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초록(國文抄錄)
평생을 우리의 아름다움을 찾아 애쓴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의 학문적 성과에 대해 체계적이며 총괄적으로 연구한 것이 거의 없으며, 또한 그의 가치를 아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한국 최초의 미학자이자 미술사학자였던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의
영향을 받아 한국미술사 연구에 뜻을 세우게 된 최순우는 한국미에 대한 접근 방식이 양식사적인 측면보다는 주로 경험적 근거에 입각한 강한 직관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논리적 보증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비판의 여지가 있긴 하나 그의 놀랄만한 미의식과 체험을 통해 얻은 한국미술관으로 구체적,
역사적 현상에 대한 한국미술의 미적 특질을 규명하여 우리 민족에게 한국미를 쉽게 느낄 수 있게 한 그는 한국미 발견의 선구자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점에 입각하여 본 논문에서는 일생을 외도없이 우리미술에
정성을 쏟으면서 한국미술에 대한 눈을 뜨게 한 그의 한국미술관과 그의 높은 견식과 안목으로 본 한국미적 주요특징에 대해 검토해 보았는데 이와
같은 그의 체험적인 학문적 성과는 시대별(선사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장르별(도자기, 건축, 회화, 공예, 조각
등)로 나누어 우리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하였으며, 이러한 미술품 등에서 느끼는 독자적인 한국미의 특질을 규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한국미술관 특색을 형성한 배경에 관한 연구와
시대변천으로 본 한국미술관에 대한 연구(제Ⅲ장)를 하였고, 나아가서 그가 탐구한 한국미적 주요특징(제Ⅳ장)을 살펴보았다.
그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우리의 독특한 것은 우리 강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며 거기에는 우리민족의 성정이나 생활이 녹아 있어 그들이 표현한 미술품에 나타난 아름다움도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익살] [은근] [고요] [순리] [백색] [담조(淡調)] [추상] 등 독자적인 미의 특질을 지녀 세계적인 미술품으로 당당히 자리잡은 것이라
했다.
이렇듯 그의 한국미에 대한 연구는 매우 가치있는 것으로 특히 그가
남긴 글귀와 많은 논문들은 학문적이고 논술적인 어떤 글보다도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한국적 미학으로 귀중한 한국미술사의 큰 지표가 될
것이다.
Ⅰ. 서 론
1. 연구목적 및 의의1
2. 연구방법
Ⅱ. 최순우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1. 생애
2. 사상적 배경
1) 한국미술관에 관한 관점
2) 한국미술의 본질 규명을 위한 방법론적 시각
3) 미의식
Ⅲ. 최순우의 한국미술관
1. 한국미적 특색 형성의 배경에 관한 연구
1) 자연환경
2) 역사적 환경
2. 시대 변천으로 본 한국 미술관에 대한 연구
1) 선사시대
2) 삼국시대
3) 통일신라시대
4) 고려시대
5) 조선시대
Ⅳ. 최순우가 본 한국미적 주요 특징
1. 익살의 아름다움
2. 은근의 아름다움
3. 순리(順理)의 아름다움
4. 백색의 아름다움
5. 담조(淡調)의 아름다움
6. 추상의 아름다움
Ⅴ. 결 론
참고문헌
ABSTRACT
Ⅰ. 서 론
1. 연구목적 및 의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총괄적이며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며 평생을 우리의 아름다움을 찾아 애쓴 그의 가치를 아는 사람도 흔하지
않다.
그래서 한국미의 정체성(正體性)과 전통성을 일깨워 우리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연구한 그의 학문은 서구미술사상의 무분별하고 무비판적인 수용으로 인하여 서양미술 영역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리의 교육현장을 보더라도
한국미에 대한 고찰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느껴 그의 사상을 연구하게 되었다.
일생을 외도없이 우리 미술에 정성을 쏟으면서 한국 미술 전반을
관조할 수 있도록 개관한 ≪한국미술사 개설≫들을 통해 우리 미술사의 큰 숙제를 풀어냈으며 우리 미술사학계의 길잡이가 된 분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에 대한 연구는 불모지나 다름없으며, 한국미에 대한 그의 높은 견식과 안목을 주로 실생활에서 실천하여 많은 사람들이 큰 논자로 자기 학문에만
지나치게 몰두하거나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으려는데 반해 그는 괄목할만한 논문과 한국미에 대한 수필과 해설원고로 우리 것에 대한 이해를 북돋아
주었고, 그의 특유의 깔끔하고 부드럽고 구수하며 은유적인 언어 구사의 절묘함으로 그의 글을 읽으면 문화적 의미를 터득할 수 있게 했으나 한국미에
대한 눈을 뜨게 하는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전체성을 규명해 내지는 못했다.
최순우는 19세의 나이로 문화재 관련 업무에 종사하기 시작하여
고유섭 문하에서 사사하였는데 이것은 고유섭의 본격적인 학문 활동때와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의 미술사적 활동은 직간접적으로 고유섭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유섭 예술사상의 형성은 고유섭이 살았던 시대가 일제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에게 미술을 가르친 스승 역시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일본의 미학, 미술사를 받아들였고, 19세기 서구 근대미학과
미술사학의 방법론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으며, 또한 그는 미술사학에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론을 받아들임으로써 양식사-사회경제사-정신사의 변모를
가져왔는데, 결국 고유섭의 미술사학은 양식사에서부터 사회경제사로, 그리고 미술사학으로 그의 입장을 변모시켜 왔지만 그의 토대는 어디까지나
정신사적 입장에 두었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명대는 고유섭에 대한 몇가지 한계점을 지적하였는데
첫째, 고유섭은 말년에 가서 한국미술사학의 이론을 정신적인데 너무 치우치게 한 나머지 한국 미술의 특징을 숙조(淑照)나 애조(哀調) 또는
무관심성과 같은 것으로 보는 등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본의아니게 받아들였다는 점이며 둘째는 한국미술사학을 일원적으로 보고 있는 점이라 하였다.
이에 강우방도 정신사로서의 미술사학은 미적 체험, 생명의 체험,
종교적 체험후의 시론적(試論的) 작업으로 미술사학의 본령은 미적 체험에 의한 올바른 양식사에 있다고 하면서 고유섭의 정신사적 미술사학에 치우친
점을 말하였다.
그러나 최순우는 한국미에 대한 접근 방식을 양식사적인 측면보다는
경험적 근거에 입각한 강한 직관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논리적 보증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비판의 여지가 남아 있기도 하다.
최순우는 해방직후 미술사를 하고자 한 이들과 1950년대 말기
모임을 시작해서 1960년 여름 [고고미술 동인회]를 발족하여 전국의 유적을 누비면서 샅샅이 유존 문화재의 현상을 밝혀 새 자료를 발굴하고
개발하면서 우리의 산하와 문화에 대한 애착과 사랑으로 우리 강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흙, 풀, 낯선 돌 하나에서도 독특한 우리의 멋을
찾아내었다. 이처럼 그는 한국미술사학의 양식론에서 출발하였다기 보다 박물관인으로서 체험을 바탕으로 한 다분히 심미주의 미학에 기반을 둔
기질론(氣質論)에서부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의 한국 미술사에 대한 접근 방법이 그에 대한 비판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만이 소유한 장점이기도 한 것이다.
강우방은 미술사학의 과제를 [이론, 체험, 실천의 세 가지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시각적 사고를 통하여 성립하는 학문]이라고 하였는데, 그의 이와 같은 말은 미술사학의 방법에 있어서 이론 못지 않게 체험도
중요함을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활양식과 심성, 그리고 우리나라의 자연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분명한 것은 고유섭이 경성대학 미학, 미술사학과에서
한국미술사를 전공하여 우리 한국 사람 스스로가 손을 댄 우리 미술사학의 시발점이 되고 10여년이란 짧은 연구생활에서 이룩한 많은 논고들이 오늘날
우리 미술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면 최순우는 황수영, 진홍섭 등과 같이 고유섭의 학문 풍토를 계승한 제1세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일생을 한국미 연구에 몸바친 그의 미의식과 체험을 통한
한국미술관에 대한 미술의 구체적, 역사적 현상에 대한 한국미술의 미적 특질규명에 중점을 두고 검토해 보았다.
최순우의 한국미에 대한 연구를 좀 더 깊이있게 검토해 봄으로써 그가
한국 미술사에 끼친 영향과 한국미술을 전공하는 학도는 물론 세계화, 정보화 시대라 하여 우리만이 지닌 고귀한 아름다움을 자칫 잃기 쉬운 우리
모두에게 우리 문화와 우리 것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여 우리 문화를 세계화 시키는데 좋은 자료가 되었으면 한다.
특히 야나기 무네요시와 그의 영향을 받은 고유섭이 한국미의 백색에
대한 미감을 비애의 미로 표현한 것에 반해 최순우가 달리 느낀 백색미감은 괄목할 만 하다.
학문적 용어보다 한국인의 마음에 한국미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그의 영롱한 글 솜씨인 것 같아서 그의 말과 글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또한 회화, 도자기, 조각, 공예, 건축 등에서 우리에게 전달된
한국미를 통해 한국인으로써 커다란 자부심을 갖게 하고 이러한 우리 문화재를 보호하는 대책도 시급함을 알리고 싶다.
2. 연구방법
본 논문은 최순우가 그의 일생을 통해 한국미술사를 보다 분명하게
체계화시키고 정립시키는 일과 그의 미의식과 체험을 통해 한국미술관에 대한 구체적이며 역사적 현상에 대한 한국미술의 미적 특질을 규명한 것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그래서 본 논문을 시대변천으로 본 그의 한국미술관을 고찰해 보았고,
또한 그가 탐구한 한국미적 주요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연구함에 있어 그에 관한 문헌이 많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가 남긴 많은 글과 말들을 묶은 최순우의 저서 ≪최순우전집≫ 5권과 그에 관한 서적들과 생전에 그와 가까웠던 분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장님이신 정양모 관장님과 그의 외동딸 최수정의 도움을 얻어 본 논문을 기술하였다.
Ⅱ. 최순우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1. 생애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는 1916년 4월 27일 개성에서 부친
최종성(崔鍾聲)씨와 모친 양순섬(梁順蟾)여사와의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양주(陽州)이며 소요공파(逍遙公派)로 본명은
희순(熙淳), 필명은 순우(淳雨)이다.
일찍부터 남달리 문학에 재능을 발휘하여 소년 시절에는 소설가
지망생이던 최순우는 개성 송도 보통학교에 다니던 방학 중 어느날 개성박물관을 산책하게 되었는데 마침 당시 개성부립박물관장이던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이 몇 명의 일본인 손님에게 박물관에 대해 소개할 때 고유섭이 깊이 있는 해박한 지식으로 소장품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에 감화를 받아
한국 미술사 연구에 뜻을 세우게 되었으며 이때 조선 총독부 박물관 진열품 도감 고려청자편을 교과서 삼아 고유섭의 지시대로 유물을 답사하면서
박물관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그는 개성 송도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호수돈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문화재에 대한 향수를 못잊어 이풍재씨가 관장일때인 1943년 최순우가 29살 때 개성부립박물관에 발을 들여 놓은 후 1984년
작고할때까지 40여년간을 외길 만을 걸어온 그는 황수영, 진홍섭 등과 함께 개성 삼걸로 불리어졌으며 특히 고려청자 분야에는 권위로 꼽히고
있다.
최순우가 문화재 관련 업무에 종사하기 시작한 것은 1935년 조선
고적연구회때부터인데 아마 이 무렵 고유섭 선생께 사사해서 미술에 대한 재질을 크게 깨우치고 큰 재목이 되리라는 고유섭의 영향이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936년에는 개풍군에서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을 담당했고
1945년 국립박물관에 발을 들여 놓은 후 1946년 국립개성박물관 참사를 지내고 1948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전근하여 국립박물관
미술과장, 수석학예연구관, 학예연구실장 등을 거쳐 1974년 6월 18일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하였다.
정양모는 그의 국립중앙박물관 봉직은 한가닥 터럭만큼의 사심이 없는
오직 박물관을 내몸 내집같이 아끼고 사랑한 정성으로 점철된 결곡한 생활이었으며 박물관의 창고 구석에서부터 전시실, 진열장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고 최순우의 정성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듯이 최순우는 박물관의 산 증인이었고 박물관의 역사였으며 지금과 같은 박물관의
기틀을 잡아 놓은 분이라고 했다.
1945년부터는 5년간에 걸쳐 문학 동인지 ≪순수(純粹)≫의
주간(主幹) 역할도 맡아 한국의 멋과 정서에 적절한 낱말과 구수하고 부드러운 그의 독특한 문체로 한국의 아름다움을 꾸준히 펴
나갔다.
그의 박물관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여 1976년 3월에는 국립박물관에
우리 역사 이래 처음으로 [보존기술실]을 두어 우리 문화재의 보존 처리 방법과 기술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특히 금속기의 경우에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방법과 기술로 처리하고 있어 선진국에서도 그 방법과 기술을 전수받아야 할 입장이다.
그 외에도 인재양성, 기구확충, 박물관 전시, 유물 수집, 조사,
연구는 물론 교육홍보, 박물관 외곽 단체의 활성화 등에까지 남다른 노력과 애정을 기울여 오늘의 박물관을 있게 한 분이다.
해방과 6.25 등 격변과 수난이 얽힌 박물관사의 산증인이기도 한
그는 1.4 후퇴때와 2차 중공군 공세때는 유물을 부산으로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해 창고 옆에서 155mm포를 쏘아대는 와중에도 유물을
포장하였으며 젊은 수위들은 다 도망가고 혼자 남은 나이 많은 수위와 짐을 꾸려 날랐는데, 그는 지금이라면 사과 한 궤짝 옮기기도 힘들 것이라며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이후에 서울 환도에 따른 혼란 중 박물관이 경복궁에서 남산으로 다시
덕수궁으로 다시 경복궁으로 이전하면서 수만점의 유물을 정리하고 운반하고 전시하면서 오늘의 박물관에 이르기까지 거기에 바친 혼신의 정성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1957년부터 1958년까지는 미국에서 1960년부터
1962년까지는 구라파 각 나라를 돌면서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의 도자기, 목기, 회화 전시를 비롯하여 [한국미술 2천년 전시] 등 대소규모의
특별전시회를 수십차례나 주관하여 한국 미술의 이해와 보존, 진흥에 크게 이바지 하였으며 1976년에서 1984년 기간에는 [한국 미술
5천년전]을 일본, 유럽, 미국에서 전시를 주관하여 한국 미술 문화를 세계에 선양하고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에서의 [한국미술 5천년전]에 대해 최순우는 전시회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로는 고고학과 역사학을 전공하는 일본학자들의 그릇된 우월감으로
심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조용히 반성하게 한 점과 한국의 고대 문화가 체계적으로 수천년간 일본에 지속적으로 강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일본학계는 부인할 수 없게 된 점이며 둘째는 한국 문화의 [깊이]와 [폭]을 일본의 국민에게 이해시켰다는 점이고, 셋째는 60만 재일동포들에게
조국 재발견의 계기를 만들어 민족적인 긍지를 심어준 데 있다고 했다.
이렇게 그는 [한국미술 5천년전]을 통하여 5천년 동안의 긴 민족사
속에서 우리 민족이 이룩한 문화적인 업적, 특히 그 속에서 조형예술의 갈피를 뚜렷하게 세우고 추려서 그 흐름이 갖고 있는 동양미술사상의 창조적
지위와 역할을 분명히 하여 일본인에게 올바로 인식시키며 그들의 오랜 편견과 선입관을 해소하는 데 노력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는 박물관을 지키고 키우면서 한편 한국 미술사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진력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도요지 발굴사업을 추진하여 고려청자와(高麗靑瓷瓦)의 연구 등 수십편의 우리나라 도자기와 목칠공예
관계 논문과 한국 공예사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60년 여름에는 [고고미술동인회]를 발족하여 문화재 자료
발굴과 개발을 하면서 한국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보냈는데, 그의 선천적인 심미안과 감식안 위에 우리의 참된 아름다움을 지키고 찾아내어 몸소 그
속에서 생활하고 이를 널리 알려 우리가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게 하는 길잡이가 되었으며, 여기서 조형미술에 나타난 한국미의 계발에
관한 엣세이와 논고만 하더라도 수백편에 달한다.
또한 그는 1950년부터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홍익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미술사의 강의와 강연회에서 많은 사람과의 교류를 통하여 우리 옛 것을 현대에 살려 현대미술의 참된 밑바탕이 되게
하는 등 현대미술의 향방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의 한국미술에 대한 높은 관심은 미술과 관계되는 여러 단체에도
소속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1962년 10월부터 1965년 10월까지는 김환기 등 화단의 중진들이 발기한 한국 미술평론인회 대표를 하였으며,
1965년 12월부터 1966년 12월까지는 한국미술평론가협회의 대표를 맡았고, 1967년부터 활동한 문화재위원회 위원(제1분과)은 작고할때까지
맡았으며, 1976년 시작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위원은 1980년까지 역임하면서 한국미술사 연구와 문화재 보존에 깊고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유홍준은 이러한 최순우에 대해 [그는 한국미의 탐색자였으며
대변인이었다. 감성의 논리학이라는 미학적 사고를 전개하는 미학자가 아니라 미술품이라는 실물을 관찰하고, 음미하고, 분석하면서 숨겨진 미적 가치를
발굴해 내는 대안목의 소유자였다]고 하며 그의 전집을 우리시대 예술 고전의 대열에 올려 놓았다.
최순우는 깨끗하고 품위있게 노년을 보내는 선비의 모습이나 옛 선비의
풍모를 찬탄하면서 [그 어른은 학같이 늙으셨군. 늙어서는 학같이 고결한 모습이여야지] 라며 늘 고상하게 세월을 보낸 노년의 품위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 말은 한점 속기가 없는 조촐하고 청초의 생활 신조가 깃든 최순우의 심성을 알 수 있는 듯 하다. 이러한 그는 1981년부터
국립박물관을 구(舊) 중앙청 청사 건물로 이전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어 그 주역으로서 일하다가 제반 계획과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격무와
신병으로 개관을 눈 앞에 둔 1984년 12월 16일 성북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1945년부터 1984년 12월 작고할 때까지 40여년간을
박물관에서 봉직한 그의 생애는 [우리의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의 일거수일투족 모두 우리의 아름다움과 같이 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한국미에
대한 그의 생각과 언행은 우리 미술의 본바탕에 대한 이해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2. 사상적 배경
1) 한국 미술관에 관한 관점
한국의 미술은 한국만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위대한 작품들이
무수히 많다. 수천년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 그리고 조선을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질(質)과 양(量)에서 많은 업적을 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역사의 이면에는 반드시 예술가가 형성되어 있는 것처럼, 장구한
역사의 한국사도 다양하고 복잡한 한국미술사를 형성해 왔으나,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미술사에 대한 [관(觀)]으로 한국미술은 존재하나
한국미술관은 부재하다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한국미술사관을 지닌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와 조선인인 고유섭(1905-1944)이다. 최순우의 스승격이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고유섭은 조선인으로 한국 미술관에 대해 효시적이며 독보적인 업적을 이룩하였으나, 그런데 고유섭에게는 어쩔 수 없는 하나의 문제가 언제나
뒤따르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의 선배격이며 동시대의 미술사학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와의 관계인데 야나기 무네요시는 젊은 시절부터 조선예술에
대해 흥미와 관심을 갖고 노년까지 부단히 노력하며 조선 미술에 심취해 있었던 인물로서 특히 공예미술 방면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고유섭이
고려청자에 대한 열정을 가졌던 것과 외면상일지라도 손쉽게 비교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고유섭의 영향을 받아 조선총독부 박물관 진열품도감,
고려청자편을 교과서 삼아 고려청자 분야에 권위자로 꼽히는 최순우와도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술을 감상 이해하는 자의 감상이 한
시대의 정신적인 사조에 얼마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가 하는 점과 그 감상자의 입장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에 따라 동일한 대상의 분석과
감상에도 차이가 난다는 사실과 관계된다. 말하자면 식민상태에 있던 우리나라의 미술에 대한 이해의 입장에선, 감상자와 자문화에 대한 이해의
입장에선 감상자의 차이로서도 언급될 수 있는 문제다.
다시 말하자면 과거 한국미술이라도 동일대상을 앞에 두고 야나기
무네요시와 고유섭의 관점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미술 특히 조선조 도자기에 쏟은 애정어린 이해와 상찬은 당시
조선인에 대한 감상적인 동정론에 빠져들어 비애적으로 판단한 점이 있는데, 고유섭이 이러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설과 조선미술을 선적이라고 한
주장을 받아들이긴 했으나 고유섭은 그것을 전혀 다른 평가의 차원에서 조선미술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정립시킬 수 있었던 것은 고유섭의 입장이
야나기 무네요시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문명대는 한국미술사를 처음(1923) 체계적으로 기술했던
세기노 다다시(關野貞, 1867-1935)나 한국 미술을 [비애의 미술]이라고 특정지었던 야나기 무네요시(1922)는 모두 식민지사관에 입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34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했던 고유섭마저도 [결국 식민주의 사학에 자신도 모르게 휘말리는 경우]라고 하면서 고유섭에 대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을 거의 부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최순우는 조선시대, 특히 구한말에 사대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때 신채호, 송석하, 손진태, 고유섭 같은 사람들은 이런 풍조를 배격하고 나서서 일제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우리 것에 대한
전통문화를 위해 고군분투하였다고 했다. 이것은 비록 고유섭이 정신사적 미술사학에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론을 받아들이긴 했으나 그때만 하더라도 온통
일본인 학자들 중위(重圍) 속에서 그는 회화, 조각, 공예, 건축의 각 분야에서 우리 미술의 전통과 그 진가를 밝히는데 짧은 생애를 불태웠고
사회의 계몽운동에도 온 힘을 기울였는데 학문적인 논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짧은 생애에 비하면 신문 잡지류의 기고도 놀랄만한데 이것은 우리
미술사 분야 뿐만 아니라 예술론, 미술 비평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어 한국 미술사의 개척자로서 현대미술이론 분야에서도 처음으로 무게 있는
업적을 우리 사회에 남겨 준 점 등은 일제시대 우리 국민의 많은 수가 전통문화가 얼마나 특색이 있고 얼마나 뛰어나다는 것인가를 알려 준 시금석이
된 분이라고 했다.
고유섭이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서도 그 나름대로 전통을 살리기
위해 힘썼듯이 국토가 감정당한 시기에 태어난 최순우는 자연히 민족적 자주정신을 키움과 동시에 우리나라 산천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안고
성장하였는데 그의 평생 소망은 [한국 미술사를 보다 분명히 체계화, 정립하는 일]인데 그가 한국미술사에 종사하는데 영향을 준 분은 고유섭이라고
하면서
본래 소년시절의 내 꿈은 문학이었습니다. 시도 쓰고 소설도 썼지요.
그러다가 고유섭 선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유섭은 [암흑기를 지내는 한국 젊은이들이 민족에 이바지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한국
전통미술은 세계에서 특이한 존재이며 장래에 반드시 재평가 받을 분야이다. 그러니 한국미술의 체계를 세우고 그 자랑을 민족의 가슴에 올바르게
심어주는 일도 문학에 못지 않은 중요한 일이다.]라는 말에 그때부터 방향을 바꾸어 한국의 전통문화, 특히 미술사를 통하여 한국 사람에게 긍지를
갖게 하자 그러면서 해방을 맞이했다.
라며 고유섭이 그에게 한 말을 위와 같이 회고했다. 이처럼 고유섭이
고미술도 민족의 장래를 위해 중요한 분야라고 일깨워 준 것이 최순우의 일생을 결정케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최순우에게 우리 문화를 보존하고 그
값어치를 가꾸어 준 선각자였다.
2) 한국 미술의 본질 규명을 위한 방법론적
시각
2최22.최순우가 1935년 19세 나이로 문화재 관련 업무에
종사하기 시작하던 그 당시는 일제 어용 사학자의 이론이 한국미술사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소위 식민사학에서 말하는 정체성(正體性)과 반도적 성격의
영향으로 한국 미술이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 없는 상태일 때 한국 최초의 근대적 학문을 배운 미술사학자인 고유섭은 본격적으로 학문 활동을
전개하였다.
과거 우리의 미술사가 반세기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사실 처음으로
근대적인 학문의 안목으로 한국 미술 개개인의 작품을 관찰해서 학계에 소개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아닌 외국인 세기노 다다시였다.
당시 일제가 자기들의 식민지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가장 먼저 착수한
사업 중의 하나가 고적 조사사업이었는데 그들은 이러한 조사를 통해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철저하게 파악하여 그들의 식민 정책 수립에 기초 자료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고적조사 사업을 주도한 사람중 한사람인 세기노 다다시는 1902년에
한국에 와서 당나귀를 타고 다니면서 한국의 사적을 조사해서 <한국 건축조사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거기에는 미술사학적인 자료를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목적인 건축을 폭넓게 고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나기 무네요시나 세기노 다다시는 그들의 식민 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시켜 나가면서 또한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문화지배의 논리로, 피지배민족에 대한 연민의 감정과 거기에서 발생된 착색(着色)된
샌티멘탈리즘의 논리로 이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국미술사를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로 세기노 다다시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자주 언급되는데 두 사람의 견해는 다소 차이가 있다.
세기노 다다시는 ≪조선미술사 (1932)≫ <총론>에서
한국이 갖는 역사지리적 환경을 한민족의 문화주체적 근간을 이루는 국민 기질과 연관시켜 한국의 반도적 성격에서 기인하는 지리적 숙명론과 그로 인한
사대주의적 국민근성이라고 논리적 전제를 하면서 한민족의 미적 경험의 다양한 가능성과 그 표현방식의 형성원리를 역사지리적 환경 요인과 결부시켜
의도적으로 왜곡함으로써, 당시 일제 관학자들의 소위 식민주의 문화사관을 대표하는 논리를 발표해 신랄한 비판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야나기 무네요시는 그의 ≪조선의 미술 (1992)≫에서
자연과 원리의 근거를 찾는 방법론적인 전제에 있어서는 세기노 다다시와 상통한 점도 있으나, 자연환경적 비교 검토의 시야나 조형논리적 구성에
있어서 한국미술의 미적 특질에 관한 몇가지 중요한 개념적 술어를 제시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미적 예술적 형성과 관련된 각자의 고유성과 그 당위적인
가치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그의 논리는 세기노 다다시에서 볼 수 없었던 분명히 또 다른 각도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한국미술의 본질 규명에 접근하고자 했던 태도에 있어서도
[중국의 예술 앞에서는 조선 예술은 독립된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는 독단]과 [조선의 뛰어난 예술에 대한 (일본인들의) 무식]을 꾸짖고, 심지어는
[일본이란 조선의 미술에 의해 장식된 나라]라고 까지 말할 수 있었던 그의 학자적 양식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이러한 태도는 같은 시대 소위
어용관학자(御用官學者)들의 왜곡된 시야와는 현격하게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을 받은 고유섭은 비로소 우리 고유의
주체적인 시각에 의해 한국 미술의 미적 특질을 그 현상적 근본에 있어서 규명해 내고자 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시도는 그의 몇몇 미학적인 개념들을
통해 우리 고유의 미의식을 해명하는 두드러진 성과로 그의 이와같은 선험적인 의식을 최순우는 받아들인 것이었다.
우리 고유의 미의식에 대한 탐구는 한국 민족의 미적 가치 체험의
표현인 한국 미술에 대한 미적 가치의 의미 해석을 구하는 과제라 할 수 있는데 고유섭이 활동하던 당시 그는 남다른 열의와 비상한 능력을 갖추고도
그의 이상을 끝내 실현하지 못하고 41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학계에서도 매우 안타까와 했다.
시대적 영합으로 고유섭의 미술사학이 정신사적 입장으로 한국미술을
숙조(淑照)나 애조(哀調), 무관심 등으로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본의 아니게 받아들인 점이 없지 않으나 그는 학문적인 논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짧은 생애에 비하면 신문 잡지류의 기고뿐 아니라 예술론, 미술 비평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어 한국 미술사의 개척자로서 뿐만 아니라 현대의
미술 이론 분야에서도 처음으로 무게 있는 업적을 우리 사회에 남겨 주었다.
온통 일본인 학자들 중위(重圍) 속에서 이렇게 고군분투한 고유섭의
저서 중에서 최순우는 특히 ≪韓國美術史及美學論攷≫제2부에 수록된 10편의 논고 중 <協展觀評>이란 전람회 평을 감명깊게
평가했다.
숨막힐 듯한 왜정치하 속에서 총독부 관전(官展)과 맞서서 화단에
끈기있는 민족적인 저류를 이루어 온 [서화협회전]의 작품들을 그 해박한 예술관을 통해서 종횡으로 해부한 솜씨는 당시의 중압 아래에서도 굽힘없는
고유섭의 기백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라 했다.
이러한 고유섭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최순우는 고유섭의 양식사적인
측면보다는 주로 직관성에 의존하여 학문적 한계점에 비판의 요소가 있긴 하나 그는 한국미에 대한 높은 견식과 안목을 실생활에 실천하는 그의 생활
하나 하나가 한국미의 실천이고 교육이었다.
3) 미의식
그는 우리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 위에 우리 문화유산과
평생을 같이 하였으므로 회화, 도자기, 조각 등에서 한 점 한 점 감상하고 해석한 짤막한 글 속에서도 그의 자연과 우리 문화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그의 글은 한국미술 전반을 관조한 속에서 우러나온 글이기 때문에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우리 것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슴에 새기게 되고 한국미에 대한 눈이 트이게 된다. 그는 우리의 산하와 우리 문화에 대하여 천성적으로 강한 애착과 사랑의 소유자로서
그의 문화재에 대한 많은 글에서 누구나 동감되는 그의 문화적 의미를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그의 학문적 업적을 살펴보면 한국 미술 전반을 개관한
≪한국미술사 개설≫을 1950년대에 펴내 당시 한국미술에 뜻을 둔 사람들에게 지침서가 되게 하였으며 1960년 초에는 공예사, 도자사, 회화사를
집필하여 괄목할만한 논문들을 발표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논문으로 <고려도자의 편년>, <고려시대의 공예>,
<조선시대의 공예>, <단원 김홍도의 재세연대고(在世年代攷)>, <고구려 고분벽화 인물도와 유형>,
<안견-몽유도원도의 경지>, <겸재 정선>, <혜원 신윤복>, <한국미의 전통>, <민족미술의
이해>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우리 미술사의 오래고 큰 숙제를 풀어놓은 것이며 앞날을 밝힌 것으로 길이 우리 미술사학계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그의 해박한 격식과 높은 안목으로 한국미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담긴 수필과 해설 원고들도 썼다. 김용호는 이러한 것을 최순우의 연대별 미술사 연구 특징에 따라 시기와, 분야별로 연구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기를 나누어 다음과 같이 구별하였는데 제1기(1950년대 이전)는 그가 고유섭의 감화로 박물관과 인연을 맺어 한국 미술사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탐색기로 보았으며, 제2기(1960년대)는 고고미술 동인 활동에 참가하여 도자공예, 민속공예, 회화, 문화시평 등에서
괄목할만한 논문을 발표하였던 그의 성장기로 보았고, 제3기(1970년대)에는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1975)하여 한국미술사학회 대표위원으로서
한국미술사 연구와 우리 문화재를 국내외에 보급하며 폭넓게 활동한 시기로 이 시기에 논문이 가장 많았으며 특히 공예 분야에 논문이 집중되고 있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또 제4기(1980년대)는 4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이 시기는 불사, 건축, 금속공예분야에 그의
관심을 크게 증대시켰고, 그의 미술사 연구가 완숙의 단위에 이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고유섭이 우리 고유의 미의식을 탐구하기 위하여 특수한 시대
환경에서도 고군분투한 그의 지적 탐구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설을 거의 수정없이 수용하고 적용하였다는 문제와 또 하나 야나기 무네요시를 넘어서
조선성의 확보를 위한 미적 범주의 문제가 있는 데 반하여 최순우는 고유섭의 학문 풍토를 계승하면서 우리 문화의 특색과 그 장점을 옳게 터득해서
그것을 가꾸어 나가고 그것이 우리 문화의 장래와 국제 문화의 앞날에 기여하여 후학들에게 한국미의 특질을 깨우치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나 체험 위주의
학문적 성과는 미학적인 개념들을 통한 한국 미술의 미적 특질을 규명하는데는 약간의 미미한 점이 있어 이것이 하나의 과제로 남아있는 문제점은
있다.
Ⅲ. 최순우의 한국미술관
1. 한국미적 특색 형성의 배경에 관한 연구
1) 자연환경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사는 다양하고 복잡한 한국미술사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선사시대를 비롯해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뚜렷한 한국미술관을 가지고
한국미술이 존재해 왔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한국미술관에 대한 우리의 사고는 너무나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미술사를 연구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나 한국 미술사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고유섭 등에 의한 한국미술관을 보더라도 한국의 미술사는 우리나라의 지리적 환경이나 역사적 환경으로 미적 특질이 이루어졌다고
보았으나 그것을 과학적이나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규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에 최순우는 한국미술은 다른 문화와 함께 원시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이웃에 선진 한민족의 연원적 문화가 있어서 태고부터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우리 미술의 생성 변천에 작용해 왔으며 우리 민족이
싫든 좋든 대륙으로부터 선진문화와 접촉함으로써 우리 미술 5천년사는 자연 한족(漢族)이 주도하는 동아 문화권의 일환 속에서 중국 대륙에 원류적
요소와 사상적 배경을 두고 전개를 보여왔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예술적 재질을 시대와 처소에 따라 때때로 놀라운
미술작품을 낳으면서 아류적 처지를 원도(願倒)시켰으며, 이러한 오랜 세월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양식은 스스로 민족의 호상(好尙)과 풍토,
그리고 우리에게 알맞는 한국미의 세계를 전개시켜 왔다고 하겠다.
이러한 미의 전통은 그 시대의 생활과 자연과 역사적인 여건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에 따라 한국미적 특색이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이에 미술사적 원인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한국인과 한국인의 조상들은 기원전 30, 40세기 무렵의 신석기
시대부터 오늘까지 변함없이 한반도의 주인이었다.
중국과 인접해서 아시아 대륙 동북부에 자리잡고 있는 한반도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상고시대부터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중국 한민족의 선진문화와 늘 밀접한 접촉을 가져왔다. 이것은 비단 한민족 고유의 문화뿐만 아니라
스키토 시베리아적 고대 북방 아시아계의 문물을 비롯해서 불교적인 인도의 문화, 서남아시아 및 그리스계 등 서쪽 문명요소도 대개는 이 중국을
거쳐서 한반도에 파급되어 온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압록강 위로는 중국 대륙의 동북부인 산동반도와 만주, 몽고대륙과
직결되는 지역과 맞닿아 있고 두만강 위로는 소련의 일부와 근접해 있는 우리 옛 선조들은 강성한 중국 한민족과 뛰어난 문화를 이웃하면서 그리고
호전적인 북방족과 일본의 잦은 침략을 받아넘기면서 고유문화를 분명하게 가꾸고 지켜온 것이다.
전국토 중 80%가 산지이며 산맥의 대부분이 북쪽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는 까닭에 중부이남의 서남지역과 동부지역의 문화 인식이나 미의식의 표출에도 상당히 다른 차이를 보여 삼국시대 중 백제 미술이나 신라의 미술이
독특한 멋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와 같은 조건들은 우리 민족성에도 크게 반영되어 반도가 갖는 전형적 민족
성격을 지니게 되었으며 감성이 풍부하고 그 변화의 폭이 넓은 성격을 형성해 왔을 뿐 아니라 그 반면에 극히 자기내면으로 향하는 내성적 요소도
간직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요인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이러한
고대국가들의 성장은 주체적인 새 문화건설을 북돋우었고, 그들의 차지하는 강토의 지리적인 여건에 따라서 각기 미술 감각에 풍토적인 특질과 민족의
성정을 반영시킨 민족 양식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그들이 말달리던 광막한 만주벌판과 험준한 서북부
한국의 산세 그리고 준열한 기후 속에서 끊임없이 겪어온 시련 그리고 중국과 북방 변두리 족속들과의 투쟁을 통해서 길러진 씩씩하고도 거센 기상을
그들의 미술 감각 위에 반영시켰으며 그리고 그들 고유 문화의 바탕 위에 이웃한 중국 미술과 변두리의 여러 족속들을 통해서 접촉한 서방양식 등
다원화된 외래 양식을 점차로 발전시키고 정리 순화하면서 백제와 신라 미술의 형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백제는 북으로 고구려와 동으로 한강 이남의 서남부를 차지하고 신라와
더불어 오랫동안 본고장을 지켜왔으며, 끊임없는 고구려의 남침 위협과 신라의 팽창 위협에 항쟁하면서 백제는 외교 정책상 바닷길로 중국 남부와의
수교를 불가피하게 했다. 따라서 비교적 비옥한 평야와 온화한 풍토에 힘입은 백제의 미술은 부드럽고도 훤칠한 특색을 지니게 되었으며 조각, 공예
등에 중국 남조양식이 비교적 짙게 반영되었다. 이에 신라의 미술은 북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 백제와 나란히 서서 삼국통일을 향한 투쟁을
계속했으나 4세기에는 이미 농업경제의 안정을 보았는데 풍부한 산금(産金) 등에 힘입어 다채로운 공예미술 특히 귀금속, 장신구류의 비상한 발전을
북돋우었으며 그들은 이러한 경제적인 토대와 산자수명(山紫水明)한 풍광 속에 사회가 비교적 안온할 수 있었으므로 그들 본바탕 문화의 고격을 삼국
중에서 가장 잘 간직한 나라이기도 했다.
간혹 나라 총면적의 5분의 4가 산악지대여서 얼른 듣기에는 산악
중첩지처럼 느껴지나 실질적으로는 산봉들이 둥글하고 높지 않아 평원 산수화 같아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한국인의 자연에 대한 애호, 순응성을
기르는데 도움을 주었는데 그리 험하지도 연약하지도 않은 산과 산들이, 그다지 메마르지도 기름지지도 못한 들과 맑은 하늘 이러한 한국
강산에서우리 한국 사람들은 담담하면서도 욕심이 없으면 없는대로의 재료, 있으면 있는대로의 솜씨로 꾸밈없이 한국의 미술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최순우는 이러한 우리 산하의 의지나 자연의 표정은 한국민의 성격과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숨김없는 거울 같다고 하면서 원래 한국 사람들은 자연 풍광 속에 집 한채 멋지게 들여 세우는 뛰어난 천분을 지녔다고 했다.
[순리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자연풍광 속에 자리잡은 건축들은 과거 한국인들의 자연애와 자연에 대한 깊은 외경(畏敬) 그리고 자연과 인위의
조화미에 대한 희한한 안목에서 우러난 멋진 조형의 예의 하나님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최순우가 우리의 아름다움을 분수에 맞는 아름다움이나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 자연환경에 알맞게 이룬 형질미를 두고 한 말이다.
김원룡은 그의 <민족예술에서 본 한국의 미>라는 논문에서
한국의 미는 [자연의 미]라고 단정하고 나서 이 맑은 하늘 밑 산수 속에 그 동심같은 백성이 살고 있으며 여기에 한국미의 세계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곧 자연에 인공이 끼어서는 자연이 아니라는 것이며 자연은
미추(美醜)를 초월한 미 이전의 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긴 하지만 인간 특유의 속기가 없으며 아무도 미학, 미론을
내걸고 미를 추구하거나 창작하지 않는 것이 한국이라고 하면서 자연은 변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인공에 의하지 않는한 자연이 손상되거나 말살되는 일이
없는 바로 여기에 한국미의 생명이 있다고 하였다.
최순우는 이 자연설은 바로 고유섭의 <한국 고대 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 속에서 다룬 한국 미술의 [무관심성]과도 상통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처럼 한국 미술의 특징을 만드는 지리적 조건
외의 자연환경으로 한반도의 전형적인 온화한 해양성 온대기후를 들 수 있다.
윤희순은 ≪조선미술사연구≫에서 공기가 유난히 건조한 한국의 하늘빛은
유난히 푸르고 깨끗하며 그야말로 청정무후하여 그 청초한 정서를 동경하여 청자의 색이 창조되었다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이 청자의 푸른색이 땅에서
유리한 색조가 아닌 것처럼 백의의 숭상 역시 신화적 유래보다는 이러한 청초한 양광 밑에서 청정무후의 상징으로서 사용된 것이며 노년에 옥색을 즐겨
입던 것도 이러한 연유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자연히 염색술의 발달이 이루어질 수 없게 했을 뿐더러 색채의 아담함이나 조선시대 초상화의
독특함과 연결된다고 보았다.
이와 비슷한 견해로 조요한은 <전통미와 전통의식>이란
논문에서 산악지대에 사는 사람과 해안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미의식이 같을 수 없고, 열대지방과 한대지방의 예술표현이 같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풍토와 기후와 미의식을 운위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예로서 북구(北歐)에는 흐린 날이 많고 공기에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떠 있어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아 선이 주조가 아니라 색이 주조이면서 형태의 세부까지 묘사한데 반하여, 남구(南歐)는 청명한 날이 많고
공기가 맑기 때문에 윤곽이 뚜렷하여 이곳의 회화는 선이 주조를 이룬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추론으로 보면 조요한이 공기가 건조하고 하늘이 맑은
한국의 미를 남구의 미술과 같이 [선의 미]이고 [형의 단순화]라고 말한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최순우도 이같이 높고 푸른 우리나라의 하늘과 맑고 밝은 공기를 가진
한국미의 전통, 그 중에서도 고려청자가 청아한 맑은 하늘색을 띠고 이조백자의 다양한 백색의 빛깔과 한국 미술품이나 옷 빛깔에서 볼 수 있는
색감의 기조가 담담한 것은 바로 우리 예술의 풍토적 특색이라 하면서 우리의 전통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을
산 언저리와 강건너마을, 그리고 골짜기와 포구에 버섯들처럼 무수하게
돋아난 가난한 초가마을들이 논두렁 밭두렁을 안고 몽금포타령, 정선아리랑, 담바구니타령이나 수심가 같은 아련한 민요를 들으면서 유순한 표정을 쓰고
있는 고장이 바로 한국이었다. 뽐낼 줄도 모르고 잔재주는 애당초에 성미에 안맞는 족속들이 천년을 하루같이 처덕처덕 토담을 쌓고 또 초가지붕을
이으면서 가난하게 살아 온 것이 우리네의 조상이었던 것이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공기는 맑고 밝은 고장, 있으면 있는 대로의 재료, 없으면
없는대로 그대로 살아온 담담한 마음씨들이 오랜 세월 섞삭여서 지어낸 색채들이 바로 그것이다. 무슨 권위도 신경질도 안 타고난 사람들끼리 소박하게
초가지붕 아래 살자면 그런 담담한 빛깔이 맞춤이었을는지 모른다. 천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도자공예가 색채를 안 받아들인 연유도 바로 그런
마음씨에서였을 것이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에서 발전된 다양하고 다채로운 채색 도자기들이 그들의 복식에 나타난 색채호상과 그들이 자연하고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를 비교해 보면 우리의 담담한 색감의 세계에 한층 빠른 이해가 갈 것이다.
라고 말했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담담한 색채호상은 우리 강토에 맞는 우리
민족미의 참모습이며 이조 그릇이 지닌 따스하고 부드럽고 소담한 흰 유색은 고려청자가 지닌 조용한 푸른 빛과 함께 우리 도자기사에 있어서 일관적인
색의 성격일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즐겨입던 흰 빛이나 엷은 옥색의 소담한 빛깔을 지닌 전통적 색조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함없이 대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이 맑고 밝은 자연기후와 깊은 영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최순우는 아름다운 선을 이루고 있는 예로서
하늘로 향해 두 귀를 사뿐히 들었지만 뽐냄이 없는 의젓한 추녀의
곡선, 아낙네의 저고리 도련과 붕어백지은 긴소매의 맵씨있는 선, 외씨 버선볼의 동탁한 매무새, 초가지붕과 기와지붕들이 서로 이마를 마주 비비고
모여선 곳, 여기엔 시새움도 허세도 가식도 그리고 존대도 발을 붙이지 않는다.
라고 말했는데, 이 내용에 있는 우리 선의 아름다움도 조요한의
견해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온대기후의 영향일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한국미의 특색을 이루는 요소로 반도적
지리환경이나 온대기후에서 오는 독특한 미감으로 미루어 볼 때 자연환경이 한국 미술관을 느끼게 하는 큰 요소로 자리잡음을 알 수
있다.
2) 역사적 환경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만주에서 뻗은 반도국으로 중국에
대해서는 요동반도와 함께 늘 동이족(東夷族)들의 해상 공격기점이 되어 왔었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의 원인으로 서기전 300년경을 전후하여서는 전국
중에 한 나라와 연(燕)으로부터 요동공략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이어서 서기전 108년에는 한나라에 의해서 낙랑군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 낙랑군은 결국에는 삼국시대 초기가 되면서 쫓겨나긴 했으나 이
낙랑군의 설치는 무력, 정치력으로서가 아닌 문화적으로 한국을 중국화 하는데 성공하였고 경제적으로는 농경민화의 영향을 주어 숙명적으로 한국은
남북대항-즉 비한족과 한족과의 투쟁에서 중국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런 한 민족의 입장은 자연히 중국 공격자들에 의한 전초 공격의
대상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여기에 좁은 우리 국토는 잔인무도한 침략자들에 의해 여러번 짓밟히고 파괴되는 결과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침략을 받을 때마다 가장 고통을 겪는 것은 주로 일반
국민들이었고 이런 국민들의 고통은 비단 외척에 의한 것 뿐 아니라 생활의 빈곤과 졸렬하고 부패한 정치에 의해서도 그와 못지 않게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생활환경에서도 현실을 기피하기 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속에 만족을 찾자는 태도로 현실 순응의 체념적 낙천철학과 대자연, 자연적인 것, 인공·인간 도피적인 관념을 키우면서
현실거부가 아닌 현실 순응의 자세를 가지며 살아왔다.
최순우도 원래 한국 민족의 인종과 원시문명의 본바탕은 이 중국
한민족(漢民族)과 근원이 다르지만 이러한 입지조건 때문에 한국 민족은 수천년동안 한족(漢族)이 주도하는 중국 문화권의 테두리 안에서 미술활동을
하게 되었고 이런 한국 조형문화의 발상은 물론 선사시대부터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지금 한국에 남겨진 미술사적인 조기적 유물을 들자면 BC
108년에 시작되는 낙랑시대의 공예미술품들을 그 시초로 삼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 낙랑군은 원래 한제국(漢帝國)이 설치한 일종의 직할
식민지로서 그 유적에서 발견되는 공예품들은 당시의 한반도에 사는 토착민들의 생활문화와는 거리가 있는 주로 그들 식민지 계급들이 향유했던
귀족문화였기 때문에 이 낙랑유물들은 한국 문화라기보다는 그대로 한대(漢代) 중국 미술의 일부 전파의 자취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후 이러한 낙랑 문화의 자극으로 한국 고대 국가의 성립과 때를
같이 하여 한반도의 남북에도 새로운 조형 문화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한국 미술사의 첫머리를 이루는 삼국시대 미술의 성립인
것이다.
이 삼국시대의 미술활동은 대략 3, 4세기에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
대륙에서 급격히 파급되는 다양한 외래문화를 재빨리 흡수 배양해서 비교적 짧은 기간 사이에 풍토적인 감각과 민족적인 생활 정서를 잘 반영시켜
이보다 한층 이른 시기에 이미 싹터 있던 한국미술의 실력을 축적하고 세련시켜 왔다. 사실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움직여 오면서 인간의 삶과
인간이 산 시간을 끌어안고 있는 모든 내용의 총체로서 예술을 보는 시각 역시 각 시대마다의 총체적 삶의 내용을 알아야 할
것이다.
김영주는 이런 점에서 한국 예술은 [민족혼의 표현]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일어났던 무수한 경험들, 이 경험들을 통해 일어났던 감상들, 슬픔과 고통, 쓰라림과 통한, 기쁨과 희열, 갈망, 염원, 공포,
절망 등 여러 가지 빛깔의 정신적 경험을 내면에 간직하면서 끊임없이 이 경험들을 통합하려는 내적 움직임, 바로 이러한 것이 모두 예술에,
창조의지에 관여한다는 것은 바로 예술의 역사가 정신의 역사와 상통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는 단일 민족인 임을 항상 자랑으로 삼고
있으나 이런 자랑의 뒤에는 수많은 시련과 고비가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해 왔다. 우리나라를 외침의 역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침략을
받고 또한 전쟁 등으로 국토가 황폐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웠지만 우리 한국 민족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문화와 비교해도 절대로 굽히지 않을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최순우는 이것은 바로 우리 민족이 앞날을 바라보며 부지런히 일하고 또 꾸준히 참아나간 끈기와 우리 민족 스스로가 느끼는
문화 민족으로서의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이러한 우리의 역사적 단면을 느낄 수
있는 글을 1919년 5월 일본 [독서신문]에 다음과 같이 <조선인을 생각하며>라는 제목으로 기고하면서
조선의 역사가 받은 운명은 슬픈 것이었다. 그들은 억눌리고 또
억눌리면서 3천년의 세월을 겪어왔다. 그들은 힘도 필요하고 돈도 욕심나겠지만, 짓밟히고 학대받는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정이 그리운
것이다......<중략>
나는 한국의 예술, 특히 그 요소라고 볼 수 있는 선의 아름다움을
참으로 사랑에 굶주린 한국인들의 마음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길게 끌고 나간 아름다운 한국의 선은 참으로 연연하게 하소연하는 그들의 소망과
그들의 눈물도 나에겐 그 선을 따라서 흐르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라고 했다.
간절한 감정을 실은 이 글은 당시 엇갈리는 반응을 보였는데 일부는
한국미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일깨워 주었다는 반면 일부는 한국인으로서 지니고 있는 긍지를 건드린 지나친 동정조와 일률적으로 민족의 애상에만
치우쳐 다룬 내용이라는 비판의 반응이었다.
이것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조선의
예술을 바로 보았는가 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그러나 그의 영향을 받은 고유섭은 우리나라가 수많은 외침이나 대란 속에서도 유유히 우리 것을
만들고 지켜왔다고 하면서 이조시대의 미술에 관하여
대개 [이조(李朝)] 하면 누구나 의례에 얽매이고 형식에
구차(苟且)하여 생활은 건조하고 심정은 고갈되고 이지(理智)는 고도(固圖)되고 의력(意力)은 쇠침(衰沈)한 시대로 심하며 예술문화는 하나도 없던
시대같이 타기(唾棄)하고 만다.
그그그러나 이조는 과연 그러던가. 물론 이조는 타방(他邦)에 없고
타시대에 없던 부유(腐儒)가 생기고 사색이 생기고 전란이 족발(簇發)하고 가감(苛 )이 횡행하여 비운의 횡액이 매일같이 연발되고 망극한
원차(怨嗟)가 천지를 휘덮었다. 그러나 이조 5백년이 전부 그에 그쳤다면 우리 종족이 어찌 씨라도 남았으랴마는 오늘날까지도 2천만이란 민족이
남아 있는걸 보면 아무런 독기에도 간헐(間歇)이 있었고 체식(滯息)이 있어 그간에 생의 서광이 번뜩인 적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세종, 문종대
서광이 그요 중종, 문종대 서광이 그요 숙종, 영종대 서광이 다 그다.
이러한 간간한 참 때에 우리는 세계에 자랑할 [한글]을 낳고
의상(儀像)을 내고 세계에 자랑할 사상의술(四象醫術)을 내고 세계에 자랑할 약학을 내고 세계에 자랑할 보학(譜學)을 내고 세계에 자랑할
편당(偏黨)을 내어 마침내 세계에 자랑할 끝을 막았다.
이러는 동안에 우리가 자랑할 미술 공예도 임진왜란에 한번 씻겨가고
병자호란에 다시 뿌리조차 빠져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분탕(奔蕩)한 양란을 치르고 나서도 건축으로 회화로
조각으로 공예로 각 방면에 우수한 예증을 다소라도 남기고 있다.
고 했다.
이 글에서 우리는 비록 야나기 무네요시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고유섭이지만 우리 민족의 애상설을 강조한 그의 소론에 동조하지 않은 고유섭이 한국 민족에게 긍지를 갖게 하기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이에 최순우도 이러한 역사 속에서 자라온 우리의 한국미는 누구도
결코 범할 수 없는 자율적인 미를 간직해 왔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고유하고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져왔다고 했다.
비록 많은 어려움을 겪고 힘들게 살아온 우리 민족이지만 한국인의
마음씨는 조국의 흙과 더불어 순박하고 덤덤한 생활 성정으로 그다지 슬플 것도 복될 것도 없는 조촐한 생활을 자위하면서 살아왔으며 욕심없이 있으면
있는대로의 재료, 없으면 없는대로의 재료로 꾸밈없이 솜씨를 발휘하였고 우리 풍토에 맞는 생활의 희로애락이 발현된 미술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 미술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자연환경과 역사에 의해서 우리만의 독자적인 아름다움이 형성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미술의 역사를 더듬어 보긴 했으나 사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예술에 관한 이론이나 화론(畵論)이라고 할만한 저술이 크게 부족하여 우리나라 예술사를 연구하는데 많은 애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떠나서는 한국 미술사를 연구할 수 없듯이 본
논문에서도 시대별로 우리 나라의 작품들이 갖는 최순우 미술관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해 보기로 하겠다.
2. 시대 변천으로 본 한국 미술관에 대한 연구
최순우는 미술이란 어느 민족의 경우를 가릴 것 없이 그 고장의
자연과 역사적인 여건 속에서 자라난 그 민족의 독자적인 생활 감정이 짙게 스며 있으므로 이것이 조형적으로 얼마나 개성이 뚜렷하고 또 얼마나 잘
정리되고 세련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독자적인 미의 특질이 평가되고 그 민족미술이 지니는 미술사적 위치가 자리잡혀진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시대나 지역을 무시하고 한국미술의 특색을 공식화해
버리는 일은 불합리한 것이며, 결과적으로 한국미술의 공통된 특색이 공식화되어 나온다 하더라도 일단 시간적, 지역적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인과 한국인의 조상들이 기원전 30, 40세기 무렵의 신석기
시대부터 오늘까지 변함없이 한반도의 주인으로써 문화를 이끌어 오면서 동북아시아의 문화건설자로서 지도적인 위치를 가지고 독자적인 특색을 가졌다는
한국 미술의 공식화된 특색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시대에 따라서 표현되는 감정이나 강조하는 주안점이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각 시대의 사회, 경제, 정치적 배경 또는 종교적 사정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며 또 각 시대에 따른 정치적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의 변천, 지역적
장애선의 이동 등에 따라 미술의 성격도 바뀔 수 있다고 볼 때 한국 미술의 특색을 시대별로 고찰해 보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그래서 최순우는 이러한 한국미술의 특색을 시대적, 장르별로 그
특색을 말하였는데 그것을 토대로 하여 시대적으로 나누어서 지역과 시간을 초월한 한국미술의 기본적, 전통적 특색이 무엇인가를 찾아볼까
한다.
1) 선사시대
한국 조형문화의 발상은 물론 선사시대부터 비롯되어 한국에 남겨진
미술사적 조기적 유물로 낙랑시대의 공예미술품을 들긴 하지만 낙랑시대 예술품은 엄밀히 말해서 우리의 미술품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면서 최순우는
신석기시대의 생활용구였던 토기의 발달이 한국공예의 시작으로 보았다.
토기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약 6000-4000년전 신석기시대
쯤으로 추정되는 무늬가 없는 것과 무늬가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무늬가 있는 것을 유문토기라 하고 무늬가 없는 것을 무문토기라 하는데, 무늬가
없는 무문토기는 한강 이북 지역의 강변에서 주로 발견되었으며 모래알이 섞인 진흙을 약 800-900℃ 구워서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채색토기 형식을 띄기도 하였다.
특히 유문토기에는 즐문 즉 빗살무늬가 많고 주로 바닷가나 강변의
낮은 언덕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즐문토기에 나타나는 소위 어골문(魚骨文)은 시베리아 지방에 퍼졌던 동식(同式) 토기 문화의 문양이 전화한 것인데
그것이 후에 중국 채도의 영향을 받아 곡선적인 것으로 변모해 갔으나 그래도 그 기본 성격은 소박하면서도 상징적, 추상적이었는데 이것은 북방계
미술의 선을 따른 것이었다.
그중 최순우는 BC 3천년 무렵에 한반도에 널리 퍼졌던
빗살무늬토기가 기하학적인 직선을 특색을 가졌다고 하면서 이것은 훗날 청동기시대의 특징을 이루는 조문형, 세문경 등에 장식된 기하학적 무늬에
계승된 것으로 짐작했다.
이외에도 BC 4천년 무렵 유적의 하나인 부산 동삼동 패총 바닥에서
발견된 무문토기들과 토기 표면에 가늘게 비빈 흙타래를 붙여서 장식한 용기문토기, 무늬도장을 찍어서 장식한 압날문토기와 가늘게 돋은 무늬를 장식한
세선용기문 토기들은 바로 우리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소박한 미의식을 드러낸 공예품들이라고 했다.
이후 BC 1천년 무렵부터는 청동기시대가 열렸는데 소위
홍도(紅陶)라 해서 굽기전에 산화철을 그릇 표면에 바르고 이것을 문질러서 윤택이 나도록 한 홍색 토기들이 각처 지석묘와 주거지에서 출토되었으며,
일종의 홍도계 채문토기로 볼 수 있는 동체가 평퍼짐하게 생긴 엷은 갈색 항아리 어깨에 회흑색의 대범한 무늬들을 장식한 암갈색 토기들이 경주
등지에서 출토되었는데 여기에는 가식없이 소박한 감정을 간직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자기를 드러내어 그러한 강직성이 농경지대의 완곡하고 유동적인
곡선이나 화려하고 여성적인 채색토기 따위를 싫어하고 꺼렸던 것 같다.
이러한 토기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동안 청동기시대의 금속공예 중
두드러진 작품들이 나타났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난 조형을 나타낸 것은 동검 등 무기류와 청동세문경들이고, 그리고 의기(儀器)와 장신구들이 있는데
세문경등은 동심원과 기하학적 추상무늬를 가졌으며 청동기시대 말기 장신구 중 하나인 마형대구를 보면 그들이 기마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순우는 특히 청동기 후기의 석검이나 마제석기들을 보면 매우 정제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며 석검, 석촉들은 간결하고도 엄격한 조형미를 가졌다고 하면서 이러한 특징을 갖춘 것은 우리의 독자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상의 선사시대 토기류가 갖는 특징처럼 선사시대의 회화적 유적에서도
그와 같은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1970년 경상북도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서 발견된 BC 2, 3세기 무렵의 청동기시대 말기 또는 철기시대
것으로 판단하는 반구대 암각화도를 보면 선각으로 야수들과 가축 그리고 어족들의 다양한 생태묘사를 능숙하게 표현했으며 물체를 가로 세로로 배치한
전체구도는 매우 간명한 회화적 효과에 마음을 쓴 자취가 엿보인다.
이 천전리 암각화는 U자형의 강물이 흐르는 절벽이 새겨져 있고
상하로 나뉘어 상부에는 선사시대 경의 기하학 문양이나 인물, 동물, 물상등이 새겨져 있으며 하부에는 신라시대의 선각 그림과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문양은 마름모꼴, 둥근 무늬형, 마름모, 우렁무늬, 가지모양 무늬 등이 있고 사슴, 호랑이 등의 동물상도 있다.
명문은 을사명(乙巳銘)이 중요한데 이것은 법흥왕, 진흥왕때 왕족
귀족들이 와서 의식을 하면서 기념으로 새긴 것이라고 하는데 최순우는 이 암각화에서는 한국 그림의 본바탕이 싹트고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선사시대의 유물들에서는 뚜렷한 한국미를 나타냈다는 것보다는
그 시대 사람들의 소박한 미의식을 주로 나타내었고 또한 선사시대의 미술의 특색은 기하학적 추상무늬를 주로 나타내어 이런 것들로 미루어 보아
한국미의 기초가 싹튼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삼국시대
최순우는 이 시기를 실질적으로 한국 미술사의 본격적인 생성시기로
보았다.
세 나라가 지리적인 특색으로 그 나라들만의 고유의 특색을 지니고
있는데 실상 삼국미술은 초기부터 중국 한·육조의 영향을 받으면서 고대 회화의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삼국은 그들의 권위에 찬 표현이나 고조된 기교에서 오는
완미한 권위의 아름다움이 아닌 번거로움이 없는 간소미와 통일된 대범한 아름다움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우리의 풍토 양식에 맞는 정직한 아름다움,
속임수 없는 미 본연의 아름다움을 가꾸어 온 시기였다. 이때 국가체제가 성립되고 불교가 유입되면서 중국 육조나 수·당대의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를 한국 미술이 본격적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최순우는 이런 미술활동 중에서 고구려의 조각·회화, 백제의
조각·토기, 신라의 조각·토기 등은 바로 한국의 자연에 분수를 맞춘 작품들이라고 평가했으며 무작위, 무기교의 바탕이 기본 성격이라고
하였다.
이런 삼국시대의 미술 특색을 최순우는 어떻게 특징짓고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누어 알아보았다.
먼저 고구려는 원래 만주에서 일어나 평양지방에 있던 낙랑군을 통해
한(漢) 계통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전초 기지는 요동반도였기 때문에 화북(華北) 지방의 영향도 직접 받았는데 고구려 문화의
표현방식과 기법 또한 중국의 한·육조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
최순우는 한국 회화의 초기 유적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4세기
무렵부터의 고구려 고분벽화라고 했다. 비록 고구려가 한족적인 고유사상에 배경을 두고 한·육조시대의 북부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그것이 지니는 조형 감정의 일면에는 유목 수렵사회에서 점차 농경사회로 정착 성장해가는 고구려 민족 문화의 특성과 황량한
벌판과 험준한 산악지대의 자연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외적들과 싸워 이긴 기마민족 고구려인의 기상이 힘있게 벽화의 묘선과 약동하는 벽화 주제 속에
녹아있다고 했다.
고유섭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징인 굵고 힘있는 선을 [의미를 얻은
힘있는 운동]이라 했는데 최순우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무용총벽화의 무용도에서 볼 수 있듯이 대소 원근법이 무시되고 투시법이나
수평관념도 없으며 동작과 사물의 정면 묘사가 익숙치 못해서 측면관을 보이는대로 나타낸 그림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고유섭은 이것을 [전면화(前面化)의 작용]이라고 했는데 [전면화의
작용]이라 함은 측면관을 표현할 수 없으므로 측면으로 표현해야 할 것도 정면관으로 표현해 버린 것이라고 하면서, 또한 투시법도 무시되었으며
따라서 수평선의 문제도 무시되어 고구려 벽화는 수레의 고저와 그것을 끄는 소의 고저가 현저한 차이를 이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최순우는 이러한 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징이 6세기 후반
무렵부터는 원시회화가 지니는 도안적, 나열적인 단계에서 벗어나서 점차로 회화성을 지니는 과도기적 특질을 나타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런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제를 살펴보면 주로 죽은자로 하여금
내세에도 현세와 다름없는 생활을 영속시키려는 염원과 갱생에의 희구를 표현했으며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신령, 주인공의 생활사적인 기록, 종교적
이념, 장식적인 의장, 주술적인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회화로써 무덤 속에 소우주를 설정해서 죽은자가 영생한 세계를 마련하고 아울러 사자의
묘지적인 기록화를 남기고자 한 것이 주목적이라 하였다. 이들 묘심 속 천장에는 천체와 운무를, 주벽에는 청룡(동), 백호(서), 주작(남),
현무(북)의 사신도와 산천초목, 전각, 처첩시자(侍者), 선인(仙人) 또는 전투, 수렵, 무악, 공양도에 이르기까지 잡다한 내용이 그려져 있는데
김영주도 고구려 미술의 역량이 가장 잘 발휘된 것은 고분벽화라고 하면서 특히 고분벽화 사신도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조화를 통한 세련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환상의 동물 청룡, 백호, 주작, 현무는 마치 꿈틀거리며 벽을 차고 튀어나올 듯한 생동감에 넘치고 이런 기운은 고분 벽면 밖으로까지
넘쳐나오는 기백의 아름다움을 성취해 내고 있다고 하였다.
최최순우는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회화적 특색이나 그것이 가지는
생활상의 영향 같은 것 외에도 고구려 문화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 것은 인물도라고 하면서 이들 인물도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① 묘실 주인 부처를 그린 초상적인 그림
② 묘실 주인이 등장하는 묘지적인 여러 기록
그림
③ 장례와 풍속에 관계되는 행사 그림
④ 고사설화를 그린 그림
⑤ 묘실 문위를 그린 그림
위와 같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인물도를 다시 복식별로는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① 묘실 주인 부처의 정장
② 묘실 주인을 포함한 귀인들의 기마장(騎馬裝)
③ 묘실 주인의 전복(戰服) 갑주(甲胄)
④ 묘실 주인의 자녀들의 정장 또는 평복
⑤ 승려와 신직(神職)들의 의장(儀裝)
⑥ 사관, 사녀(仕女) 또는 비복들의 정장과
평복
⑦ 연희자(演戱者)들의 평복
⑧ 전사의 전복과 위병의 정장
또, 이들 복식을 제식별로 유형을 나누어 한족적인 한·육조풍의
복제와 고구려인 고유복제를 구분하였는데, 이 두 형의 복제 중에서 한족적인 경우는
① 묘실 주인과 그 처의 정장
② 승려들의 중국류의 승복
③ 사관과 사녀들의 정장
④ 전사와 위병들의 군장 등으로 나타나 있고, 그 밖의 경우는 묘실
주인의 평복과 정장을 포함해서 모두 고구려 고유복제로 등장한다.
여기에서 고구려 고유복제로 다음의 다섯가지를 대표로 꼽고
있다.
① 통이 넓은 바지에 대님을 댄 이른바 옹구바지 모양의 바지와
소매가 약간 넓고 길이가 긴 저고리를 입은 남성복, 이 긴 저고리에는 넓은 내리닫이 섶과 전체의 도련, 그리고 소매 끝까지 선(禪)이라 일컫는
색깔 또는 무늬있는 회장을 두르고 옷고름 대신 허리띠를 댄다. 저고리의 섶을 여미는 법은 고대 동북아 복제의 특징대로 좌임(左 )이며 후에
한족적인 우임(右 )도 나타난다.
② 여성복 또한 남성복과 같은 회장을 돌린 긴 저고리에 옹구바지
차림이 기본이 된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는 이 바지 위에 발이 덮이는 긴 벨 스커트형의 잔주름치마를 덧입는 예들이 많다. 또 그 위에
두루마기처럼 긴 웃옷을 입기도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예장이 되는 것으로 신분 있는 여성들의 옷차림으로 짐작된다. 이 긴 웃옷 또한 긴
저고리식으로 내리닫이 긴 섶과 소매 끝에 있는 무늬있는 회장을 두르고 허리띠를 댄다.
③ 새 깃털을 꽂은 고구려 특유의 남성의
조우관(鳥羽冠)
④ 머리에 띠를 두르거나 건국(巾國)이라 일컫는 특이한 두건을 쓰는
여성 두식(頭飾)
⑤ 두 뿔 모양이 붙은 투구, 목둘레가 세워진 고령의 갑옷,
윗도리와 바지 모양으로 생긴 갑옷 아랫 도리
최순우는 이상과 같이 인물도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의 복제를 살펴본
것은 이러한 인물도의 고구려 고유복제는 후한대 이래로 중국 고대의 고분벽화에서 영향을 받은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 독자성 짙은 고구려 문화로서
가장 구체적인 실상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구려 옛 강성 안에 남아있는 고분벽화 중에서 인물도를 다룬 가장
오래된 그림 중에 연대가 분명한 대표적 유적은 황해도 안악 3호분(동수묘) 벽화이다.
이처럼 고구려는 한족의 영향을 받긴 했으나 고유의 특색을 많이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고구려 미술은 후기로 들어가면서 한국적 경향을 많이 나타내었다. 고유섭은 한민족과 고구려의 특색을
비교하면서 한족이 나전적(羅甸的)이라면 고구려는 [고딕]적이라고 보았다. 즉 고구려가 삼각형의 조형 형태에서 근본 형식으로 취급했다면 한족은
방형(方形)으로 하였고, 문필에 있어서 고구려는 요발적(拗撥的)이라면 한족은 장세적(張勢的)이라 하였으며, 산악의 사실(寫實)등에 있어서는
고구려를 평원적이라면 한족은 고원적이라고 하였다.
최순우는 이처럼 한족과 다른 특색을 가진 고구려가 한국적 경향을
많이 나타낸 것은 고분벽화의 불상조각에서라고 하였는데 1940년 평양시 평천리에서 출토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고구려 사유반가상 양식을 잘
나타낸 작품으로 이 조각의 얼굴을 보면 매우 부드럽고 겸손하며 선이나 면이 누그러지고 감정이 평화롭고 안정되며 원만하게 되는 것은 바로 한국
미술의 특색을 나타내는 일면이라고 하였다.
지리적 영향으로 고구려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백제는 해로를 통해서는
남부 중국 문화와는 직접 접촉을 가지면서 중국 남조회화 양식을 흡수해서 회화 발달의 기틀을 마련했는데 백제의 고분벽화에는 씩씩하고 고구려적인
기상은 줄어들고 묘선과 구도가 부드럽게 변한 것이 특색인데 이것은 백제적인 풍토감각의 작용이라고 최순우는 말했다. 즉, 한반도 서남부의 풍요한
평야와 온화한 기후속에 길러진 백제인의 기질이 깃들어 온유 풍아한 백제 양식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백제의 특색을 김원룡은 [백제 미술품은 낙천적이고 여성적이며
우아하다]라고 했고, 고유섭은 [유려하고 아윤(雅潤)하며 섬세하고 명랑하고 더욱 교지(巧智)까지 흐르는 정서를 가졌다]고
하였다.
이러한 백제 미술의 특색은 고분벽화뿐 아니라 불상조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최순우는 백제 불상조각은 북쪽 고구려를 거쳐 들어온 북위 불상양식과 남조에서 파급된 양(梁)을 비롯한 남조 불상 양식이 겹쳐져서
고구려 불상이나 북위 불상보다는 긴장이 풀리고 온유한 감각을 느낄 수 있으며 단순해진 간교한 조형미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고유섭은 [백제불상은 공식적 형식을 구비한 중에도 온아한 정서와
유려한 취태가 흐르고 있어 입가의 고졸(古拙)한 미소 이외에 안모(眼眸)의 소태(笑態)는 다른 조형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라 하였는데, 이처럼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는 백제 관음 불상이나 무령왕릉에서 나오는 장신구 등은 중국 최고품을 능가하는 작품들로 그들의 풍족한 사회에서 오는
백제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와는 달리 신라는 북변과 서변이 고구려와 백제에
가로막혀 중국 본토와의 접촉이 어려웠으므로 최순우는 신라의 문화미는 짙은 고구려의 문화요소가 깔려 있어 삼국 중 신라의 회화는 가장 보수적인
경향을 보인다고 하였다.
또, 그는 신라시대의 화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63년
경상남도 고령에서 발견한 연화도 벽화나 1971년 경상북도 영주의 어수술간묘(於宿術干墓)에서 6세기 것으로 보이는 을유명 인물상과 연화도를 보면
신라의 고분 문화가 고구려 고분문화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신라 화가의 대표로 꼽는 솔거의 약전(略傳)이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남아 있어 솔거가 인물화, 불화, 풍경화 등에 매우 훌륭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솔거가 그린 황룡사 벽화의 노송 그림은 하도 훌륭해서
야조(野鳥)들이 속아서 날아들었다. 세월이 흘러서 그림이 퇴색하자 스님이 그 위에 단청을 개칠했더니 다시는 새들이 날아들지 않았다. 경주
분황사에 그린 관음보살상과 진주 단속사에 그린 유마상은 모두 그의 작품이며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화신(畵神)이라고
일컬었다.
라고 되어 있다.
솔거가 그린 황룡사의 노송이 실제 살아있는 소나무인 줄 알고 여기에
앉으려고 뭇새들이 날아들었던 것인데 사람들은 그의 이처럼 훌륭한 그림을 보고 신화라고 불렀는데 그러나 솔거의 작품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이렇게 신라의 회화에서는 이렇다 할 신라의 특색을 찾기는 힘들지만
신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고구려나 백제보다 조금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불상 조각에서 신라 특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최순우는 금동소상과 반가상에서 특히 신라 특유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고 하면서 그리고 명기할 것은 그들 불상 중에는 화강석으로 불상들을 만들어 신라인들의 화강석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 것을 알 수 있고 이들
화강석 조각은 불상의 테두리에서만 머물지 않고 앞날 통일신라시대 능묘의 호석으로 석조 전개의 기틀이 되어 주었을뿐 아니라 황금기 통일신라시대의
조각 불상 조형을 개화하는 시금석이 되었다고 했다.
이와같이 신라에서 불교가 수입되면서 불상조각의 발전뿐만 아니라
공예미술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하였는데 최순우는 [신라토기는 백제토기에 비하면 실용도가 낮고 비현실적이긴 했으나 신라토기는 김해토기 양식에서
발달되어 4세기 말부터 이미 독자적 양식을 정립하였는데 가야를 포함한 신라 지역 어디서나 출토되는 신라토기들을 보면 삼국토기 중 고격과 특색이
가장 짙게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시대는 중국 한·육조의 영향을
받았으나 우리 풍토 양식에 맞는 회화, 조각, 토기 등에서 정직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면서 한국 미술 활동의 중심체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3) 통일신라시대
7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신라의 삼국통일은 단일체계의 민족문화로서
새로운 전개를 가지게 되었다. 신라의 미술이 당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국제적 색채를 띤 것은 사실이나 통일신라는 보수성이 짙어 당의 영향에 세련된
한국인의 조형재질을 반영하여 삼국의 어느때보다도 정제된 양식과 원숙한 표현력을 발휘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서 분립되었던 민족세력과 그 문화의
갈피를 통합한데도 뜻이 크지만 강성한 국력으로 서방의 문화요소를 받아들인 당으로부터의 영향은 불상조각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것은 인도조각에 반영된 굽타(Gupta)식을 비롯한 서양적인 사실
표현 경향인데 이런 굽타식 불상조각이 중국을 거쳐서 두 세 번 걸러져 삼국시대 말기에 파급되긴 했으나 여운에 불과했고 성당문화(盛唐文化)와
폭넓게 접촉한 통일신라는 이러한 사실 표현에 큰 감명을 받아 동방적인 형이상학과 어울러 원숙한 경지의 불상조각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는 융성한 불교를 온상으로 해서 불교미술의
결정이라고 할만큼 불교예술의 통합을 이룬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 내었는데 건축, 조각은 물론 토기들에서도 불교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최순우는
경주 불국사(佛國寺)의 대석단과 청운교, 백운교 등을 예로 들며 이것을 그 시대의 건축의장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꼽았다.
이 불국사는 쌍탑식으로 된 산지자람의 뛰어난 예로 최순우가 한국미의
특색으로 꼽는 순리의 아름다움을 갖춘 대석단의 구성미나 그 대석단 위에 다보탑, 석가탑과 함께 이룬 안정과 율동의 해화미는 바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유적으로 한 데 손색이 없는 것이다.
최순우는 또한 이 시대의 석탑들은 대체로 허세에 기울지 않고
목조가람 건축에 알맞은 크기와 단아한 선과 쾌적한 양감과 비례를 나타내고 있다고 하면서 특히 이 시대 건축은 화강석 석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며, 안정된 비율과 명확한 윤곽이 주위환경과 잘 조화시키는 특징을 가졌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불국사와 버금가는 대표적 작품으로 석굴암을 들고 있는데
이 불상은 계산된 아름다움으로 바로 그렇게 쾌적한 시각의 비밀은 바로 수학적인 기초가 요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석굴암에는 본존여래를 비롯한 여러
조상들이 있는데 이 조상들은 석굴 건축 자체와 더불어 모든 조형 계획이 계산된 기초 위에 이루어진 것으로 불신(佛身) 특히 본존여래좌상을 측정해
보면 지체의 비례는 물론 석굴과의 관계가 수학으로 풀어서 맞아떨어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강우방은 이것을 한국 미술의 원리로 [원융(圓融)과
조화(調和)]라고 하였는데 원융은 완벽한 조화를 실현하는 것으로 우리 한국인은 이것을 지향했으며 또 하나의 개념인 조화는 예술적 표현 방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도 결국은 원융으로 인도되는데 그런 표현 방법은 석굴암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하면서
석굴암의 건축과 조각은 매우 치밀한 기하학적 작도와 아름다운 비례의
원리(1:)를 적용하여 완성한 지구상에서 이루어진 가장 위대한 예술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라고 표현했다.
이같은 표현 방법처럼 우리나라 고대의 사찰 평면과 석탑에 치밀하게
응용된 기하학적 비례는 부분과 부분은 물론 전체와 부분의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었는데 최순우는 이와같은 계산된 아름다움을 지닌 석굴암 제상들에서는
어느 조상도 따를 수 없는 높은 차원의 조형미와 불교 정신의 승화된 형이상학적인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는 본격적인 화강석 조각의 황금기로 능묘의
호석(護石), 즉 문인석, 무인석 그리고 석사자, 십이지신상 등을 능묘에 배설하는 새로운 풍조가 일어나 특이한 석조가 발달되었는데 이 능묘
호석의 전통은 고려시대 능묘에까지 이어졌으며, 이런 화강석 조각은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마모의 미]를 처음부터 알고 시도한 조상들의 지혜라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건축이나 불상조각 외에도 통일신라시대의 두드러진 특색을
나타내는 것으로 토기를 꼽을 수 있는데 통일신라 토기를 신라의 토기와 시대를 분명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통일신라시대 토기는 원저장경감, 고배,
이형토기 등 비기능적인 기물은 자취를 감추었고, 얕고 안정된 굽이 있는 호형(壺形), 병형(甁形), 합형(盒形), 배형(杯形) 등 현실적인
기형으로 대체되었다.
또 신라토기 장식의장의 특색을 이루던 예리한 선각문양 대신
인화문(印花文)(타압(打押), 압날(押捺))이 기면에 장식된 통일신라 토기의 두드러진 특색을 나타내었는데 이것은 불교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통일신라시대 토기의 기형이나 장식의장이 변화한 것을 살펴보고 최순우는 이러한 기형은 중국 육조나 당의 기명양식이 짙게 반영된
것으로 비합리적인 것에서 합리적으로 비약한 모습이며 비현실적, 비실용적이던 고신라토기에 비해 기능적이고도 현실적인 실용성 있는 기형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들은 당의 영향을 많이
받긴 했으나 성당양식의 충격에 밀리지 않고 극도로 세련된 미의식과 수법을 내세워 한국적인 순수와 소박하고 꾸밈없는 생활 철학으로 세련되고 안정된
조화의 미를 발휘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4) 고려시대
고려예술은 불교를 국시로 삼은 고려의 불교적 영향이 매우 커 고려의
문화도 불교적 영향을 무시하고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번성과는 달리 고려의 불상조각은 신라 조각이 지녔던 정기와 격조를
잃고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고조되었던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이상이 지녔던 높은 차원을 따를 수 없었던 불교 이상의 저조화가
원인이라고 최순우는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현상으로 고려불상조각은 신라조각의 사실기법만이
승계되어 내재적인 형이상학적인 높이의 아름다움은 지니지 못하고 자연 인간성에 가까운 아름다움으로 변모되어 자칫 불상이 인형의 성격에 가깝게
변했다고 하면서 그러나 다행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일어난 철조불상의 여세가 강하게 남아 있어서 고려시대 전기에는 철조여래상이 만들어져 비교적
고려불상 조각의 위신을 지켜주었다고 했다.
불상조각 외에 최순우는 고려건축에서는 주위 자연의 선이나 구성을
해치지 않는 순리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면서 산의 경사면을 교묘하게 이용한 자유스러운 평면배치나 건축물 크기의 억제를 통하여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룬 것은 한국적 분위기 형성에 성공한 것으로 예로서 부석사 무량수전과 수덕사 대웅전이 있다고 했다.
고유섭은 [이것은 자연의 신비성, 숭고성, 장엄성에 청취되고
합덕되려는 곳에 노장(老壯) 철학이 자연에 귀일되려는 사상과 동공이곡(同工異曲)에 속하는 것으로 인간적 공기(工技)를 대자연 속으로 흐믈흐물하게
녹여버리고 말려는 정신]이라고 하면서 [무위공관(無爲空觀)은 노불(老佛)을 합일시킨 근기(根機)이지만 고려건축에 자연에 대한 배치를 설정한
원리도 된다.]고 했다.
고려인들의 거대한 석상의 기술이 퇴화하고 석탑의 제작이 줄어들었지만
이처럼 고려시대 건축은 조용하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특색을 가졌던 것이다.
사실 고려는 귀족승려들과 문신들에 의해 실질적으로 고려의 미를
형성하고 지시하고 갔는데 고려 서적의 자체(字體)에서 나타나는 완벽주의나 고려청자의 귀족적인 성격은 그러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회는 몽고족의 침입으로 국력이 피폐해지고 12세기 말에
일어난 무신의 집권 등으로 백성들은 불안정과 무질서로 현실의 밑바닥에는 끊임없이 절망이 깔려 안돈할 수 없는 형편이 지속되었는데, 이러한 시대적
정황에서도 고려는 고려 독창적인 수법으로 도자의 본토에도 없는 고려청자의 새 생명을 얻었으나 고려청자에 비애와 우수가 깃들인 것은 시대의
슬픔이나 영혼의 감성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로 말하였는데 최순우는 이에 반해 고려 비색의 독특한 아름다움은 고려 사람들의 호흡이었으며 고려
사람들의 오랜 시름과 염원, 영원한 꿈의 실마리가 담긴 겸허와 지조의 아름다움이며 사색과 고요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이름 붙여서
[자제의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일찍이 고유섭은 고려자기처럼 도자로 말미암아 당시의 역사적 사회성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기는 드문 일일 것이라고 하면서 청자를 통해서 당시의 귀족적 번화성(繁華性), 향락성(享樂性), [델리키트]한 [센티멘탈리즘],
문학적 정서, 시적 정서를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고려도자에 관하여 최순우는 <고려도자의
편년(編年)>에서 고려도자의 절정기는 12세기 전반기 50년 동안이었는데 이것은 11세기 후반기 이래 청자와 백자의 유태(釉胎)가 세련을
거듭해 오면서 도자기뿐만 아니라 이 무렵의 고려공예와 회화, 그리고 인쇄술의 발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고려도자는 기형(器形)과
의장(意匠) 등 조형 감각과 기술에 분명한 국풍화 경향을 짙게 나타냈다고 하면서 고려자기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고려청자에 관한 양상을 알 수 있는 문헌은 고려
인종원년(1123)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북송의 서극이라는 사람의 저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속에서
陶器色之靑者 麗人謂之翡色
近年以來制作工巧 色澤尤住
出香赤翡色世 上爲 獸
下有仰蓮以承之 諸器性比最精絶
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최순우는 당시의 송은 징종(徵宗)대로
문물이 꽃을 피우던 때였으므로 서극이 고려의 청자를 그처럼 찬양한 것은 놀라운 일일 뿐 아니라 당시 고려 사람들이 중국식의 호칭인
비색(秘色-청자를 일컬음)을 버리고 고려의 청자를 비색(翡色)이라 한 것은 그들이 청자 유색에 대해서 그만한 긍지를 지니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무렵의 송나라 학자인 태평노인(太平老人)이 그의
저서 ≪수중금(袖中錦)≫ 속에서 천하제일을 다루는 속에서 송의 청자를 빼고 고려청자를 꼽았던 사실은 위와 같은 내용을 뒷받침하는데 그는
監書內酒 端石硯 洛陽化 蓮州 茶
高麗秘色(고려청자를 일컬음) 皆爲天下第一
이라고 했다.
이외에도 고려청자의 유색(釉色)을 비 개고 안개 걷힌 후 먼
산마루에 갓 맑은 하늘 빛의 하늘색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곧잘 푸른 빛깔에 비유해서 [우후청천색(雨後晴天色)]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최순우는 이러한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은 청자비색의 아름다움과 곡선의
아름다움 그리고 도자기의 기체에 이물질을 상감해 구워내는 청자상감의 기법을 일컬어 고려청자가 지니는 독자적인 아름다움의 3대요소로 꼽았는데
이러한 고려청자의 표현감각 속에는 귀족공예적인 요소와 불교적인 취향이 짙게 깃들여 있으며 이것은 바로 고려의 사회적 배경에서 오는 민족미술양식의
일환이 된다고 하면서 사회적인 영향을 배제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고려청자의 유색으로도 그 시대의 미의식과 그 시대의
사회적 정황을 미루어 알 수 있지만 그러나 몽고군의 침입으로 수십년간에 걸친 사회불안과 경제의 혼란 속에 그처럼 정기어렸던 고려청자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고 그로 말미암아 청자의 태토(胎土)와 유조(釉調) 그리고 장식 의장(意匠)에 이르기까지 영향이 미쳤는데 이러한 변화는
청자상감의장이 점차 대범해지고 거칠어졌으며 그 표현에는 밀도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상감의장의 일부는 일정한 인형(印形)으로 압날(押捺)해서 손쉽게
처리하는 등 매우 절제없는 풍조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의장은 다음 시대에 등장하는 조선시대의 인화문(印花文) 상감기법의 시원이
되었다.
이와같은 고려시대 청자사의 흐름 속에 나타난 가장 큰 변혁은
대륙에서 일어난 송, 원간의 교체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고려는 싫건 좋건 몽고족의 압제하에 놓여짐에 따라 시대 양식적인 장식의장 변화는 물론
번조기술면에서도 중국 북방계 기술의 침식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14세기말 고려왕조의 운명과 함께 고려청자상감이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탈바꿈하여 고려청자와 같은 정교하고 세련된 맛은 적으나 고려말기 도공들이 품고 있던 한국인 본연의 조형기질이 전해져 조선왕조의
새로운 조직과 새 문화건설의 의욕 속에 건강하고도 민중적인 새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5)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의 불교적 영향을 떠나 유교적인 새로운 사회체계로
일반미술과 공예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특히 국민의 생활정서를 가장 솔직하게 반영하는 미술의 미감각은 이러한 시대 배경을 민감하게
받았다.
귀족적이고 불교적이던 고려시대 공예미의 성격이 14세기말 이후
갑자기 실질적이고 민중적인 감각으로 바뀌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반영때문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인들의 신앙심 속에서 불교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고, 궁중으로부터의 불교에 대한 지원이 완절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위세가 당당하던 고려와는 만반의 활동에서 크게 달라졌고
미술에 미치는 영향도 당연히 후퇴하게 되었다. 유교적인 인생관에 의해 영향을 받았던 민중의 감정으로 한국 역사의 그 어느때보다는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한국 풍토의 양식을 보인 조선적인 미술을 전개하였는데 특히 회화부분과 백자, 목공예로 대표되는 공예분야는 절대적인 진전을 보였는데
중국, 일본과의 교류도 더욱 활발하였다.
이런 점에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 고예술연구는 중국과 일본을
이어주는 교두보였으므로 조선미술사 연구의 의미가 중요함을 시사했는데, 이처럼 일본인이 조선미술사 연구의 중요성을 시사했듯이 조선의 미술연구는
사실 우리 한국 미술의 특색을 아는데 매우 중요한 일인 것이다.
최순우에게 큰 영향을 준 고유섭은 <조선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에서 조선 고미술의 특색으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비정제성(非整齊性)] [비균제성(非均齊性)],
[무관심성(無關心性)], [구수한 큰 맛]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조선미술의 특색이라는 것은 곧 조선미술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고유섭이 설명한 이러한 조선미술의 특색에 최순우도 많은 공감을
하면서 나름대로 조선미술을 장르별로 모아 특색을 발견했는데 먼저 회화에서 그 특색을 살펴보면, 이조의 회화는 고대의 우리 불교 미술이나
고려청자에 비해 아직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체의 이조회화사 연구가 아직 진보되지 못했고 작가연구나 작품의 체계있는
정리가 이루어지지 못한데 연유가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초에 도화원(圖畵院)(후에 도화서(圖畵署)로 개칭됨)이 설치되어
왕공사대부(王公士大夫)들 중에도 그림을 좋아하고 즐겨 그리는 사람들이 다수 나타나 초기의 화단은 활기를 띠었으나 고려시대에 한몫하던 승려화가들의
활동은 억불숭유정책 때문인지 크게 위축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회화를 발전시켰던 것은 화원들과 왕공사대부화가들로
볼 수 있는데 조선초기에는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 그림뿐만 아니라 순수한 감상을 위한 회화가 크게 진작되었고 그림의 소재도 다양해진 것을 당시의
작품과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의 왕공사대부들의 생활과 사상을 반영해주는 작품들로 대나무,
산수, 인물, 익모, 화조 등 다양한 면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산수화가 가장 널리 제작되었다.
당시의 산수화는 궁중의 각종 행사나 사대부들의 계회(契會)를
묘사하는 실용적 목적의 그림에서 뿐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는 당시 사대부들의 호연지기가 밀착되어 크게 성행하였던 것인데, 그러나 최순우는 조선초기
회화는 송대 화풍의 복고적인 경향이 짙었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중에서도 이조 전기 문인화 계열의 작가들은 산수와 인물화에서 보다 더 짙게
작가적인 개성과 풍토감각을 드러내어 민족미술 양식의 일면을 보여주었다고 하면서 특히 종실 출신의 이엄과 이정, 사대부 출신인 사임당 신씨와 조속
부자등의 수묵으로 그린 작품은 고담하고 야일적이며 성기고도 스산한 조선 문인화 감각의 특이한 기틀을 잡아주었고, 17세기 후반기에 크게 변천한
이조전기 초상화 기법의 발달은 전신(傳神)이라 해서 형이적인 용모 사실(寫實)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안광과 인격 그리고 학문과 성정까지
화폭에 박력있게 표현된 형이상학적인 아름다움의 구현을 으뜸으로 삼은 놀랄만한 솜씨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남종화, 문인화 등의 화풍이 유행하여
진경산수, 풍속화 등이 풍미하였는데 겸제 정선은 오랜 수련을 통해서 독보적인 한국 산수화의 새로운 정형을 개척하여 영·정조 연간에 걸쳐 18세기
실학파 학문과 한글로 개척된 서민문학의 대두와 서민사회의 가림없는 생태를 주제로 한 풍속화와 나란히 성장한 민족양식이 되었다고
하였다.
풍속화가였던 김홍도와 신윤복 등은 정선의 그러한 업적을 비록
간접적으로 받긴 했지만 한국 자연 정취를 올바르게 본 사람으로 남종화 양식을 절충하여 이른바 단원 산수화를 이루어 한국 산수화의 특이한 분위기를
잡았을 뿐 아니라 서민의 생업과 사람의 사랑의 생태를 대담하게 다룬 풍속화의 새로운 면을 개척하기도 했다.
최순우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면서 고답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이 상례이던 당시의 화단에서 현실적인 서민 생활에서 드러나는 생업과 사랑과 익살 등 일하는 서민의 즐거움과 사는 즐거움을 주제로 삼은 소위
속화의 개척은 현실적인 자기 자신에 눈을 돌린 서민의식의 싹틈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서민사회의 성과 사랑의 생태, 그리고 이조인들의
생활속에 스며있던 멋과 태와 가락의 기조를 실감있게 다루어낸 신윤복의 풍속화는 그것을 사실해서 그 정형을 기록해 낸 사실만으로도 그 공헌이라고
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이조회화는 조선초기에는 귀족과 관료, 학자나
문사들이 산수화나 화조, 익모 등을 즐겨 그림을 그렸으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직업화단이 성장하면서 한국적인 특질을 갖게 되었는데 최순우는
한국회화가 갖는 구체적인 특징으로 첫째는 조용하고 담담한 색채감각과 두 번째로는 좀 거칠고 밀도가 적게 대범하게 표현한 그림의 표현방법과
기법이라고 했다.
이처럼 조선회화가 독자적인 특질을 가진 것처럼 조선시대 건축 중 먼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생활사와 우리 문화의 성장과 함께 자라온 한국 주택건물의 아름다움을 조선시대 미술 특색에서 빠뜨릴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꼽을 수 있다.
최순우는 [주택은 꼭 미적인 측면에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
바탕은 민족성과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아 자연과 조화시키고 주위의 환경과 주인의 지체를 분수에 맞추어 순리대로 표현한 것이 한국 주택 건축의
아름다움인데, 특히 집자리를 정할때는 항상 점지의 묘를 살려 집을 지을때는 반드시 자연에 순응하여 건축의 규모와 주위의 환경을 조화시켰으며
여기에 풍수사상이 주축이 되어 지상(地相)(땅의 형세)와 가상(家相)(집의 형세)을 조화시키면서 금기와 호상을 따졌다]고
했다.
최순우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의 주택은 주택의 공간도 순리의 공간,
안주의 공간을 이루면서 바라보는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염두에 두었으며 추녀 끝에서 바라보는 무한대로 뻗은 곡선과 회색기와와 흰벽, 흰 화강석의
주춧돌과 대석, 단청이나 번쩍이는 것을 칠하지 않은 재목 등은 절묘한 색의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나타내었고, 순리로 주택을 꾸미려는 안목은
후원에서도 잘 나타났는데 정원은 자연에 인공을 가미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그대로 살린 것이었다.
고유섭은 이조의 정원 예술을 인공과 자연과의 싸움, 그 싸움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조화-춘, 하, 추, 동의 사시경(四時景)이 한 곳에 모이고 나뉘는 일대 거울이 정원이라고 하면서 일본의 정원과 비교했는데
일본의 정원을 보면 그곳에는 무수한 법칙과 약속이 있어 그들이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그대로의 자연보다 오려내고 깎아내며 손질이 넘어난 인공의
자연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일본의 정원은 이조의 정원이 갖는 순리의 아름다움을 갖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순우는 이러한 독자적인 한국의 아름다움을 지닌 이조 주택미의
기조를 간직한 건축의 예로 비원의 연경당을 들었는데 이 연경당에는 겸허와 실질과 소박의 아름다움과 한국적인 품위와 조국에 대한 즐거움 같은
담담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상으로 조선의 회화와 건축의 아름다움을 살펴보았는데 그는 회화와
건축에서 뿐 아니라 조선미술의 특색을 가장 뚜렷하게 발전시켜 온 것은 특히 도자기와 목공예품들이라고 하면서 우리 미술 중에서 무엇이 가장
한국적이냐 할 때 서슴지 않고 이조도자기를 들고 싶다고 했다. 이것들은 생활도구들이기 때문에 국민 생활 정서가 가장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반영된
실질적이고 민중적인 감각의 생활 미술의 미감각이 가장 잘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자기는 그 나라 하나 하나의 역사와 자연이 반영되어 그 미의
방향이 정해지긴 하지만 대개는 불필요한 기교와 허식으로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그르치는 예가 많은데 역사와 풍토를 배경으로 한 민족적인 생활 정서를
가장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조건을 가장 잘 구비한 예의 하나가 한국 도자기인 것이다.
이조도자기들은 고려도자의 정교성에 비해서 기술적인 퇴화를 느낄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귀족적인 취향을 드러낸 조형으로부터 자유스럽고 실리적인 조형으로 바뀌었는데 말하자면 귀족사회로부터 이조적인 관료체제의 새
환경에 순응하는 가장 솔직한 민족양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조시대는 고려말의 타락되었던 청자상감시대에서 청신한 새 체제의
아름다움으로 탈바꿈한 분청사기의 양식이 성립되었고 원, 명 백자에 자극된 소문순백자(素紋純白磁)의 뛰어난 세련이 주목할 만한 발전을 한
시기였다.
이 점에 대해 고유섭은 조선도자에는 고려자기에서 볼 수 없는 한
개의 기박(氣迫)이 있다고 했는데 이 기박은 조황(粗荒), 박력(迫力), 기우(氣宇), 활달(闊達) 이 모든 점이 들어 있는 것인데 이것은
분장회청기(粉粧灰靑器)에 나타나 있는 특징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은 분청사기를 미시마데(三島手)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일본에
있는 삼도신사에서 일본의 히라가나 문자로 책력을 발행한 책자의 모양과 비슷하다 해서 이렇게 불렀다고도 전하며, 또 한편으로는 삼도신사에 모신
주신이 한국의 신이라 해서 [한국의 자기]란 뜻으로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15세기 초부터 발달된 분청사기의 기법은
15세기 중엽 새로운 문물이 싹트던 세종때 그 절정을 이루다가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전국의 요업생산이 마비된 채로 좀처럼 전후 부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전쟁으로 2백년간 계속된 분청사기는 절감되었으며 일본군은 한국
도예를 탐욕해서 많은 도공들을 그들 가족과 함께 집단으로 납치해 갔으며 납치된 한국 도공들의 손으로 비로소 일본 자기질 요업이 17세기 초에
구주지방을 기점으로 출발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전후의 이조자기는 백자 단일 체계 속에서 지방요에서 생산되는 회유계
흑유자기들이 일부 병행되었는데 백자는 순백자와 청화백자가 2대 주류를 이루었으나 청화재료 구입이 어려워 그 대용품으로 개발되었던 철회백자가
16세기 이래로 개발되어 17세기까지 매우 이색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는데, 최순우는 이러한 이조백자에 대해 외면적으로는 단순한 흰색 일색에
불과하지만 여러 가지 요소가 안으로 동결된 [구수한 큰 맛]이란 것이 내외없이 혼연한 풍미를 이룬다고 했다. 고유섭은 이러한 이조백자가 구수한
큰 맛을 이루게 되는 것은 확실히 한국조형미술의 한 특징이라고 하면서 한국의 아름다움은 비록 체질적으로는 작다 하더라도 구수한 큰 맛이 있으며
이것은 한국미술이 지니는 작은 맛과 상대된다고 했다. 또한 그는 작은데서 오는 [단아](端雅)라는 예술성은 외부적, 자연적, 지리적 환경에서
오는 소치(所致)로, [단아]라는 작은 맛은 자연의 제약에서 오는 면이며 큰 맛이란 생활의 면, 생활의 태도에서 오는 맛으로 두 개의 모순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김임수는 <고유섭연구>에서 [구수한 큰 맛]이란 [고소한
작은 맛]과 상대적 의미에서, [맵자하다는 것]은 [헐거운 것]과 [단아]는 [온아]와 대칭되는 개념으로 쓰여지면서, 그 예술적 발양(發揚)과
관련된 가치 창조적 의미가 강조되는 가운데, 그러한 개념들은 곧 예술 형식적 활동 주체의 인격적 가치 창조작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면서
다시 말하면 [예리, 규각, 표렬] 얄상궂고 천박하고 경망하고 교혜로운 점이라든가 [조대(粗大), 조추, 난잡, 궤약] 고루하고 빡빡하고
윤기없고 변통성 없고 음체로운 것과 같은 결합은 인간의 바람직한 미적 심성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은 또한 인격적 결함과 다름 아닌 것으로 이와
같은 결함에 있어서는 미적 체험도 예술 창조도 불가능한 것이고 보면 여기에 대상적 소여(所與)에 앞서서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것은 주체의
미적 심성이라 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구수한 큰 맛]은 곧 단아와 생활의 면,
생활태도에서 오는 맛의 여러 요소가 동결된 맛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순우는 이와 같은 구수한 큰 맛을 지닌 이조백자의 아름다움을 [잘 생긴
며느리 같다]고 표현하면서 백자의 아름다움은 그 흰 빛깔의 폭이 넓어 같은 흰색이라도 복잡미묘한 다양성을 무수히 가지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한국사람들이 자연스러운 오랜 훈련을 통해 흰색을 민감하게 느끼는 감성을 지녀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최순우는 회화, 건축, 도자 외에도 공예미의 본질적인 미의
원천을 가진 것은 한국의 민예품이라고 하면서 그 중 이조 공예미의 독자성은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솔직하고도 단순한 것이 특징인데 좋은
공예작품일수록 그 아름다움의 본성은 건강하고 정직하다고 했다.
민예라는 말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중적 공예(民衆的 工藝)를
간략하게 줄여서 민예(民藝)라 부르기로 하자]라는 그의 책에서 처음 사용된 말인데 최순우는 이 민예라는 뜻은 민중적 예술에서 오는 약어로써
궁정이나 양반 등 상류사회에 떠받치는 권위예술 작품이 아닌 민중 속에서 민중을 위해서 자라난 무명의 공장(工匠)을, 또는 민중 스스로의
뜨내기들이 만들어낸 민중 속의 일상용기, 용구민화 등에 나타난 민중적인 조형예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민예품은 조선시대 국민들의 생활정서가 소박스럽고 솔직하게
드러나 있는 미술품으로 이조미술의 특색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최순우가 이조시대의 미술에서 느끼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특색을 종합해 본다면 유교의 영향을 받은 국민의 감정으로 한국역사 어느때보다도 국민 생활 정서를 가장 솔직하게 미술에 반영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Ⅳ. 최순우가 본 한국미적 주요 특징
한국미의 특질이 논의될때마다 그 대상으로 늘 폭넓게 다루어지는 것이
우리 [멋]의 세계이다.
최순우는 우리의 멋이란 미술에도 문학에도 그리고 음악과 무용 등
어느 예술 분야에도 다 스며있지만 특히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상 속에서 그 멋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먼저 한국적
전통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여 올바른 체질로 그 장점을 느끼고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국적인 특질과 장점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통이나 한국적인 것을 잘못 알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도자기를 열심히 만들거나 색동옷, 단청, 문양 등을 그리는 것이 곧 한국적인 것인양
착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런 소재만으로 국적을 판별하는 사고방식은 한국적인 특색과 장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한국적 의미를 간추려 본 한국미는 한국 사람들의 성정과 생활양식이
우러나며 한국적 전통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한국인다운 체취가 농도짙게 표현된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유하고 독특한 아름다움인
것이다.
최순우는 이런 점으로 미루어 한국의 예술이 위대한 것은 즉 그
민족이 미에 대한 놀랄만한 직관의 소유자로서 의미를 가지고 결코 조야(粗野)의 미도 아닌 강한 특질도 아닌 다만 참으로 섬세한 작품들이라는 점에
있다고 했다.
최순우의 스승인 고유섭도 우리의 미를 발견하는 것은 작품이나 유물을
실증하는데 있다고 했으며, 또한 그는 한국 미술의 미적 특질은 미학적 문제와 관련하여 미적 체험 형성의 원리적 구조를 이루는 자연 및 예술과
분리될 수 없는 인간 삶의 미적은 [생활 자체의 본연적 양식화] 또는 [종합적 생활 감정]의 미적표상이 바로 한국미술의 민예적 특징을 이룬다고
했는데 이것은 최순우가 한국 사람들의 성정과 생활양식에서 찾는 한국미와 같은 맥락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미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의 언어 표현으로 남달리 독특한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을 살펴보면 [아름다움]이란 말 자체가 우리의 미의 본질을 강력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름]이라는 것은 [안다]의 변화인 동명사로서 미의 이해 작용을
표상하며 [다움]이란 것은 형명사로서 [격(格)], 즉 가치를 말하는 것으로 [사람다움]이란 것은 인간적 가치 즉 인격을 말하는 것이고
[일다움]은 일의 정상을 말하는 것처럼 [아름다움]은 지(知)의 정상(正相), 즉 지적가치를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아름]이 추상적 형식
논리에 그침과 달리 종합적 생활감정의 이해 작용에 근거를 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름다움]이란 종합적 생활감정의 이해작용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최순우가 한국의 미를 여러 가지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그래서 그는 한국적이라고 하는 말은 한국 사람들의 성정과 생활양식에서 우러난 무리하지 않는 아름다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소박한 아름다움, 호젓한 아름다움, 그리움이 깃든 아름다움, 수다스럽지 않은 아름다움, 그리고 이러한 아름다움 속을 누비고
지나가는 익살의 아름다운 것을 아울러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이러한 한국미의 특질을 순리, 담조, 익살, 은근,
백색, 추상의 아름다움 등으로 제시하면서 이외에도 고요함을 가지며 분수에 맞고 개성적인 우리 아름다움을 주옥같은 그의 글과 말에서 여러 측면으로
나누어 표현했다.
이와같이 한국미의 특질을 여러 측면으로 보아 온 최순우의 감식안을
한국 사람인 우리는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일생을 바쳐 연구해 온 한국미의 특질 즉, 우리의 아름다움이 주요한 의미를 지닌 한국미의
주요 특징을 좀 더 자세히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 익살의 아름다움
최순우는 우리 한국 예술인들은 모든 작품과 예술활동 속에 잔잔한
웃음을 주는 익살을 집어 넣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의 성정과도 관계되는 것으로 한국 사람들은 웬만큼
친한 사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농을 걸어 서로의 정을 돋우기도 하며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해학의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달래고 슬픔의 아름다움과
해학의 아름다움을 함께 반영하여 조형 작품 위에 옮겨 놓았는데 이러한 고요의 아름다움과 슬픔의 아름다움을 조형 위에 옮겨 놓은 것은 바로
예술에서 말하는 관조미의 세계이며 익살의 아름다움을 조형위에 구현하는 것은 바로 해학미의 세계라는 것이다.
여기서 익살의 아름다움은 한국의 회화, 조각, 공예, 건축 등 모든
분야에서 흔히 느껴지는 즐거움으로 이 익살 표현은 민중적인 경향으로 표현된 조선조의 도자기, 민화, 자수 등에서 자주 다루어졌으며 그러한 경우에
그 효능이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다.
이밖에도 사물 표현에서 대담한 생략과 왜곡과 과장을 자연스럽게 다룬
솜씨와 둥근 것이 지니는 좌우 대칭에 대한 무신경, 그리고 이지러진 둥근 맛이 주는 공간미 등은 한국 공예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익살의 세계인데
이것은 거드름도 잔꾀도 모르며 어줍고 익살스러운 한국인의 선천적인 즐거움이 미술에 반영된 것인 것이다.
익살은 미의 범주인 골계미에 속하는데 미의 범주 중 하나의
골계미(the comic, Das Komische)는 익살, 기지, 반어, 해학 등에 의해 일어나는 희극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통인 이하
악인의 모방이라 했으며, 칸트는 웃음으로 긴장했던 기대가 무(無)로 전파하는데서 생기는 정서라고 했고, 뿐만 아니라 립스(Lips)는 불시에
의외로 출현하는 왜소한 것이라고 했다.
이 골계는 다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으로 나뉘어지는데 기지,
풍자, 해학 등은 주관적 골계미에 속하며 익살, 광대극은 객관적인 골계미에 속하는 것이다. 최순우는 이러한 익살스러움이 있다는 것은 한국미가
지니는 큰 장점이며 또한 구수하고 은근스러운 서민적인 대상 속에서 숨김이나 과장없이 풍겨나는 일종의 흥겨움은 우리의 자랑거리라고
했다.
그는 공예나 도자기, 회화 등 모든 작품에서 이 익살의 아름다움을
찾아내었는데 특히 공예에 나타난 익살은 매우 다양하다고 했다. 그것은 한국 민예품들이 매우 솔직하고 순정적이어서 억지가 없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너그럽고 익살스러운 우리 민족의 마음씨에 주저없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도자기에서 익살의 아름다움을 많이
발견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분청사기의 문양에서 익살의 아름다움을 많이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예로서 <분청사기철회어문병(粉靑沙器鐵繪魚文甁)>을 보면
익살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천박해 보이지 않는 해화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으며 <백자철회용문(白磁鐵繪龍文)항아리>는 용의 모습이
익살스럽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항아리에 그린 용의 작가는 자신이 상상한 용을 현실 속에서 신기롭게 용꿈을 꾸면서 익살스럽게 용의 모습을 표현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못생긴 용처럼 순박하고 천진하게 쭉쭉 찍은 점과 어리광스러운 선은 청신한 추상회화처럼 싱싱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고유섭은 조선미술의 특색인 [비정제성(非整齊性]에서 우러나오는 익살의 숨은 뜻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비정제성]은 음악적, 율동적이고 선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우아한
적조미를 구성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려청자나 이조백자에서 볼 수 있는 단색조(單色調)와 구수하게 어우러진 변화성을 갖고 있는데 이 단색조는
사상적 깊이보다는 사상적으로 어느 정도 만큼의 깊이에 들어갔다가 다시 명랑성으로 화하여 나온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사상적으로 철저한 깊이에 들어가지 않고 어느
한도에서 체관적 전회(諦觀的 轉廻)를 하는 것으로 즉 이는 끈기가 부족한 것이며 반면에 허무, 공무(空無), 운명의 관념이 쉽사리 이루어져
농조(弄調)로서의 유모어가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민화나 국악, 창 등에서 볼 수 있는 해학, 익살 같은 요소들은 바로 이와 같은 근거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최순우는 이조의 회화에서 발견한 익살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는데
이조 전기 문인화가 중 두성령 이엄의 익모, 화초의 작품에는 동심과 해학이 깃들인 작품이 많다고 하면서 그는 묘사가 대범하고 거친 듯 하면서도
익살의 아름다움이 곁들여 있다고 했다. 또 남리(南理) 김두량의 견도(犬圖)는 이조화에 나타난 차원높은 해학을 보인 좋은 예라고 하면서
가려운데를 발로 긁적거리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개의 모습에는 익살기가 넘나들고 있는데 이러한 화흥을 일으켰던 남리의 인품도
엿보았다.
특히 조선후기에 유행했던 풍속화에서는 생생한 민중 삶의 현장을
그리면서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탈하고 익살스럽게 묘사했는데 특히 김홍도는 당시 천민으로 대우받는 대장간이나 풍각쟁이 또는 마부나
머슴들의 생활에서 풍기는 사는 즐거움을 익살스럽게 그렸는데 이것은 당시 사회나 화단으로서는 뜻하지 못하던 일이었으니 그것은 단원의 사상이나 그의
사람됨이 반영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최순우는 이러한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에 나오는 인물들의 구수한
얼굴들과 익살스러운 표정과 동작에서 느껴지는 해학의 아름다움 속에는 오히려 지체할 수 없는 일말의 엷은 애수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허무, 공무, 운명의 관념이 쉽사리 이루어져 농조로서의 유모어가 나오는 고유섭이 말한 [비정제성]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풍속도를 보고 있으면 서민 사회의 구수하고도 익살스러운 흥겨움이 화면에 넘쳐나고 있다고 하면서 그의 작품은 예쁘다든지
미끈하다든지 하는 느낌보다는 이렇게 익살스러운 표현이 앞선다는 것은 단원이 서민사회의 생태를 너무나 잘 보고 잘 알고 또 사랑했던 까닭이라고
보았다. 이외에도 조선조 후기 민중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민화에서도 정통회화와 비교하면 묘사의 세련미나 격조는 다소 떨어지지만
익살스럽고도 소박한 내용들이 많다.
김철순은 민화의 매력 중 하나로 익살을 꼽았는데, 한국인들은 원래
낙천적인 사람들로서 한국 사람이나 민화를 그린 사람들이 모두 잘 살아서 그렇게 명랑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살림과 고달픈 인생살이에서도
언제나 웃음을 웃고, 남을 위해 웃어준 그런 낙천성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민화에 웃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재미있게 살고자 했고 웃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믿었으며
민화를 보고 미술품을 보고, 예술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예로서 <작호도(鵲虎圖)>를 보면 호랑이가 갖는 용맹성과
까치의 날렵한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호랑이의 표정은 소박하고 어수룩하나 소나무가지 위의 두 마리 까치는 호랑이를 향해 시끄럽게 우짖고 까치를
바라보는 멍청한 표정의 아기호랑이는 시무룩 주눅든 어리숙한 모습이다. 이 작품은 참으로 따뜻한 미소를 자아내는 민중적인 표현이다. 이외에도
민화는 이러한 익살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이 매우 많다.
최순우는 이런 익살의 아름다움이 한국미술이 지니는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우리 조형작품 속에서 우러나는 마음을 조용하게 하거나 홀로 실소를 자아내게 해주는 내재적인 아름다움으로 볼 때 익살의 아름다움은
한국미의 두드러진 특징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2. 은근의 아름다움
한국미의 특질을 은근과 끈기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60년대 쓰이던 문교부 편찬 ≪고등 국어≫ 제3권에 실려 있던 조윤제(趙潤濟) 교수의 <은근과 끈기>라는 한편의
글이 젊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면서 부터였는데 조윤제는 여기에서 [은근은 한국의 미요, 끈기는 한국의 힘이다]라는 구절로 결론지었으며,
이윤제(李允宰)는 ≪표준 조선말 사전≫에서 [은근]은 ① 간절함 ② 비밀스러움 ③ 정이 깊음 등으로 풀이했다. 이에 최순우는 정이 깊다는 뜻과
간절하다는 뜻도 한국미술이나 문학이 지니는 뚜렷한 특색임에는 틀림없으나 이중 조윤제의 은근이 지니는 특색에는 수긍하지만 [끈기는 한국의
힘이다]라는 말에는 수긍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것은 한국 미술은 감각적인 면이나 그 표현애, 기교면에서 오히려
끈기가 모자라는 것이 특색이며 이 모자라는 끈기 때문에 순진하고 자연스러운 치기의 아름다움이 있고, 그 허점 등에서 이루어지는 간박(簡朴)
단순한 아름다움이 오히려 우리 민족 미술의 특색이 된다는 것이다.
[은근하다]는 것은 드러내지 않고 다정스러우며 겸손하고 조용한 뜻을
지닌 것으로 이렇게 볼 때 한국미는 정력적인 미술, 끈덕진 아름다움, 의욕적인 미술에서 볼 수 있는 권위라든가 정밀하고 정교하며 화려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위하는 아름다움보다 오히려 비정력적인 아름다움, 즉 끈기의 부족 속에서 이루어진 미 본연의 자태, 즉 솔직한 아름다움과
올바른 아름다움의 법칙과 그 방향을 지니고 있다고 보겠다.
이처럼 한국미의 전통에 나타난 이러한 비정력적인 요소가 어디에
요인이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고유섭은 한국 고미술이 지니는 전통적인 성격, 즉 성격적인 특색은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이라고
했다.
무기교의 기교나 무계획의 계획은 기교와 계획이 생활과 분리되고
분화되기 이전의 것으로 구상적 생활 그 자체의 생활본능의 양식화로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것은 생활과의 합조가 처음부터 문제되어 있지 않고 구상적
생활의 본연적 양식의 발현으로 생활과 생활의 연속에서 생활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교적인 기교, 계획적인 계획이 작위적 기교, 작위적 계획으로
구석구석이 기교적으로 정돈하고 구성함으로써 구상적 생활을 이루려는데 반하여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은 생활자체의 본연적 양식화 작용이란
점에서 그것은 기교와 계획의 독자성, 자율성, 과학성이 자각되지 않은 것이다.
최순우는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은 헤벌어지지도 않고 뽐내지도
않고, 번쩍이지도 않는 그리고 호들갑스럽지도, 수다스럽지도 않은 은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였다. 은근의 아름다움은 우리 민족의 성정과 생활 양식과
큰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 아름다움은 특별한 경우나 특별한 물건에 한정되어서는 안되며 보다 더 평상적인 보통 물건―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미술은 민중에 기반을 둔 민예적 미술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지 않았었다. 즉, 상품화된 미술이 아닌 정치(精緻)한 까닭에 맛이 없고 늘 정돈이 부족했으나 그대신
질박(質朴)하고 순후하며 순진하고 구수한 맛을 지니었으며 파조(破調)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도자기 중 옛날 다인들이 좋아하며 [이도]라고
불리던 찻잔을 예로 들면서 이 찻잔은 의식적으로 아름다움을 나타내려고 해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라 그것은 원래 평범한 싸구려 밥그릇이었는데
그런데도 한없이 깊이있는 수수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그는 그 아름다움은 어디서 왔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것은 바로 도공들의
작업태도, 작업장, 일상생활 그리고 그들의 신앙 모두가 다 자연에 밀착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말하자면 미와 추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경지에서 일하였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달성하려는 의식의 속박이 없었으므로 솔직하고 순조롭게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이다. 즉 미와 추가 분리되지 않은 근본에서 오기 때문에
가장 진실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고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만들어진 무기교와 무계획적인 이조도자기에는 진실되고 수수한 은근의 세계가 깃들여 있다는
것이다.
최순우는 이러한 한국미의 은근성을 돋우어 주는 요소 중에는 전통적인
우리 색감의 담담한 세계가 한몫 하는데 고려청자의 청아한 맑은 하늘색이나 이조백자의 다양한 백색의 변화를 보면 한국의 독자적인 겸허와 적미와
은근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우리 민족의 담담한 옷 빛깔들에도 이러한 멋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이뿐 아니라 은근의 아름다움은 한국의 전통적
공예품이나 주택건축에서도 무수히 마주칠 수 있다고 하였다.
김원룡은 이 은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인간의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될 수 있는대로 인공의 환경을 피하려는
기본적인 태도가 우리의 전통을 크게 성격짓고 있는 듯 하다. 미술에서도 이상, 추상주의 같은 것은 전혀 이질적인 존재였고 자연미와 융합하는
서민적인 사실, 자연주의가 주류로 되어 있다. 서울의 육상궁의 정원에 백의의 이조인이 서 있으면 가장 한국적인 세계를 보여 줄 것이다. 육상궁의
정원은 담장을 넘으면 이 정원은 그대로 대자연으로 번져나가고 담장 안은 그대로 자연의 한 모퉁이에 번져나가고 담당 안은 그대로 자연의 한
모퉁이에 최소한으로 필요한 사람의 손질이 갔을 뿐이다. 이렇게 아늑하고 정다운 아름다움이 바로 은근의 미에 통하는 일면이 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처럼 우리 건축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계획적이나 기교적이 아닌
생활과 함께 하는 은근한 아름다움은 바로 독자적인 한국미의 특색이 틀림없다.
비단 도자기나 건축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 한국미술은 어떠한
장르에서도 이와같은 호들갑스럽지도 수다스럽지도 않는 수수하고 진실된 은근의 아름다움을 모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 순리(順理)의 아름다움
최순우는 한국미의 특질 중에 순리의 아름다움과 분수에 맞는
아름다움을 같은 맥락으로 보면서 순리의 아름다움을 [억지가 없는 아름다운 사물의 이치나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는 아름다움]의 자세라고
규정하며 이것은 과분하지 않다는 뜻이라고 했다.
또한 [자연 환경이나 자연의 태도에 가장 알맞은 형질미를 가늠할 줄
안다]는 말은 분수에 맞는 아름다움을 나타낸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유섭이 한국미의 미적 특질로 [무관심성]을 자연에 대한
순응의 논리로 입증하였는데, [무관심성]이란 이를테면 건축의 경우 목재의 자연적 굴곡이 아무런 정리도 받지 않고 그대로 사용되어 목재 본형을
그대로 양식 구성에 사용하여 양식 감정의 표현을 순리적으로 한 점과 민간에 있는 추녀를 형성할 때 곧은 나무를 기교적이거나 계획적으로 깎아내지
않고 자연대로 굴곡진 목재를 그대로 얹어 만들어 낸다든지 또는 구름에 집을 짓고 장벽을 둘러 쌓을 때 자연의 지형대로 마디지게 쌓는다든지 하여
자연에 대한 강압을 거부하면서 원래의 재료가 갖는 자연성이나 이미 주어진 바의 자연적 환경과 거슬럼 없는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무관심성]은
마침내 자연에 순응하는 심리로 변해진다는 것이다.
김임수는 그의 논문에서 미적가공이나 미적관조를 막론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심리로써의 무관심성은 결국 미적 가치의 근원으로서의 자연을 보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때 자연은 결코 미적 가공을 위한
소재나 재료의 의미에 있어서가 아니라, 미적 형성이 지향하는 목적 또는 미적 반응의 원천적 원리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며, 예술은 자연과의 구별에
있어서가 아니라 당연히 그 결합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고 하면서 한국인의 자연은 인간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고 인간을 위압하거나
광대무변하고 웅장무비(雄壯無比)한 그런 자연이 아닌 우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인간미가 있는 조그마한 자연이라는 것이다.
김원룡은 [As it is - 이것이 자연의 자태라고 하면서
고의적인 변화나 인공적인 가공이 없는 그 사실 이상으로도 진전시킬 필요도 없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실제로 한국 사람들처럼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민족은
없을 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는 아름다움의 자세는 모든 생활 성정에서도 잘 나타나 있는데 미술제작에 대한 순리적 자세는 작품의
착상이나 제작의 기발함에 무리가 없이 재료의 속성을 존중할줄 알며 작품이 놓여질 환경에 자연스럽게 순종하는 순직한 마음의 자세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같이 한국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사랑이나 외경(畏敬)은 한국의
건축에 잘 반영되어 있는데 최순우는 그 좋은 본보기로 석굴암과 불국사의 건축과 한국 주택의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순리의 아름다움이란 특히 그
조형미의 체질이 주위환경과 얼마나 알맞고 쾌적한 조화를 주느냐에 그 척도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석굴암과 불국사 굴원은 지금 경상북도 내동면 토함산 꼭대기에 가까운
동쪽편에 있는데 ≪계창기≫에 보면 그 위치에 대해
백두산에서 비롯된 산줄기는 구불 구불 뻗어 내려오다가 주남(州南)
치술령에 이르자 거기에서 동쪽으로 돌아 다시 올라가 성조산(聖組山)에서 멈추어, 한 줄기는 남쪽으로 가서 봉서산(鳳棲山)을 이루고, 한가지는
북쪽으로 가서 토함산(土含山)이 되었다. 높은 재와 낭떠러지가 많은데, 경태(경兌) 방향에서 들어와 서쪽에 자리잡아 동쪽을 향한 것이 곧
석불사이고, 갑묘(甲卯) 방향으로 떨어져나가 북쪽에 자리잡아 남쪽을 향한 것이 바로 불국사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자연을 그대로 포옹하며 자리잡은 위치는 어느 누구도 그
건축과 그것을 둘러싼 자연의 관계에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동해가 바라보이는 토함산 중턱에 그 위치 그 높이에 앉은 석굴암의 크기와
짜임새는 줄일수도 키울수도 없는, 정말 분수를 아는 건조물인 것이다.
또한 그는 조선인들의 형안(炯眼)에 감탄하며 과거 한국인들의 자연과
인위의 조화미를 이룬 덤벙주초의 예를 들었다. 덤벙주초란 생긴 그대로의 절벽, 바위 둔덕 위에 울멍진 높고 낮은 자연 암석들을 적당히 의지해서
주초(柱礎)로 삼고, 불가피한 곳에만 자연석을 옮겨 놓아 주초의 수를 채웠으므로 기둥길이를 여기에 맞추어 길게 짧게 마름질한 것을 말함이다.
한국 건축에 나타난 덤벙 주초는 비단 삼척에 있는 죽서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어느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의 하나이다. 말하자면 덤벙주초는 과거 한국인들의 자연애와 자연에 대한
외경(畏敬), 그리고 자연과 인위의 조화미에 대한 안목에서 우러난 멋진 조형 예의 하나님이 분명하며,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은 타고난
안복(眼福)의 하나로 먼곳에서 바라볼 때 한층 눈맛이 나는 건축물을 점지의 묘를 살려가며 세웠는데, 대동강변에 자리잡은 부벽루나 을밀대, 밀양의
영남루나 진주 남강의 촉석루등은 인공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자연 풍광을 도운 좋은 예들이다.
그리고 최순우는 한국주택의 아름다움도 역시 그 속에 앉아서 자연을
바라보며 눈맛을 즐기고 멀리서 바라보면 그 집의 앉음새가 자연 속에 편안하게 앉은 것이 한국 주택의 미덕이고 또 점지의 묘인데, 이렇게 자리잡은
주택은 기와집은 기와집대로 초가집은 초가집대로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주위의 환경과 주인의 지체에 분수 맞추어 표현한 순리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러한 한국주택은 일본 주택처럼 신경질적인 아름다움이나 근시안적인 아름다움을 숭상하지 않으며 중국 주택처럼 갑갑하지도
호들갑스럽지도 않을 뿐더러 장대한 아름다움을 꿈꾸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런 주택 속에는 후원과 장독대가 들어가는데 최순우는 한국 후원의
수수한 꾸밈새 역시 자연의 섭리에 순순하게 따르려는 한국인들의 담담한 마음의 자세로 꾸밈없고 잔재주 없는 순수한 조원미(造園美)를 발휘한
것이라고 했는데 고유섭도 한국의 정원은 자연의 일부로 담을 넘어서 자연으로 번져나가도록 한 순리의 아름다움을 나타낸 것으로 정원예술은 건축
예술의 일부분으로 보면서 그것은 인공과 자연과의 싸움인데 그 싸움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조화-춘, 하, 추, 동의 사시경이 한 곳에 모이고 나뉘는
일대의 거울이라 했다. 이에 대해서 백기수도 이런 대자연의 미는 예술의 미를 낳게 하는 모태가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어느 지역이건간에 그 지역에 고유한 자연풍토의 특수성이 있게
마련인데 이 자연환경은 이 속에서 생을 영위하는 생활 주체로서의 인간의 기질 내지는 그 민족성에 영향을 주고 이를 규정하며, 나아가서는 그
민족에 고유한 미의식 또는 예술의식을 비롯한 제반 문화현상을 외부에서 규정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즉 한국미술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순리를 따르려는 인간의 겸허함을
엿보이게 하는 심미의식으로 생활과 일체한 생활 속에 스며 있으면서 드러나는 미감으로 이것이 바로 순리의 의식인 동시에 독특한 한국미의 특질인
것이다. 이렇게 사물의 이치나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는 아름다움의 자세로서 이것은 즉 인공을 배제한 자연미와도 연결되며 항시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염두에 둔 분수에 맞는 아름다움을 지닌 우리의 한국미술은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나라임에
분명하다.
4. 백색의 아름다움
최순우는 한국의 흰 빛깔과 공예미술에서 표현된 둥근 맛을 한국적인
조형미의 특질 중 하나로 꼽으면서 한국의 폭넓은 흰 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스러운 아름다움을 알아야만 한국미의
본바탕을 체득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 백의민족이라는 이름을 지어 부를 정도로
백색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왔는데 그것은 흰 빛을 좋아하는 담담한 우리 민족의 마음씨와 거짓없고 꾸밈없는 생활 성정에서
우러나온 것일 것이다.
백자들에서 느낄 수 있는 흰 맛과 둥근 맛의 아름다움을 한국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도자기의 흰빛에 대해 많은 의견이 대두되어 백색논쟁까지 발전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일본의 미술사학자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우리 도자기의 흰 빛을 우리 민족의 마음씨와 비교하면서 우리 민족이 흰 빛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 민족이
갖는 비애미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렇게 백색논쟁이 된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의 미술>에
기고한 내용을 보면
중국과 특히 일본에서는 그처럼 다양한 색채의 의복이 발달하였는데,
왜 이웃나라인 조선에서는 그러지 못했는가? 입고 있는 의복의 색은 아무런 색도 지니지 않은 흰 빛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색이 가장 적은 연한
옥색이 아닌가.
늙은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은 색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찌된 연유에서일까? 이 세상에는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다. 그렇지만 이처럼 기이한 현상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역사가가
아니므로 이러한 의복이 어느 시대에 생겼는지 단정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흰 옷은 언제나 상복이었다. 쓸쓸하고 조심성 많은 마음의 상징이었다.
아마 이 민족이 맛본 고통스럽고 의지할 곳 없는 역사적 경험이 이러한 의복을 입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버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어쨌거나 색이
빈약하다는 것은 생활에서 즐거움을 잃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시험삼아 조선 사람들이 드물게 백의(白衣)의 통칙(通則)을 깨뜨리고
색깔이 있는 의복을 입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즐거움이 허락되었을 때만 울긋불긋한 옷을 입는다.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경우가 그 민족에게는 세 가지가 있었다. 이
세가지 경우에만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장식되어 있다. 세가지의 이례란 무엇일까.
첫째는 왕이나 귀족같이 힘있고 돈있는 자들에게 자주 다양한 색깔이
사용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잔치나 명절같이 즐거운 때에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는다.
설날이나 단오절 같은 때면 젊은이들은 상복을 벗어버린다. 1년중에 허락된 신나고 행복한 때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저 순진무구한 세상의 고통을 모른 어린아이들이다.
어린아이만은 흰 옷 속에서 여러 가지 빛깔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것을 갖지 못한때 사람들은 다시 상복으로 돌아간다.
색채를 떠난 세계가 그들이 살지 않으면 안되는 현세였다. 형태도
아니고 색도 아닌 그 어디에 그들의 마음을 의탁해야 할 표현의 길이 있었겠는가. 바로 선이 그들에게 받아들여져 사랑을 받았던 필연적인 이유를
사람들은 깊이 이해해야 한다.
라고 되어 있다.
위의 글에서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국 사람의 흰 옷을 상복에 비유하고
한국의 미를 비애의 미라고 표현한데 대해 김양기는 조일신문에 <한국미는 모두 비애미라고 얘기해 오던 야나기 무네요시의 견해는
잘못>이라는 제목으로
종열은 한민족이 키워온 백의의 백(白)을 상복의 백과 동일하게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한민족이 백의를 상용해 온 이유를 거듭되는 외척의 침입으로 희망과 기쁨을 빼앗긴 민족의 슬픔에 허덕이는
마음의 표징이라고 본 것이다.
종열이 상복의 백(白), 곧 슬픔의 백(白)이라 본데 대하여 나는
백화(白畵)의 태양을 나타낸 밝은 낙천적인 색으로서의 백(白)이며 하느님의 자손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 종열은 표백되지 않은 마포의
상복과 평상의 목면(木棉)이나 비단의 백(白)과를 혼동하고 있지만 같은 백(白)은 아니다.
라고 기고하면서 백색논쟁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글은 그 당시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도 그럴것이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국의 미를 선과 같은 접근 방식(approach)으로 비애의 미라고 한 것이 거의 반세기 이상이나 하나의 정설처럼 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백색논쟁 이후에도 일본에서는 여기에 반론을 계속 제기했는데,
이테가와가 몇가지 예를 들면서
첫째 한국의 공예품들에는 화려하며 기하학적인 문양이 들어 있고
자수가 놓여 있으며 둘째는 흰 도자기뿐 아니라 신라시대에는 흑색 토기를 빚어 사용하였으며 고려청자의 우아한 멋을 살린 도자기가 있었고 셋째 흰
옷은 상복이 아닌 일상 생활에서 입은 평상복이었으며 넷째 백자는 흥겨운 잔치(祝宴)에도 사용되었고 뿐만 아니라 이조 전기(前期)에는 중국풍의
조형과 조선초와 조선말에는 염색 그릇을 사용했으며 희노애락과 같은 민족감정을 풍부히 들어내는 탈춤의 의상에서 본다면 야나기 무네요시가 상복의
백색이나 민족의 비애미를 나타낸다고 이조백자의 백자를 해석한 것은 잘못된 인식인 것이다.
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김양기가 흰 빛은 상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흰 빛을
태양의 백(白)이라고 한 것에 대한 같은 의견도 나왔는데
서양의 상복의 색깔은 흑색이다. 그것은 고대 로마시대부터의 버릇이며
이 때 흑색은 사자(死者)에의 공포를 나타내며 죽은 사람에 조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서양 사람들의 백색은 죽음을 상징하는 흑색과 정반대로 밝은 것을
연상시켜 주고 있으며 웨딩드레스가 흰색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고대인들은 흰 옷을 즐겨 입었는데 그것은 태양 숭배의 원시 신앙에서 비롯한
풍속이기도 했다. 따라서 똑같이 태양숭배하던 바빌론이나 이집트도 백의(白衣)를 입었다. 이런 고대의 태양신앙에 있어서는 백색은 태양의 빛,
신성, 청정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또 흑색이 악을 상징하고 있었다면 백색은 선을 상징하고 있었다.
는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흰 빛을 비애의 미라고 파악한 것은 잘못이라는
김양기의 말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옛부터 우리나라 선비와 평민들의 흰 옷은 생활화된 색으로서 의복의 역할을 해 왔으며 각종 문양, 공예품에도
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흰 모시 조각보라든지 보자기의 재구성을 보면 모방색에서 맛볼 수
없는 투명한 색성과 자연미가 숨쉬고 있으며 이 유백의 미감은 우리 선조들의 때묻지 않은 순연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생활 그대로를 반영한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 미술의 특색으로 논해지는 흰색의 미감의 기원을 살펴보면
이 흰색의 상징은 15세기의 표기에서 [?榻?]이며 여기서 [??]는 태양을 나타내는데 결국 빛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화려하거나 변득스럽지 않은 욕심없고 순정적이며
인간이 지닌 가식없는 어진 마음을 본바탕으로 하여 흰색을 즐기며 백색의 아름다움을 창조해 냈다는 최순우의 백색에 대한 견해는 그 동안의 많은
의견들로 보아 백색이 한국적인 색감으로 대변되는 것임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최순우는 백색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은 어떠한 권세로도 어떠한 개인의
색조 취미로도 이루어질 수 없는 독자적인 백색미의 세계를 가졌다고 했다. 최순우가 백색미를 독자적인 세계에 비유하듯이 이일은 백색을 정신성과
결부시켜
우리에게 있어 백색은 단순한 백색 이상의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빛깔 이전에 하나의 정신인 것이다. 백색이기 이전에 [백(白)]이라고 하는 하나의 우주인 것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있어 백색은 그 어떤 물리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중략)
한마디로 백색은 스스로를 구현하는 모든 기능의 생성의 마당인
것이다.
라고 해석했다.
이것은 원초적 상태의 무색 속에서 자연의 정신 앞에 고개 숙이는
겸허한 한국인의 자연관과 물질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으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온 우리 백성들에게 흰색은 이와같이 맑은
정신으로 승화되어 나온 색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조자기의 아름다움은 계산을 초월한 신기롭고도
천연스러운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한 백자에 대한 최순우의 견해 역시 야나기 무네요시가 흰색을 비애의 미라고 표현한 것과는 분명히 다름이
있다.
정양모는 <백자론>에서 도자기만큼 한나라 겨레의 생활과
밀착되어 거기서 우러나오는 미감을 순수하게 나타낸 것이 없다고 하면서 이것은 미감이라기 보다는 마음 속에서 내재하는 미의식의 본바탕이며 바로 그
겨레의 마음자리라고 하였다.
조선중기 이후 분청사기의 자취가 감춰지면서 백자가 대종(大宗)을
이루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백색을 다듬을 수 있느냐가 과제였고 또한 백색을 기조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러한 여러 가지의
변화는 백색을 숭상하고 흰색을 즐겨쓰는 오랜 전통을 가진 우리 민족의 백색에로의 발전이고 백색의 세련이며 백색으로 향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백색의 정신성은 자기 자신과 삼족이 멸해지는 참극 앞에서도
절개와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마음의 소유를 가지는 민족성과도 일치한 것이다. 바로 더러워지기 쉬운 흰 옷에 여러 가지 물감을 들여도 좋으련만
물감을 들이지 않고 흙이 튀면 마른 다음에 털고 더러우면 빨아 입었으며, 그냥 흰 옷이 아닌 흰 옷에 정성을 들여 빛을 내어 입은 그런 우리
민족은 불의의 박해 속에서도 깨끗한 마음을 지키는 것과 같으며 백설같이 티없이 깨끗한 마음과 행동, 굳은 의지,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생활이념이며 또한 이런 모든 것을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구현하려는 것이었다.
고유섭은 <조선 미술 문화의 몇낱 성격>에서 흰색의
미감을 [고수]하다고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흰 색은 외면적으로는 백(白) 일색에 불과하지만 여러 가지 요소를 안으로 응집동결한 특색을 가진 것으로
[구수]한 맛이 안팎으로 훈연한 풍미를 이룬다면 이것은 안으로 응집된 풍미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즉 흰색은 [고수]한 맛처럼 안으로 응집된 맛이므로 씹고 씹어야 그
맛을 알 수 있고 또 그 맛이 나타내는 정신성까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맛을 내기 위해서는 고유섭은 온아, 단아한 맛을 위해 다채적이거나
[멋쟁이]여서는 안되며 질박, 담소, 무기교의 기교라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흰색 속에 여러 가지 요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백색의 톤을 매우 중시한 우리나라 색깔의 뿌리가 매우 깊기 때문이며 고려청자에서 볼 수 있는 맑고 담담한 청자색이나 조선시대의 백자에서 이루고
있는 한국의 담담한 색은 우리 국민의 심성과 맑고 밝은 우리 자연과 감각이 상응하는 것으로 흰색에 대한 감각도 삼채(三彩)니 오채(五彩)니 하는
중국이나 색채지향적인 일본과는 차이가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이 특수한 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최순우는 우리나라 사람의 흰색에 대한 특수한 감각에 대한 글을 읽은
뒤
일제때 경상제국대학의 안과교수로 있던 한 일인(日人)이 한국 사람의
가시적인 감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백색의 색상표를 20여 가지로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 늘어놓은 뒤 일정 시간만 보여 주곤 다시 그것을 흩트려 놓고
나서 제자리로 맞춰보도록 했더니, 일본인 표본 그룹과 한국인 그룹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거의 순서를 맞추지
못했는데, 한국인은 그 색깔의 미묘한 순서대로 거의 정확히 늘어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든 한국 사람이 흰색에 대해서 특수한 감각을 갖고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라고 소개했다.
이와같이 백색사상이라고 하는 흰색의 특수한 감각을 지닌 우리 민족의
백색미 전통은 선천적으로 생활 속에 멋지게 녹아 흰 옷을 즐겨 입었고 그런 순수하고 꾸밈없는 심성으로 백자 항아리에서 느낄 수 있는 백색미의
전통은 오늘의 세계인들의 생활미술 속에 널리 전파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5. 담조(淡調)의 아름다움
한국미의 전통 중에는 또 하나 색감의 기조가 담담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엷고 담담한 색조의 아름다움은 한국의 회화, 도자기, 의복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일관된 색채호상을 분명히 자리잡아
왔다.
최순우는 한국미에서 색감의 기조가 담담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뽑낼줄도 잔재주도 모르는 성정을 가진 우리네 조상들은 높고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 밝은 고장에서 있으면 있는대로의 재료,
없으면 없는대로의 그대로 살아온 마음씨들이 오랜 세월 섞삭여서 지어낸 색채가 바로 우리의 담담한 색감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위 권위와 권력을 필요로 하는 관인 사회의 예복과 제복류들에는
짙은 색이 도입되었으나 남색, 붉은색, 짙은 쪽빛과 검은 빛 등 엷은 사 종류의 색감 조화와 복제 양식에서 풍기는 [멋]의 세계는 그대로
한국미의 또 하나의 세계였다. 여인들의 의상에서 볼 수 있는 기품있는 선과 색의 해화는 순색에서 오는 조용함이 깃들어서 아무 잡음도 깃들이지
않은 순화된 높은 격을 보여 주었고 여러 형태의 의장과 관모류의 조화에서 풍기는 흥건한 멋은 우리 민족미의 참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엷고 담담한 색조의 아름다움은 한반도가 전형적인 온화한
해양성 온대기후에 속함으로서 반도적 특수성과 어우러져 빚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윤희순은 ≪조선미술사연구≫에서 공기가 유난히 건조한 한국의
하늘빛은 유난히 푸르고 깨끗하며 청정무후하여 그 청초한 정서를 동경하여 청자의 색이 창조되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청자의 푸른색은 땅에서
유리된 색조가 아니며, 백의의 숭상 역시 신화적 유래보다는 이러한 청초한 양광(陽光) 밑에서 청정무후한 상징으로서 사용된 것이고 노년의 옥색
옷을 즐겨입는 것도 이러한 이유로 볼 수 있다고 했다. 한국미에서 담조의 색채호상은 이렇게 자연미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
강토에 맞는 민족미의 참모습과 같은 것이다.
고유섭은 조선이 색채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단색적이라고
했는데 그곳에는 순박성도 보이지만 이것은 적조미의 일면에서 나오는 고요의 아름다움을 포함한 담담한 색채호상을 가진 것이라고 했다.
최순우가 이조백자나 복식, 건축 등에서 담조의 아름다움과 고요의
아름다움의 특질을 발견한 것도 가식없고 순박하며 깊이 있고 조용한 우리 선조들의 마음씨에서 읽은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그는 그러한 담색조의 맑은 공간속에서 서로 좋은 조화를 이룬
예를 들었는데 그것은 고려청자 오백년 뒤에 이조백자 오백년이 이어진 점이나 백장에 겨우 청초한 청화 그림을 조촐하게 곁들인 것을 가장 숭상했던
점, 자수공예나 화각장 등에 일부 다채로운 색상이 쓰였지만 본격적인 자수병풍 역시 생경한 원색을 모두 삼가고 밝고 조용한 중간 색상으로
조화시켰던 점, 그리고 이러한 병풍의 경우 여러 층으로 농담을 가려 쓴 청색계가 기조를 이루는 예가 많았던 점, 산수화 등 한국그림 또한 알 듯
모를 듯 담채로 된 것이 지배적이었고 민화류도 담조로 된 것이 오히려 차원높았던 점등을 담조의 색채호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유섭은 우리 여인의 복식이나 조선공예들에서 볼 수 있는
감각적으로 다채적이며 명랑한 것은 담소한데서 오는 것으로 그것은 자칫 적요에 치우치기 쉽다고 하였다.
이에 최순우는 천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도자 공예가 색채를
안받아들인 이유는 무슨 권위도 신경질도 아닌 타고난 담담한 우리 민족의 마음씨였다고 하면서 가까운 일본과 중국에서 발전된 다양하고 다채로운
채색도자기들이 그들의 복식에 나타난 색채호상과 그들이 자연하고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를 비교해 보면 우리의 담담한 색감의 세계는 더 빨리 알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도자기의 특질> 중 사용된 색채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깊이있는 색이지 선명하고 화려한 색은 결코 아니라고 하면서 유약에 따라 만들어진 이조도자기의 색채에 대해
다음은 유약의 색으로 대략 네가지로 나눌 수 있다. 순백색,
유백색, 청백색, 회백색이다. 그 중에서 순백색이 가장 적다. 이것은 일본과 반대되는 점이다. 가장 많은 것이 청백색이며 그 중에는 날카로운
느낌이 드는 것도 있다. 이 유약은 고려시대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것일 것이다. 조선 고유의 맛이 있다. 색은 투명하며 물색이 대단히
아름답다. 다음으로 많은 것이 회백색일 것이다. 이것에도 조선의 기질이 드러나는 것 같다. 회백색은 철사가 99%를 차지한다. 검은 철사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 매우 아름답다. 다음은 유백색이며 이것은 오래된 수법일 것이다. 멋은 대단히 상품속에 속한다.
고 하였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지적했듯이 조선에는 붉은색 그림의 도자기는 없었고
그것은 바로 헤벌어지지 않고 가식없는 순수하며 사려깊은 조선인의 마음씨를 그가 읽은 것임에 틀림없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담담한 색채를 이루고 있는 담조의
색채호상은 최순우가 지적했듯이 우리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자연미에 맞게 형성되었으며 또한 뽑낼줄도 잔재주도 부릴 줄 모르는 가식없고 순수한 우리
조상들의 마음씨가 섞삭여서 만들어진 고유한 우리 색감으로 틀림없는 한국미의 전통 중 하나의 특징이 되는 것이다.
6. 추상의 아름다움
추상미술이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도 산새들의 노랫소리를 아름답게
들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추상미술을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이 즐거워지고 또 마음 속에 아름다운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으로써 그 주요한
사명을 다한 것이 된다는 뜻이다.
즉 추상적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최소한의 자연 현상이 기본적인 형태로
단순화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작가가 의식적으로 의도된 추상화를 그릴 수도 있고 때로는 작가가 느끼고 있든지 아니든지를 불문하고
무의식적으로 추상화를 그릴 수도 있지만 모두다 마음을 즐겁고 아름답게 느낄 수 있도록 감정을 일으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최순우는 현대 추상미술이 난해하다는 말을 주위 사람들에게 많이
듣기도 하지만 추상의 아름다움이란 알고보면 그다지 난해한 것이 아니며 특히 우리의 전통 속에는 추상의 아름다움이 살아 숨쉬고 있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쉽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돌비석의 비석머리에 새겨진 무늬를 보고 우리 선조들의 추상정신을
발견하고 거기서 현대 추상미의 본바탕을 느낄 수 있다고 했는데 본보기로 강원도 삼척에 있는 [비석머리]를 예로 들었다.
비석머리에 새겨진 무늬를 보면 일렁이는 파도 무늬를 새긴 것인가
하고 보면 봉이 봉이 산두메를 그린 것 같기도 하고 산인가 하고 보면 크고 작은 동그라미가 불규칙하게 군데 군데 새겨져 있어서 산과 하늘 사이인
듯 싶은 환상을 가져오게 되는데 다시 말하자면 비석머리의 작가는 소박하고도 단순하 선과 원을 새겨넣으면서 그 나름으로 추상 조형의 흥겨움을
감추지 못할 만큼 즐거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비단 [비석머리]에서 뿐만 아니라 신석기시대부터 상징적인 기하학적 표현이 재현(모방)에서 추상화로,
사실(寫實)에서 부호화로 이르며 아름다움의 의미있는 형식으로 변화되어갔으며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회화적인 표현에 추상적인 표현으로 내적 조형
충동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특히 분청사기에 나타난 추상도문들을 보면 일찍이 한국인들의 천성 속에는 추상의 본바탕을 이루는 일종의
이상시각(異常視覺)의 감흥이 맥맥히 흘러내려 왔다고 볼 수 있다.
고유섭은 추상성의 표현은 곧 상상력의 풍부에서 오는 것으로 상상력의
풍부란 곧 창조에 있어 첫 번째 요건이며 구성력은 상상의 구체화, 형태화의 요건으로서 창조의 창조다운 결착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와 관련해 조선미술의 특질로서 [비정제성]을 들었는데 예를
들어 도자공예에서 기물의 형태가 원형적 정제성을 갖지 않고 왜곡된 파형을 많이 다루는 것은 이곳에 형태가 형태로서의 완형을 갖지 않고 음악적
율동성을 띄게 된 것이니 이와같이 형태가 형태로서 완형을 이루지 못하고 음악적 율동적인 것이 선적으로 우아한 약점을 보이며 다시 또 여기서
생동성을 느낄 수 있는 비정제성의 왜곡된 파형은 바로 추상성의 표현과 상관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유섭이 추상적 표현을 할 수 있는 상상력의 풍부를
창조적으로 본 것은 모방이건 응용이건 변용이건간에 그곳에 우리 선조들의 자주정신과 창조정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자주정신과
창조정신은 나아가 추상조형을 이루는 바탕이 된 것이다.
선사시대부터 추상의 미의식을 간직해 온 미술품들 중에서 최순우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에 주로 만들어진 분청사기에서 현대 감각의 추상적 문양들을 많이 발견하였는데 거기에는 현대적 시각에서 보아도
하나의 추상작품으로서 그 추상의식이 놀랄 만 하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박지문(剝地文)이나 획화문(劃花文) 등 분청사기에 나타난
기하학적 도문이나 추상화된 동식물 도분의 멋이나 흥겨움은 모시발처럼 깔끔한 자기의 표면과 조화되어 현대감각을 무색케 한 점은 어찌보면 마티스나
피카소의 소묘와 같은 높은 격이 있는 우리 서민들의 멋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며 놀라워 했다.
그는 이렇게 분청사기에 나타난 뛰어난 추상도문을 구사한 작품들을
추려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설명했다.
① 무의미한 완곡선이나 우직한 선조로 면을 분할하고 그 안에 작은
점을 가득 찍어 채우거나 산봉형 중선문(山峯形 重線文)을 중첩해서 채운 것, 점을 찍어 채운 분할면의 묘사는 마치 루치오 폰타나(Luccio
Fontana)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점공(點孔)의 아름다움을 연상시켜 준다.
② 착상의 발상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굴곡 선조들과 허탈한
직선들의 무질서한 교차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해화감(諧和感)은 마치 구스타페 징기어(Gustave Singier)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③ 우직한 종선대들 안에 부정형 톱니모양의 선묘와 부정형 원, 방,
각 등 소탈한 무늬들을 채워서 마치 폴클레(Paul Klee)의 곡선 그림을 연상시켜 준다.
④ 부정형 방사선상의 우직한 선조 끝에 부정형 만상(蔓狀) 또는
원권(圓圈) 등을 선묘해서 마치 요를 베매래(Jorn Wema re)의 곡선 그림을 연상시켜 준다.
⑤ 우직한 선조로 부정형 사격자 문곽(斜格子文廓)들을 그리고 그
중간 능형 공간에 점선문대를 그린 것
⑥ 상, 하 2구로 나누어 사격자문곽과 산봉형 중선문곽을 그린
것
⑦ 화면을 몇 개의 부정형 기하학 문곽으로 분할하고 그 사이사이의
직선대 안에 톱니형 선묘 등을 그려 넣어서 전체의 해화미를 일으켜 주는 것
⑧ 봉화형(烽火形)의 선묘를 가로, 세로 또는 십자형으로 그려
넣어서 운동감을 드러낸 것
⑨ 중권(中圈), 단권(單圈), 중방각(重方角), 방각(方角) 등을
백상감 선묘해서 바둑판처럼 비교적 질서있게 혼성배열한 것
⑩ 양면 설상대(舌狀帶)를 이룬 종선대를 그리고 그 안에
승상문(繩狀文)을 선묘한 것
⑪ 부정형 산봉형을 자유스럽게 중첩해서 도립(倒立), 백상감한
것
살펴본 바와 같이 분청사기에 표현된 추상도문들은 전통적 문양에서
전화하거나 변형된 예는 적고 도공들의 창의로서 생성된 추상도문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듯이 분청사기에 나타난 추상양식의 주류는 도공들의
창의에서 싹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순우는 이 추상무늬들은 도공들이 어떤 뜻이나 비밀을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라 다만 도공들이 생각나는 대로 그리고 흥겹게 찍은 선과 점들이 어울려서 쾌적하고도 유량한 근대적인 미를 알려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도 조선도자기의 특질로 문양의 특이점을 말하였는데
조선시대 문양은 고려시대 것에 비해 섬세하고 우아한 멋은 없으나 자유분방하고 큰 맛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도공들이 걸작에 대한 의식없이
그릇을 탄생시킨 무기교의 기교를 간직하고 있어서이고 또한 기교가 단순해지고 문양이 거칠고 질이 떨어져 조잡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것은 오히려
천진스러우며 자연스러워서 최고의 미를 만들어내는 요소가 되었다고 하였다.
어떤 꾸밈이나 욕심없이 두 셋의 분방한 필치로 놀라운 문양을 그려낸
도공들의 마음은 자연의 숨은 진리와 어우러져 현대 감각의 멋을 지닌 추상적인 문양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한국 서민들의 조형의욕
속에는 추상적인 요소가 짙게 깔려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추상 미의식이 사람들 마음에 맥맥히 스며 내려오면서 추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창의적인 명수가 되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우리 선조들은 놀랄만한 추상의식을 간직하고 자연과 미묘한
관계를 가지며 소박하고 단순한 선, 점, 원을 그려 넣으면서 추상조형의 아름다움으로 한국미의 또 하나의 전통을 만든
것이었다.
Ⅴ. 결 론
이상과 같이 혜곡 최순우의 한국미감에 대한 그의 사상을 자연환경과
역사적 환경으로 구분하여 시대적으로 살펴보고 그가 느낀 한국미의 주요 특징들을 검토해 보았다. 최초로 한국 미술사를 논리있게 정리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고 있던 그의 스승인 고유섭의 미술사상에 힘입어 최순우는 더욱 더 한국적인 위대성과 일본과 비교할 수 없는
우리 문화재의 우월성을 작품 하나 하나에서 실제로 발견하여 알리는 데 주력한 우리 한국미 발견의 선구자로서 우리 한국 미술사적으로나 우리
문화재를 통한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일깨운 점으로나 문화재 보호 대책을 앞장서서 이룩한 공로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 미술사의 큰
거목이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일본인으로서 객관적으로 우리 미술을 평가하고
연구하여 위대함을 피력하긴 했지만 우리 민족이 아닌 외국인으로서의 주관성이 있어 자칫 우리 미술을 일방적인 견해로 본 점 없지 않는 바 최순우는
확실히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최순우는 선사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통일신라시대, 고려,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건축, 회화, 탑파, 불상, 도자기 등을 그가 실제로 답사하거나 조사하여 문헌 연구한 한국 고미술의 여러 국면을 연구하여
도출해 낸 산 증인이다.
그래서 본 논문 제2장에서는 그의 생애와 학문적 배경을 살펴 보았고
제3장에서는 시대 변천으로 본 그의 한국미술관을 살펴 보았으며 제4장에서는 그가 본 한국미의 주요 특징들을 검토해 보았다. 제3장에서 최순우는
시대 변천으로 본 그의 한국 미술관을 형성하는 요인으로 우리나라의 지리적 환경, 기후, 풍토 등의 자연환경과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역사적 환경을
들었는데 이러한 것이 요인이 되어 선사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의 기본적, 전통적 특색이 지역과 시간을 초월해서 만들어졌다고 하였으며
제4장에서는 그러한 한국미술의 전통적 특색을 여섯으로 나누어 검토해 보았다.
한국미의 특질에 대해서 최순우는 <한국미술의 흐름>이란
글에서 한국미의 특질을 여섯가지로 제시하였으나 그가 연구한 한국미에는 이보다 더 가치있고 중요한 우리 한국미의 특질이 있어 본 논문에서는
이외에도 백색미나 추상미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것은 한국미의 특질을 여러 측면으로 보아온 최순우의 감식안을 한국
사람인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대 변천으로 본 그의 한국미술관을 보면 선사시대에는 미술의 특색이 주로 기하학적 추상무늬를
나타내며 한국미의 기초가 싹튼 시기로 보았고 실질적으로 한국미술사의 본격적인 생성시기는 삼국시대부터 였다고 했다.
특히 삼국은 불교가 유입되면서 중국 육조나 수·당의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때의 미술활동은 무작위, 무기교의 바탕을 기본 성격으로 하여 자연에 분수를 맞춘 작품들을 특징으로 보았다.
그후 7세기 중엽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당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국제적 색채를 띠기도 했으나 보수성이 짙어 삼국의 어느때보다도 세련된 한국인의 조형 재질을 반영하여 정제된 양식과 원숙한 표현력을 발휘한 시기로
보았는데 특히 통일신라시대는 융성한 불교를 온상으로 해서 불교미술의 결정이라고 할만큼 불교예술의 통합을 이룬 시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국시로 하였으나 불상조각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특히 고려는 몽고의 침입과 무신집권의 내란 등으로 백성들이 불안정하고 무질서한 현실 속에서도 이를 현실 속에 승화하는 고려
비색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고려 청자를 통해 민족미술의 한 양식을 만들어 냈다.
고려청자를 이와 같은 역사적 사회적 정황으로 비애와 우수가 깃들인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으나 최순우는 고려 사람들의 오랜 시름과 염원, 영원한 꿈의 실마리가 담긴 겸허와 지조의 아름다움이며 사색과 고요의
아름다움을 지닌 [자제의 아름다움]을 나타낸 것이라 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대해 우리나라는 선사시대에서 조선시대로 올수록
한국미술의 특색을 더 잘 느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조선시대는 특히 국민의 생활정서가 가장 솔직하게 반영된 미감각을 반영한 시대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그가 느낀 한국미술의 주요 특징을
제4장에서 살펴보았다. 최순우는 이러한 한국미의 특질을 순리, 담조, 익살, 은근, 백색, 추상의 아름다움 등으로 제시하면서 이외에도 고요함을
가지며 분수에 맞고 개성적인 우리 아름다움을 그의 말과 글에서 여러 측면으로 나누어 표현했다.
그중 첫째는 익살의 아름다움이다.
이 익살의 아름다움은 한국의 회화, 조각, 건축 등 모든 분야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며 이는 민중적인 경향으로 표현된 도자기, 민화, 자수 등에서 더 자주 다루어졌으며 특히 공예에 나타난 익살을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은 추상성을 지닌 표현에 매우 능숙하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사물표현에서 대담한 성격과 왜곡된 과장을 무신경, 그리고
이지러진 둥근 맛이 주는 공간미를 가졌는데 이것은 거드름도 잔꾀도 모르는 어줍고 익살스러운 한국인의 선천적인 즐거움이 미술에 반영된 것이라
하였다.
둘째는 은근의 아름다움이다.
은근은 드러내지 않고 다정스러우며 겸손하고 조용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최순우는 한국미는 정력적인 미술, 끈덕진 아름다움, 그리고 의욕적인 미술에서 볼 수 있는 권위라든가 정밀하고 정교하며 화려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위적인 아름다움보다 오히려 비정력적인 아름다움, 즉 끈기의 부족 속에서 이루어진 미 본연의 자태, 즉 솔직한 아름다움과 올바른 아름다움의
법칙과 그 방향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헤벌어지지도 않고 뽐내지도 않고, 번쩍이지도 않는 그리고 호들갑스럽지도, 수다스럽지도 않는 아름다움이
은근의 아름다움이라 하였다.
셋째는 순리의 아름다움이다.
그는 순리의 아름다움이란 [억지가 없는 아름다운 사물의 이치나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는 아름다움의 자세]라고 규정하였는데 이것은 과분하지 않다는 뜻도 된다고 하면서 또한 [자연환경이나 자연의 태도에 가장
알맞는 형질미를 가늠할 줄 안다]는 말은 분수에 맞는 아름다움으로 크면 큰대로 작은면 작은대로 주위의 환경과 분수 맞추어 표현한 것을 순리의
아름다움이라 하였다.
넷째는 백색의 아름다움이다.
최순우는 우리 민족이 백색미의 전통을 선천적으로 생활 속에 멋지게
녹여 흰옷을 즐겨 입고 흰 빛을 좋아한 것은 순수하고 꾸밈없는 우리 민족의 마음씨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특히 우리 민족은 백색에 대한
특수한 감각을 지니고 한국인 만이 빚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불의의 박해 속에서도 깨끗한 마음과 행동, 굳은 의지를 가진
생활이념으로 스스로 백의민족이라고 이름지어 부르면서 공예미술에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스러운 아름다움과 함께 표현된 색이었다고
하였다.
다섯째는 담조의 아름다움이다.
이는 엷고 담담한 색조의 아름다움으로 생경한 원색을 삼가는
색채호상은 수다스럽지 않고 성정이 숨김없고 객기없는 한국 사람의 담담한 마음씨에서 우러난다고 보았다.
여섯째는 추상의 아름다움이다.
최순우는 선사시대부터 발견할 수 있는 기하학적 무늬에서 느낄 수
있듯이 우리의 전통 속에는 어디서나 추상의 아름다움이 숨쉬고 있는데 이는 우리 선조들에게는 선천적으로 추상의 미의식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특히 분청사기에 표현된 추상도문들은 도공들의 창의에서 생성된 것으로 이러한 문양들은 천진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런 최고의 미의 극치라고
평가했다.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일생은 한국미를 위해 태어났고 한국미를 위해
살았으며 한국미를 위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할 수 있다.
최순우가 어릴 때 희망이 문학도였던 것을 미루어 짐작하듯 그가 남긴
많은 글들에는 그의 철학과 사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글귀들은 학문적이고 논술적인 어떤 글보다도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한국적 미학이
아닌가 싶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우리의 아름다움과 같이하여 한국 미술사에 큰 지표가 됨과 같이 본 논문은 우리 민족의 아름다움을
가슴깊이 새겨넣을 수 있는 데 일조를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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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우·이경성 대담 <한국적·현대적인 것> ≪계간미술
제20권≫ 중앙일보사, 1981, 서울
최하림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미술관> 展望, 1976.
7, 서울
홍사중 <백색논쟁> ≪계간미술 제4권≫ 중앙일보사,
1981, 서울
ABSTRACT
A Study of Choi Soon-Woo"s Thought on
Korean Aesthetic
By Sim Young-Ok
Major in Art Education
Kyung Hee University, Seoul,
Korea
There is few systematic and overall
study of Choi Soon-Woo"s(1916∼1984) academic fruit who made efforts in search of
our beauty through life. Also quite few people understand his worth. He came to
aim to study Korean art history under the influence of Koh Yoo-Sup, the first
aesthetician and art historian in Korea. His approach to Korean beauty is based
mainly on strong intuitiveness due to experiential grounds rather than the
aspect of pattern history, and there is room for criticism that such approach
should be accompanied by logical guaranty.
But he must be a pioneer in finding
out Korean beauty who enabled our people to feel such beauty easily by looking
into the beauty characteristics of Korean fine arts on concrete and historic
phenomena with his outlook on Korean art formed through a wonderful sense of
beauty and personal experience.
This dissertation has examined the
major characteristics of Korean beauty seen through his outlook on Korean fine
arts, high insight, and judgement who devoted himself to our fine arts,
awakening us to Korean art. His experiential fruit of study has been divided by
time (The prehistoric, the Three Kingdoms, Unified Shilla, Koryo, the Yi
dynasty) and by genre (Pottery, architecture, painting, industrial arts,
sculpture, etc.) so that one may feel the characteristics of independent Korean
beauty thus introduced.
In addition, I have studied not only
the background forming his peculiar view on Korean art, but also his outlook on
art objects through the changes of times (Chapter III).
The major features of Korean beauty
he pursued have been examined as well (Chapter IV).
According to his research, our unique
taste is to be seen wherever in the country with our nature and life melt into
it.
Beauty appearing in works of art has
unparalleled "humor", "implicitness", "calmness", "rationalism", "white", "a
serene tone", "abstraction", etc., occupying a place among world art
works.
A number of his writings and essays
are more objective and persuasive than any other literature on his subject and
may be a great guide post to the history of Korean art.
참고 도판 목차
1. ≪靑磁象嵌雲鶴文梅甁≫ 높이 42.0cm, 12세기 중엽,
간송미술관
2. ≪粉靑沙器彫花文扁甁≫ 높이 22.1cm, 15∼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3. ≪綠釉骨壺≫ 높이 16.5cm, 통일신라중기,
국립중앙박물관
4. ≪白磁鐵繪포도무늬항아리≫ 높이 53.8cm,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5. ≪白磁象嵌草文扁甁≫ 높이 22.1cm, 1406년,
호암미술관
6. ≪三層 찬탁≫ 45.3×37.4 높이 138cm, 조선말기,
국립중앙박물관
7. ≪粉靑沙器抽象文扁甁≫ 높이 20.5cm, 16세기, 서울,
개인소장
8. ≪金銅彌勒菩薩半跏像≫ 높이 83.2cm,
국립중앙박물관
9. ≪慶州 石窟庵 本尊像≫ 높이 3.26m, 8세기,
경북월성
10. ≪華嚴寺의 獅子三層 石塔≫ 높이 5.5cm, 통일신라, 국보
35호
11. ≪三陟 비석머리≫
12. ≪불국사의 大石壇≫
13. ≪秘苑의 芙蓉堂≫
14. ≪秘苑의 演慶堂≫
15. ≪慶會樓의 돌기둥≫
16. ≪粉靑沙器鐵繪魚文甁≫ 높이 29.7cm,
국립중앙박물관장
17. ≪白磁항아리≫ 높이 40.7cm,
국립중앙박물관장
18. ≪粉靑沙器鐵繪草文대접≫ 높이 8.2cm,
국립중앙박물관장
19. 李在寬 作 ≪松下處士圖≫ 지본채색, 113.8×66.2cm,
국립중앙박물관
20. 鄭善 作 ≪仁旺霽色圖≫ 견본담채, 79.2×138.2cm,
호암미술관
21. 金明國 作 ≪達磨像≫ 지본수묵, 83×57cm,
국립중앙박물관
22. 金斗樑 作 ≪긁는개≫ 지본수묵, 23×26.3cm,
국립중앙박물관
23. 金弘道 作 ≪梅鵲圖≫ 지본담채, 26.7×31.6cm,
호암미술관
24. 金弘道 作 ≪舞樂圖≫ 지본담채, 27×22.7cm,
국립중앙박물관
25. 金得臣 作 ≪破寂圖≫ 지본담채, 22.5×27.1cm,
간송미술관
26. 申潤福 作 ≪草堂놀이≫ 지본담채, 28.2×35.2cm,
간송미술관
27. 申潤福 作 ≪船遊圖≫ 지본담채, 28.2×35.2cm,
간송미술관
28. ≪책거리≫ 지본채색, 각 67×35cm,
홍익대학교박물관장
29. ≪까치호랑이≫ 지본채색, 113.5×112cm, 釜山,
개인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