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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여행(2) - 정약용의 또 다른 멘토 –정약전- (akajklh)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실학사상의 집대성자로 추앙받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 그에게는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 두 명의 멘토(Mentor)가 있었다. 한 명은 일찍이 정약용을 인재로 알아보고 깊은 신임을 주었던 조선의 제 22대왕 정조였고, 다른 한 명은 정약용의 형이자 지기(知己)였던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었다. 정약용은 특히 둘째 형인 정약전을 어린 시절부터 잘 따랐고, 유배 생활 중에도 그에게 심적으로 많은 의지를 하며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정약용이 정약전을 떠나보낸 뒤, 애통해하며 쓴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외로운 천지 사이에 우리 손암(巽菴, 정약전) 선생만이 나의 지기(知己)였는데, 이제는 잃어버렸으니, 앞으로는 비록 터득하는 바가 있더라도 어느 곳에 입을 열어 함께 말할 사람이 있겠느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차라리 진작에 죽는 것만 못하다. 아내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자식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형제 종족들이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처지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슬프지 않으랴.<em>- 정약용,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21권 <기이아(寄二兒)> 병자(丙子) 6월 17일</em>
정약용에게 있어 아내보다 자식보다 그리고 다른 형제와 친척들보다도 더 특별했던 존재였던 정약전. [자산어보(玆山魚譜)1)]의 저자로도 널리 알려진 정약전의 삶을 통해 두 형제의 특별하고도 애틋했던 인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정약전은 누구인가
정약전은 1758년(영조 34) 3월 1일 경기도 광주 마현(馬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자는 천전(天全), 호는 손암(巽庵), 연경재(硏經齋), 또는 매심(每心)이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이었고,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였다. 정재원은 부인이 두 명이었는데, 약전은 둘째 부인인 윤씨의 3남 1녀 중 큰 아들로 1758년(영조 34)에 태어났다. 이복형으로 정약현(丁若鉉), 두 동생은 약용(若鏞)과 약종(若鍾)이고 누이는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李承薰)의 아내가 되었다.
정약전은 1776년(영조 52)에 호조좌랑이 된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오게 되었는데 이때 이윤하, 이승훈, 김원성과 교유하기 시작했고, 성호 이익(李瀷)의 학문을 이어받은 권철신(權哲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약전은 네 살 아래의 동생인 정약용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래서인지 정약용의 문집에는 정약전에 관한 기록이 곳곳에 보인다.
공은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았고 자란 뒤에는 더욱 기걸(奇傑)하였다. 서울의 젊은 사류들과 교유하며 견문을 넓히고 뜻을 고상히 가졌다. … 성옹(星翁) 이익(李瀷)의 학문을 전수 받아 주자(朱子)를 쫓고 도학(道學)의 근원을 찾아 공자(孔子)에까지 거슬러 가서 읍양(揖讓)하며 학문을 강론하고 탁마(琢磨)하여 서로 더불어 덕을 쌓고 학업을 닦았다.<em>- 정약용, [다산시문집] 제15권,<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em>
정약전은 특히 서양의 학문과 사상에 심취한 이벽(李檗), 이승훈 등 남인 인사들과 교유하고 특별히 친밀하게 지냈는데, 이들을 통해 서양의 역수학(曆數學)을 접하고 나아가 천주교에 마음이 끌려 이를 신봉하기까지 하였다. 1777년(정조 1)부터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서학(西學)을 공부하는 강학회(講學會)가 경기도 여주 주어사(走魚寺)에서 열렸는데, 여기에 정약전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러한 학통의 계승은 정약전은 물론이고, 정약용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하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정약전은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790년 증광문과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ㆍ병조좌랑의 관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1798년에는 왕의 명령을 받아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2)를 편찬했다.
늘 함께했던 형제
정약전은 정약용과 때로는 학문을 논하고 때로는 산수를 유람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1778년(정조 2) 겨울, 아버지가 화순현감으로 있을 때, 두 형제는 함께 동림사(東林寺)에 머무르며 독서를 하였다. 그곳에서 40일 동안 정약전은 [상서(尙書)]를 읽었고, 정약용은 [맹자(孟子)]를 읽었다. 이때, 정약용은 [맹자]에 나오는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정약전에게 물으며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공부하는 동안 정약용은 정약전에게, “중이 중노릇을 하는 이유를 내가 지금 알았습니다. 부모 형제 처자의 즐거움이 없고,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음탕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女色)의 즐거움이 없는데, 저들은 어찌하여 고통스럽게 중노릇을 합니까. 진실로 그와 바꿀 수 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가 학문을 한 지 이미 여러 해 되었는데, 일찍이 동림사에서 맛본 것 같은 즐거움이 또 있었습니까3)?”라 하였고, 정약전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1782년(정조 6) 가을에는 두 형제가 봉은사(奉恩寺)에서 15일 동안 머무르며 경의과(經義科)를 익혔다. 정약용은 이때 “우리의 아름다운 아가위꽃이 안팎의 집안 간에 서로 비치어 너그럽게 대하고 격려도 하니 가슴속에 정성이 일어나누나4)”하고 시를 지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아가위꽃[棣華]’은 [시경]에 나온 말로5), 우애 있는 형제를 뜻한다. 정약용은 자신과 형 정약전의 관계를 아가위꽃에 빗대어 표현했던 것이다.
정약전은 1783년(정조 7)에 진사가 되었지만, 대과(大科)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1789년에는 이미 벼슬길에 나선 정약용의 설득 탓인지 생각을 바꾸어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임금을 섬길 길이 없다”며 공부에 집중하여 1790년(정조 14) 증광별시에 응시하였고, 병과로 급제하였다6). 이후 성균관 전적을 거쳐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이때, 정조는 “정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정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하며 총애하였다7).
정약용과 정약전은 차례로 벼슬에 나아가 함께 관리 생활을 하면서 깊은 신뢰를 이어갔다. 형제는 벼슬생활 중에도 여유를 갖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1797년(정조 21) 여름, 당시 승정원에서 좌부승지로 일했던 정약용은 고향이 그리웠다. 조정의 승인 없이 도성 밖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약용은 이를 어기고 근무지를 이탈하여 고향으로 달려갔다8). 정약용은 고향에서 정약전을 비롯한 형제들과 배를 타고 나가 물고기를 잡아 끓여 먹기도 하고, 천진암(天眞菴)에 가서 노닐기도 했다.
강에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았는데, 크고 작은 고기가 모두 50여 마리나 되어 조그만 배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물 위에 뜬 부분이 겨우 몇 치에 불과했다. 배를 옮겨 남자주(濫子洲)에 정박시키고 즐겁게 한바탕 배불리 먹었다. … 한편으로 길을 가면서 한편으로 새 소리를 듣고 서로 돌아보며 매우 즐거워하였다. 절에 도착한 뒤에는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으면서 날을 보내곤 하다가 3일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이때에 지은 시가 모두 20여 수나 되었고, 먹은 산나물도 냉이ㆍ고사리ㆍ두릅 등 모두 56종이나 되었다.<em>- 정약용, [다산시문집] 제3권,<단오일배이형유천진암(端午日陪二兄游天眞庵></em>
벼슬살이의 고단함을 피해 고향에서 고기도 잡고 산나물을 뜯으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형제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함께 공부하고 함께 벼슬에 올랐으며 함께 노니는 등 서로에게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가까운 벗으로 지냈다.
율정(栗亭)에서의 이별
1784년(정조 8) 4월 15일은 정약전과 정약용에게 있어서는 운명적인 날이었다. 이날 두 형제가 사돈 이벽(李檗, 1754~1785, 맏형 정약현의 처남)에게 천주교 교리를 듣고 그에 심취하게 됐기 때문이다. 당시 큰형수의 제삿날이어서 정약전과 정약용은 고향으로 내려갔고, 이벽도 누나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마현을 방문했다. 제사가 끝나고 그들은 함께 한강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향했는데, 두미협(斗尾峽)쯤에서 두 형제는 이벽에게 천주교 교리를 들었다9). 그들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수표교(水標橋)에 살던 이벽의 집으로 따라가,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몇 권의 천주교 교리서를 빌려 읽으면서 천주교 신앙에 깊이 쏠리게 되었다.
후에 두 형제는 천주교와 거리를 두게 되었으나, 반대파들은 한때 천주교에 몸담았던 그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정약전과 정약용을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1801년(순조 1)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천주교 금압령을 내렸다. 스승 권철신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이 사형을 당했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각각 신지도(薪智島)와 장기현(長鬐縣)으로 유배되었다10). 이것이 바로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신유박해로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되거나 귀양을 가자, 천주교도였던 황사영(黃嗣永, 큰형 정약현의 사위)은 탄압의 실태와 그 대책을 적은 편지를 북경에 있던 프랑스 주교에게 보냈다. 이 편지에서 황사영은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 함대를 파견해 조선 정부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을 적었다. 그러나 이 백서(帛書)가 탄로 나면서 황사영은 처형당하였고, 두 형제는 더 험한 곳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이배(移配)되었던 것이다11). 정약전과 정약용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귀양길을 떠났으나, 나주(羅州)의 성북(城北) 율정점(栗亭店)에 이르러 손을 잡고 서로 헤어져 각기 배소(配所)로 갔다. 그들은 알았을까? 이것이 그들의 영원한 이별이었다는 것을. 그래서인지 이때 남긴 정약용의 시는 우리에게 더 애틋함을 느끼게 해준다.
[출처] 정약용의 또 다른 멘토 -정약전-|작성자 akajklh
첫댓글 열심히 읽어보고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