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강 들판이 잘 어우러진 대구분지에는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였으며,
따라서 관개와 치수의 기술 또한 발달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북대학교박물관에는
신라 법흥왕 때에 대구에 이미 수리시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무술명오작비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 상동교 동편 신천변에는
조선시대에 달서천에 대규모 제방을 축조하여
하류의 홍수를 방지하였다는

판관 이서의 공적을 기리는 이공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농업의 발달로 인하여 먹을 것이 풍부해지고,
이 땅에 오래 터 잡아 살아온 달구족의 포용성으로 인하여,
달구벌에는 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따라서 여러 곳에 입향씨족의 세거지가 생겨났습니다.
달구벌의 수도인 달성이 세거지가 되었던 달성서씨,

본리동의 남평문씨세거지,

둔산동 옻골 경주최씨세거지,

하빈 묘골박씨세거지.

평광동 단양우씨세거지,

현풍솔예곽씨세거지 등이

대구사람이 되어 대구를 포용과 통합의 도시로 만든 주인공들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귀화한 사람들도 대구가 좋아 많이 살러 오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가토 키요마사의 부장으로 와서 정의로운 이 나라가 좋아 귀화한
사야가는 사성 김해김씨를 하사받고,
조총의 제조법을 전수하기도 하면서 스스로 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후
대구에 정착하여 향약을 제정하기도 하여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창 우록동의 녹동서원이 그를 모신 서원이며, 마을에는 후손들이 살고 있습니다.
당나라 시성 두보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군 장수 이여송의 부장으로 왔다가 전쟁이 끝나고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귀화한 두사충도 대구에 살았습니다.
그가 살았던 곳이 대명동이며, 죽어서 만촌동에 묻혔습니다.
묘소 앞 사당에는 모명재라 이름붙여져 있으며,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후손이 모명재를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대구 제일의 유원지가 되어 있는 수성못의 남쪽 산기슭 체육공원 서쪽에는
자그만 일본사람의 묘소가 하나 있습니다.

미즈사키 린타로라는 사람인데, 바로 수성못을 축조한 사람입니다.
미즈사키는 일제시대인 1915년 대구로 와서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수성못을 축조하고 관리하다가 1939년 임종하면서,
수성못이 보이는 곳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 땅에 신종교를 뿌리내리고,
새로운 의술로 대구를 질병으로부터 구제하고자 했던
많은 선교사들도 달구벌의 언덕에 뼈를 묻었습니다.

이렇듯 대구로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는 가운데,
임진․정유 양란 후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되고 대구읍성이 축조되면서
명실 공히 영남의 수도로서 대도시로 발전하는 기틀이 되었습니다.
포정동에는 당시의 경상감영의 정청이었던 선화당과 관찰사의 거처였던 징청각이 남아 있으며,

감영 앞에 세워진 도로원표를 보면

바로 이곳이 영남지방의 수도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을사조약 후 일본인들에 의해 뜯겨 나간 대구읍성의 자리는 도로로 만들어졌는데,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같이 훼손되었던 감영의 정문이었던 관풍루는 달성공원으로 옮겨져 복원되어 있고,
읍성의 남문이었던 영남제일관은 만촌동의 망우공원에 복원되어 있습니다.

망우공원에는 영영축성비와 대구부수성비도 같이 보존되어 있어

대구읍성의 축성과 수성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라시대의 불교와 조선시대의 유교의 번성과 더불어
근대 종교의 유입으로 대구의 정신문화는 한층 풍부해지게 되었습니다.
1898년에 제일교회의 전신인 남성정교회가 건립되었으며,

1899년에 계산성당이 지어졌습니다.

동산병원 내의 의료선교박물관에서는 지역의 기독교 전파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