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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광장(梧竹廣場)에 담긴 진주 시민의 소망
진주시민이면 누구나 과거 국제 로타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국제 로타리를 오죽광장(梧竹廣場)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오죽광장(梧竹廣場)은 한자로 벽오동 나무 오(梧)와 대죽(竹)을 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나무를 심어 둔 것을 보고 까마귀 오(烏) 대죽(竹)을 연상하여 오죽광장인데 왜 검은 대를 심지 않고 일반 대를 심은 것에 대해 의아해 한다. 그것은 대나무만 보고 오동나무는 보지 못한데서 기인한 오해이다. 사실 오죽광장(梧竹廣場)으로 이름을 바꾼 사연에는 진주 시민의 애잔하고 간절한 소망이 내포 되어 있는데 그 연유는 다음의 이야기를 읽고나면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진주는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는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래서 고려 때 이미「三南人才 半晉州」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고려 예종 때 여진족 때문에 나라가 어수선 한 적이 있었다. 민심이 흉흉하면 괴담이 돌기 마련이다. 그 때에 나돈 소문중에 '불원간에 진주에서 보위에 오를 사람이 등장하여 나라를 안정시킨다' 라는 소문이 퍼진다. 이 소문을 접한 조정에서 무도한 간신 척준경을 보내 진주의 「氣」를 꺾도록 한다. 척준경이 제일 먼저 시도한 일은 진주의 맥인 대봉산(大鳳山)이란 이름을 비봉산으로 바꾼다. 대봉산은 산세가 큰 봉황이 앉은 것과 같다는 의미인데 반해 비봉산(飛鳳山)은 봉이 날아 갔다는 의미다. 비봉산(飛鳳山)으로부르게 함은 운이 살아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지금의 봉알자리에 봉의 알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것도 파괴한다. 그것도 모자라 비봉산 서쪽편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의 이름은 봉이 노닌다는 뜻을 가진 봉지(鳳池)라는 연못이다. 그런데 그 연못의 이름마저도 가마못(못의 물이 끓는다 의미)이라고 바꿔 부르게 하여 봉의 기상마저 꺾고만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포은 정몽주선생이 후일에 진주를 방문하여 비봉산 비봉루를 둘러보고 시 한 수를 남긴다.
圃隱先生의 詩
飛鳳山前 飛鳳樓 비봉산 앞에는 비롱루가 있고 樓中宿客 夢悠悠 누각에 잠든 객의 꿈속에 세월이 유구한데 地靈人傑 姜河鄭 영지에서 난다는 인물 강씨 하씨 정씨 名與長江 萬古流 그 명성 남강과 더불어 영원히 흐르리라.
진주를 음해한 세력은 조선시대에도 등장한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등극을 한 후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는 진주 지방에서 반대 세력이 등장할까 두려 워서 무학대사로 하여금 진주 지리를 살피게 하였다. 먼저 무학대사가 찾은 곳은 진주성이다. 진주성을 아무리 살펴 봐도 철웅성의 요새로는 손색이 없을지라도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할 만한 풍수 지리적 명당은 아니었다. 그래서 안도하는 마음으로 멍하니 있다가 무심결에 비봉산을 바라 보게 된다. 비봉산을 바라본 무학대사는 한 눈에 명지임을 알게 된다. 봉황이 나는 모양의 산세에 봉황이 알을 품은 것과 같은 지형의 봉 알자리와 대롱 골의 황새 터가 연결된 지맥을 보고 「三南人才 半晉州」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를 유추하게 된다. 비록 척준경에 의해 비봉산이 많이 훼손 되기는 했어도 「氣」가 흐르는 맥은 아직도 충만했다.그래서 무학대사가 그 「氣」마저 꺾기 위해 지금의 비봉산과 봉원초등학교 사이의 연못이 있던 산등성 지맥 마저 끊고 만다. 비봉산 동쪽을 살피던 무학대사는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생겨났다. 그것은 비봉루 옆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향교였다. 향교의 위치를 보니 뒤로는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리고 앞으로는 남강을 품에 않고 있어 장풍득수(藏風得水)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음이 무학대사를 전율케 했다. 이 자리에 향교가 있는 한 특출한 인재는 계속 배출될 것이고 혹시라도 새로 세운 이씨 조선에 맞설 역적이 등장할까 두려워 향교 마저 옮기게 한다. 그러고 난 후 남쪽을 살피는데 남강하류 새 벼리 덤 고개 밑에 돌출된 돌산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무학대사는 또 장탄식을 한다. 이곳이 석용 골이다. 「정말 축복받은 땅이로구나! 웬 골골마다 이렇게 명당자리만 있다니?」 이것을 두고는 앞의 명당 파괴도 「氣」를 꺾는데 역부족일 것 같아 이것 마저도 파괴하고 만다. 전설에 의하면 인부를 시켜 석용을 파괴하는데 떨어져 나오는 돌 하나하나가 모두 용 비늘 같았고, 돌이 떨어져 나올 때 마다 붉은색의 물이 흘러 나왔는데 마치 용의 피같이 보였다. 붉은색의 물은 의령에 이르기 까지 선명했다고 한다. 무학 대사가 비록 진주의 지맥을 끊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충절의 인물은 계속 배출된다. 방원을 도와 태종을 보위에 오르게 한 ‘하륜’ 임진왜란 때 ‘논개’ ‘삼장사’ ‘삼열사’를 비롯한 많은 지도적 인물들이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의 이름을 빛낸다. 각설하고 '봉황은 오동나무에 둥지를 틀고 죽실(竹實) 즉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고 한다. 오죽광장(梧竹廣場)에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심은 것은 비봉 산에서 날아 나온 봉황이 이곳에서 둥지를 틀어 다시 「氣」를 회복하여 「三南人才 半晉州」의 옛 명성을 되찾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묻어 있다. 이왕 이렇게 좋은 뜻으로 오죽광장을 만들었다면 또 하나 간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오동나무를 제대로 키우는 일이다. 오동나무를 실생으로 심어 가꾸면 나무 둥치의 속이 비어 좋은 재목으로 쓸 수 없다. 그런데 원 순을 잘라 곁순을 나게 하기를 반복할수록 속은 점점 꽉 차게 된다. 속이 꽉 찬 오동나무를 베어 악기나 가구를 만들면 명품이 된다고 한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고진감래를 할수록 더 단단해 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앞으로 오죽광장(梧竹廣場)을 지나는 걸음이 있으면 무심코 지나지 말고 그 광장에 담겨 있는 뜻도 한번 헤아려 보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