고변 한다,
이때에 양계형과 명계,요산,형이 삼휴공에게 이거를 축하하는 詩문이 있다,(양계문집,명계문집)
*삼휴공이 명산리에서 노항으로 이거하여 사시다가 詩1수를 짓는데,,,
鄭好信
芳辰賞花花落則休방진상화화락즉휴,따뜻한 봄에 꽃이피면 꽃을 보다가 꽃이 지면 쉬고
良宵對月月傾則休양소대월월경즉휴,달이 떠면 밝은달을 보다가 달이 지면 쉬고
閒中得酒酒盡則休한중득주주진즉휴,맛있는 술이 익어면 술을 마시다가 술이 다하면 쉬노라,,,
*삼휴공이 술을 좋아하셨는데, 찾아오는 손님에게 술을 대접 했는데 客이 술 맛이 좋다고 더 내어달라고 아무리 사정해도 삼휴공은 그것이 전부라 하시고 내어 주질않았다 한다,(마지막 술 독을,,)
하루는 집에 백형 명계공와 중형 요산공이 찾아와 삼형제가 오랜만에 술 상을 차려놓고 회포를 푸는 자리에 형님 들이 술을 조금만 더 내어 오라고 했는데,
삼휴공이 내가 먹을 라고 해도 술 독이 비었는데 없습니다 이제 그만 합시다,,라고 했다,,,
그러고 바로 그때,,,,
問
閒花開謝無詩盡한화개사무시진, 좋은꽃은 피고 지니 다하는 때가 없고
明月多情缺又鉤명월다정결우구, 밝은 달은 다정하여 기울고 또 차 오르고
三萬六千須日醉삼만육천수일취, 한평생 취하지 않는 날이 없는데
主人何事更三休주인하사갱삼휴, 주인은 무슨 일로 3번 쉰다고 하는공??
答
無花無月暫支이무화무월잠지이, 꽃도 없고 달도 없으면 잠시 턱 괴고
坐사床頭酒熟期좌사상두주숙기. 평상위에 앉아 술 익기만 기다린다네
誰知此老三休意수지차노삼휴의, 이 늙은이 3번쉬는 뜻을 누가 알겠나
休了還無休了時휴료환무휴료시, 쉰다고 해도 실상은 쉬는 것이 아님을,,,,,
鄭好仁
이렇게 詩를 집 마당에서 읊으며 들어오니,,,,,,
바로 양계형이 안강 곤봉공,쌍봉공집에서 놀다가 동생 호신집에 들리는 길이였다,
당시 20살이나 손위이신 쌍봉공에게 양계공은 자주 왕래 한것으로 보여 집니다,
3형제들이 모두 문 밖에 나와 맞이하고는 방에 들어오니 집 주인 호신은 창고에 들어가 술 독을 1독 그대로 안고 들어왔는데,,,
명계형과 요산형이 노라 눈만 끔뻑끔뻑 거리니 동생 호신이 이 술 독은 양계형이 오시면 드리려고 담아 둔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두 형들이,,누가 뭐라 하는가!!!,,,
삼휴공은 언제나 양계형의 술을 담아놓고 누가 와도 감춰 두었다는 설,,,입니다,,,
귀한 글은,,,, 글의 깊이를 아는이가 알아본다고 하나요,,, ㅎㅎㅎ
그 만큼 양계형과 삼휴동생의 사이랐다고 합니다,,,,
어째든 양계형이 3번 쉰다는 동생의 시 문을 해석하니 모든 사람들이 그때 부터 호신을 삼휴라고 이름 하였다 하네요,,,
양계공이 양산군수로 떠나시며 신홍망에게 답한 편지
卽拜惠翰伋審 退休林泉 體履沖謐 區區感慰難量 好仁 意外承海邑除 命 聖恩至渥
而皓首殘갈 豈堪朱墨之役 竊欲投狀乞免 而荒年弊邑 跡涉規避 將以來初 强作肅行
數畦杞菊 方看漸茁 而抛鋤遠出 亦非細事 憐歎而己 伯父 壬辰殉節事 言之痛心
當日納壙之文 一不收錄 只有先 先生뢰語一節 至今奉閱 可以發揚忠孝 起九原於曠世
而此亦偶得於知 舊間 字劃漫환 往往有熹處 故玆以仰陳 伏望先稿中 此本騰送 以爲
永示來裔之地如何
곧 혜안을 받들어 살펴보니 임천에 무러나 쉬는데 몸과 행동이 평온하다니 위안됨이
한량없나이다.
호인이 뜻밖에 바닷가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하는 교지를 받으니 성은이 지극히 두려우나 흰 머리에 늙은 몸이 어찌 공무를 감당할 수 있겠나만은. 곧 소를 올려 사직을 하려해도 흉년이 들어 피폐한 고을이라 고의로 피한다는 혐의를 입을까봐, 다음달 초순에 사은숙배를 하고자 하나 몇 고랑의 구기자와 국화가 막 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서 호미를 던지고 멀리 나가고자 하니 또한 작은 일이 아니라 탄식할 따름이오,
백부께서(백암공) 임진왜란에 순절하신 일은 말만 해도 가슴이 아픔니다,
그때 무덤속에 묻은 글을 하나도 수록하지 못하고 단지 선서생의 뇌문 한 편 만 있었는데 지금 받들어 읽음에 충효를 발양해서 죽은 사람을 다시 세상에 일으킬 것 같은데
그러나 이것도 친구 간에 우연히 얻은 것이라 읽고 또읽어 본 지라 종이가 피거나 때가 묻어 자획이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고 손 때로 손상되어 보이질 않는 부분이 있으므로 우러러 청 하오니 (先稿)선고 중에서 이 글을 베껴 보내주시면 후손에게 보여주도록 해
주심이 어떠하리오??
鄭好仁
*이 편지에 내용은 임진왜란시에 백암공 鄭宜藩께서 임란창의 하여 경주 서천전투에서 순절하신
것에 부공 이신 진사공 鄭世雅께서 아들의 친구에게 시와 만사를 모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시총으로 당시 申之悌公이 지은 절친한 친구 정의번에게 한 만사로 그 것을 신승지의 아들인孤松 申弘望에게 받은 편지의 답장을 보낸 편지 내용입니다,
*신홍망=1600~1673년 아주신씨로 승지 신지제의 아들로 장여헌 문하에서 공부하며 양계공 보다는 3살 어린 친숙한 벗 으로 1627년에 진사,1639년에 별시병과로 지평,정언,풍기군수,역임,1652년에 사헌부지평,장령,을 지냈다, 아버지 신 승지의 호는 梧峰오봉,으로 백암공의 친한 벗,
첫댓글 일부분을 교정하여 다시 올렸습니다,, 언제나 존경 하시는 집안 어르신께 가르침을 높이 받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